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의(便意)’ 비유가 갖는 선적(禪的) 진실: 자연성과 당처(當處)의 일

​우리가 일상에서 변의를 느낄 때 “소식이 왔다”고 하듯, 깨달음을 ‘한 소식’이라 부르는 데에는 눈부신 비유적·본질적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1. ​에고(의지)의 조작이 아님 (자연성): 변의는 내가 머리로 계산하거나 의지를 발동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생리적 조건이 다 차오르면 ‘저절로' 찾아옵니다. 깨달음 역시 에고가 애를 써서 얻어내는 어떤 성취가 아니라, 인연과 조건이 성숙했을 때 본래 자성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 ​당처(當處)가 스스로 하는 일: 배변 작용은 소화계라는 ‘자연의 생명 메커니즘(당처)’이 스스로 하는 일일 뿐, ‘나’라는 에고는 그저 그 소식을 느끼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견성(見性) 또한 ‘내가’ 본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성(당처)이 본성 스스로를 비추는 일’입니다.

3. ​격외의 파격, 임제와 운문의 평상심: 선가에서 조사(祖師)들은 깨달음을 결코 신비화하지 않았습니다. 운문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물음에 “마른 똥막대기(乾屎厥)”라 답하고, 임제 스님이 “법에 맞게 수행하는 사람은 똥 누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을 뿐”이라 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변의처럼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당처의 작용이야말로 흉내 낼 수 없는 깨달음의 진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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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글에서는 내 아이들에게 선 수행을 권하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마침 아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 대화중에 선 수행을 권유하게 되었다.

계기는 내가 유물주의를 믿는지 관념주의를 믿는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유물주의든 관념주의든 하나만 말하면 틀린다고 답하고 예를 들면 뇌가 의식을 만든다고 하면 오답이라 했다.

대화 중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둘이 아니고 '평상심이 도요 일상이 곧 선'이라는 불이문에 기반한 생각을  말하고 선에 입문하길 권했다. 희한한 우연의 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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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영성 철학 등이 결국 생사문제를 뚫어버리려 하기 때문에 비슷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오랜 기독교 생활 끝에 선종에 입문했는데 솔직한 심정은 기독교에 불순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길을 잘못 들게 하거나 유쾌한 삶을 저해하는 게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시스템 또는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그것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부작용도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천주교) 덕분에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지게 되는 등 계몽된 점도 있고 심지어 아이들 이름은 한국 성인 이름을 빌려서 지어주었다. 특별히 기독교를 자주적으로 수용, 한국화한 서학은 높이 기려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3.1 운동의 동력이기도 한 동학은 한국사회 저변의 큰 자산인 동시에 한류의 원천이라고 본다. 서학이 주자학에 대한 '반(antithesis)'이라면 동학이야말로 변증법적 '합(synthesis)'이면서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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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모든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종의 가르침으로 교체하면 내 경우 모순을 못 느낀다. 선의 방편을 취해도 그리스도를 배척할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영성적으로 효능감이 크다.

1. 모든 교리 부인 : 알음알이의 배척
2. 영혼 : 자성
3. 신의 섭리에 맡김 : 연기에 맡김
4. 삼위일체 : 관찰자와 피관찰자, 관찰 행위의 일체
5. 그리스도의 무심판 요청 : 불이를 믿음

친구들을 만나면 화제가 자연스레 임종과 죽음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늦게 선(禪)에 입문하여 살펴보니, 결국 붓다의 삶과 가르침 역시 늙고 병드는 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보게 된다.

​붓다께서 출가할 때 아버지 정반왕과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해 보면, 그분의 출가 명분 또한 근원적인 죽음의 문제 해결에 있었다. 그리고 선(禪)에서 내놓는 궁극의 답은, ‘대사일번(大死一番)’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마나 마하리쉬처럼 삶의 한가운데서 한번 진실로, 확실하게 죽어보는 것. 그렇게 '나'라는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은 뒤 남아있는 삶의 모든 과제를 온전히 연기에 맡긴다면, 우리는 임종에 이르는 삶이라는 항해를 가장 의연하고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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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끝까지 분별하지 말고 속지 말기를 온갖 방편으로 깨우쳐 주신다. 그것들은 사실 내가 과거로부터 겹겹이 축적해 온 ‘안경 필터’를 통째로 깨버리기 위한 자비로운 일격일 뿐이다.

​우리는 나이와 경험, 지식과 관념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세상을 본다. 대상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분별이 해석해 낸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스승은 우리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때, 그 안경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려 버리신다. 분별이 싹트는 찰나를 낚아채어 어떠한 관념도 딛고 설 수 없게 만든다.

​견성(見性)이란 새로운 지식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선종(禪宗)에서 알음알이를 내버리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정견은 어떤 바른 견해나 주관을 새로 갖는 것이 아니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 어떤 해석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을 단지 바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혹시 ‘필터를 깨버려야 한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안경을 쥐고 있지는 않은가? ​깨뜨릴 필터도 없고, ‘바로 보는 나’라는 관념조차 내려놓을 때,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드러나는 이 참된 바라봄. ​오늘도 그저 안경을 벗고, 필터 없이 들리는 소리를 듣고 보이는 것을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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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과 선가(禪家)의 어록을 보면 언어의 옷만 다를 뿐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너 자신이 곧 신성이요 부처다)”라는 동일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서양 정통 교회사에서는 이단의 굴레를 쓰고 1,600년 넘게 흙 속에 묻혀 있었으나, 도마복음은 결국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끌어낸다면 그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70절)”라는 구절을 통해, 이미 우리 자성 안에 온전히 구족되어 있는 진리를 일깨워 주는 훌륭한 ‘동서양 영성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버리고 선을 택한 제 경우 참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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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 말씀이다. "신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삶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 머물러야 한다. 진정한 이해, 사랑, 기쁨은 오감에 기반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에게서만 나와야 한다. 신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이것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영혼의 어두운 밤이기도 한데 그것은 감각적·지적 집착을 비워낸 상태이며, 선종의 '무심(無心)'과 정확히 같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이 말한 '신'의 성품과 접근법은, 선종에서 말하는 '형상과 오감을 초월한 본래 자성'을 가리키는 고백과 본질적으로 완벽히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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