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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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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요령과 요점'에 해당되는 글 82

  1. 2019.06.04 수행의 기초로서의 독서
  2. 2019.06.01 깨달음의 요체
  3. 2019.05.20 공부의 핵심 요점
  4. 2019.04.24 무심(無心)과 힘 빼기
  5. 2019.03.02 어떻게 살까?
  6. 2019.02.28 세상을 바꾸기
  7. 2019.02.27 군자와 성인의 차이
  8. 2019.02.22 종심소욕불유구에 이르기
  9. 2019.02.20 현상학 용어로 본 명상
  10. 2019.02.18 유교 명상론

수행의 기초로서의 독서

2019.06.04 04:30 | Posted by 목운

오늘은 제가 번역중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우리가 잘 모르거나 간과하는 사실을 하나 소개합니다. 일단 옮깁니다. "그리스도교적 명상이나 관상적 기도를 하고 싶다면 독서(lectio)로 시작하시라. 독서는 신께서 택하신 곳으로 당신을 이끄시도록 당신을 열어준다. 기도, 명상 및 관상(觀想)은 정확히 이 수행(lectio)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신비적 삶에서 강력한 수련인 것이다. 침묵의 훈련으로서 명상과 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당신의 여정에서 끝까지 함께할 집으로 작용한다. 반면 독서는 그 집이 지어지는 기초다."

-- 필자는 reading을 쓰지 않고 라틴어 lectio를 씁니다. lectio는 Lectio Divina를 줄인 말로 '거룩한 독서' 또는 '영적 독서'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니까 경전이나 경전급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유명한 회심자들은 읽었던 책에서 한 구절이 마치 온 존재를 때리는 듯한 체험을 하여 평생 그 말이 사라지지 않는 체험을 합니다. 그런 예를 보더라도 매일 영적 독서를 하는 것은 수행 공부의 기둥이자 기초입니다. 이 기초 위에 명상이라는 집을 짓는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재론할 여지 없이 이 독서는 이미 검증된 경전급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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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요체

2019.06.01 06:26 | Posted by 목운

공부를 하되 나중엔 그리스도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대목이 '그리스도의 편지'에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미 그러고 계시겠지만 제가 덧붙이는 말들도 참고만 하실 뿐 의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탈종교-탈기독교를 실천하는 제가 의지하는 텍스트는 '편지'를 기둥으로 하여 성공회 신도였던 데이비드 호킨스, 로마 가톨릭 교도였던 닐 도널드 월쉬, 그리고 기독교적 영성에서 나온 '기적 수업'에 더하여 불교와 유교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호킨스 박사의 365일 묵상집에서 공부에 무척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어 말씀을 옮겨볼까 합니다. "진리나 깨달음이 찾아내거나 구하거나 얻어내거나 획득하거나 소유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영원한 현존'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그것은 깨달음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면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공부하는 것은 필요 없지만 불합리한 것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름을 몰아내는 것이 해를 빛나게 하는 원인은 아니지만 그동안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수행은 마지막에 그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는 것 이상의 일이라고 하는, 그것을 이뤄낸 사람이 하는 약속을 믿고 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무지(the unknown)를 구하는 일입니다."

-- 기본적으로 우리 공부는 덜어내는(letting go, 도덕경의 損之又損) 일을 기본으로 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은총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것도 결국 은총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 년 전 당나라 이고 님은 '에고로 에고를 없애려는 것은 더 큰 에고다(以情止情 是乃大情)'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삶을 기도로 만드시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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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핵심 요점

2019.05.20 04:28 | Posted by 목운

1년전 오늘 글인데 함께 복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여기에 하나 보탠다면 세상 속에서의 조건 없는 사랑 실천입니다.

'내가 교회를 등질 마음이 없는데 왜 이단이냐?'라고 항변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복권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학자이자 영성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말 하나 인용합니다. "'누구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태 16:24)' 모든 것은 여기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 이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다. (영성지도 10쪽)"

여기서 '부인'은 원문에는 잊음(forget)으로 되어 있고 1968년 최익철 님 번역판엔 ‘자기를 끊고’로 되어 있어서 요즈음 서양 영성의 자아 소멸에, 동양 영성의 무아와 극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다음에 나오는 '놓아보냄'에 조응합니다. 결국 철학 내지 영성의 공통 요소는 내면의 탐구인데 '천국이 내면에 있다'고 하는 속뜻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고 했는데 이것은 에고와 참나 또는 복성서 노선에 따른 정(情)과 성(性), 대승기신론 노선에 따른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이라는 자아의 두 측면을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즉 ‘자신’이 바로 에고이고 ‘너’가 참나에 해당합니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대전제를 가르치지지 못하는 심리학은 실천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게 제 체험입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고 하는 부분은 명상과 같은 성찰 방법을 취하여 참나의 자리에서 에고를 살펴보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에고는 부인하고 끊어버려서 궁극에는 잊어버리게 되는 경지까지 이어지는 의식 진화의 길을 평생 가는 것이 누구나 취할 노선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충분한 보상이 있을 뿐 아니라 몸을 버린 후의 안심입명까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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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과 힘 빼기

2019.04.24 16:34 | Posted by 목운

대부분의 무예와 스포츠에서 기술을 최대한 습득한 이후 본 경기에서 감독이나 코치들이 힘을 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 있을 것입니다. 어떤 목표에 집착하면 목표 달성에 거의 실패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나 직감으로나 알고 있습니다. 마음 수련 또는 영성 수련에 있어서도 목표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깨닫겠다는 목표, 신을 만나겠다는 목표 등을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미 깨달아 있다는 것, 또는 지금 이미 신이 우리에게 임재하신다는 것을 스승들은 강조합니다. 요컨대 아무런 목표도 의식하지 않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어디로 가는가요? 도대체 왜 수행을 하는 건가요? 그렇게 마음의 달인이 되어 할 일은 유교에서는 평천하요 불교에서는 보살도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지상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모든 경우 하늘의 뜻에 매순간 부합하면서 일합니다. 아래는 무심에 대한 이소룡의 설명입니다.

"무심이란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닫아버린 빈 마음이 아니며 그저 고요하고 침묵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고요와 침묵은 필요하지만 무심의 원칙을 이루는 주된 요소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쿵푸인은 아무것도 붙들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무심이란 '전체가 된 상태'로서 마음은 자유롭게 저절로 기능합니다.  마음(또는 에고)에 대한 느낌 없이 무기를 들고 서 있습니다... 자기 안에 분리된 생각 주체(또는 에고)가 개입하는 일 없이 마음이 생각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원하는 대로 생각하지만 하심(또는 방하착, letting go) 하겠다는 노력이 전혀 없습니다. 하심하겠다는 노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분리된 생각 주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없는데 그것은 매 순간 떠오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심이란 감정이나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집착도 거부도 없는 상태입니다. 감정에 전혀 동요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마치 쉬는 법 없이 모든 것을 흘러내리는 강물과 같습니다.

무심이란 장자가 어린 아이 마음으로 비유한 그것입니다. 즉 아이는 특정한 대상에 눈을 고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 가는지 모르고 가며 무얼 하는지 모른 채 서며, 환경과 하나된 상태에서 환경과 함께 움직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위생이기도 합니다. 쿵푸에서 집중이란 주의를 한 대상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든 그저 조용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출처 : http://www.thierrycuvillier-academy.com/en/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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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

2019.03.02 21:18 | Posted by 목운
인문학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도록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아서 비슷한 소리를 계속 달리 말해 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Σ(BE+DO+HAVE)입니다. 빠진 게 있을까요?  편의상 BE, DO, HAVE를 1, 2, 3으로 표기합니다. 젊었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2와 3으로 미루어 1을 짐작하거나 2와 3에 열중하다 보면 1이 해결되는 것으로 아는 게 보통입니다.

한편 1에 인작과 천작이 있다고 본 분이 맹자입니다. 공경대부 같은 세상의 신분이 인작이고 끝까지 선을 추구하는 것(樂善不倦)이 천작입니다(고자 상). 사실상 외견을 구한다는 점에서 인작은 2나 3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천작을 추구함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인작이 다라는 생각을 끝까지 고수하면 이명박근혜나 양승태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하게 사는데 어느 정도로 선해야 합니까? 종교에서 인정받고 세상에 통하자고만 하면 위선이나 통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기에 아직 세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무한히 최고의 선을 향해 갈 것(止於至善)을 목표로 하되 경전과 내면의 스승만을 따르는 게 답입니다. 제대로만 한다면 소크라테스처럼 신의 소리를 천둥처럼 듣고 그리스도처럼 신의 말씀을 음식 삼게 될 것입니다.

뒤늦게라도 낙선불권에 전력을 다해서 우리 존재 자체가 가장 높은 의식 상태이기도 한 '사랑과 평화'가 될 때 비로소 참으로 기쁘고 행복할 것이라는 것, 그때 1로 인해 저절로 이뤄지는 2와 3이 진짜라는 것, 그래야만 몸을 벗은 후에도 괜찮으리라는 것이 사서삼경이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기초 훈련이, 즉 구구단이나 알파벳에 해당하는 게 명상과 성찰, 또는 거경궁리와 반구제기, 아니면 좌선과 계정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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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기

2019.02.28 08:00 | Posted by 목운
어제 '무위-무불위'와 '무주상보시'가 같은 경지라고 썼습니다. 이 경지는 기독교에 오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는(마태 6:3)' 경지라는 게 직감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가는 데 핵심 노하우가 '소아를 잊기(마태 16:24)'입니다. 노장에서는 '좌망'으로 불가에서는 '무아'로 표현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운동선수나 연주가가 매일 연습하듯 실천하는 게 유가에서는 내성 또는 반구제기이고 불가에서는 계정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경지에 가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범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산은 똑같은 산이지만 내면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혜능의 경우 똑같이 마당 쓸고 부엌일을 했지만 스승이 알아 봤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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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성인의 차이

2019.02.27 06:42 | Posted by 목운
이미 세 번에 걸쳐 소개한 '유교 명상론'은 공부하는 사람의 성장 삼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세에 공부에 뜻을 세운 때부터 학인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공자님이 거론하신 나이는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꼭 나이대로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학인의 경우 보시 기타 선을 행하려 하지만 잘 안되는 경우입니다. 엊그제 썼지만 불혹이 되면 선을 선택하는 데 흔들림이 없어져 군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위 책에서 배우는 것은, 유교 명상에서 거경궁리 또는 계신공구를 거쳐 '한다는 의식 없이' 선에 항구한 경지에 도달한 때를 성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경지가 도덕경의 무위-무불위,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군자에서 성인으로 가는 노하우가 각 영성에 있지만 공통점은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진짜 나는 무엇인가?'의 질문 또는 참나와 에고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공부 결론으로는 이 경지는 초월적 도움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고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단에 기반한 양심성찰 또는 육바라밀을 꾸준히 실천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를 자기가 믿는 절대자에게 완전히 의탁하며 간절한 기원을 하는 게 길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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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칠순까지 제 자식을 포함한 뒷세대한테 쓸모있는 수행서를 내는 게 목표라서 읽고 쓰는 일의 과반수가 여기에 바쳐집니다. '유교명상론'을 공부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주희를 전후한 신유학자들의 목표는 작위가 없는 보시행이 가능한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이 경지는 다름 아닌 도덕경의 무위와 금강경의 무주상 보시를 행하는 경지라고 봅니다. 대개의 신유학자들은 불가에서 먼저 공부를 했거나 텍스트로라도 선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그럴만한 일입니다. 이미 서술했듯이 선불교는 도교와 불교의 융합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쨌든 위 책을 지은 정해은 님은 유교 명상의 목표가 반성의식의 정상적 작동을 거쳐 결국에는 반성의식의 소멸에 있다고 하며, 전자는 공자님의 학습단계 가운데 불혹에 해당하고 후자는 종심소욕불유구에 해당한다고 합니다(위 책 315~335쪽 참조).

제가 덧붙이자면 불혹은 계신공구를 실천내용으로 하는 성(誠)의 결단과 함께한다고 봅니다. 불혹 이후에 양심성찰 또는 육바라밀이나 거경궁리 등 무엇으로 부르든 반성의식으로 곧고 좁은 길을 일로매진할 때 칠순에 성취한다는 종심소욕불유구는 공자님 이후 의식 진화를 감안하면 그 기간은 짧아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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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용어로 본 명상

2019.02.20 08:53 | Posted by 목운

새벽 두 시쯤 잠이 깼는데 두어 시간 더 자고자 했으나 잠이 잘 안 와서 어쩔까 하다가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단 몇 분이라도 정좌를 하다가 누우면 잠이 잘 오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시간에 맞추어놓고 조금 앉아 있다가 누웠더니 역시 일어날 시간에 벨이 울리면서 기분 좋게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하면 왠지 두어 시간 명상을 한 것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엊그제 소개한 정은해 님에 따르면 명상이란 현상학 용어로 대상에 대한 지각 작용인 대상의식을, 반성의식으로써 무화하거나(불교의 경우) 정화하는(유교의 경우) 일입니다. 책에서 재미 있는 것은 불교의 좌선은 관조적 반성의식으로 대상의식의 해석작용을 무화시키는 것이고, 유교의 정좌(언제나 깨어 있음)는 규제적 반성의식으로 대상의식의 해석작용을 정화하는 것인 반면, 기독교는 반성의식의 자리에 하느님의 시선을 가져온다고 한 것입니다.

책은 우리의 '걱정근심이 수동적 지각에 대한 능동적 해석(=대상의식)과 이전의 대상의식에 대한 사후적 해석에서 발생한다(594쪽)'고 해서 대상의식이란 불교의 오온, 요즈음 영성 용어로 에고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에고 차원에서 사는 사람이 소인이고 항상 반성의식을 가동해서 살려는 사람이 군자와 성인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반성의식도 근기의 차이 또는 공부의 차이에 따라 수준이 같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을 의식지수로 표시하여 진화하는 의식을 고찰한 것이 호킨스 패러다임이고 10지품으로 나누어 상향하는 보살도로 본 것이 화엄경 패러다임입니다. 호킨스 의식지수로 예수와 붓다는 1000이고 아마도 10지품에서는 법운지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법운지에 이른 사람은 바로 완전히 신 의식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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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명상론

2019.02.18 09:33 | Posted by 목운
정은해 님의 '유교명상론, 불교와의 비교철학'을 훑어보니 결국 수행 또는 수양에서 핵심이 되는 실천이 명상(좌선, 정좌)이며 유교 전통을 계승하는 학자들이 명상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유교 명상 방법론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주희와 왕양명을 비교하고 또 이들의 방법론을 불교는 물론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으로 재조명한 점이 이 책의 얼개이자 특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600여쪽이나 되는 책 내용은 복잡다기하지만 부록으로 붙인 정이천, 왕양명, 이연평, 주희의 명상 요지를 보니 결국 유교 명상법도 요즘 동서 영성에 보존 전수된 방법과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수승화강의 호흡법을 기본으로 차크라를 따라 기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 정좌해서 내면에 떠오르는 부정적 사념을 대처하며 없애는 것, 경전의 핵심 진리를 묵상하는 것 등을 기본 줄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강 읽고 보니 이제까지 제가 실천하던 명상법을 계속 유지하되 역시 요점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며 초월적인 도움을 간구할 것, 양심성찰 내지 육바라밀을 쉬지 않고 실천하되 은혜를 입어 돈오 또는 활연관통을 체험하길 기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동서고금 수행론에서 공통으로 거론되는 비유를 보면 햇빛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이것을 성취할 때 이미 존재하던 햇빛은 저절로 비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추는 햇빛의 자명함과 황홀함이 바로 참나 또는 참본성이지만 그것이 항구하게 우리를 지배하도록 할 때까지 끝까지 쉬지 않고 육바라밀 또는 계정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이제까지 학습한 동서 영성의 공통 가르침입니다. 주희나 왕양명은 불교의 수행을 지양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돈오 이후의 공부를 얘기한 혜능과 점수를 통해  돈오에 이르려는 신수의 차이가 근기의 차이에서 나올 뿐 공부가 극에 이르면 결국 깨달음은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또 유추컨대 주희-왕양명 차이나 유교-불교 차이는 어쩌면 사소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죽는 날까지 공부를 놓지 않으면 언젠가 유교의 지향점인 천인합일 상태(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고 그때에는 동서고금의 가르침이 모두 같은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요즘 용어로 무조건적 사랑 및 비이원성과 의식으로 풀 수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이 책은 제가 하고 있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게 분명하기에 대강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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