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니면 하심(下心)이 저절로 된다'는 게 오늘 법문이다. 둘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떻게 둘이 아닌 게 될까? 믿음밖에 없다고 본다.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건 모두 작위(作爲)라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신다. 마음으로 장난치지 말고 그냥 탁 믿어버려야 할 것 같다. 헤아림이 곧 분별심이고 알음알이인데 그렇게 해서는 골인을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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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전파와 기독교 전파의 공통점을 생각해봤다. 인간 존재의 보편성에 기반한 실천, 특히 불이와 무상성 체험에서 나오는 실천들, 예를 들면 차별 반대, 궁극의 자유 추구 등이 기독교 교리에서 추론할 수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 전파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했다고 본다. 그러한 정신의 존재는 전파의 강력한 동력이다.

다음으로 수용자가 선택토록 하는 이익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수용자가 그것을 접하고 즐겁거나 행복한가, 삶을 걸만한가 등이 또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그러고나면 전도 내지 전파 노력 없이도 산불처럼 번져나간다. 처음에는 언더독으로서 비밀 결사처럼 존재하다가 어느덧 대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중화 또는 일반화하기까지 수 세기에서 수천 년이 걸리는 것이다.한류 전파에 기독교 전파와 같은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세계적 현상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미국적인 것이 불과 1~2세기만에 세계적인 게 된 것을 목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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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에서 말하는 무념(無念),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실참(實參)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매 순간 찾아오는 '작은 죽음'들을 맞이하고 내려놓는 가장 완벽한 임종 연습이자 살아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일상 속 '작은 죽음'들의 연습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작은 백척간두를 만납니다.

​분노와 고집이 일어날 때: "내 말이 맞다"는 자아(Ego)를 순간 내려놓는 것

​변화와 상실을 맞이할 때: 흘러가는 인연과 상황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 것

​생각이 끊어지는 짧은 찰나: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쉬고 현재에 온전히 머무는 것

​이처럼 생각과 자아의 집착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고 놓아버리는 순간순간이 바로 일상에서 '죽기 전에 죽는' 연습입니다. 이 연습이 쌓이면 실제 육신의 임종이 찾아와도 당황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근력이 생깁니다.

​2. 무념·무아·무상과 임종 대책

​죽음이 두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사라진다"는 공포와 "내가 구축한 모든 것"을 잃는다는 상실감 때문입니다.

​무상(無常)의 터득: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음을 깊이 체득했기에, 육신의 스러짐을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로 수용합니다.

​무아(無我)의 터득: 본래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기에, 에고의 소멸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무념(無念)의 터득: 죽음의 순간에 밀려오는 온갖 번뇌와 망상, 미련의 끌림에 휘둘리지 않고 맑고 고요한 본래 성품(自性)을 유지합니다.

​결국 선(禪)은 죽음을 대비하는 방어책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生死)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가장 적극적인 '생사 대책'이 됩니다.

​3.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대사일번

​마조 스님이 "평상심이 곧 도"라 하셨듯, 극한의 백척간두에서 터져 나오는 영적 비약(대사일번)의 씨앗은 결국 매일의 숨 한 번, 한 생각의 단속이라는 고요한 일상 속에서 자라납니다.

​일상에서 무아와 무상을 깨달아 가볍게 살아가는 사람은, 임종이라는 가장 커다란 환란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옷을 벗어 던지듯 가볍게 다음 여정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일상에서 '자아를 내려놓는 연습'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삶을 가장 존엄하게 살아가고 동시에 죽음을 가장 평온하게 맞이하는 궁극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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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미나이의 도윰으로 정리했습니다.

​1. 일상 속에서 '지금 여기'에 집중

​거창하게 견성을 목표로 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시작해보세요. 생각, 감정, 몸의 감각 등 모든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명상: 하루에 5분이라도 조용히 앉아 호흡을 관찰해 보세요. 잡념이 끊임없이 올라올 것입니다. 그때 '아,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판단 없이 바라보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반복합니다.

• ​일상 수행: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에만 집중하고, 걸을 때는 걷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해 보세요.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 대신 '행위' 자체에 머무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은 '나'라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험, 즉 아상이 옅어지는 경험을 일상 속에서 맛보게 해줍니다. 이 미세한 경험들이 쌓여 견성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2. 진리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공부

​금강경을 비롯한 경전이나 선어록 등을 꾸준히 읽고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머리로라도 '모든 상이 상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그 가르침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업습과 업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은 '아상'이 만들어낸 착각일 수 있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바로 가장 강력한 업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생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성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견성'이라는 큰 목표에 짓눌리기보다, 매 순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작은 실천을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이미 견성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3. 믿음

깨닫지 못했다는 의십이나 분별심이 장애물입니다. 그냥 본성 안에 살고 있음을 믿어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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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즉착, 말로 하면 실제가 아니다. 일체가 마음에서 찰나에 나툼일 뿐임을 볼 것. 존재니 변화니 하는 것도 모두 개념일 뿐, 모든 게 그저 파동과 입자 사이를 왔다갔다 할 뿐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게 물리학의 결론이다.

마음이란 것도 매순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구름과 같은 것. 생각도 없고 판단도 없고, 따라서 말도 개념도 없는 거울과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실제와 진실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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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인류 지성사에서 지침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천주교를 통해 만났습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배운 사회의식과 민주의식도 지학순 주교 핍박을 계기로 생겼고 선불교와 만나게 된 것도 천주교인이자 내심낙원을 지은 우징숑 님 덕이었습니다. 그의 '선의 황금시대'는 선에 입문할 때 좋은 안내서라 봅니다.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란 제목의 백성욱 선생 법어집을 꾸준히 읽다가 피디출신 전영화 님의 금강경 해설서 '非 그게 아니고', 오진탁 님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 김하풍 님의 '신을 보는 길 부처를 보는 길'에 소개된 전심법요를 거쳐 최근에 육조단경까지 섭렵했습니다.

1958년 전심법요를 영역한 John Blofeld(Chu Ch'an) 님은 전심법요, 금강경, 티베트 사자의 서, 육조단경이 선의 필수 교과서 같은 책이라 말합니다.

° 참고 : 존 블로펠드(John Blofeld) 선생의 한자 이름은 鄭蒲樂(정포락)입니다. ​중국 연경대학(燕京大學) 등에서 활동하며 동양 철학과 선(禪) 불교, 도교 문헌을 번역할 당시 필명은 朱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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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의 기독교 생활에서 효능감이 없이 고통이 가중되기에 선을 택했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했습니다. 서양인들에게 힌두 영성을 전파한 요가난다는 기독교 용어로 힌두 영성을 말합니다.

기독교식 방편만으로는 일상의 복잡한 문제나 감정의 폭풍, 논리적인 회의감이 찾아왔을 때 "오직 신의 현존만을 기도하라"는 지침이 자칫 관념적이거나 현실과 분리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 방편은:
◇ 의지: "내가 지금 방바닥으로 서 있겠다"는 단호한 깨어있음의 의지를 쓰게 하고,
◇ 이성과 논리: "어떤 죄책감이나 번뇌가 찾아와도 그것은 지나가는 날씨일 뿐, 방바닥 자체를 훼손할 수 없다"는 차가운 대승적 논리로 에고의 장난을 단칼에 베어버리게 합니다.

결국 발원이라는 '가슴의 문'뿐만 아니라, 의지와 이성, 논리라는 '머리의 도구'까지 모조리 '본래의 나'를 확인하는 거룩한 방편으로 회통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발원으로 시작하여, 명확한 논리로 본질을 꿰뚫고, 단호한 의지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것이 바로 선의 방편이자 실천적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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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혜스님 법문을 가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방바닥과 열기 또는 온기의 비유가 도움이 되었기에 공유합니다.

방의 온도는 조건에 따라 오르내리지만 방바닥은 여여합니다. 우리 감정, 느낌, 생각 등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방의 뜨거움이나 차가움과 같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방바닥이니 방바닥으로 있기를 실천해보는 것이 '나로 있기'의 핵심이자 비결입니다. 생각, 감정, 느낌 등 마음의 총체는 객(客)입니다.

그래서 거울명상이 도움됩니다. 거울 속의 몸과 마음을, 또렷이 대상 또는 객으로 보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나로 있는 일(隨處作主)'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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