2020/03 13

기독교의 자연사

저를 포함해서 비유와 실재를 언제나 정확히 분별하는 데 사람들은 대체로 무능합니다. 그래서 스승들이 체험한 영적 실체에 대한 설명은 수도 없이 왜곡에 왜곡을 거칩니다. 며칠 전 거론한 '새로 남'에 대한 대화에서 니고데모는 당대 최고 지성의 반열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이어서 6장에서 피와 살을 먹는다는 비유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오래 생활했음에도 못 알아듣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기독교의 일파인 가톨릭은 이 비유를 말 그대로 알아들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사용한 '아버지'란 말도 무조건적 사랑이자 우주의 근원 에너지를 지칭하는 말임에도 사람들은 인격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주워들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의 진정한 의미만을 이해하고 그분이 실천한 대..

단상 2020.03.12

새로 태어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와 '새로 남'에 대해 나누신 대화를 찾았더니 요한복음에만 있더군요. 불가에서 '견성하셨나요?' 하는 질문처럼 '새로 나셨나요?' 하는 질문은 하기도 어렵고 알아보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공부그룹에 그 체험을 하신 것으로 믿어지는 분이 계셔서 아침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약 50년의 구도 체험 속에서 새로 남을 구현하셨다고 하면서 제게도 그게 필요하지 않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대로 '새로 남'은 육체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고 스승들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존재합니다. 제 일감으로는 에크하르트 님의 '영원한 탄생'이 있고 플로티누스라면 '일자 체험'이 될테고 인도의 성자라면 '비이원성 체험'이 될 것이라 봅니다. 중요한 것은 제 동학님 말대..

끝까지 파기

맹자를 복습하는데 뒤에서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대개 경전 읽기를 하다보면 앞에 너무 비중을 두게 되어 뒷부분이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읽다가 그만둔 적도 많고요~ 며칠간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 대목은 진심 상편의 우물 파는 비유입니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팠더라도 물 나오기 전에 중단하면 애초에 포기한 것과 다름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주어는 그냥 '행하는 자(有爲者)'로 되어 있는데 저는 행함의 목적어를 유교의 이상인 내성외왕(內聖外王) 가운데 내성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심장 앞의 고자 상편에서 천작과 인작을 나누어 반드시 천작이 앞서야 한다고 하였고 고자 하편에선 의식주와 예를 비교하여 다시 본말을 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모든 사람..

단상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