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환상

윤집궐중의 실천

단상

제가 기회 있는 대로 종교와 언론을 비판하고 학교와 사회 탓을 하면서 그것들이 '되는(becoming)' 일에 정답을 찾아 실천하지 않고 유사품에 만족하기 때문에 답을 못찾는다는 요지의 글을 자주 썼습니다.

우리가 유교의 세례를 받아 의식 무의식에 문화 DNA를 간직하고 있으며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영향을 듬뿍 받았음에도 그것들이 세상일에서 득을 보는 데 그치도록 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그것들이 그저 지배 내지 통속(通俗)의 수단에 그침으로써(이데올로기로 기능함으로써) 뚜렷한 한계를 체험하다 못해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시사했지만 그 이유는 가르침을 끝까지 철저히 제대로 실천하는 이들이 극히 소수에 그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깨달은 정답은 이미 맹자 고자편에 있습니다. 인용하면, "옛사람은 천작을 닦아서 인작이 거기에 따르게 했지만 오늘날은 천작을 닦아 인작을 구하며 인작을 얻으면 천작을 버린다. 그것은 순서가 뒤집힌 것이어서 끝내 망할 뿐이다. (고자상)"

천작을 끝까지 닦는 일을 유교 체계 전체에서 찾되 그리스도교 정신에 딱 합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하지대본인 중을 잡고(允執厥中) 그 상태에서 모든 덕을 베풀 뿐 아니라 '제가평천하'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가 요약한 신애(神愛)와 인인애(隣人愛) 계명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집궐중의 실천 방법이 우리 쪽에서는 정좌 내지 좌선이고 서양에서는 정관(靜觀, contemplation)입니다. 이 경지에서 체험되는 것을 장자는 좌망(坐忘)이라 하여 결국 홀로 매일 앉아 있는 일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중용이 얘기하는 '신기독 수기중'도 바로 여기에서 도출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이 왜 꼭 필요한 일인지 알아서 실천하면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 - 이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종교도 위에 지적한 것처럼 통속의 도구에 그칠 뿐 이런 것을 중시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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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와 코카콜라

단상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고 언론이 자본의 장단에 춤추는 현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숭배집단을 내칠 때에도 있었던 일이 아닌가요? 활자매체가 자본의 이익에 맞추어 계속 허구를 지어낸다면, 영상매체는 계속 감각의 즐거움을 부추김으로써 사람들을 가시계에 묶어 놓습니다.

이런 현상을 언론학자 기틀린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했으니 즉 '미디어란 헐리우드와 코카콜라다!' 즉 눈을 홀려 물건 사도록 부추기면서 사람들을 땅에 단단히 묶어놓는 것이 미디어가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의식'이 본질이고 그 의식을 가시계에 비추어낸 것이 몸과 에고와 소위 문명이건만 미디어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끝없이 저항할 뿐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문명은 언제나 절멸 위기를 피하지 못하며 미디어는 오늘도 거짓을 밥먹듯 전파하며 삽니다. 몸바친 혁명으로 겉을 바꾸는 노력이 허망한 이유도 결과로 결과를 대적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체 게바라가 대단하다고 보지만 그에게서 위로와 평안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정신의 핵은 주희를 봉우리로 하는 송명이학(또는 신유학)이고 서구 정신의 핵은 에크하르트를 봉우리로 하는(물론 이견이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라고 봅니다. 전자는 불교와 도교를 흡수했고 후자는 그리스 철학(특히 산플라톤주의)을 흡수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먼저 내면으로 가서 '의식'이 주인임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혁명처럼 저항을 초래하기도 하고 꾸준하기가 어려워 수천년간 소수만이 끝까지 실천했습니다. 아침마다 황폐한 소식만 전하거나 먹방과 돌아다닐 궁리에 불지르는 영상매체, 한숨 돌리려 클릭하면 이간질과 시기심을 북돋우며 거짓말의 독소만 내뿜는 활자매체를 멀리하려 해도 참 어렵다는 하나마나 한 소릴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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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靜坐), 좌선(坐禪), 정관(靜觀)

단상

제 아이들과 조카들에게 기회 닿는 대로 '너 자신이 잘 되는 것이 효도다', '네 상태가 최선일 때 효도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해줍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해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식이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 효도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모의 바람은 자식 '잘 되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잘 되는 일을 학교와 사회에 맡겨버림으로써 조금씩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배워 깨닫겠지' 하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하는 이유는 그 기준을 가시적인 데서 찾아버릇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회입니다. 소위 언론, 요즈음은 주로 티브이와 유튜브에 맡기는 셈입니다. 서양식으로는 내면에서 신을 찾아 스스로 신이 되는 것, 우리 식으로는 천하지대본인 중(中)에 머무르는 일을 과반수 인구가 실천했다면 매국도 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사법농단도 검난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경전을 찾아 읽었지만 지식으로 안 것은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정좌(좌선 또는 정관)하지 않으면 바깥 유혹이 크고, 에고란 전자기의 인력과 척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할 뿐입니다. 세상에 있되 세상 사람이 아닌 삶(신약성서), 세간을 벗어난 자유인(선가귀감), 종심소욕불유구(논어)에 도달하지 않으면 다람쥐 쳇바퀴를 맴돌 뿐입니다.

에고는 옳고 그름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을 초탈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자신을 발견하고 방향을 180도 바꾸어 돌아갈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은 돈과 권력으로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귀향할 줄 모릅니다. 무조건 시간을 내서 홀로 고요히 있는 연습을 해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은총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 일은 에고 드라이브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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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2014년 메시지 2

그리스도의 편지 /논설과 메시지

그러면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우선 너희 모두 각자가 명상하면서 신 의식에게 가야 한다. 

 

명상이란 말로 나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너희에게서 너희 삶을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를 비울 것을 의미한다. 너희 마음에서 우주의 방대함으로 뻗어나가 너희를 존재케 한 거기에 접속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감고 앞 이마 꼭대기로 들어올려라. 세상이 마땅히 취할 모습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고무되기 위하여 신 의식으로 채워지기를 구하며 너희 의지를 포기하라. 신 의식과 접속하는 동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명상을 마치자마자 영성 일기에 그 아이디어를 써 내려가라. 누구나 그 영성 일기를 써야 한다.

 

모든 사람과 무조건적 사랑을 나누는 삶의 실상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하라.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네 삶은 어떤 모습일까? 네 안에서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가?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동안 너희 마음에 그런 공간을 만들어라. 무조건적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동료 집단을 만들어라. 그들에게 무엇을 배우는가? 네 현재 의식에 관해 발견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라.

 

너희는 이 순간 두 차원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너희는 대혼란과 불쾌한 의식으로 된 세계에 있다. 동시에 마음과 감정과 몸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대단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신 의식의 보호와 복락 안에 있기를 가능한 한 꾸준히 선택하고 그려봐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삶에서 불쾌한 의식의 힘을 만나게 될 때 너희 인간성, 즉 에고가 너희를 끌고 들어가는 범죄자들의 해침, 불쾌함 및 반대를 무시하고 너희 삶에서 유일한 실체로서 신 의식을 깨닫도록 도와 달라고 신 의식께 계속해서 빌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과오에 빠지는 사람의 복락과 행복을 배려하고 보살피면서 용서의 길로 들어가 머물게 될 것이다.

 

이렇게 비반동적이고 긍정적인 방법으로 살고자 하는 초기에 (이 경우 의식적으로 에고 반발 상태를 거부하고 긍정적인 둘째 상태로 들어가야 함)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옛 감정을 내려 놓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주 고통스럽고 성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끈기 있게 또 즐거이 견뎌낸다면 언젠가 그 순간 너희의 균형을 깨는 누구에게든지 적극적인 기쁨, 용서, 이해 및 돌보는 관심 상태로 옮겨 갈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쉬면서 이 땅 위에 온전한 영역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노력하면 이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에 부딪쳐서도 네 마음에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 때마다 환경 속에 신적 사랑이 있는 작은 오아시스를 세운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어두움에 대응하려고 이 땅에서 노력할수록 어두움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광은 없을 것이기에 지상에 하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열을 지어 늘어나고 넘쳐나서 마침내 신성의 소리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을 밝혀주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들이 지상에 자기만의 신적 사랑의 오아시스를 창조하는 동안 지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런 오아시스들은 인간 사회에 오래 바라던 혜택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로 인해서 인간들은 지난 전쟁 이래 계속 만들어진 과오를 시정하기 시작한다. 공공 서비스는 개선되기 시작할 것인데, 즉 인류가 동료 인간을 자애로운 배려와 동정심을 가지고 대우하도록 보장할, 행동을 다스릴 새로운 윤리를 채택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번영이 다시 회복되고 빈곤은 완화되며 사람들 마음과 심장 속에서 자애로운 반응이 새로 생겨 그 어느때보다 건강이 증진될 것이다. 그때 받을 수혜는 현재 순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고도의 의식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 너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이 너희가 지상에 하늘나라를 건설할 노하우다.

 

딱 한 마디 경고를 하겠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인간적 사고만이 세상의 '물질'에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게 아니다. 각 사람의 '나'는 혼이 아니다. 혼은 에고 안에 숨어 있다.

 

그리스도의 편지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다른 영적 지도자도 따랐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너희 에고는 너희가 마음 속으로 초월적 신 의식을 끌어와서 점차 정신 과정을 영적으로 만들 때까지 너희 의식의 통제를 받는다.

 

다음을 주목하라.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내 메시지의 특정 측면만을 받아들인 스승들 때문에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말해야 하겠다. 

 

죽에 물을 부으면 죽은 부드러워지지만 물을 흡수해서 죽의 상태를 유지한다. 영적 영감이 수용적인 마음에 흘러들어가도 같은 일이 생긴다. 이제 영적 영감이 인간 본성이 된다. 그 영감이 들어가서 그 '진리'에 불을 붙여 아주 강한 깨달음이 들어 한 사람의 믿음이 즉각 바뀌는 일은 매우 희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궁극의 진리에 대한 다양한 버전을 가르치는 것이다. 결정적 버전은 자기들 존재를 신성에게서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신성이라고 들을 때 생긴다.

 

진실을 말하면 영감 받은 의식을 조금씩 마음에 끌어들여 아주 조금씩 인간 에고의 어두움이 분해되어 신적 영감으로 비추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드디어 의식이 온전히 밝아져 에고는 정복된다. 이런 일이 한 사람에게 일어나면 그 사람은 '궁극의 의식' 안에 온전히 '우주적'이 되어 더 이상 소아의 욕망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분리된 무엇이 되어 오직 신 의식의 환희와 지복만을 체험하고 타인의 복락을 자애롭게 증진시키며 살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의식이다.

 

이 때문에 내가 내려와서 너희를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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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2014년 메시지 1

그리스도의 편지 /논설과 메시지

더 높은 이상

 

너희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더 높은 이상이 필요하다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더 높은 이상을 어떻게 성취하고 어떨게 드러낼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이 약속을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말을 마음에 새기는 사람을 많이 보았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 구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더 높은 이상을 창조하려는 이러한 요청의 결과 아주 큰 사랑이 드러나서 이제 너희들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하도록 내가 다시 오는 게 긴요하다.

 

너희가 역사책의 도움과 또 여러나라 및 여러 세기에 걸친 유명 작가 및 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구상에서 지난 50만 년에 걸친 각 인간의 발전을 돌아보면 사상과 생활 양식의 변화는 없을 뿐 아니라 그 변화란 그저 아주 앞선 사상가의 고도로 지성적인 마음에 생긴 변화하는 의식의 청사진 때문에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대중에게 제시했고 대중은 그것을 존경스럽게 흡수한 것처럼 새로운 사상은 서민들의 마음에서 다른 모습을 취했다. 그 후에 점차적으로 이들 새로운 사상은 조금 새로운 행동 양식으로 드러났고 또 한 가지 모습이나 다른 모습으로 일반적으로 국민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어떤 변화든 누군가가 대중의 감성에 강하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받아들이게 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결과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그저 상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맞다. 하지만 새로운 인식은 상식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배척당할 것이다.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 즉 1845~1919년을 돌아보면 의회와 귀족 계급 및 상층 계급이 부과한 매우 전통적 규제가 삶을 엄격히 지배했음을 알 것이다. 이 모든 법과 규칙은 비교적 거칠게 살던 세대가 만들었으나 영국 사상가들의 생각이 진보함에 따라 점차 완화되고 세련되었다. 이들 사상가들의 이상에 따른 결과 문명의 다양한 부속물이 채택되었는데 예를 들면 하수시설, 포장도로 및 불우한 이들의 피난소가 있으며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풍습이 매우 합리화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그들이 죄를 지으면 받을 천벌과 지옥불에 관해 설교자들이 말해야 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였다. 나라 전체가 자발적으로 취한 그런 기강의 결과로 사람들이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런 상황은 인간의 생각과 의식의 숨겨지고 파괴적인 요소가 전쟁에서 분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모든 강력한 감정적 생각은 결국엔 드러난다. 갈등은 젊은이들에게 숨겨져 있던 공격적 성향을 드러낼 기회를 가져왔다. 그것이 남성들과 소년들이 1914년 징집에 몰려든 이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대중의 의식이 다시 바뀌었는데 그것은 전쟁 중에 만연했던 인간의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보복적 충동이 드러남으로써 초래된 고통과 번민을 체험한 때문이었다. 영국인들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니라 즐거움을 원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전쟁 전처럼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39~1945년의 전쟁은 사회 자체를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 압제받던 대중이 전쟁에서 삼군에 들어가 그때까지 몰랐던 정보와 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다. 그 결과 계급 장벽이 크게 허물어졌고 이전에 기본권 보장을 못 받던 이들이 교육을 더 받고 전문직종으로 올라갈 기회가 생겼다.

 

슬프게도 이러한 기회가 생긴 만큼 빈곤한 가정에서 어릴 때 물려받은 의식은 생명을 주는 사고로 교체되지 않았다. 삶이 불공정하고 부자에 의해 고통받고 배척되었다는 과거의 느낌이 남아서 엄청나게 큰 부정적 반응을 일으켰다. 즉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 기회가 높은 수준의 영적 당당함과 성공과 성취, 그리고 행복에 대한 믿음을 낳지 못하고 사람들 마음에 아주 부정적이고 생명을 잠식하는 의식이 있어서 인간의 일반적 복리에 기여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기술적 지식 및 발견과 함께 전후에 세워졌어야 할 많은 복지와 기쁨을 파괴했다. 

 

그러나 오락과 천박함을 좇느라 고귀한 삶의 원칙은 해이해졌고 점차 버려져 해이해진 삶의 악영향이 대중의 의식을 물들였다. 그들은 정서의 급격한 변화의 결과로 고도의 비참함과 절망을 체험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다시 공격과 증오라는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부정적 반응이라는 충동을 지닌 사람들은 성적 남용을 통해서 고통을 덜어보려고 했다. 이런 일은 미디어와 영화, 티브이와 라디오에서 들리는 것과 광고하는 것을 보고 들음으로써 커져서 많이 들을수록, 그것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고 극심해져서 서로 간에 더욱 지독해지는 범죄로 이어졌다.

 

그리고 여기가 너희들이 현재 서 있는 곳이다. 사람들 마음에서 진행되고 이 땅위에 행동과 체험으로 볼 수 있게 된 것들에 더해서 이 땅의 '물질(matter)'에 가하는 그러한 궤도를 벗어난 생각과 행동에서 나오는 엄청나게 부정적인 결과들이 (첫 번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고 나를 믿지 못하였겠지만 내가 사막에 있었을 때 내 의식 변화가 내 주위 티끌의 진동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강화되거나 약화되면서 그 외관은 아주 미미하게 바뀌어 보통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날씨는 또 어떤가? 의식이 날씨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 있다.

 

너희 삶의 모든 것이 의식이다. 이것은 의식이고 저것은 고체라고 자기 혼자만 생각할 수는 없다.

 

모든 존재가 예외 없이 실제 가시화된 의식이며 인간들의 마음이 매 순간 그것을 창조하고 있다. 

 

들을 태세가 된 이들에게 왜 내가 왔는지 이제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아주 아주 많은 영광된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변화를 가져오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고도의 의식을 창조하기 시작하라는 내 요청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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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유럽의 지적 전통

에크하르트 입문

이 복잡한 인물을 찬찬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 지적 생활의 진화에서 그가 결정적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클레멘트 4세가 1267년에 도미니코회로 하여금 여성 종교 공동체에 대한 사목을 맡도록 했는데 그때 비로소 설교 목적으로 독일어를 쓰게 된 것이며 그 이전에 모든 지적 사상은 라틴어로 쓰였다. 도미니코회 첫 세대의 업적이 무엇이었든(그것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차세대에 속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에서 유럽의 평민 언어로 된 수준 높은 철학적 신학적 논의의 상당량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초유의 환경으로 기록될 텐데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의 뛰어난 철학과 신학 전통의 비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참말로 에크하르트에게는, 수 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어지는 뚜렷히 독일적인 철학적 사상을 가진 학파들을 가리키는 많은 것들이 있다. 에크하르트와 독일 도미니코회 학파를 특징짓는 지성과 인간 정신의 탁월함은, 19세기 독일 관념론의 예표이며,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자기 생각을 전하기 위해 의지했던 언어의 수사학적 재료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나 마틴 하이테커와 같은 현대 독일 사상가를 연상시킨다.

 

둘째로 에크하르트 신학은 그리스 사상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합을 성취하려는 중세의 위대한 노력의 하나로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토머스 아퀴나스의 경우 그리스 전통을 전한 사람은 새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에크하르트의 경우 프로클루스는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물려받은 철학적 유산을 제공한 것은 신플라톤주의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로클루스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안에서 신플라톤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이 우연히 일치하는 일은 더더구나 선구적 현대 사상가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다. 현대의 이러한 반응으로 해서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에크하르트 작품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피조물의 허무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동양종교 및 자신의 비관주의와의 유사점을 본 한편 헤겔은 철학과 종교의 종합을 제기한 에크하르트의 그러한 점에 흥미를 느꼈다. 20세기에 이러한 관심은 에른스트 블로흐에서 마틴 하이데거(그는 에크하르트의 '초탈'이란 말을 광범위하고도 표나게 사용했다)와 자크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철학계가 존재, 영혼 및 부정성과 같은 주제를 에크하르트가 다룬 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면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그에게서 초월 체험에 대한 감각에 기반한 종교의 강력한 변호를 발견했다. 그는 또 신학 용어의 부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던 것으로 여겨져 신선하고도 도전적인 방법으로 고전 종교의 주제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도든 아니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은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에서 '언어를 뛰어 넘는 신'이라고 하는 아주 낯선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한 스승의 말을 듣기 위해 중세 독일의 교회와 수도원에 모였던 사람들을 한때 감동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스타일의 따사로움, 심오한 사고방식 및 영적 비전을 발견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방법론(2)

에크하르트 입문

에크하르트 양식의 표현에서 더 나간 요소는 '이상적' 입지에서 이야기하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이미 신과 합일한다면 '진실일'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다. 그가 언급한 대로 '신의 안목'에서 보고 그것이 청중의 독자적 실체인 듯이(강론 11)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의도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강론 22)와 같은 강론은 그런 말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청중들에게 그들이 창조되기 전처럼 되라고 촉구한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이도록 의도한 게 아니라 청자들 앞에서 그들 본성의 초월적 가능성을 취하도록 한 시도이며 그런 것들은 또 에크하르트 자신이 한 때 '강조해서 말하기'로 인정한 것에 속한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신을 향한 돌파는 지식의 돌파다. 낮은 형태의 지식은 영혼에게서 신을 흐리게 하고 영혼을 그 초월적 본성에서 흐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문제로 돌아오는데 그것은 (에크하르트가 아는 대로) 문제의 근본적 부분이다. 언어는 시공상 유한성을 지닌 채 우리에게 세상을 매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에게 사용될 때 신을 대상으로 만들고 그 창조된 바 없는 본성에 대한 부적절한 개념과 이미지로 신을 덮음으로써 방해가 된다. 그러나 언어가 장애물이라면 그것은 또 역설적으로 구원의 장소이기도 한다. 언어를 정화하여 그 가장 추상적이고 내적인 형태로 만들어 자유분방하게 신에 대해 비유적인 언어를 씀으로써 에크하르트는 그에게 있어 신과 하나인 초월적 지식으로 돌파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신은 (무한히)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아는 한편 에크하르트는 또 진실되게 언어의 파괴적인 비평을 통해서 신을 참되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참말로 이것은 '언어가 말씀으로부터 온다'라는 에크하르트의 말로 요약된다. 이 공식은 또 에크하르트가 '왜' 언어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지 말해준다. 지성처럼 언어는 '사물'과 감각으로 된, 유한하고 조잡하고 다수인 세상에 영원히 반대되는 '말씀'과 '모상'으로 된 '영적이고' '마음과 관련되고' '하나인'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후자의 실체는 추상적이고 신적인데, 삼위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인 '말씀' 안에서, 즉 인간 지성이 창조된 바의 '모상'과 거기에서 '말씀이 오는' 그 모상 안에서 확인된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표면이 때때로 아무리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주된 구조는 놀랍도록 일관성 있다. 그것들은 바로 한편은 신적인 일자이고 다른 한편은 신의 자기 복제(탄생, 모상)다. 신플라톤주의에서 대부분 가져온 전자와 성서 전통에서 나온 후자를 보다 진화한 윈칙으로 쓸 수 있는데 바로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신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가까이 있다는 것, 즉 위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에크하르트 사상이 나아가는 곳은 바로 이 두 극단 사이이며 함께 변증을 이루는 것도 이 두가지인데 그 자신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변증의 효과는 에크하르트가 논하는 모든 것 안에서 특별한 추진력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때때로 에크하르트가 가르치는 내용을 형성하는 개념과 생각의 유형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가르침들이 이들 두 기초적이고 상호 밀접한 원칙 가운데 한 가지 목적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방법론(1)

에크하르트 입문

여기 수록된 에크하르트 작품은 학자로서라기보다 설교가로서의 그의 활동을 보여준다. 도미니코회는 수도자 설교회로도 알려져 있지만 설교의 역할에 대해 크게 강조하는 복음적 수도회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관행을 '사람들에게 명상의 열매를 전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입장은 이러한 복음 선포의 전통 안에 있는 것이며 그의 철학적 배경은 자신의 신비적 환시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일에 크게 기여한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근본적 구조를 형성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요소(대담하게 도전적인 철학-신학 및 초월적 의식 상태에 대한 개인적 영감)가 우연히 합치한 데 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언어 사용을 촉발한 것은 이 두 요소의 상호작용이다. 주로 독일어 강론에서 그는 그 자신만의 지식과 체험에 적응하려는 청중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수사학적 영상언어와 급진적 언어전략을 구사한다. 모순 가득하고 또 풍성한, 형이상학적 드라마 및 과장법이 가득한 강론에 수사학적 표면을 입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과거에 때때로 배운 사람들은 에크하르트를 혼란스런 사상가로 생각하고 덜 배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심하게 신비적인 종교를 설파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러한 데 기인하다.

 

한 평자는 에크하르트가 진리를 찾는 사상가라기보다 진리를 알기 쉽게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참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조직 신학자 가운데 가장 비조직적인 사람이게 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 선포자로서 가지는 요소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 체계를 부여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중세에 관한 위대한 학자인 에티엔 질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자기만의 확신으로 에크하르트를 하나의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렇게 했을 때의 문제는 그것이 그 무엇에 못지 않게 진정성 있는 텍스트에 기반했더라도 아주 쉽사리 전혀 다른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에크하르트가 보여주려 노력하는 바로 그 진리란 정의상 체계화를 불허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엔 쓸모없는 일이 된다. 에크하르트가 청중의 마음에 자라나길 바랐던 일 가운데 드디어 신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는 안이한 느낌이 드는 일은 가장 아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가장 큰 과오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강론 28).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은 조직적 절차를 뒤집고 청중의 마음 안에서 참으로 초월적 지식의 가능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사용한 다양한 전략에 집중된 것이다.

 

그럼에도 에크하르트가 사용한 모순되고 부정확하고 비체계적인 특정 방법들이 어느정도 체계화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경향은 신에 대한 신학을 제시할 때 보이는 모순이다. 이것은 주로 라틴어 작품에 해당하는데 거기에서 신은 '존재(being)', '벗겨진, 노출된 존재', '존재의 순수성', '일자성' 또 '지성'이나 '이해(앎)' 등 여러가지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강론 W67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장 높은 천사가 날벌레보다 높은 것처럼' 존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종합컨대 그러한 변형들은 신이란 말로 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그토록 강하게 되새기는 청자의 마음에, 시기상조가 될 수 있는 자기만족을 조금이라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에크하르트는 마치 언어의 그물을 벗어나기 위한 것처럼 '영혼의 근저'에 관한 그 모든 비유를 잔뜩 내어놓을 때의 독일어 강론에서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독일어 강론에서 그에게 다양한 이미지와 신학적 개념을 제시하는 다양한 성서 구절에 대응한다는 사실에서 부분적으로 발생하는 다른 종류의 '혼란'도 있다. 그는 이러한 문구를 자신만의 사고 방식에 맞추며 그렇게 할 때 종종 다른 곳에서 한 말과 쉽게 모순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과의 합일이 사랑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하고(강론 W72),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 하기도 한다(강론W77). 영혼 안에서의 신의 탄생에 대해 말할 때도 그것이 지성이라고도 하고(강론 23) 지성이 아니라고도 하며(강론 W68), 한 강론(W68)에서는 은총과 같다고도 하고 다른 강론(W41)에서는 같지 않다고도 한다. 그러한 부정확성은 에크하르트가 신학적 개념과 이미지를 얼마나 두리뭉실하게 쓰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영혼 안에서 신의 탄생'이나 심지어 '영혼의 근저나 불꽃' 같은 중심이 되는 묘사들도 계산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비유'로 작용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세한 논의라기보다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려는 표현 수단인 것이다.  

노후대책과 좌탈입망

단상

고교 졸업한 지 반세기가 다가오니 친구들 만나면 주체하기 어려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과 간접적 표현이나마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까 하는 게 공통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정치 얘기와 자녀 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역시 친구들과 적당히 즐기기엔 산행과 당구 게임만한 게 없지 싶습니다(제가 골프 칠 만한 클래스가 아니라서... 하긴 어제 어울린 친구 하나는 호주 시민권자인데 거기선 골프가 그냥 대중적인 놀이라고 합니다). 

오늘 얘깃거리로서 더 중요한 것은 아직은 부모님 가운데 한 분 정도는 계시는지라 곡기 끊는 일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저는 제가 많이 생각하는 일이라 우리는 '좌탈입망(坐脫立亡)' 할 수 있게 매일 준비해야 한다고 했더니 수긍하는 듯했습니다. 그 노하우에 대해서는 이곳에 아주 여러번 썼는데 매일 정좌(靜坐)하고 경전 독서를 함으로써 멸정복성(극기복례와 같다고 봅니다)을 이루고 몸이 나라는 고정관념을 없앨 때 대자대비 상태(무조건적 사랑의 상태)가 된다고 봅니다.

우리도 동서양 고승들처럼 가고 싶은 날 정해서 '안녕' 하고 갈 수 있도록 공부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 가운데 제대로 된 선비는 모두 '반일 독서, 반일 정좌'를 실천했고 그 증거로 우리가 문화적 DNA로서 책상다리를 물려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이삼년 이상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란 어렵고 복잡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좌와 독서를 매일 하는 분은 신비주의적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면 우리는 비로소 신 의식(궁극의 실체 또는 순수 의식)이 지배하는 상태가 되어 살 때나 죽을 때나 두려움 없이 끝없는 진화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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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 5

에크하르트 입문

초탈

 

에크하르트에 있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수렴은 '초탈'의 개념에서 가장 뚜렷이 보인다. 이 영어단어는 중세 고급 독일어인 떼어냄(abgescheidenheit, 또는 gelazenheit)의 번역인데 세상에 있는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깨어난 영혼이 자유롭게 된 것을 뜻한다. 물론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는 인간이 영적 삶에서 진보하기 위해서 세속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고 언제나 강조했지만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뚜렷한 것은 이 도덕적 해방이 얼마만큼의  마음의 해방으로 여겨졌는가 하는 것이다. '초탈'은 욕망을 통한 사물에 대한 육체적 애착에서의 자유와 동시에 인지적 해방을 뜻한다. 즉 마음을 제약하고 그것이 그만의 초월 가능성에서 떨어지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물질적인 것의 영상에서 해방되는 것을 뚯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전통에 독특한 것이 아님에도(예를 들면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에 그에 버금가는 것이 있음) 그렇게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초탈한 사람'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 것이 아닌 사람이다(요한 17:16 참조). '신의 탄생'은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의 '본질에 대한 앎'은 신으로 가득하여 세상과 함께하지 않는다. 그 인간이 이제 그 안에서 관여하는 바의 영적이고 신적인 실상의 형이상학적 기조가 일자성이기 때문에 이 상태의 도덕적 드러남은 박애의 실천인데 즉 다른 사람을 자신인 것처럼 대하게 된다(레위기 19:18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복지를 돌보는 그만큼 다른 사람의 복지를 돌보게 되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겸손의 정신 안에 간직될 것이다. 참으로 초탈과 크게 연관된 모든 덕성 가운데 겸손은 가장 기본적이다. 매우 수사적인 명민함을 보이는 한 구절에서 에크하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의 '겸손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촉구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가장 낮은' 부분이지만 동시에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신은 거기에 계시면서 우리를 고양시키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핵심이기도 하기에 우리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다(강론 W 46).

 

초탈이 드러나는 두 번째 모습은 우리 안에서 신의 탄생의 결과로서 고통과 통증에 영향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발언은, 고통을 체험한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신의 탄생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거나 신의 의지에 전반적으로 순응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친구가 살아 있는지 여부'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말할 때처럼 이상적이고 수사적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구절은 강론 21(여기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를 정확히 수정하는 것 같다)에서처럼 다른 것들과 더불어서 읽어야 한다. 우리는 뒤에서 에크하르트가 청중 앞에서 취하는 관점의 수사학적 방법을 거론할 것인데 그가 말하는 관점이란, 신에게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현재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잠재적이고 궁극적으로 신과 결합된 상태에서 나온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영혼의 '근저'나 '불꽃'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교의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모상에 관한 전통적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있는 모상을 통한 하나의 탐구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리고 '영혼 안의 신의 탄생'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은총교리와 비슷한 설명이라면 '초탈'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덕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상깊은 해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초탈한 사람'은 자애롭고 겸손하며 평온하고 지혜로우며 전적으로 신에게 사로잡힐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지성에 대해 에크하르트가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덕스런 영혼이란 '능력의 다수성'에서 단일한 근저로 철수해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그는 덕의 실천에 주된 장애물인 소아(小我)를 잃어버리고 지성의 핵심과 하나로 된다. 에크하르트 체계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덕스런 삶의 형이상학적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 즉 깨달은 또는 초탈한 자아 안에서 구분이 없는 상태다.

 

덕을 실존적인 면과 지성적인 면 모두에서 내적 상태로 보는 것의 주된 결과는 헌신적 과업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다. 에크하르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경견성을 매우 강조하는 시대를 살았고 그가 밀접하게 관련된 특별한 환경, 즉 여성들의 종교 공동체라는 환경은 이러한 추세를 아주 크게 반영했다. 그런 공동체의 기록에 따르면 14세기 종교적 여성들은 종종 영적 성취의 일부로서 극심한 금욕생활을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세 후기 여성들의 커다란 영적, 문학적 성취를 부인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때로 취한 극단적 금욕 관행이 그 시대를 지배한 여성 혐오와 가부장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신적 과업이 당대에 광범위한 영적 관습에 대한 미묘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과 관련해서 에크하르트가 내면성과 내적 '지향'에 대해 되풀이해서 강하게 촉구했다는 것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는 종교 생활 안에서 헌신적 수행 원칙을 (2세기 후에 몇몇 개혁가들이 했었던 것처럼) 그 자체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개인적이고 내적인 신과의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 그런 것들을 상대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현명하게 환기시키듯이 '신을 꼭 한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 취하는 자는 신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보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다'(강론 19). 

 

주) 위 강론 번호는 펭귄판 기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