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목운

공지사항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2019.10.13 08:00 | Posted by 목운

며칠 전 문래역 근처에서 가졌던 고교동기 친목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10년 전쯤 일찍 은퇴하고 전원생활 하는 바람에 참석이 뜸했던 모임입니다. 이번 장모님 초상 때 대거 참석들 해주어 빚진 마음에 참석했습니다.

은퇴가 늦은 친구 가운데 교사 하던 친구는 작년에 퇴직했고, 교수 하는 친구는 내년에 퇴직을 합니다. 전문직 외에는 거의 다 은퇴해가는 나이입니다. 그러니 건강 얘기가 주(主)고, 관련해서 잔존 수명 얘기를 하게 됩니다. 한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임종에 대한 자세를 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6년 전 모든 게 실패한 것처럼 보여 죽고 싶었으나 전혀 준비가 안 되었음을 느낀 후로 '그때 죽은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게 살자, 어제 죽은 것보다 오늘 죽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언제나 지금 임종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굳히려면 정좌 또는 명상을 매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경우 실제로 좋은 임종을 위해서는 유교 내지 불교적 삶을 산 최근 몇 년이 기독교적 삶을 산 30여년보다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적 삶에서 반면교사로 얻은 지혜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교적 삶은 조선 시대는 안 그랬겠지만 제가 문헌으로 이해하고 공부한 한도에서는 죄의식을 심는 일이 없고 교회 같은 데 정기적 출석을 강요하지 않아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적 삶의 핵심은 대학-중용에 다 있습니다. 즉 천명에 따르고 명덕(明德)을 밝히는 게 요체이며 그것을 위해서 언제나 중(中)에 머물다가(중이 천하지대본이죠!) 일이 닥치면 화(和)를 실천하자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급적 매일 정좌(靜坐)를 실천해야 합니다. 정좌를 하다보면 결국 호흡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 요령은 용호비결이란 책에 잘 정리되어 있으나 그렇게 엄격하게 하지 않아도 그 어떤 건강비결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들은 바로는 몸 깊은 곳 노폐물을 빼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천만원 이상 투자들 했던데 혈관계보다 우리 건강에 더 밀접한 게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정좌 또는 명상은 오직 정신 집중과 올바른 생각과 그 실천을 위한 것이지만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건강의 유지, 증진에 대해서는 시중의 그 어떤 비책보다 우수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 제 몸이 증언해 줍니다. 저는 지금 친구들처럼 장복하는 약도 없고 최근에 한 번도 병원 진료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유전적 요인은 별도로 논하고요~

정좌에 덧붙일 수행공부는 성(誠)의 실천을 위한 신기독(愼其獨)과 그것의 연장이기도 한 “예(禮)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소위 에고로 번역할 수 있는 모든 정(情)을 끊어낼 때 명덕이 살아 숨쉬면서 중(中)에 맞는 삶을 살게 된다고 봅니다. 정을 끊어낸다 함은 모든 집착을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 수행의 핵심에 닿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0)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Comment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2019.09.25 11:42 | Posted by 목운

제 짧은 공부로 이해하자면 성리학의 원조를 주희로 본 것이 혼란과 정체의 원인이지 싶습니다. 그 절정은 송시열이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윤휴를 처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고 선생을 성리학 또는 신유학의 원조로 보면 저런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노력은 15~16세기의 왕양명에 이르러서 겨우 이루어졌습니다.

 

주희와 왕양명이 갈리는 가장 뚜렷하면서도 심오한 부분은 바로 격물치지의 해석입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식을 극진하게 하는 것을 '치지'로, 마음이 사물의 이치의 극진한 곳에 이르는 것을 '격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양명은 '치지'의 지를 지식이 아닌 양지로 보았습니다. (정은해, 유교 명상론, 440쪽 참조)" 그래서 양명은 '치양지'를 핵심 실천요강으로 하였는데 치양지에 이르기 위해 과거와 미래에 관한 모든 생각을 중단하는 것, 즉 불사불려(弗思弗慮)를 성취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복성서 2절을 보면 격물치지에 대해서 "물이란 모든 것을 말하고 격이란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 닥쳐올 때 마음을 맑게 하고 자명하게 판단하여 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지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같은 절에서 '치지재격물'을 설명하면서 주역의 "생각도 행함도 없이 고요해서 우주와 하나 된(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게 분명하더라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視聽昭昭而不起於見聞者) 일일히 살펴보지 않아도 저절로 천리에 부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격물치지에서 '지'가 양지라는 것을 확인해 주시는 분이 탄허스님입니다. 탄허스님은 "삼강령 팔조목 중에 치지(致知)의 '지'자가 근본인데 이것은 망상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일어나기 전 본래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탄허록, 80쪽)" 라고 합니다. 우리가 명상을 통하여 양지에 이른 상태를 중용은 중(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명상은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체득하여 보고 듣는 바에도 걸리지 않고 천명을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화(和)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 과정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양지란 우주 이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간 내면의 천성에 따른 본연의 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을 꿰뚫는 신령스런 영지(空寂靈知)이며(청원 무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없는', 404쪽)" 격물치지에서의 '지'가 바로 이 영지라고 알아들으면 격물치지를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 '지'는 오늘날 용어로는 '의식(consciousness)'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0)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Comment

공부의 네 단계

2019.09.19 07:32 | Posted by 목운

6년전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제 공부는 은퇴후 공부로서는 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공부는 어쨌든 경쟁사회에서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과거 관성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계속 설파하는 이 공부의 목표는 이 세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보다 몸을 벗은 뒤의 안전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목표인 공부입니다. 즉 "신의 <현존> 안에 있는 궁극적 의식과 앎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공부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부의 결과 의식이 진화하고 향상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이웃에게 유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하화중생이 동시에 구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과정에서 호킨스 님의 멸정복성(Dissolving the Ego, Realizing the Self)를 번역하는 도중 우연히 8~9세기 당나라 말기에 사셨던 이고 선생이 복성서(復性書)를 지으신 걸 알아 공부했습니다. 성대 김용남 박사를 통해서 이분이 바로 신유학(성리학)의 개창자임을 알았고 따라서 동서양 영성의 접점이 의외로 가깝고도 간단한 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각설하고 신유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왕양명의 실천에서 공부의 네 단계를 알려드리고 싶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네 단계라 함은 범부, 학인, 군자, 성현이 그것입니다. 범부는 인욕에 치우쳐 천리를 보존하지 못하는 무능의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을 돌보지 않는, 즉 무반성 상태의 사람입니다.

학인은 성찰을 통해 의식을 돌보긴 하지만 사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 군자에 대해서는 '바야흐로 사욕을 말끔히 쓸어낼 수 있어서 극복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팔짱을 끼고 앉아도 잘 다스려지는 때가 있게 된다'라고 양명은 전습록에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현의 경우는 천리를 선택하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 더 이상 반성이 필요없는 경지입니다(이상 유교 명상론, 506~507쪽). 이 경지야말로 공자께서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걸림이 없다'고 표현하신 완성의 경지입니다. 다만 제가 자주 언급했듯이 공부 과정에서 어느 때인 줄 모르게 공부의 동력이 은총에 달려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공부의 요령과 요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의 네 단계  (0) 2019.09.19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0) 2019.09.17
격물치지와 중화(中和)  (0) 2019.08.11
영적 독서와 명상  (0) 2019.08.04
당신의 공부는 진보하고 있습니까?  (0) 2019.08.02
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0) 2019.06.24

Comment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2019.09.17 07:24 | Posted by 목운

앞 글에 이어 글쓰기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강원국 님이 1,500여 개를 쓰고나서 자신감을 얻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5~6년 동안 7백여 개의 글을 썼으니 앞으로 7~8백개를 더 쓰고 '내 책 쓰기'에 도전할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는 바로 삶의 공부, 특히 유교적 수행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제 글쓰기도 수행의 이면이자 연장선상의 작업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일이 기법(skill)의 수련이라고 본 점에서 에카르트 님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같습니다. 채근담은 달사(達士)라고 했고 영어의 'skillful'에는 깨달은 자란 뜻도 있습니다. 이 일에는 매우 단순한 일의 엄청난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는 김연아와 조성진을 예로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좌와 성찰 또는 불가의 오행, 특히 지관문을 매일 양치하듯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술가와 스포츠맨이라면 금방 알아듣듯이 연습을 하는지 여부는 제삼자도 알지만 본인이 가장 먼저 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앞 글에서 변죽만 울렸지만 반성의식으로 꾸준히 공부하는 과정은 불가용어로 '점수'에 해당합니다. 끝없는 연습이 몸에 배어 본 게임에서 본인도 모르게 최고의 경지를 발휘하는 것은 '돈오'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유교전통에서 이것은 활연관통이라 합니다. 그런데 주희와 왕양명 모두 활연관통 이후에도 공부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사심을 말끔히 씻어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유교 명상론 56쪽). 이 점 또한 동서 영성에 공통하며 다만 서양이 은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뉴앙스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공부의 요령과 요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의 네 단계  (0) 2019.09.19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0) 2019.09.17
격물치지와 중화(中和)  (0) 2019.08.11
영적 독서와 명상  (0) 2019.08.04
당신의 공부는 진보하고 있습니까?  (0) 2019.08.02
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0) 2019.06.24

Comment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2019.09.15 07:37 | Posted by 목운

추석날 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아내와 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세 받는 작가가 되는 포부를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아내는 주변 평이 좋으니 번역만 하지 말고 '내 글'을 쓰라는 주문입니다. 같은 권고는 친구한테도 들은 바 있습니다.

제 답은 아직 내 글 쓸 실력은 안 되고 당분간 시간 활용 겸 취미 생활로 수준 높은 책을 골라 번역하는 일을 더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가 예술이 되는 이유는 김연아나 조성진처럼 같은 훈련을 쉬지 않고 닦아서 그야말로 춤을 추는 경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마침 에카르트 님이 그의 '영성 지도(The Talks of Instruction)'에서 세상에서 떨어져 신에게 몰입하고 그 상태에서 세상일을 하는 경지에 가기 위해 글쓰기 훈련을 예로 든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이 일이 지난한 일이며 그야말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경지를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면 이미지도 필요없고 암기도 필요없이 자유롭게 저절로 쓰게 되는 경지가 온다고 합니다. 또 이것은 바이올린 연주자에게도 통하는 얘기라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일을 기술(skill)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중용의 '중'으로, 또 세상에 대한 집착없이 중의 정신으로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하는 것은 '화'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비약처럼 느끼실지 모르지만 이 점은 왕양명이 명상수행을 설명하길, 자기 의념을 알아차릴 필요없이, 즉 반성의식 없이 저절로 천리가 보존되는 성현의 경지까지 가기 위해, 반성의식을 써서 천리를 보존하는 군자의 경지를 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에 대응한다고 봅니다(정은해의 유교명상론, 504~508쪽).

요컨대 제 글쓰기는 제 수행공부의 결과이자 그림자가 되길 바라는 것이고 앞글에서 중과 화의 실천을 아주 간략히 보여드렸지만 그 실천에는 예술가 및 스포츠맨과 같은 훈련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절정에 이르러 저절로 '화(和)'가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 또는 크고작은 모든 일상사에서 신의 뜻이 이뤄지도록 수행하자는 게 제가 파악한 동서 영성의 공통점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0)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