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킨스 박사에 따르면 황벽 선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르신 분입니다. 이곳에 소개한 이고 선생은 청원 행사 선사 휘하의 약산 유엄께 배웠지만 황벽 선사는 남양 회양 휘하의 마조 도일과 백장 회해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고 선생과 같은 시대를 사셔서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황벽 선사의 법어집 가운데 하나인 전심법요는 선종의 요지가 들어 있는 책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김하풍, 신을 보는 길 부처를 보는 길, 223쪽). 전심법요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이라는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말씀을 비롯해서 명상과 깨달음의 요체이기도 한 과거를 생각지 말고 미래도 생각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옮겨보겠습니다.

 

"실로 여래가 말로 가르칠 일정한 법이란 없다. 우리 종문은 이 일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멎으면 곧 고요가 오니 앞을 생각지 말고 뒤를 염려치 말라는 것을 알 뿐이다(實無有定法如來可說, 我此宗門不論此事, 但知息心即休, 更不用思前慮後)." 요컨대 지금 이곳에서 존재의 근원인 신 의식(동아시아 용어로 공적영지, 허령불매)은 오직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모두 정지할 때 만나진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가까운 일이기에 '업은 아이 3년 찾듯' 사람들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서고금에서 똑같이 제시하는 답이기에 어떻게든 여기에 도달하기만 하면 사성제에 입문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똑같은 취지의 말을 오늘날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디야산티에게서 인용해보겠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지금 순간에서 벗어나게 할 뿐입니다. 이 두 방향을 내버리자마자 마음은 지극히 고요해집니다. (The past and the future are just distractions from the present moment. As soon as we let go of those two orientations, the past and the future, then the mind becomes extraordinarily quiet.)"

 

복성서는 중편 이후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용합니다. "올바른 생각이란 과거와 미래를 생각지 않는 것이다. 역경은 우주에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어찌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正思者, 無慮無思者也. 易曰. 天下何思何慮.)" 수행에 관한 많은 책과 말씀들이 여기에 도달하는 것을 가르치며 그것을 성취하려면 끝없이 신 의식에 접속하여 모든 사언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용의 중(中)과 화(和)에 대한 가르침도 같은 목적이라고 봅니다.

어제에 이어 친구의 질문 요지를 더 생각해보니 제가 돈오 내지 활연관통을 얻었냐 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즉답하자면 그런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불퇴위에는 들어섰다고 말하겠습니다. 불퇴위란 '한번 도달한 수양의 계단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수행을 퇴폐하는 일이 없는 지위(대승기신론 소와 별기 참조)'를 말하는데 쉽게 보면 발심을 제대로 해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라 봅니다. 기독교적으로는 탕자가 아버지 집에 들어선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돈오 이후의 공부는 오후(悟後) 공부라 해서 오행(보시, 지계, 인욕, 선정, 지혜, 정진)을 끝없이 닦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과정은 화엄경의 보살도라고 보면 됩니다. 더 쉽게 이해하려면 십우도 또는 심우도 해설을 보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공부과정에서 여러가지 초자연적 현상인 싯디(siddhi) 내지 신통을 체험할 수 있으나 거기에 매혹되는 것은 길을 잘못 들어 하락의 길을 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에 이어 다시 강조하면 이 공부는 곧고 좁은 길이니 그저 끝없이 가는 것만이 답이라 봅니다.

공부의 핵심 요점을 적자면 마하라쉬 님의 가르침이나, 나무아미타불의 정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 그리고 제가 집중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에서 공통되는 것인데 자신의 의지를 '근원 의식' 또는 신 의식에게 완전히 맡기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 그 하나요, 몸이 아니라 순수 의식이 내 정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도록 애쓰는 것이 그 둘입니다. 그렇게 가면서 공부가 진짜로 제대로 잘 되면 비이원성(nonduality)의 세계에 들어설 뿐 아니라 이승과 저승 간에 무차별한 생각이 들어 심지어는 몸에 들어가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전해지는 체험담입니다. 그러니 임종 준비로는 최고라고 보는 것입니다.

'반일정좌 반일독서'는 추사께서 고택에 써붙여 놓아서 유명해졌으나 주희 선생도 곽덕원이란 제자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말의 취지는 공부의 입문 단계에서 1~3년 집중적으로 하면 반드시 진보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본인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을 때 양생수단으로 실천했다고 합니다.

제가 파악하는 한 보다 중요한 것은 서양 신비주의 내지 수도 전통에서도 공부 수단으로서 신적 독서(Lectio Divina)와 정관(静观, contemplation)을 병행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반일정좌 반일독서'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또 동서 공히 공부 목표는 의식의 끝없는 상승이며 그것은 불가에서 화엄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유가의 상근기라면 언제 어디서나 덕을 좋아함이 색을 좋아함을 압도하는 경지를 목표삼아야 할 것인데 이삼년 반일정좌 반일독서를 결단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이 저 말씀의 취지라고 봅니다.

공부 목표로서 저는 일관되게 의식향상을 얘기합니다. 의식을 어디까지 향상시킬 것이냐에 대해서는 최소한 호킨스 측정체계 내에 있는 무조건적 사랑이란 존재상태라고 하겠습니다. 마침 온오프에서 만난 여러 동학(同学)들과 함께 공부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도 공부 목표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왜 그리하냐고 물으면 이 길이 누구나 목표삼는바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궁극의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그 목표를 위해서 종교는 물론 철학, 과학, 영성 모두 똑같이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위 교재에도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마저 언젠가는 돌파의 수단일 뿐이며 그 어떤 스승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무조건적 사랑의 상태는 깨달음의 초입이자 이원성을 극복한 상태여서 공자님 말씀하신 바의 종심소욕불유구와 같다고 봅니다. 거의 인간 감정을 모르는 기쁨과 사랑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상태라서 그야말로 악인의 땅에나 선인의 땅에나 똑같이 내리는 비와 같습니다.

1월초 10일간 잡힌 여행일정 때문에 노동 내지 소득활동 없이 1월 중순까지 보낼 요량입니다. 그러고보니 잔존 수명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부가 수행공부라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제 공부 요점을 압축하면 멸정복성으로 대자대비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평생 독서와 삶의 요점이자 결론이기도 합니다. 대자대비란 말은 처음 쓴 것 같은데 조건없는 사랑의 동아시아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며칠전 거론한 미륵사상에도 연결됩니다.

즉 미륵이란 말은 미트라에서 유래됐고 자(慈)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륵불을 '자씨불'이라 한답니다. 관련해서 보살은 항상 대자대비로써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고 하므로 미륵사상도 결국 대승의 자리이타를 최고조로 구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결국 모든 종교와 영성의 요점은 에고를 지워내고 신성 또는 참나를 구현해서 조건없는 사랑 자체가 되는 데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반드시 정좌(명상 또는 좌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 이제는 제국주의적 필요에서 나온 종교를 탈피해서 민주주의에 적합한 개별 영성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자 실천입니다.

더불어서 이 일을 글쓰기나 바이올린 연주와 같은 기술의 훈련으로 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책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구글 플레이북 전자책으로 4천원도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신 분은 술술 읽힐텐데 제가 볼 때는 우리의 중용과도 모순되지 않는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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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진짜 제대로 사는 것과 세 가지 한계상황을 거론했는데 제대로 사는 길이란 그 존재상태가 사랑 자체가 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입발린 종교적 용어로 인(仁), 대자대비, 사랑의 삶이 아니라 존재상태가 조건없는 사랑의 길로 상승 진화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보살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일에서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꾸준하기가 불가한 것은 이고 선생이 설파한바 '에고로 에고를 이기려는 것은 더 큰 에고일 뿐(復性書)'이기 때문입니다. 향상일로의 보살도를 가는 데 꼭 필요한 방편으로 정좌 또는 명상, 모든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는 하심(letting go) 및 끝없는 경전 독서(lectio divina)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길에서 상승 여부의 점검은, 사랑과 기쁨, 평화가 커지고 있는지, 유머 감각이 생기고 있는지를 봄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세 가지 불운은 개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발생할 뿐 아니라 자연에서 오는 삼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런 경우에도 평정을 잃지 않을 때까지 닦고 닦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준 경전이 있어서 인용해 봅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나를 구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하바꾹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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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분 인용하고 합일체험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 갑자기 나는 몸에 대한 감각이 아주 없어졌다. 소리도 못 느끼고 시각도 없었다. 촉각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이 상상해 볼 수도 있는 충만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상상밖의 것이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환희였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어서 인간으로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사랑과 환희다. 그리고 이것을 '느끼는' 것은 나, 지아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주객이 없고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상태였다. 끝없는 사랑과 환희의 무한한 대양이 나를 완전히 감쌌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놀랍게도 '내가 그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없고 그것이었다. 그것을 '체험하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나는 없었다. 내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였다. 그것은 아주 충만하고 완전하며 지극히 넘치는 완전한 상태여서 지금 그것을 쓰면서 내 눈에 눈물이 난다."

-- 합일체험에서 공통적으로 보고되는 것은 주객이 사라짐, 지상의 어떤 환희보다 큰 압도적 환희와 사랑, 깊고 완전한 평화 등입니다. 그리고 이 분들의 실천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사랑과 자비,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의 행업이 대자대비, 타인구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아시아에서 돈오라 하는 체험도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공통된 것은 대양의 비유인데 그것은 대승기신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합일체험에 대해 가장 많이 진술한 현대인은 미국의 호킨스 박사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김기추 선생이 있습니다.  물론 돈오 이후에도 계속 공부가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점수를 해야 하지만 깨달은 선사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나서 좌탈입망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참나가 아니고 더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상태인 참나 상태를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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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집니다. "나는 고요히 앉거나 심지어 누워서 그저 내 안의 한 점에 집중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깊이 느끼곤 했다. 나는 어떻게든 내 안에 있는 한 점에 내 의식의 초점을 모을 수 있다면 나를 뛰어넘는 어딘가 먼 곳에 있는 무엇인가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바의 그 사랑과 연결되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매일 그렇게 했다.

그러자 어느날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넘어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날 그 어느때보다 강렬히 집중해서 명상을 했는데 '무한에 이르겠다'는 내적 열망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두 시간째 됐나 싶은데 내 몸은 엄청난 빙을 느끼기 시작했다. 깊은 평화의 느낌이 나를 감쌌고 나는 거의 무게를 못 느끼며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이 생기자 내 안의 한 점에 계속 집중했으며 갑자기 그 일이 생겼다. 그것은 마치 의식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으며 나는 그것을 관통해 '떨어졌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한히 거대한 의식이 완전히 감싸는 것 같았다." 

-- 이와 비슷한 진술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신비체험의 정수라 하겠습니다. 공통된 언급으로는 드디어 고향에 왔다는 느낌이며 완전히 안전하며 보호받는다는 확신이 드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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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앞에 소개한 책을 쓴 분의 신비체험을 소개할까 합니다. 주지하시듯 서양철학의 기원은 소크라테스고 그 가르침은 플라톤이 집대성했습니다. 플라톤을 계승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베푼 사람이 플로티누스고 플로티누스의 생각은 아우구스티누르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을 통해서 기독교에 깊이 심어져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서양철학이 기독교에 깊이 심어질 수 있었던 것은 플로티누스의 신비체험, 즉 일자와의 합일체험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가 아니었던 플로티누스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신인합일 체험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는 탈기독교 추세에 맞추어 다시 플로티누스의 일자와의 합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우리가 여행담을 쓰는 것은 남들도 똑같은 환희와 놀람을 체험했으면 하는 마음이듯이 합일체험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실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며 보다 항구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인데 바깥 세상에 보다 몰입하는 세상 풍조 때문에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글을 올리는 세 군데 약 250명 가운데 1/5이 신비주의에 관심을 표명해 주셨기에 용기를 얻어 번역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스무 살 초기에 명상을 시작하였다. 명상 형태와 상관없이 제대로 된 모든 방법은 한 가지 궁극 목적을 가지는데 그것은 우리 존재의 진리에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일찌기 이해했다. 나는 내 안에 무한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저 알고 있었다. 나는 무한히 사랑하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깊이 연결되기를 바랐다. 나는 그것을 열렬히 원해서 하루에 몇시간씩 명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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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제 공부는 은퇴후 공부로서는 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공부는 어쨌든 경쟁사회에서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과거 관성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계속 설파하는 이 공부의 목표는 이 세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보다 몸을 벗은 뒤의 안전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목표인 공부입니다. 즉 "신의 <현존> 안에 있는 궁극적 의식과 앎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공부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부의 결과 의식이 진화하고 향상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이웃에게 유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하화중생이 동시에 구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과정에서 호킨스 님의 멸정복성(Dissolving the Ego, Realizing the Self)를 번역하는 도중 우연히 8~9세기 당나라 말기에 사셨던 이고 선생이 복성서(復性書)를 지으신 걸 알아 공부했습니다. 성대 김용남 박사를 통해서 이분이 바로 신유학(성리학)의 개창자임을 알았고 따라서 동서양 영성의 접점이 의외로 가깝고도 간단한 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각설하고 신유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왕양명의 실천에서 공부의 네 단계를 알려드리고 싶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네 단계라 함은 범부, 학인, 군자, 성현이 그것입니다. 범부는 인욕에 치우쳐 천리를 보존하지 못하는 무능의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을 돌보지 않는, 즉 무반성 상태의 사람입니다.

학인은 성찰을 통해 의식을 돌보긴 하지만 사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 군자에 대해서는 '바야흐로 사욕을 말끔히 쓸어낼 수 있어서 극복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팔짱을 끼고 앉아도 잘 다스려지는 때가 있게 된다'라고 양명은 전습록에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현의 경우는 천리를 선택하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 더 이상 반성이 필요없는 경지입니다(이상 유교 명상론, 506~507쪽). 이 경지야말로 공자께서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걸림이 없다'고 표현하신 완성의 경지입니다. 다만 제가 자주 언급했듯이 공부 과정에서 어느 때인 줄 모르게 공부의 동력이 은총에 달려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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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에 이어 글쓰기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강원국 님이 1,500여 개를 쓰고나서 자신감을 얻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5~6년 동안 7백여 개의 글을 썼으니 앞으로 7~8백개를 더 쓰고 '내 책 쓰기'에 도전할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는 바로 삶의 공부, 특히 유교적 수행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제 글쓰기도 수행의 이면이자 연장선상의 작업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일이 기법(skill)의 수련이라고 본 점에서 에카르트 님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같습니다. 채근담은 달사(達士)라고 했고 영어의 'skillful'에는 깨달은 자란 뜻도 있습니다. 이 일에는 매우 단순한 일의 엄청난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는 김연아와 조성진을 예로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좌와 성찰 또는 불가의 오행, 특히 지관문을 매일 양치하듯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술가와 스포츠맨이라면 금방 알아듣듯이 연습을 하는지 여부는 제삼자도 알지만 본인이 가장 먼저 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앞 글에서 변죽만 울렸지만 반성의식으로 꾸준히 공부하는 과정은 불가용어로 '점수'에 해당합니다. 끝없는 연습이 몸에 배어 본 게임에서 본인도 모르게 최고의 경지를 발휘하는 것은 '돈오'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유교전통에서 이것은 활연관통이라 합니다. 그런데 주희와 왕양명 모두 활연관통 이후에도 공부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사심을 말끔히 씻어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유교 명상론 56쪽). 이 점 또한 동서 영성에 공통하며 다만 서양이 은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뉴앙스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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