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목운

공지사항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2019.10.13 08:00 | Posted by 목운

며칠 전 문래역 근처에서 가졌던 고교동기 친목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10년 전쯤 일찍 은퇴하고 전원생활 하는 바람에 참석이 뜸했던 모임입니다. 이번 장모님 초상 때 대거 참석들 해주어 빚진 마음에 참석했습니다.

은퇴가 늦은 친구 가운데 교사 하던 친구는 작년에 퇴직했고, 교수 하는 친구는 내년에 퇴직을 합니다. 전문직 외에는 거의 다 은퇴해가는 나이입니다. 그러니 건강 얘기가 주(主)고, 관련해서 잔존 수명 얘기를 하게 됩니다. 한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임종에 대한 자세를 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6년 전 모든 게 실패한 것처럼 보여 죽고 싶었으나 전혀 준비가 안 되었음을 느낀 후로 '그때 죽은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게 살자, 어제 죽은 것보다 오늘 죽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언제나 지금 임종해도 괜찮다는 믿음을 굳히려면 정좌 또는 명상을 매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경우 실제로 좋은 임종을 위해서는 유교 내지 불교적 삶을 산 최근 몇 년이 기독교적 삶을 산 30여년보다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적 삶에서 반면교사로 얻은 지혜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교적 삶은 조선 시대는 안 그랬겠지만 제가 문헌으로 이해하고 공부한 한도에서는 죄의식을 심는 일이 없고 교회 같은 데 정기적 출석을 강요하지 않아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적 삶의 핵심은 대학-중용에 다 있습니다. 즉 천명에 따르고 명덕(明德)을 밝히는 게 요체이며 그것을 위해서 언제나 중(中)에 머물다가(중이 천하지대본이죠!) 일이 닥치면 화(和)를 실천하자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급적 매일 정좌(靜坐)를 실천해야 합니다. 정좌를 하다보면 결국 호흡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 요령은 용호비결이란 책에 잘 정리되어 있으나 그렇게 엄격하게 하지 않아도 그 어떤 건강비결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들은 바로는 몸 깊은 곳 노폐물을 빼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천만원 이상 투자들 했던데 혈관계보다 우리 건강에 더 밀접한 게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정좌 또는 명상은 오직 정신 집중과 올바른 생각과 그 실천을 위한 것이지만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건강의 유지, 증진에 대해서는 시중의 그 어떤 비책보다 우수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 제 몸이 증언해 줍니다. 저는 지금 친구들처럼 장복하는 약도 없고 최근에 한 번도 병원 진료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유전적 요인은 별도로 논하고요~

정좌에 덧붙일 수행공부는 성(誠)의 실천을 위한 신기독(愼其獨)과 그것의 연장이기도 한 “예(禮)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소위 에고로 번역할 수 있는 모든 정(情)을 끊어낼 때 명덕이 살아 숨쉬면서 중(中)에 맞는 삶을 살게 된다고 봅니다. 정을 끊어낸다 함은 모든 집착을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 수행의 핵심에 닿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0)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Comment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2019.09.25 11:42 | Posted by 목운

제 짧은 공부로 이해하자면 성리학의 원조를 주희로 본 것이 혼란과 정체의 원인이지 싶습니다. 그 절정은 송시열이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윤휴를 처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고 선생을 성리학 또는 신유학의 원조로 보면 저런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노력은 15~16세기의 왕양명에 이르러서 겨우 이루어졌습니다.

 

주희와 왕양명이 갈리는 가장 뚜렷하면서도 심오한 부분은 바로 격물치지의 해석입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식을 극진하게 하는 것을 '치지'로, 마음이 사물의 이치의 극진한 곳에 이르는 것을 '격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양명은 '치지'의 지를 지식이 아닌 양지로 보았습니다. (정은해, 유교 명상론, 440쪽 참조)" 그래서 양명은 '치양지'를 핵심 실천요강으로 하였는데 치양지에 이르기 위해 과거와 미래에 관한 모든 생각을 중단하는 것, 즉 불사불려(弗思弗慮)를 성취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복성서 2절을 보면 격물치지에 대해서 "물이란 모든 것을 말하고 격이란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 닥쳐올 때 마음을 맑게 하고 자명하게 판단하여 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지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같은 절에서 '치지재격물'을 설명하면서 주역의 "생각도 행함도 없이 고요해서 우주와 하나 된(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게 분명하더라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視聽昭昭而不起於見聞者) 일일히 살펴보지 않아도 저절로 천리에 부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격물치지에서 '지'가 양지라는 것을 확인해 주시는 분이 탄허스님입니다. 탄허스님은 "삼강령 팔조목 중에 치지(致知)의 '지'자가 근본인데 이것은 망상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일어나기 전 본래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탄허록, 80쪽)" 라고 합니다. 우리가 명상을 통하여 양지에 이른 상태를 중용은 중(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명상은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체득하여 보고 듣는 바에도 걸리지 않고 천명을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화(和)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 과정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양지란 우주 이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간 내면의 천성에 따른 본연의 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을 꿰뚫는 신령스런 영지(空寂靈知)이며(청원 무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없는', 404쪽)" 격물치지에서의 '지'가 바로 이 영지라고 알아들으면 격물치지를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 '지'는 오늘날 용어로는 '의식(consciousness)'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0)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Comment

공부의 네 단계

2019.09.19 07:32 | Posted by 목운

6년전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제 공부는 은퇴후 공부로서는 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공부는 어쨌든 경쟁사회에서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과거 관성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계속 설파하는 이 공부의 목표는 이 세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보다 몸을 벗은 뒤의 안전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목표인 공부입니다. 즉 "신의 <현존> 안에 있는 궁극적 의식과 앎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공부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부의 결과 의식이 진화하고 향상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이웃에게 유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하화중생이 동시에 구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과정에서 호킨스 님의 멸정복성(Dissolving the Ego, Realizing the Self)를 번역하는 도중 우연히 8~9세기 당나라 말기에 사셨던 이고 선생이 복성서(復性書)를 지으신 걸 알아 공부했습니다. 성대 김용남 박사를 통해서 이분이 바로 신유학(성리학)의 개창자임을 알았고 따라서 동서양 영성의 접점이 의외로 가깝고도 간단한 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각설하고 신유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왕양명의 실천에서 공부의 네 단계를 알려드리고 싶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네 단계라 함은 범부, 학인, 군자, 성현이 그것입니다. 범부는 인욕에 치우쳐 천리를 보존하지 못하는 무능의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을 돌보지 않는, 즉 무반성 상태의 사람입니다.

학인은 성찰을 통해 의식을 돌보긴 하지만 사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 군자에 대해서는 '바야흐로 사욕을 말끔히 쓸어낼 수 있어서 극복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팔짱을 끼고 앉아도 잘 다스려지는 때가 있게 된다'라고 양명은 전습록에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현의 경우는 천리를 선택하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 더 이상 반성이 필요없는 경지입니다(이상 유교 명상론, 506~507쪽). 이 경지야말로 공자께서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걸림이 없다'고 표현하신 완성의 경지입니다. 다만 제가 자주 언급했듯이 공부 과정에서 어느 때인 줄 모르게 공부의 동력이 은총에 달려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공부의 요령과 요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의 네 단계  (0) 2019.09.19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0) 2019.09.17
격물치지와 중화(中和)  (0) 2019.08.11
영적 독서와 명상  (0) 2019.08.04
당신의 공부는 진보하고 있습니까?  (0) 2019.08.02
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0) 2019.06.24

Comment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2019.09.17 07:24 | Posted by 목운

앞 글에 이어 글쓰기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강원국 님이 1,500여 개를 쓰고나서 자신감을 얻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5~6년 동안 7백여 개의 글을 썼으니 앞으로 7~8백개를 더 쓰고 '내 책 쓰기'에 도전할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는 바로 삶의 공부, 특히 유교적 수행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제 글쓰기도 수행의 이면이자 연장선상의 작업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일이 기법(skill)의 수련이라고 본 점에서 에카르트 님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같습니다. 채근담은 달사(達士)라고 했고 영어의 'skillful'에는 깨달은 자란 뜻도 있습니다. 이 일에는 매우 단순한 일의 엄청난 반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는 김연아와 조성진을 예로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좌와 성찰 또는 불가의 오행, 특히 지관문을 매일 양치하듯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술가와 스포츠맨이라면 금방 알아듣듯이 연습을 하는지 여부는 제삼자도 알지만 본인이 가장 먼저 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앞 글에서 변죽만 울렸지만 반성의식으로 꾸준히 공부하는 과정은 불가용어로 '점수'에 해당합니다. 끝없는 연습이 몸에 배어 본 게임에서 본인도 모르게 최고의 경지를 발휘하는 것은 '돈오'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유교전통에서 이것은 활연관통이라 합니다. 그런데 주희와 왕양명 모두 활연관통 이후에도 공부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사심을 말끔히 씻어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유교 명상론 56쪽). 이 점 또한 동서 영성에 공통하며 다만 서양이 은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뉴앙스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공부의 요령과 요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의 네 단계  (0) 2019.09.19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0) 2019.09.17
격물치지와 중화(中和)  (0) 2019.08.11
영적 독서와 명상  (0) 2019.08.04
당신의 공부는 진보하고 있습니까?  (0) 2019.08.02
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0) 2019.06.24

Comment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2019.09.15 07:37 | Posted by 목운

추석날 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 아내와 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세 받는 작가가 되는 포부를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아내는 주변 평이 좋으니 번역만 하지 말고 '내 글'을 쓰라는 주문입니다. 같은 권고는 친구한테도 들은 바 있습니다.

제 답은 아직 내 글 쓸 실력은 안 되고 당분간 시간 활용 겸 취미 생활로 수준 높은 책을 골라 번역하는 일을 더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가 예술이 되는 이유는 김연아나 조성진처럼 같은 훈련을 쉬지 않고 닦아서 그야말로 춤을 추는 경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마침 에카르트 님이 그의 '영성 지도(The Talks of Instruction)'에서 세상에서 떨어져 신에게 몰입하고 그 상태에서 세상일을 하는 경지에 가기 위해 글쓰기 훈련을 예로 든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이 일이 지난한 일이며 그야말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경지를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면 이미지도 필요없고 암기도 필요없이 자유롭게 저절로 쓰게 되는 경지가 온다고 합니다. 또 이것은 바이올린 연주자에게도 통하는 얘기라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일을 기술(skill)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중용의 '중'으로, 또 세상에 대한 집착없이 중의 정신으로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하는 것은 '화'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비약처럼 느끼실지 모르지만 이 점은 왕양명이 명상수행을 설명하길, 자기 의념을 알아차릴 필요없이, 즉 반성의식 없이 저절로 천리가 보존되는 성현의 경지까지 가기 위해, 반성의식을 써서 천리를 보존하는 군자의 경지를 넘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에 대응한다고 봅니다(정은해의 유교명상론, 504~508쪽).

요컨대 제 글쓰기는 제 수행공부의 결과이자 그림자가 되길 바라는 것이고 앞글에서 중과 화의 실천을 아주 간략히 보여드렸지만 그 실천에는 예술가 및 스포츠맨과 같은 훈련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절정에 이르러 저절로 '화(和)'가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 또는 크고작은 모든 일상사에서 신의 뜻이 이뤄지도록 수행하자는 게 제가 파악한 동서 영성의 공통점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후 삶과 임종 준비  (0) 2019.10.13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Comment

신유학의 정수

2019.09.13 10:52 | Posted by 목운

엊그제 아산병원에서 문상하면서 토론하기를 성리학의 영성은 기독교의 그것과 대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이 망한 이유는 중국이 망한 이유와 같습니다. 중국은 화약을 먼저 개발했고 서구보다 먼저 충분한 화력을 갖출 기술이 있었지만 제국주의적 야욕이 없었고 그 야욕을 종교로 포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부작용 때문에 그 근본정신을 부정하고 내버릴 수 없듯이 동양이 서양 제국주의에 일시적으로 패했다고 해서 성리학(=신유학)의 근본정신을 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벽의 천진암 그룹과 같은 그리스도적 성리학의 실천가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 페이스북 벗이신 분께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을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철저히 공부하여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이고 책 몇 권에 의지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사상을 위해 순교했다. 주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기독교 사상이, 사람이 하늘이라는 동학을 낳음으로써 전근대적 사유는 파탄되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때 어머니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역시 초등학생때부터 아버지 따라 조상 제사에 빠짐 없이 참석했습니다. 이제 몸의 DNA뿐 아니라 정신의 DNA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갈 즈음인데 기독교의 정수와 우리 사상인 신유학(과 동학)의 정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쉬운 현대말로 정리하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동학 쪽은 조예가 깊은 분이 여럿 계시고 제가 감당할 부분이 아닙니다. 오늘은 신유학의 정수 가운데 하나인 중화(中和)가 매우 알기 쉽지만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지(오늘날 '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르기도 하고 실천도 아니 하기에) 보이기 위해 호킨스 박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매일 깊은 명상 중에 신과 친교를 나누고 당신과 하나가 된 신의 사랑과 안내하심을 일상사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항구한 평화와 행복에 이를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중용의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에 대한 해설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물치지의 해석과 명상  (0) 2019.09.25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어떻게 살 것인가?  (0) 2019.08.22

Comment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2019.09.03 07:33 | Posted by 목운

저 책을 읽고 평소 제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물론 제 생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말씀드리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두 계명, 즉 신애와 인인애(이웃 사랑)의 실천방법을 잘 모릅니다. 제가 보고 겪은 바로는 인인애로써 신애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교회 잘 출석하고 말 잘 듣는 것으로 신애를 실천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정하려면 2천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학습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신비적 실천이라 함은 먼저 신애에서 만렙까지 가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세상이 요청하는 인인애를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 노선은 상구보리가 하화중생에 우선한다고 보는 불교적 방법과 화(和)를 실천하기 위해 정좌해서 허령지각과 먼저 친해져야 한다(中의 실천)는 유교적 방법과 실천적으로 동일합니다.

인상 깊게 하려고 만렙이란 말을 썼는데 요컨대 이거 하나 파면 이승과 다음 생 문제를 올바로 꿴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때 국영수, 심지어 영어 하나만 확실히 파도 우리나라에서 그럭저럭 많은 문제가 풀린다는 게 제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양승태, 한 사람만 봐도 압니다.

정답은 역시 '마음과 뜻과 정성(and/or 목숨, 힘)을 다해 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바탕에서 이웃 사랑의 지혜와 실천력을 구하지 않기에 수많은 구호단체와 종교단체의 타락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흉내내어 감히 모든 유교 경전을 요약하면 '윤집궐중'입니다. 여기서 중은 중용이 말하는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허령지각 또는 탄허스님 말씀대로 천리라 봅니다. 중용은 이 '중'이 '천하지대본'이라 합니다. 실천적으로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주희는 하다하다 궁하여 결국 '상제'를 끌어들였죠!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원고를 받으신 분은 아시게 되겠지만 신애의 실천 또는 윤집궐중의 실천은 바로 영적 독서(lectio divina)와 관조 또는 묵상(contemplation)을 쉬지 않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바오로 말씀의 취지입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하심(下心, letting go)이 있습니다. 이 비결만이 국영수 만렙추구의 한계를 돌파해 줄 것입니다.

※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원고 파일을 받아 보실 분은 메신저 기타 방법으로 이메일 알려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현의 경지, 군자의 경지  (0) 2019.09.15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어떻게 살 것인가?  (0) 2019.08.22
왜 신비주의인가?  (0) 2019.08.16

Comment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2019.08.28 07:22 | Posted by 목운

며칠 전 접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인용해 봅니다. "당신이 불완전성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뒤에도 당신은 전과 다름이 없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몸만 벗었을 뿐이다...

그저 죽음으로써 천사가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무엇이 되었든 이 다음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환생한다 하여도 똑같은 상태로 날 것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노력해야 한다. 세상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에 대한 부모의 기대와 소망, 자식에 대한 내 기대와 소망을 숙고해 봅니다. 아마도 그것은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가난다 님은 그것을 천사로 표현했다고 봅니다. 존귀함의 드러남이 옛날엔 귀족이었다면 요즘은 고관이나 부자쯤 되겠지요!

그것을 위해 거의 모든 부모는 좋은 스펙을 추구하며 가만히 보면 문과는 법조인, 이과는 의사입니다.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더군요. 하지만 맹자에 따르면 천작에 인작이 따라오게 해야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어지러운 것도 이것을 거꾸로 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면 천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고 언제까지 노력해야 합니까? 제가 볼 때 천작이라 함은 '지어지선'이며 다른 말로 하면 최고선에 이르기 위해 쉬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악스러운 우리들은 이것을 뒤로 미룹니다.

제가 은퇴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채근담이 말하는 무명무위지락(無名無位之樂)을 추구하게 되는데 명예도 지위도 없음의 즐거움이란 바로 안회의 즐거움이고 안회의 '일단사일표음'의 즐거움이란 빈한함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매일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이라는 깨우침이 듭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평생 번역하신 탄허스님은 좌우명을 '향상일로'로 하셨으리라고 보며 오직 향상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에 새겨진 운명이 끝없는 진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진화만이 존재의 전부요 진화가 바로 창조입니다.

어쩌면 '하화중생'도 내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불가피하게 이뤄지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삶이라면 자리(自利)가 이타(利他)요 꿀벌이 본의 아니게 식물의 수정을 돕듯이 외부경제를 낳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유학의 정수  (0) 2019.09.13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어떻게 살 것인가?  (0) 2019.08.22
왜 신비주의인가?  (0) 2019.08.16
교만의 치료약  (0) 2019.08.11

Comment

어떻게 살 것인가?

2019.08.22 07:52 | Posted by 목운

동아시아의 사상 또는 학문이란 결국 이곳에 살던 이들이 이승의 고통을 벗어나면서도 세상 경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추구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이곳에서 발흥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와 유교에 불교가 더해지면서 통합적인 답을 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답을 쉽게 풀면 '규칙적으로 정좌하여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고 거기서 자명하게 얻어지는 매 순간의 실천방안을 세상에 펼치자'쯤 되는데 이렇게 말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경전을 인용해서 풀면 어려워서 모르겠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짧은 공부지만 나름대로 근거를 밝혀가며 쓰는 이유는 동아시아 지성인이 수천년간 실천한 것이 같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분이라도 학우를 얻으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 큰 기여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비슷한 결론을 조금 바꾸어 써보겠습니다.

우리 삶에서 성공의 토대는 신인합일을 이루는 데 있으며 그러기 위해 실천적으로는 모든 일에서 최우선적으로 존재의 근원(또는 제1원인, 신 의식, 불성)을 만나야 합니다. 이 경지는 반드시 규칙적인 명상과 자명한 선택을 꾸준히 함(대승의 지관문)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한편 지관문을 포함한 오행(6바라밀)의 실천 동력 내지 인센티브는 외력이나 에고의 분발 기타 세상의 인센티브가 아니라 신 의식 쪽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어떤 벗님이 이것을 무한 반복하냐고 묻는데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에 있는 천국을 이곳에서부터 누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비결이라고 봅니다.

저는 유불선뿐 아니라 기독교 텍스트가 이 점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세부 사항과 표현방법은 무수히 다양하다고 봅니다. 특히 역경(주역)의 실천은 매 순간 변화하는 사물을 만날 때마다 신 의식께 묻고 청하며 자명한 선택을 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의식을 변화시키고 내 의식에서부터 새로운 창조를 꾀하는 노력이 바깥 현상을 바꿀 것입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번역 완료  (0) 2019.09.03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어떻게 살 것인가?  (0) 2019.08.22
왜 신비주의인가?  (0) 2019.08.16
교만의 치료약  (0) 2019.08.11
명상과 성성(聖性)의 추구  (0) 2019.07.31

Comment

왜 신비주의인가?

2019.08.16 16:58 | Posted by 목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삼교를 마치고 마지막 부분이자 의미심장한 부분을 인용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서 월시의 '고통 없이 고통받기'라는 말과 앤소니 드 멜로의 깨달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신비주의는 궁극적으로 당신이 죽기 전에 천국에 드는 기술일 뿐이다. 아니 더 적합하게 말하면 천국이 당신 안에서 지금 드러나도록 하는 기술이다. 신비주의는 당신의 죄나 아픔과 고통 또는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또 당신이 사는 세상의 부조리, 또 영원의 이쪽에서 계속 살아낼 세상의 부조리를 없애 주지도 않지만 신비주의는 이 모든 것을 바꿔준다.

신비주의에서 당신은 삶이 당신의 길에 던지는 모든 것에 대해 신이 개입된(God-infused) 선택과 응답을 하는 힘을 얻으며 그 일을 하는데 아주 건강한 아이들처럼 자의식이 전혀 없이 하게 된다. 신성에 참여하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그것을 단순하고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관조적 여정의 끝에서 찾으리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종착지는 계속 새로운 시작으로 펼쳐질 것이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작이 향상하는 즐거움  (0) 2019.08.28
어떻게 살 것인가?  (0) 2019.08.22
왜 신비주의인가?  (0) 2019.08.16
교만의 치료약  (0) 2019.08.11
명상과 성성(聖性)의 추구  (0) 2019.07.31
중을 잡아라(允執厥中)  (0) 2019.07.14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