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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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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내 초기 제자들과 안티옥 수임 이후의 바울이 유대인들을 최대한 한데 뭉치게 하고 이방의 개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종교다... 너희 영적 발전은 오로지 존재의 법칙과 <너희를 존재하게 한 그것>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인식과 이해로부터만 일어날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의 영적 근원을 알지 못함으로 해서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고 인간 의식을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온갖 고난을 낳는 근원인 지상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희가 배운, 혹은 전통이 전해준 그릇된 믿음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실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쌓을 수 있도록 <존재의 진실>을 이해가능한 현대 언어로 너희에게 전하기 위해 <내 그리스도 의식을 온통 쏟아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편지, 270~271쪽)

-- 저처럼 소년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신 분들은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 영향력이 압도적이어서 오히려 종교로 인한 깊은 고난과 좌절의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위에 써 있는 대로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초기 교회 다음엔 로마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 이후 로마제국 통치의 하위 수단, 즉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위에 써 있는 대로 '편지'의 기본 태도는 과학적입니다. 인류 고통의 원인인 전쟁(기록된 역사의 약 93% 이상이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이 없었을 때는 페스트와 같은 전쟁에 버금가는 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고 영적 발전을 꾀함으로써 모든 창조의 근원인 집단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매우 합리적인 하화중생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는 방법

2019.06.14 07:40 | Posted by 목운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원한다(wanting)'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원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현재 결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당장 이뤄지지 않습니다. 즉 현재 이뤄지지 않고 미래 어느 시점에 막연히 이뤄지기를 현재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는 상태가 됩니다. 대부분 우리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대개는 믿는다고 기도합니다. 물론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했으니 이것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아는(knowing) 것입니다. 아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며 그보다 조금 못한 것으로 내 체험을 종합해보니 마치 법칙처럼 확실하더라고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한국인이 되면 나는 한국에 대해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뜻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방법은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신처럼 창조자가 됩니다. 신이 아는 것을 모두 압니다.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신을 아는 것입니다. 신처럼 생각하고 신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들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는 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있고 신처럼 창조할 때 신적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뜻하는 것을 이루는 차선책으로는 과거를 돌아볼 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이뤄졌다는 것을 체험상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모든 필요가 채워지리라는 것을 그냥 아는 것입니다. 제 경우 여기에 해당하면서 신이 되는 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신비주의가 신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일에 몸바친 사람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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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글은 매일 명상을 위해 바치는 기도와 지상 천국 회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보면 (1)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2) 치유와 해결을 필요로 하는 모든 치유와 문제 해결이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이미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아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는 환갑 넘는 삶을 살면서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채워졌음'을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채워진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다음에 지금 순간까지 적절한 때에 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필요한 치유가 일어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를 잘 해서 내가 이미 신 의식의 일부임을 믿을 필요가 없이, 마치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두말할 필요없이 아는 것처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같은 성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신인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랑 자체가 되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명상 기도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궁극 목적은 당신을 표현하는 것임을 아나이다"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실천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일거수일투족이 신의 표현이 되도록 사는 것이 바로 인간 삶의 참 목표임을 뼛속 깊이 새기기 위해 매일 정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공부입니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

2019.06.05 07:33 | Posted by 목운

우선 명상기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당신은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제 가장 숭고한 영감이십니다." 다음에 세부규칙 해설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신 의식과 결합함으로써 치유와 해답을 구하는 모든 문제가 적절히 치유되고 해결될 것임을 안다."

매일 읽고 기도를 바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기도 지향이 오직 신 의식과 합치하고자 하는 데 있고 또 신 의식에 완전한 신뢰가 있다면 따로 구할 게 있습니까? 부자의 정의를 제대로 내린다면, 즉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자'가 부자라고 본다면 우리는 믿는 바대로 이미 부자입니다.

다음에 또 다시 신 의식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걱정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치유와 해답을 구하는 모든 문제가 적절히 치유되고 해결될 것임을 아는데'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며 왜 잠을 잘 못 이룹니까? 그리스도 말씀대로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온 마음과 뜻과 목숨을 바쳐 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기존 교회에 의지하는 일이 매우 효과가 없고 간혹 속임수에 휩쓸린다는 자각이 있는 분은 탈교회-탈종교를 추구한다고 봅니다. 루터가 세 가지 '만', 즉 성경, 은총, 믿음만을 주장한 것은 기존 교회가 심하게 부패했을 뿐 아니라 길을 잃고 아무런 효험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정당한 기존 교회는 오늘날 다시 형태만 다른 교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서 보다 효과적으로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신비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는 것이 바른 판단인데 자기네 교회만이 그리스도 신비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입니다.

수행의 기초로서의 독서

2019.06.04 04:30 | Posted by 목운

오늘은 제가 번역중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우리가 잘 모르거나 간과하는 사실을 하나 소개합니다. 일단 옮깁니다. "그리스도교적 명상이나 관상적 기도를 하고 싶다면 독서(lectio)로 시작하시라. 독서는 신께서 택하신 곳으로 당신을 이끄시도록 당신을 열어준다. 기도, 명상 및 관상(觀想)은 정확히 이 수행(lectio)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신비적 삶에서 강력한 수련인 것이다. 침묵의 훈련으로서 명상과 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당신의 여정에서 끝까지 함께할 집으로 작용한다. 반면 독서는 그 집이 지어지는 기초다."

-- 필자는 reading을 쓰지 않고 라틴어 lectio를 씁니다. lectio는 Lectio Divina를 줄인 말로 '거룩한 독서' 또는 '영적 독서'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니까 경전이나 경전급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유명한 회심자들은 읽었던 책에서 한 구절이 마치 온 존재를 때리는 듯한 체험을 하여 평생 그 말이 사라지지 않는 체험을 합니다. 그런 예를 보더라도 매일 영적 독서를 하는 것은 수행 공부의 기둥이자 기초입니다. 이 기초 위에 명상이라는 집을 짓는다고 하니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재론할 여지 없이 이 독서는 이미 검증된 경전급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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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해당 구절을 알려주지 않으시기에 제가 찾았습니다. 일곱 번째 편지 425쪽과 455쪽에서 두 번 거론되고 있습니다. 즉 "영적 버팀목으로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을 약화시키는 일이므로 나에게 의지하는 것조차도 일시적 수단으로만 여겨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희로 하여금 너희 진정한 후원자이자 대들보인 <생명과 존재의 근원>은 평형상태의 우주의식이라는 전능한 차원에서 직접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록자를 통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425쪽)"

이것은 바이블 말씀과도 조응합니다. 즉 바이블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 이상을 할 수 있다고 써 있죠! 혹시 해당 구절을 찾아 주실 분 계시나요? 다음에 455쪽에서는 "내 그리스도 의식이 항상 너희와 함께하고 있어서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즉시 나에게로 올 수 있음을 알라. 이것이 너희에게 (의지물이 아니라) 위안이 되게 하라. 나는 너희가 스스로를 계몽시켜 그리스도 의식 속으로 상승해가기 위해 지나가는 관문일 뿐이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교회에 의존하게 하는 방식을 쓰는 대부분의 기성 교회는 (알든 모르든) 교묘한 트릭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스승은 제자가 하루 빨리 독립해서 하산하기를 바라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볼 때는 죽음이라는 완전 혼자인 과업을 치루기 위해서라도 교회나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일을 빨리 벗어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재론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살불살조를 말하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의 요체

2019.06.01 06:26 | Posted by 목운

공부를 하되 나중엔 그리스도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대목이 '그리스도의 편지'에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미 그러고 계시겠지만 제가 덧붙이는 말들도 참고만 하실 뿐 의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탈종교-탈기독교를 실천하는 제가 의지하는 텍스트는 '편지'를 기둥으로 하여 성공회 신도였던 데이비드 호킨스, 로마 가톨릭 교도였던 닐 도널드 월쉬, 그리고 기독교적 영성에서 나온 '기적 수업'에 더하여 불교와 유교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호킨스 박사의 365일 묵상집에서 공부에 무척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어 말씀을 옮겨볼까 합니다. "진리나 깨달음이 찾아내거나 구하거나 얻어내거나 획득하거나 소유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영원한 현존'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그것은 깨달음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면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공부하는 것은 필요 없지만 불합리한 것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름을 몰아내는 것이 해를 빛나게 하는 원인은 아니지만 그동안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수행은 마지막에 그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는 것 이상의 일이라고 하는, 그것을 이뤄낸 사람이 하는 약속을 믿고 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무지(the unknown)를 구하는 일입니다."

-- 기본적으로 우리 공부는 덜어내는(letting go, 도덕경의 損之又損) 일을 기본으로 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은총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것도 결국 은총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 년 전 당나라 이고 님은 '에고로 에고를 없애려는 것은 더 큰 에고다(以情止情 是乃大情)'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삶을 기도로 만드시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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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핵심 요점

2019.05.20 04:28 | Posted by 목운

1년전 오늘 글인데 함께 복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여기에 하나 보탠다면 세상 속에서의 조건 없는 사랑 실천입니다.

'내가 교회를 등질 마음이 없는데 왜 이단이냐?'라고 항변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복권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학자이자 영성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말 하나 인용합니다. "'누구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태 16:24)' 모든 것은 여기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 이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다. (영성지도 10쪽)"

여기서 '부인'은 원문에는 잊음(forget)으로 되어 있고 1968년 최익철 님 번역판엔 ‘자기를 끊고’로 되어 있어서 요즈음 서양 영성의 자아 소멸에, 동양 영성의 무아와 극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다음에 나오는 '놓아보냄'에 조응합니다. 결국 철학 내지 영성의 공통 요소는 내면의 탐구인데 '천국이 내면에 있다'고 하는 속뜻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고 했는데 이것은 에고와 참나 또는 복성서 노선에 따른 정(情)과 성(性), 대승기신론 노선에 따른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이라는 자아의 두 측면을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즉 ‘자신’이 바로 에고이고 ‘너’가 참나에 해당합니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대전제를 가르치지지 못하는 심리학은 실천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게 제 체험입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고 하는 부분은 명상과 같은 성찰 방법을 취하여 참나의 자리에서 에고를 살펴보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에고는 부인하고 끊어버려서 궁극에는 잊어버리게 되는 경지까지 이어지는 의식 진화의 길을 평생 가는 것이 누구나 취할 노선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충분한 보상이 있을 뿐 아니라 몸을 버린 후의 안심입명까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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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어 외양에 치중하여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아름다운 곳, 재미있는 곳, 유익한 곳, 특별히 맛있는 곳을 계속 보여주지요!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정신의 자유를 얻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몰라도 결국 상업주의에 매몰되지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여행을 다룹니다. 저는 가장 비천한 메신저에 불과하지만 참 좋은 텍스트 '편지'를 만나 함께한다는 목적에서 이곳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어제는 규칙 1번 "우선 10분부터 시작해서 매일 명상을 하여 만족할 만큼의 시간까지 늘려가겠다."는 바에 따라 10분을 늘려 타이머를 40분에 맞추고 명상을 했는데 진짜 눈 깜짝하는 것처럼 지나가더군요. 명상이 대개는 만족스럽지 않고 헤매다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만에 종일토록 명상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근무했습니다. 물론 헤매는 명상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매일의 선언'(어쩌면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란 생각입니다)이 우리 공부의 요점을 얼마나 잘 요약한 것인지 쓰려다 길어졌습니다.

즉 '선언'은 우리 공부가 '에고 충동이 사라지고 신 의식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이들의 소아가 아름답게 표현되는 천국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매일 비는 것이 '모든 이들의 의식주 해결뿐 아니라 영적으로 드높여지는 것' 즉 의식이 높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돌아갈 곳이 신적 생명과 신 의식이 불타오르는 근원이라는 것, 그곳은 창조의 근원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링크합니다.

https://tjryu.tistory.com/entry/%EB%A7%A4%EC%9D%BC%EC%9D%98-%EC%84%A0%EC%96%B8?category=53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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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이상, 최고의 목표

2019.05.13 05:14 | Posted by 목운

너희 물질세계 장막 너머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적 의식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만유에 저마다 존재를 부여하는, 만유의 배후와 만유의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상이요 진정한 열망이요 최고의 목표다.

너희는 이 실재를 신이든 알라든 야훼든 무한자든 지성이든 신성한 마음이든 신 의식이든 도(道)든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이 모든 이름들이 너희 <존재의 근원>, 즉 <창조의 기원>을 뜻한다. 이보다 더 높은 열망을 품을 수는 없다. 모든 개체적 존재를 있게 하고 돌보아 존속하게 하는, 만유의 배후와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도의 편지, 231쪽)

-- 기본적으로 존재의 근원 또는 창조의 기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을 최고의 지성들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종교가 붙인 이름만이 거룩하고 올바르다는 것부터 오류임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종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탈종교의 시대입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실재를 체험함으로써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일원적(비이원적) 인식을 얻고 사랑 자체를 체험함으로써 저절로 완벽히 진실해지고 완벽히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 하향식 실천이지 싶습니다. 계명 하나하나를 지켜 언젠가는 신을 체험하겠지 하는 상향식 실천은 오히려 힘겹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히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겠다는 결의와 매일 성찰하고 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만나는 모든 이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겠다는 결의가 더 쉬웠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 결론은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 거기서 결사적으로 벗어나겠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