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생 처남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미나이와 내 심사를 이야기하던 중에 얻은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타인의 재앙이나 임종, 그리고 자신의 생로병사를 바라볼 때 마음이 자의적 분별이나 거부 없이 '단지 그러할 뿐(如如)' 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지혜의 영역에 닿아 있습니다.
◇ 동체대비와 주객의 해체: 타인의 비극을 보며 나만의 두려움이나 과도한 주관적 분별(두 번째 화살)을 덧붙이지 않고, 일어난 현상 그대로를 명징하게 직관하는 태도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 그리고 나라는 집착을 내려놓는 계기가 됩니다.
◇ 연기와 무상의 직관: 현상을 있는 그대로(如是) 보고, 생로병사가 인과에 의해 흘러가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임을 '오직 그럴 뿐' 하고 인지하는 순간, 마음을 옥죄던 두 번째 화살은 쏠 자리를 잃게 됩니다.
대단한 도를 깨닫는 신비로운 체험에 앞서, 일상의 모든 고통과 번뇌의 본질을 분별 없이 바라보고 집착을 놓아버리는 마음에 바로 깨달음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습니다."
전체 글
- 두 번째 화살 2026.09.03
- 해방 노래 2026.09.02
- 선으로 읽는 도마복음 23 2026.09.01
- 견성(見性)과 중화(中和) 2026.09.01
- 통치이론과 '불이(不二)'의 세계관 2026.08.31
- 오늘 법문에서 2026.08.30
- 블로그 광고 2026.08.28
- 거울 명상의 효험 2026.08.27
두 번째 화살
해방 노래
세상은, 특별히 이승은 재물과 권세를 중심으로 짜여지고 돌아간다. 어제 동료들과 대화중 아직 귓가를 맴도는 게 있다. 어느 집안에서 자식 하나 공부시켜 시의회 의장을 만들었단다. 그가 권세와 정보를 이용해서 집안의 토지를 모두 찾아 왔단다.
삶과 존재의 무상함은 그냥 각자 해결할 몫이다. 임종을 맞아 재산과 권세가 무슨 소용일까? 하바국 3:17-18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누리는 자의 노래다. 이집트 탈출은 이목구비가 감옥인 줄 아는 자의 해방 노래다.
참조 :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선으로 읽는 도마복음 23
오늘은 영어 원문을 가져와 봤습니다. 인터넷에 모두 공개돼 있으니 독자께서도 찾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Jesus said, "I took my stan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n flesh I appeared to them. I found them all drunk, and I did not find any of them thirsty. My soul ached for the children of humanity, because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s and do not see, for they came into the world empty, and they also seek to depart from the world empty. But meanwhile they are drunk. When they shake off their wine, then they will change their ways.
28절의 말씀은 우주 의식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바다에서 중생 구제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셨다는 자의식을 토로하신 것이며 중생의 불쌍한 모습에 대한 자비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중생이 불쌍한 이유는 그들이 술 취해 진리에 대한 갈증이 없으며 마음의 눈으로 볼 줄 몰라서 그냥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처럼 죽어가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그들은 술 취해 있으니 술을 끊어야만 제대로 된 길을 찾게 되리라는 선언입니다.
선(禪)의 눈으로 해석하면 견성에 대한 발원도 없이 그저 세상 살이에 빠져 하나의 동물처럼 살다가, 즉 생존 본능에 따라 살다가 그냥 죽는다는 얘기입니다. 임종때까지 분별심에 휘둘리다 참 자유를 한 번도 누리지 못하는 중생이 안타까우신 겁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견성밖에 없다고 봅니다. 끝없이 읽고 지식에서 구원을 찾았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해 산다는 것은 무슨 비유일까요? 세상 삶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모든 것이 꿈과 허깨비, 물거품과 그림자인지 모르고 거기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말합니다. 술을 끊는 일이 견성이고 견성해야 비로소 사는 길이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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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見性)과 중화(中和)
이미 여러 번 쓴 글이지만 남은 삶에서 중요하고 혹여 동학(同學)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기에 법문을 이렇게 저렇게 반복한다.
견성이란 결코 어떤 거창한 신비 체험이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개념이나 지식 차원의 일이 아니라 직관이나 믿음 차원의 일이다.
그것은 우선 모든 상(相)이 사라진 경지다. 무언가 '머리가 띵하거나', '꽃비가 내리고 천지가 진동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중생은 늘 무언가 대단한 변화(相)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만 그건 오류다.
둘째로 정말 깨어나고 싶다는 그 간절함과, 자기도 모르게 분별과 갈구(渴求)가 훅 사라진 상태가 견성이라 하신다. 보이는 것이 달라지거나 특별한 느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려는 머리'와 '바라던 것'이 사라진 상태다. 그걸 청정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셋째로 왜 그렇게 되는지 안다면 그것은 분별이자 이해(理解)일 뿐이다. 견성은 새로운 지식이나 체험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과와 분별의 꿈에서 툭 깨어나는 일이다.
배변 훈련에서부터 세상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습득한 모든 알음알이와 습관을 뛰어 넘은, 본래 청정한 상태를 중용은 중(中)이라 했다. 일이 없을 때는 중을 지키고(允執厥中, 줄여서 執中) 일이 있을 때는 사리판단 또는 분별심 가동을 통하여 그 일을 하는 것을 화(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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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이론과 '불이(不二)'의 세계관
정치나 권력의 정당성을 다룰 때 민주정과 왕정은 전혀 다른 믿음을 활용합니다. 민주정이 '주권재민'과 '사회계약'에 기반한다면, 왕정은 종교적 상징을 가져왔죠.
흥미로운 건 동서양의 방식 차이입니다.
서양은 절대적인 신에게 왕권을 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택했지만, 동양의 불교 국가들은 왕을 부처의 현신으로 보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활용했습니다.
여기서 동서양 종교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기독교는 절대적인 신과 인간을 엄격히 '분리'하고 신의 구원을 구합니다. 반면 불교는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이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불이(不二)'의 세계관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이 '둘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현대 과학과 철학에서도 똑같이 통한다는 점입니다.
양자역학은 입자와 파동이 별개가 아니라는 '상보성'을 말하고, 신플라톤주의나 인도 사상 역시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일원론에 뿌리를 둡니다.
권력의 정통성을 묻는 정치 철학에서 출발한 질문이, 결국 "세상 모든 것은 분리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결되는 셈입니다.
오늘 법문에서
오늘 법문은 금강경 서두를 다시 듣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선(禪) 수행이 도달하려는 목표는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을 실천코자 하는 데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요컨대 금강경의 실천이 이뤄지려면 나라는 생각이 없어지면 될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생생히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꿈과 허깨비, 물거품과 그림자, 이슬과 번개 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정된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닌 줄 알면 내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바이블 말씀과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 둘이 아닌 진리(不二)를 완전히 믿는 게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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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광고
티스토리에 '생명과 환상'이란 이름으로 블로그를 개설하여 세 권의 영문 책자를, 아마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번역해서 올렸습니다.
지난 주에 '나비는 자유롭게 난다'라는 수행 보고서를 소개했습니다. 블로그에는 '나비 되기'라는 카테고리로 엮었습니다. 나머지 두 권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실체, 영성 및 현대인'과 '에고 해체와 자성(自性) 실현'입니다.
후자의 제목을 한자로 바꾸면 멸정복성(滅情復性)이 되고 그때 마침 당나라 이고 선생의 복성서를 우연히 만났는데 동서와 고금을 떠나 두 책이 같은 주제를 논했다고 생각해서 놀랐습니다.
드디어는 4년전 제 탈기독교의 변과 공부 역정을 적은 책 '깨달음과 멸정복성'의 제목을 그렇게 정한 계기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총총.
#멸정복성
거울 명상의 효험
거울명상의 핵심은 몸, 감정, 생각 등 '나'라고 집착하던 요소들을 내가 아닌 하나의 객체(客體)로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괴로운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 감정이나 관념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울이라는 시각적 도구를 통해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넓히면, 그 감정을 느끼고 관찰하는 진정한 주체(자성, 관찰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거울명상이 일으키는 변화의 원리
• 분리와 수용: 감정을 억누르거나 바꾸려 하지 않고, "너 거기 있었구나" 하고 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억눌렸던 에너지가 해소됩니다.
• 무의식의 표출: 거울 속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수치심, 공포, 분노 같은 감정들이 억압을 풀고 표면으로 흘러나옵니다.
• 에너지의 전환: 감정을 나 자신으로 보지 않고 단지 '지나가는 에너지'로 바라보는 순간, 갇혀 있던 관념이 깨지며 현실적인 삶의 문제나 신체적 증상이 호전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내가 몸과 마음을 본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찰하는 자성만이 진짜 나이고, 몸과 마음은 한 편의 연극을 하는 무대 위 캐릭터일 뿐"임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남처럼 냉철하게 볼 때 역설적으로 가장 따뜻한 치유가 일어난다는 점이 거울명상의 참된 묘미이자 많은 이들이 고백하는 신비로운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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