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법문 듣고 적다 : 오직 마음을 쉰다는 것. 지금 드는 그 생각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세상에 나지 않은 것처럼 그저 있는 것.

무언가 알아지고 글쓰는 것은 취미일 뿐 거기에도 집착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오직 내려놓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다(解脫과 放下着=let it go).

'나'가 없어져 공(空) 자리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用) 저절로 알아서 나무하고 물 긷는 게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임. 오직 '나'가 없기를 염원하라(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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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저는 지난 2천년간 기독교가 초래한 비극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함으로써 생긴 것이라는 심증이 생겼습니다.

제가 기독교(천주교) 생활을 할 때 많이 듣던 신비라는 말은 결국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모든 신비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건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선종에서도 같습니다. 선종에서 믿으라는 것은 모든 이원적 짝이 둘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을 것들이 많아지고 그 많은 것들을 권위 때문에 믿게 되면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큰 것이 어제 거론한 예수의 정체에 관한 이중성 논의입니다. 오늘 하나 추가하려는 것은 삼위일체입나다.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그 신의 세 페르소나(즉 인격)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깨달은 이들의 신 체험을 세 차원에서 거론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깨달은 이들 얘기를 들으면 관찰자와 피관찰자는 하나가 되면서 구분되지 않고 오직 관찰만 남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관찰자를 성부로, 피관찰자를 성자로, 거기에서 작동하는 '관찰'을 성령으로 보는 겁니다. 그 셋이 하나가 되는 일을 누군가가 신의 '삼위일체성'으로 말했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믿으라는 것이 소위 교회의 교도권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소위 착한 신자들이 그것을 믿을 교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입장은 차라리 선종에서처럼 신비를 말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오직 실체와 진실을, 그리고 교리라면 교리인 '색즉시공'과 거기에서 파생하는 둘이 아니라는 것(不二)만 믿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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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깨달은 자로서의 발언, 즉 "나는 빛이다. 세상 모든 것 위에 있다."는 말과 보통 사람으로서의 발언, 즉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을 조화하지 못한 초기 교회는 예수의 인간성과 신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두고 이단과 정통을 갈랐다.

선종에서는 이것을, 깨달은 자는 파도로서의 정체성과 바다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살아내는 것으로 말한다. 기독교는 예수가 깨달은 자로서 행한 기적을 강조함으로써 기괴함에 빠졌으나 선종은 (선사들 가운데 그에 못지 않은 신통력을 보인 예가 있었으나) 신격화를 배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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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을 단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견해’나 ‘교리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선’으로 보는 것은 입문 단계의 해석이다. 정견은 자성(自性)에 눈을 뜨고(見性), 분별 이전 불이(不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1. 자성을 바라봄과 불이(不二)의 관점

• 연기와 공의 실체적 체득: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인 정견은 주관과 객관, 나와 너, 선과 악으로 쪼개어 보는 이분법적 분별망상(分別妄想)이 쉬어진 자리다. 자성이 본래 비어있되[空] 모든 현상으로 드러남[緣起]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것이 바로 정견이다.

• 견성(見性) 이후의 시선: 견성 전의 눈은 사물의 겉모습에 집착하여 갈등하고 번뇌하지만, 견성 이후의 정견은 모든 현상의 본질과 그 현상의 쓰임을 동시에 온전히 알아차린다.

2. 바다와 파도의 비유

"꿈을 깬 자는 비로소 바다와 파도를 보게 되리라." 이 말은 정견의 진수를 담은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다.

• 꿈속의 삶 (파도만 보는 삶): 꿈을 깨지 못한 이는 휘몰아치는 파도(현상, 번뇌, 생로병사)만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파도가 사라지면 자신이 죽는 줄 알고 두려워한다.

•  꿈을 깬 자의 정견 (바다와 파도를 동시에 봄): 꿈에서 깨어난 이는 파도의 본질이 물(바다)임을 안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쳐도 그것은 바다의 일렁임(자성의 현현)일 뿐임을 알기에 흔들리지 않고, 동시에 그 파도의 모습 또한 소홀히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파도로서의 쓰임) 온전히 바라보고 보듬는다.

체(體: 바다)와 용(用: 파도)이 둘이 아니요, 진공(眞空)과 묘유(妙有)가 불이(不二)임을 아는 눈, 이것이 바로 정견의 참모습이다. 정견이란 패러다임의 완전한 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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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영원한 탄생'이 저절로 드러나기 위해, 매일 악기 연주를 연습하듯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매일 거듭하는 연습, 그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을 통해 일평생 해온 '분별하고 탐착하는 습관'은 낯설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비우고 돌아보는 습관'은 익숙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자성(自性)에 관심을 집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마치 천동설이 지동설로 뒤바뀌듯,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전환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패러다임이 바뀐 뒤에도 과거의 익숙했던 습관은 불쑥 찾아오는데, 이를 '업력(業力)'이라 부릅니다. 이 업력을 이겨내고 오직 자성에 온전히 맡겨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극락이자 천국의 삶이며, 맹자께서 말씀하신 참된 '대인(大人)'의 길일 것입니다. 혜능 선사는 그렇게 자성에서 떠나지 않는 삶이 바로 복전(福田)이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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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입문하고 요즘은 내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되도록 심판하지 않고 바라보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 제미나이에게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둘이 아니겠네'라고 말 시켰더니 다음과 같이 답하더군요.

《무심이란 거울이 깨끗하여 아름다운 것이 오든 미운 것이 오든 그대로 비추되, 대상이 지나가면 어떤 자국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생각에도 끌려가지 않고, 나쁜 생각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저 인연 따라 덧없이 생멸함을 관조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결국 "좋고 나쁨에 선을 그어 분별하지 않고, 일어나는 생각을 그저 인연 따라 흐르게 두어 마음에 한 점도 남기지 않는 무심의 자리"가 바로 불이문에 들어선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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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아니면 하심(下心)이 저절로 된다'는 게 오늘 법문이다. 둘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떻게 둘이 아닌 게 될까? 믿음밖에 없다고 본다.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건 모두 작위(作爲)라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신다. 마음으로 장난치지 말고 그냥 탁 믿어버려야 할 것 같다. 헤아림이 곧 분별심이고 알음알이인데 그렇게 해서는 골인을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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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전파와 기독교 전파의 공통점을 생각해봤다. 인간 존재의 보편성에 기반한 실천, 특히 불이와 무상성 체험에서 나오는 실천들, 예를 들면 차별 반대, 궁극의 자유 추구 등이 기독교 교리에서 추론할 수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 전파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했다고 본다. 그러한 정신의 존재는 전파의 강력한 동력이다.

다음으로 수용자가 선택토록 하는 이익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수용자가 그것을 접하고 즐겁거나 행복한가, 삶을 걸만한가 등이 또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그러고나면 전도 내지 전파 노력 없이도 산불처럼 번져나간다. 처음에는 언더독으로서 비밀 결사처럼 존재하다가 어느덧 대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중화 또는 일반화하기까지 수 세기에서 수천 년이 걸리는 것이다.한류 전파에 기독교 전파와 같은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세계적 현상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미국적인 것이 불과 1~2세기만에 세계적인 게 된 것을 목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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