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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신비주의

신비가란 궁극의 실체와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동서의 신비주의는 저 내재적이고 초월적이면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체(이것도 명사이기 때문에 그것이란 표현이 조금 더 낫다)와 하나가 되려는 관점이나 노선이다. 제가 이곳에 줄곧 올리고 있는 선(禅)이 바로 동아시아의 신비주의다. 요즘 동서 신비가들의 어록을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발견하는 게 문학이나 음악 등 예술이 추구하는 남녀간 로맨스는 모두 신비가의 체험을 모사(模寫)한 것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인간의 로맨스는 유한하고 가시적인 범위에서 이뤄지기 때문인지 쉽사리 깨지거나 부패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지루해지거나 심지어 추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비가의 로맨스(?)는 지칠 줄 모르고 그야말로 신비하다. 오늘부터는 그들이 체험한 신비를 수..

단상 2025.05.06

임종 대비책

거의 매일 청혜선원 법문을 듣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고교 동창한테도 강추한 선원이다. 스님의 도력이 클 뿐 아니라 두세 시간 법회 동안 참가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모두 촌철살인 급이어서 공부에 크게 유익하다.엊그제 법문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않을 수 있는지',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질문하며 완전히 아상이 없어지는 것이 공부의 바른 방향이라고 하여 여운이 크게 남는다.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모습 또는 현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면 바로 해탈(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라는 금강경 가르침의 응용이다.전심법요 또한 임종 때 참마음이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어서 무심무아(無心無我)일 때 과거 현재 미래에 걸림이 없고 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히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

다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십여 년 전 사진을 살피다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훈화 말씀을 다시 접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나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마태 16:24).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자신을 살펴보고 어디에서든 자기가 있으면 자기 자신을 떠나라. 이것이 최상책이다."이 말인즉슨 요즘 몰입하고 있는 선(禅)의 가르침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에크하르트의 신을, 선가의 '나지도 죽지도 않고 이름도 모양도 없는 한 물건'과 같다고 보면 그분의 말은 선가의 법문과 다르지 않다.동시에 신을 도가(道家)의 '도라 할 수 없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것과 같다고 보면 에크하르트는 도가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어설프게 짜깁기한 신 개념은 원래 유태교의 야훼에 기원한 것이고 야훼란 '이름없음(無名)'이란 말..

선종(善終)의 비결

여섯 살에 4.19, 일곱 살에 5.16이 있었지만 그때 내가 있었다는 기억이나 어떻게 생활했는지 하는 기억이 전혀 없다. 심지어 열일곱 살에 유신 쿠데타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관심 가진 바 없다. 과거 체험은 먼 과거일수록 꿈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다섯 살 이전에 골목에서 자전거에 치어 머리에 뚜렷한 상흔이 있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라는 의식을 아상이라 하는데 그것은 뒤늦게 반복을 통해 학습되고 축적된 것 같다.마음의 평온, 나아가 생사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되어 좋은 최후를 맞이하려는 것도 욕심이긴 한데 지금 가장 바람직한 소망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닐곱 살 때와 같은 마음 상태가 되면 될 것 같다. 의지하는 말씀으로는 맹자의 적자지심 가르침이다. 내 예닐곱 살 ..

다시 공부의 요점

불이문이 왜 견성의 핵심 방편인지를 몰랐다. 대승기신론이 심진여와 심생멸을 가르쳤지만 그것들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속은 셈이다. 청혜스님은 컵으로써 설명한다. 내가 컵이면서 흙임을 체득하려면 이제까지 습득한 모든 고정관념과 분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혜능 이후 동아시아 선(禅)의 공통 과제였다.그래서 이 문에 들어오려면 모든 알음알이를 버려야 한다(入此門來 莫存知)고 했고 좋고 싫음만 없으면 뚜렷이 알게 된다(但莫憎愛 洞然明白)고 한 것이다.

禅과 놓아버리기

견성을 위한 선 공부란 일어나는 마음을 조작하거나 변화시키는 게 아니고 그것뿐인 듯이 바라보는 것이라 한다. 동시에 자기(Self)에게 온통 내어맡기라 한다. 청혜스님이 말하는 저 '자기'란 참나인 것 같다. 참나-에고 또는 영혼-육신의 언어 사용은 이분법에 빠지게 하는 약점이 있다.견성하고 나면 마치 에고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참나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그 빛이 에고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방법론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은 모두 자기(Self)의 작용이리라. 평상심이 도(道)며 분별망상에 속지 않으면 바로 참나의 작용이라 말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 같다. 선(禅)은 감정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느껴주라는 놓아버리기 방법과 통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선 공부가..

禅 공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공부하라는 것은 꼭 그대로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들어가라는 것이란다. 다급한 마음으로 전심전력 공부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현상이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 즉 홀로그램임을 즉각 인지하라는 것이다.물질 세계에서 생존하도록 하기 위해 심어진 본능과 지능, 수많은 생명 현상과 물리 현상을 체험하도록 한, 이 존재와 삶 자체가 그저 우주심의 바라봄이라면 -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면 모든 것이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不曾生不曾滅) 것이다. 그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應觀法界性) 견성하는 것이리라. 나라는 것, 내가 있다라고 하는 것 모두가 관념이기에 그것을 아상(我相)이라 한다. 아상이 없다면, 그리하여 내가 죽어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공부의 요체

무슨 일이 있든 행복하기를 선택하고 결단하라는 마이클 싱어의 말과 불이문의 법문을 종합하면 첫 번째 화살을 맞았다 하더라도 심판, 후회, 자책 등으로 두 번째 화살을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동시에 내면에서 끝없이 주절대는 놈의 소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고요히 침묵할 때 만나는, 모습도 한계도 없는 공(空)에 집중한다. 생각과 감정은 저절로 생겼다 사라지는 구름과 같다.셋째 선지식의 법문을 계속 들으며 기존의 관점, 판단, 해석 등 모든 고정관념을 버린다. 당처(当處), 즉 이름 없는 자리[도(道) 또는 야훼]에 내 존재 모두를 내맡긴다. 종합컨대 결국 내 마음이란 게 사라지도록 하는 거다.

禅과 신비주의

며칠 전 부모 미생전에 나는 있었는지 하는, 선가의 화두를 SNS에 적었다. 의문을 가지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게 선가의 가르침이기도 하다.전심법요 법문을 들으면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 것도 같다. 황벽 선사께서는 임종때를 거론하며 우리 본성은, 날 때 생기지도 않고 죽을 때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하신다.그것은 '이름도 모양도 없는 텅빔(空)이며 주객이 없다(湛然圓寂 心境一如)'고 하신다. 그러니 세상 살이에 익숙한 보통 사람으로는 감을 잡을 수 없다.그리하여 타협책으로 나온 게 성전 혹은 사원을 지어 거기에 상(相)이 있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섬긴다. 이미 썼듯 야훼란 '이름 없음'이란 말이다. 신비주의란 알 수 없는 그 신비를 깨쳐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그답이 바로 깨달음, 즉 ..

단상 2025.04.22

얀테의 법칙

우연히 얀테의 법칙이라는 걸 접했다. 북유럽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좋은 단서다. 북유럽은 한때 자살률 높기로 유명했고 요즘은 높은 소득을 누리는 사회주의적 국가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복지가 잘 된 국가들이라고 안다.나도 빈곤선과 복지문제를 주제로 한 학부 졸업논문에서 뮈르달이라는 스웨덴 경제학자를 다룬 적 있다. 내 식으로 간단히 이해하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얀테의 법칙 1조가 그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요컨대 얀테의 법칙은 매우 선적(禅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여러 생명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아무런 가치판단이나 분별 없이 본다는 것은 (잘못하면 자살에 이를 수도 있는) '나 하나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라는 선가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생명이란 우주적 가치와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단상 2025.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