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자성이란 말뜻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진리의 삶을 조금도 이룰 수 없다. 자성과 분리된 적이 없음을 믿으면 된다. 믿지 못하는 게 장애물이다.

​그러다가 은혜를 입어 문득 자성을 체험하길 바라는 게 최선이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으로 합일을 확인할 뿐이다. 그 합일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리라. 어쩌면 이것이 신망애 삼덕의 신비일 것이다.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오는 그 은혜로운 합일의 체험은, 새로운 무언가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단 한 번도 자성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일 것이다.

​에고의 의도적인 노력이 완전히 쉬어버렸을 때(無爲), 비로소 본래의 빛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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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년 전, 갓난아이였던 이 몸에는 '마음'이라는 것이 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눈동자를 떠올려 본다.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뒤의 아득함과도 같은, 자의식조차 들어서지 않은 순전한 멍함. 무엇인가를 알고 구분하는 '나'라는 문지기가 아직 일어서지 않은 상태였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나고 지며 모양을 바꾸었다. 유년의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다시 노년의 붉은 노을 앞에 섰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 모든 현상을 어찌 항구하다고 하겠는가.

​어느 날 머리통을 만지다 보면 서너 살 무렵 동네 골목에서 자전거에 치여 생긴 흉터 자국이 만져진다. 손끝에는 아련한 감촉이 남아있지만, 정작 내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흉터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혹은 누군가 그날의 소란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게 일어난 적 없는 사건과 같다. 기억이 없으니 경험도 없고, 주체가 없으니 사건도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나'라고 붙들고 있는 생각, 감정,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환영인가. 이 명확한 상처 자국이야말로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이라는 오온(五蘊)이 모두 비어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생각과 기억의 거품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서너 살 적 자전거에 치이던 그 순간에도, 갓난아이 시절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던 그 순간에도, 그리고 칠십 년이 지난 지금 홀로 찻잔을 들고 있는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어떤 감각이 있다. 세월의 파도에 단 한 번도 쓸려가지 않고 늘 그 자리에서 여여(如如)하게 존재하는 어떤 힘. 이 보잘것없는 생명을 밑에서 가만히 지탱하고 있는 아득한 바탕 말이다.

​사람들은 이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의 근원을 두고 저마다 다른 표지를 달아왔다. 혹자는 '하느님'이라 불렀고, 혹자는 마음의 참본성인 '자성(自性)'이라 하였다. 에리히 프롬이 파악했듯 구약의 야훼 역시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존재의 근거 그 자체를 뜻했다.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온갖 관념과 형상을 완전히 비워낸 자리를 단순하고도 명징하게 '근저(Grund)', 즉 '영혼의 근저(Seelengrund)'라고 불렀다. 피조물로서의 에고가 완전히 사그라졌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참된 생명력의 자리, 신과 영혼이 조금의 분리도 없이 하나로 만나는 절대의 바닥이다.

​서산대사 또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첫머리를 열며 이 한 물건의 본질을 일갈하셨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난 적도 없고 없어진 적도 없다.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으로 그릴 수도 없다."

​결국 선(禪)의 출발점 또한 멀리 있지 않다. 나라고 믿었던 몸과 마음의 구름을 거두어내고, 그 뒤에서 늘 묵묵히 빛나고 있는 그 '한 물건'을 직시하는 일이다.

​머리의 옛 상처를 가만히 짚어본다. 지나간 사건도, 나라는 집착도 다 비어버린 그 흉터 너머에서, 오늘도 말없이 이 존재를 감싸 안고 있는 영혼의 근저를 느낀다.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그 여여한 바탕 위에서, 생은 여전히 맑고 푸르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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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의(便意)’ 비유가 갖는 선적(禪的) 진실: 자연성과 당처(當處)의 일

​우리가 일상에서 변의를 느낄 때 “소식이 왔다”고 하듯, 깨달음을 ‘한 소식’이라 부르는 데에는 눈부신 비유적·본질적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1. ​에고(의지)의 조작이 아님 (자연성): 변의는 내가 머리로 계산하거나 의지를 발동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생리적 조건이 다 차오르면 ‘저절로' 찾아옵니다. 깨달음 역시 에고가 애를 써서 얻어내는 어떤 성취가 아니라, 인연과 조건이 성숙했을 때 본래 자성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 ​당처(當處)가 스스로 하는 일: 배변 작용은 소화계라는 ‘자연의 생명 메커니즘(당처)’이 스스로 하는 일일 뿐, ‘나’라는 에고는 그저 그 소식을 느끼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견성(見性) 또한 ‘내가’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성(당처)이 본성 스스로를 비추는 일’입니다.

3. ​격외의 파격, 임제와 운문의 평상심: 선가에서 조사(祖師)들은 깨달음을 결코 신비화하지 않았습니다. 운문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물음에 “마른 똥막대기(乾屎厥)”라 답하고, 임제 스님이 “법에 맞게 수행하는 사람은 똥 누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을 뿐”이라 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변의처럼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당처의 작용이야말로 흉내 낼 수 없는 깨달음의 진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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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글에서는 내 아이들에게 선 수행을 권하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마침 아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 대화중에 선 수행을 권유하게 되었다.

계기는 내가 유물주의를 믿는지 관념주의를 믿는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유물주의든 관념주의든 하나만 말하면 틀린다고 답하고 예를 들면 뇌가 의식을 만든다고 하면 오답이라 했다.

대화 중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둘이 아니고 '평상심이 도요 일상이 곧 선'이라는 불이문에 기반한 생각을  말하고 선에 입문하길 권했다. 희한한 우연의 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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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영성 철학 등이 결국 생사문제를 뚫어버리려 하기 때문에 비슷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오랜 기독교 생활 끝에 선종에 입문했는데 솔직한 심정은 기독교에 불순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길을 잘못 들게 하거나 유쾌한 삶을 저해하는 게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시스템 또는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부작용도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천주교) 덕분에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지게 되는 등 계몽된 점도 있고 심지어 아이들 이름은 한국 성인 이름을 빌려서 지어주었다. 특별히 기독교를 자주적으로 수용, 한국화한 서학은 높이 기려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3.1 운동의 동력이기도 한 동학은 한국사회 저변의 큰 자산인 동시에 한류의 원천이라고 본다. 서학이 주자학에 대한 '반(antithesis)'이라면 동학이야말로 변증법적 '합(synthesis)'이면서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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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모든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종의 가르침으로 교체하면 내 경우 모순을 못 느낀다. 선의 방편을 취해도 그리스도를 배척할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영성적으로 효능감이 크다.

1. 모든 교리 부인 : 알음알이의 배척
2. 영혼 : 자성
3. 신의 섭리에 맡김 : 연기에 맡김
4. 삼위일체 : 관찰자와 피관찰자, 관찰 행위의 일체
5. 그리스도의 무심판 요청 : 불이를 믿음

친구들을 만나면 화제가 자연스레 임종과 죽음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늦게 선(禪)에 입문하여 살펴보니, 결국 붓다의 삶과 가르침 역시 늙고 병드는 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보게 된다.

​붓다께서 출가할 때 아버지 정반왕과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해 보면, 그분의 출가 명분 또한 근원적인 죽음의 문제 해결에 있었다. 그리고 선(禪)에서 내놓는 궁극의 답은, ‘대사일번(大死一番)’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마나 마하리쉬처럼 삶의 한가운데서 한번 진실로, 확실하게 죽어보는 것. 그렇게 '나'라는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은 뒤 남아있는 삶의 모든 과제를 온전히 연기에 맡긴다면, 우리는 임종에 이르는 삶이라는 항해를 가장 의연하고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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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끝까지 분별하지 말고 속지 말기를 온갖 방편으로 깨우쳐 주신다. 그것들은 사실 내가 과거로부터 겹겹이 축적해 온 ‘안경 필터’를 통째로 깨버리기 위한 자비로운 일격일 뿐이다.

​우리는 나이와 경험, 지식과 관념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세상을 본다. 대상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분별이 해석해 낸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스승은 우리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때, 그 안경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려 버리신다. 분별이 싹트는 찰나를 낚아채어 어떠한 관념도 딛고 설 수 없게 만든다.

​견성(見性)이란 새로운 지식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선종(禪宗)에서 알음알이를 내버리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정견은 어떤 바른 견해나 주관을 새로 갖는 것이 아니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 어떤 해석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을 단지 바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혹시 ‘필터를 깨버려야 한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안경을 쥐고 있지는 않은가? ​깨뜨릴 필터도 없고, ‘바로 보는 나’라는 관념조차 내려놓을 때,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드러나는 이 참된 바라봄. ​오늘도 그저 안경을 벗고, 필터 없이 들리는 소리를 듣고 보이는 것을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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