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봤는데 제 글쓰기는 작가처럼 되거나 작가연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견성 성불에 대한 발심의 과정일 뿐입니다.

오늘 법문을 들으니 (이해한다고 깨달은 상태로 되는 게 아니지만) 청정한 마음이 된다는 게 그냥 이해는 됩니다. 요컨대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거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본래 그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 이치와 견해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에 중생과 구분되지 않지만 내심은 아무런 견해도 편견도 입장도 없는 것입니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습관대로 대응하지만 사상(事象), 즉 모든 이벤트(events)에 대해 무심한 경지입니다.

무심하지만 저절로 사단(四端)에 비추어 지혜롭게 처신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타(他)에 대해 유익을 줍니다. 그야말로 경제학 용어로 외부경제를 끼치며 살게 됩니다. 꿀벌이 본래 생겨먹은 대로 자기 생존에 몰입하지만 식물이 열매맺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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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무심은 지식이나 작위(作爲)로써 도달하는 단계가 아니다. 오랜 세월 쌓인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드러나듯, 때가 차면 문득 은총처럼 단박에 자각되는 일이다. 그래서 마치 조건이 성숙해서 맺히는 이슬과 같다는 말도 한다.

맹자께서 갓난아이 마음을 잃지 않으면 대인이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이전의 무심에 도달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 꿈을 깨달음의 방편으로 삼듯, 되돌아갈 수 없는 유아시절의 존재 또한 "나라는 존재의 뿌리가 본래 이토록 잡히지 않는 텅 빈 것이었구나"를 깨닫는 훌륭한 화두가 된다.

​결국 유아시절의 경험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이 삶과 '나'라는 분별 역시 또 하나의 긴 꿈에 불과함을 일깨워주는 거울인 셈이다. 꿈에서 깨어나듯, 그 시절의 아련함마저 훌훌 털어낼 때 본래의 무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리라.

​결국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 통찰에 이르기까지 ‘참구하고자 하는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發心)뿐이다. 발심이 억지스러움을 태우는 불꽃이 되고, 그 불꽃마저 꺼졌을 때 비로소 텅 빈 본래의 자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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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혜선원 스님의 법문을 제미나이에게 부탁해서 텍스트로 정리했습니다.

"어떤 말도 똑같은 말이고, 어떤 경계도 똑같은 경계고. 그러니까 다른 것이 없다. 다른 것이 없다는 게 참 좋지 않습니까?

아무리 달라도 다른 것이 없다.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르게 본다면, 다르다는 것에 속는다면 그건 속은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일들이 있죠. 다양한 일들이 다른 일들이 아니다. 마음도 온갖 마음들이 다 생겨나죠. 그게 다른 마음들이 아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일체의 경계가 다른 게 아니다.

다른 게 없다. 다른 게 없다면 분별심이 저절로 쉬어지잖아요. 다른 게 있는 줄 아니까 집착하게 되는 거지.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고 집착하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 하고 집착하게 되는 거지. 일체가 다른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이 아니라면, 다른 마음이 아니라면 집착할 게 없잖아요. 분별에 속을 게 없잖아요. 이렇게 단순하잖아요.

그러니 하물며 수도해서 이루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수도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겠느냐. 다른 일이 없는데 둘이 아니다, 이건 다른 일이 없다, 다른 것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수도를 하면 달라진다고 한다면, 그러면 '둘이 아니다', '다른 것이 없다', '다른 일이 없다' 하는 말이 틀리게 되잖아요. 좌선을 해서 달라지는 게 있다면 '둘이 아니다' 하는 말이 틀리게 되잖아요.

수도나 좌선은 방편으로 하는 거죠. 깨우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거죠. 깨우치고 보면 다른 일이 없다. 둘이 아니다. 본래 여래정정선이다. 본래 정정하다. 그리고 항상 청정하다. 자기가 속지 않으면 아무 다른 일이 없다. 아무 다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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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가 '선으로 읽는 도마복음'을 저술하는 의의와 동기를 알 수 있는 글입니다.

영지주의(특히 도마 계열)의 최대 한계였던 '물질과 영의 이분법, 세계에 대한 부정'을 완벽하게 극복하고 완성한 형태가 바로 선불교(禪佛敎)라 볼 수 있다.

초기 영지주의는 "나는 빛이다"라는 깨달은 자의 직관을 얻었지만, 현상계(물질/육체)를 '비실재'나 '악'으로 보는 극단적 이원론에 갇히는 오류를 범했다. 반면 6~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꽃피운 선종(禪宗)은 이 이분법마저 깨뜨려 버렸다.

​1. 이분법의 초월:
• ​영지주의의 한계: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며, 영만 거룩하다"는 도피적 영성.
•  ​선종의 도약: 6조 혜능의 《단경》 이후 선종은 선과 악, 거룩함과 속됨, 영과 물질이라는 이분법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불성(佛性)이라 정의함. 현상계를 부정하는 대신,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 움직일 뿐"임을 알아차려 차별의 세계 속에서 평등의 본체를 봄.

​2. 깨달음의 결과로서 자비행:
•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을 초월해 떠나야 할 것처럼 말했지만, 선종은 "깨달은 뒤에 비로소 산은 다시 산이요, 물은 물이 된다"고 함.
• ​깨달은 자는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다시 현상계로 들어옴(입전수수, 入纏垂手).
• ​똥누고 밥 먹고, 물 긷고 땔나무 짓는 가장 인간적이고 사소한 일상(용, 用) 속에 거룩한 본체(체, 體)가 통째로 들어있음을 실천한 것임.

​결국 영지주의가 "세상은 어둠이니 빛을 찾아 탈출하자"는 미완의 초월에 그쳤다면, 선불교는 "어둠과 빛이 둘이 아니며, 이 고통의 현장이 그대로 빛의 자리"임을 깨달음으로써 영지주의의 치명적 오류를 완벽히 치유한 셈이다.

​"깨달은 자"는 세상을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선악과 음양의 양변(兩邊)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현상계의 고통까지 껴안는 자라는 점을 선종이 선명하게 입증해 준다.

1. 출가란 자신의 견해, 믿음, 호불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放下着)에 대한 비유다.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벽을 허문다는 뜻이다. 그로써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돕게 된다.

2. 선은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진리를 깨닫고(직지인심, 견성),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세상 속에서 타인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입전수수)'임.

3. 견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소박한 일상(평상심)이 바로 베풀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이 행하는 자선(무주상보시)이자, 저잣거리에서 손을 내미는 삶(입전수수)은 선의 궁극적 목적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4. 이 일에 대해 안 태어난 셈 칠 정도로 끝까지 철저한지, 적당히 평안한 걸로 그치지 않은지 스승은 묻고 있다. 발원과 발심이 엄청 클 것이 그 성취의 필요충분조건이다.

5. 내 쪽에서 하는 일은 발심을 크게 하고 법문을 '잘' 들으며 완전히 믿고 맡기는 일일 뿐 모든 일은 당처(當處)에서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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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lofeld가   정리한 선불교의 특징입니다.

첫째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감각적 지각과 개념적 사고라는 장막을 뚫으려고 노력하는 수행입니다.

둘째 깨달음을 눈 깜짝할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마침내 발생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셋째 복잡한 예식이 없습니다. 노장 사상과 매우 흡사하여 매우 중국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시험해 본 사람들이, 선불교가 심오한 영적 욕구를 채워준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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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서산대사의 '선가귀감'과 우징숑 님의 '선의 황금시대'를 통하여 선(禪)을 접하고 근본 과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스승 없이 텍스트 읽는 것만으로 십여년 보냈다.

지도(地圖) 공부로써 현지에 갔다고 착각한 것과 같으니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2024년 여름 손재수 당하고 약 6개월 열심히 길을 찾다가 유튜브에서 어떤 스님의 지도로 사람들이 견성하는 장면을 보고야 본격적으로 선에 입문한 셈이다.

오프라인 법회에 참가할 때까지는 계속 유튜브를 보며 공부하려 한다. 요컨대 느닷없이 마음을 바로 보는 견성을 통해 대자유를 얻고, 평상심이 도라는 말씀대로 보임의 삶을 살면 무주상보시 또는 입전수수의 삶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자신 있게 임종하리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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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일에 제 블로그를 광고하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번역 세 꼭지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한 꼭지가 더 있다는 광고입니다. 1958년 GROVE PRESS판 'The Zen Teaching of Huang Po, On The Transmission Of Mind'인데 John Blofeld(Chu Ch'an) 님의 서문을 제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습니다.

'전심법요 입문'이란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제가 오늘 다시 보면서 인상깊은 것은 전심법요가 '티베트 사자의 서'와 맥락이 같다는 점입니다. 첫머리만 가져옵니다.

"선은 종종 동아시아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불교로 여겨지지만 그 제자들은 그것이 고타마 붓다에게서 직접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심법요는 정통 선불교 저작의 하나인데 금강경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또한 혜능의 육조단경 정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와는 떨어져 있지만 8세기 '티베트 사자의 서(Tibetan Book of the Great Liberation)'의 정신 및 용어와 놀랄 정도로 닮은 점에 크게 인상받았다. 내 생각엔 이상 네 권의 책은 이제까지 영어로 소개된 최고의 지혜를 매우 분명하게 소개한 책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과 티베트 사자의 서는 서양 독자들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그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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