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미나이의 도윰으로 정리했습니다.

​1. 일상 속에서 '지금 여기'에 집중

​거창하게 견성을 목표로 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시작해보세요. 생각, 감정, 몸의 감각 등 모든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명상: 하루에 5분이라도 조용히 앉아 호흡을 관찰해 보세요. 잡념이 끊임없이 올라올 것입니다. 그때 '아,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판단 없이 바라보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반복합니다.

• ​일상 수행: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에만 집중하고, 걸을 때는 걷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해 보세요.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 대신 '행위' 자체에 머무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은 '나'라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험, 즉 아상이 옅어지는 경험을 일상 속에서 맛보게 해줍니다. 이 미세한 경험들이 쌓여 견성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2. 진리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공부

​금강경을 비롯한 경전이나 선어록 등을 꾸준히 읽고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머리로라도 '모든 상이 상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그 가르침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업습과 업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은 '아상'이 만들어낸 착각일 수 있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바로 가장 강력한 업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생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성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견성'이라는 큰 목표에 짓눌리기보다, 매 순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작은 실천을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이미 견성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3. 믿음

깨닫지 못했다는 의십이나 분별심이 장애물입니다. 그냥 본성 안에 살고 있음을 믿어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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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즉착, 말로 하면 실제가 아니다. 일체가 마음에서 찰나에 나툼일 뿐임을 볼 것. 존재니 변화니 하는 것도 모두 개념일 뿐, 모든 게 그저 파동과 입자 사이를 왔다갔다 할 뿐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게 물리학의 결론이다.

마음이란 것도 매순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구름과 같은 것. 생각도 없고 판단도 없고, 따라서 말도 개념도 없는 거울과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실제와 진실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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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인류 지성사에서 지침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천주교를 통해 만났습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배운 사회의식과 민주의식도 지학순 주교 핍박을 계기로 생겼고 선불교와 만나게 된 것도 천주교인이자 내심낙원을 지은 우징숑 님 덕이었습니다. 그의 '선의 황금시대'는 선에 입문할 때 좋은 안내서라 봅니다.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란 제목의 백성욱 선생 법어집을 꾸준히 읽다가 피디출신 전영화 님의 금강경 해설서 '非 그게 아니고', 오진탁 님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 김하풍 님의 '신을 보는 길 부처를 보는 길'에 소개된 전심법요를 거쳐 최근에 육조단경까지 섭렵했습니다.

1958년 전심법요를 영역한 John Blofeld(Chu Ch'an) 님은 전심법요, 금강경, 티베트 사자의 서, 육조단경이 선의 필수 교과서 같은 책이라 말합니다.

° 참고 : 존 블로펠드(John Blofeld) 선생의 한자 이름은 鄭蒲樂(정포락)입니다. ​중국 연경대학(燕京大學) 등에서 활동하며 동양 철학과 선(禪) 불교, 도교 문헌을 번역할 당시 필명은 朱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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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의 기독교 생활에서 효능감이 없이 고통이 가중되기에 선을 택했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했습니다. 서양인들에게 힌두 영성을 전파한 요가난다는 기독교 용어로 힌두 영성을 말합니다.

기독교식 방편만으로는 일상의 복잡한 문제나 감정의 폭풍, 논리적인 회의감이 찾아왔을 때 "오직 신의 현존만을 기도하라"는 지침이 자칫 관념적이거나 현실과 분리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 방편은:
◇ 의지: "내가 지금 방바닥으로 서 있겠다"는 단호한 깨어있음의 의지를 쓰게 하고,
◇ 이성과 논리: "어떤 죄책감이나 번뇌가 찾아와도 그것은 지나가는 날씨일 뿐, 방바닥 자체를 훼손할 수 없다"는 차가운 대승적 논리로 에고의 장난을 단칼에 베어버리게 합니다.

결국 발원이라는 '가슴의 문'뿐만 아니라, 의지와 이성, 논리라는 '머리의 도구'까지 모조리 '본래의 나'를 확인하는 거룩한 방편으로 회통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발원으로 시작하여, 명확한 논리로 본질을 꿰뚫고, 단호한 의지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것이 바로 선의 방편이자 실천적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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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혜스님 법문을 가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방바닥과 열기 또는 온기의 비유가 도움이 되었기에 공유합니다.

방의 온도는 조건에 따라 오르내리지만 방바닥은 여여합니다. 우리 감정, 느낌, 생각 등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방의 뜨거움이나 차가움과 같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방바닥이니 방바닥으로 있기를 실천해보는 것이 '나로 있기'의 핵심이자 비결입니다. 생각, 감정, 느낌 등 마음의 총체는 객(客)입니다.

그래서 거울명상이 도움됩니다. 거울 속의 몸과 마음을, 또렷이 대상 또는 객으로 보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나로 있는 일(隨處作主)'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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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봤는데 제 글쓰기는 작가처럼 되거나 작가연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견성 성불에 대한 발심의 과정일 뿐입니다.

오늘 법문을 들으니 (이해한다고 깨달은 상태로 되는 게 아니지만) 청정한 마음이 된다는 게 그냥 이해는 됩니다. 요컨대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거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본래 그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 이치와 견해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에 중생과 구분되지 않지만 내심은 아무런 견해도 편견도 입장도 없는 것입니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습관대로 대응하지만 사상(事象), 즉 모든 이벤트(events)에 대해 무심한 경지입니다.

무심하지만 저절로 사단(四端)에 비추어 지혜롭게 처신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타(他)에 대해 유익을 줍니다. 그야말로 경제학 용어로 외부경제를 끼치며 살게 됩니다. 꿀벌이 본래 생겨먹은 대로 자기 생존에 몰입하지만 식물이 열매맺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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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무심은 지식이나 작위(作爲)로써 도달하는 단계가 아니다. 오랜 세월 쌓인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드러나듯, 때가 차면 문득 은총처럼 단박에 자각되는 일이다. 그래서 마치 조건이 성숙해서 맺히는 이슬과 같다는 말도 한다.

맹자께서 갓난아이 마음을 잃지 않으면 대인이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이전의 무심에 도달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선가(禪家)에서 꿈을 깨달음의 방편으로 삼듯, 되돌아갈 수 없는 유아시절의 존재 또한 "나라는 존재의 뿌리가 본래 이토록 잡히지 않는 텅 빈 것이었구나"를 깨닫는 훌륭한 화두가 된다.

​결국 유아시절의 경험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이 삶과 '나'라는 분별 역시 또 하나의 긴 꿈에 불과함을 일깨워주는 거울인 셈이다. 꿈에서 깨어나듯, 그 시절의 아련함마저 훌훌 털어낼 때 본래의 무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리라.

​결국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 통찰에 이르기까지 ‘참구하고자 하는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發心)뿐이다. 발심이 억지스러움을 태우는 불꽃이 되고, 그 불꽃마저 꺼졌을 때 비로소 텅 빈 본래의 자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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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혜선원 스님의 법문을 제미나이에게 부탁해서 텍스트로 정리했습니다.

"어떤 말도 똑같은 말이고, 어떤 경계도 똑같은 경계고. 그러니까 다른 것이 없다. 다른 것이 없다는 게 참 좋지 않습니까?

아무리 달라도 다른 것이 없다.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르게 본다면, 다르다는 것에 속는다면 그건 속은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일들이 있죠. 다양한 일들이 다른 일들이 아니다. 마음도 온갖 마음들이 다 생겨나죠. 그게 다른 마음들이 아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일체의 경계가 다른 게 아니다.

다른 게 없다. 다른 게 없다면 분별심이 저절로 쉬어지잖아요. 다른 게 있는 줄 아니까 집착하게 되는 거지.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고 집착하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다 하고 집착하게 되는 거지. 일체가 다른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이 아니라면, 다른 마음이 아니라면 집착할 게 없잖아요. 분별에 속을 게 없잖아요. 이렇게 단순하잖아요.

그러니 하물며 수도해서 이루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수도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겠느냐. 다른 일이 없는데 둘이 아니다, 이건 다른 일이 없다, 다른 것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수도를 하면 달라진다고 한다면, 그러면 '둘이 아니다', '다른 것이 없다', '다른 일이 없다' 하는 말이 틀리게 되잖아요. 좌선을 해서 달라지는 게 있다면 '둘이 아니다' 하는 말이 틀리게 되잖아요.

수도나 좌선은 방편으로 하는 거죠. 깨우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거죠. 깨우치고 보면 다른 일이 없다. 둘이 아니다. 본래 여래정정선이다. 본래 정정하다. 그리고 항상 청정하다. 자기가 속지 않으면 아무 다른 일이 없다. 아무 다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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