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공부했습니다. 펭귄 판 입문서를 번역해서 블로그에 올려 놓았고 이부현 님이 번역한 영적 강화(저는 '훈화'라는 쪽이 맘에 듭니다)를 대학-중용의 관점에서 읽어봤습니다. 에크하르트는, 바오로와 함께 기독교의 뼈대를 제공한 플로티누스를 계승한 분입니다.

플로티누스는 기독교의 신 없이 일자 체험을 근거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한 분이기에 사실상 동아시아 신비주의와 같다고 보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핵심을 대중적인 말로 풀어준 훈화를 읽으면 더더욱 그렇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읽기로 훈화의 요지는 모든 상(相, bilden)을 벗어나고 자아를 완전히 포기함과 동시에 신의 의지로 살 때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지대본인 중(中)의 상태에서 세상일을 할(和) 때 최고선에 이른다(止於至善)는 말과도 같고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어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과도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부현 님 번역에서 몇 구절 가져오는 것으로 나머지를 갈음합니다.

"그대가 모든 사물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대가 벗어난 만큼, 그대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지 그대를 그대의 것으로부터 완전히 비우는 한에서,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갖고 들어오신다는 것은 등가적 교환이고 정당한 거래다. (14쪽)"

"신을 올바르게 갖고 있는 사람은 교회나 외딴 곳이나 또는 골방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장소에서든 어떠한 거리에서든 어떠한 사람과 함께 있건 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17쪽)" -- 이 말씀은 '신기독 수기중(愼其獨 守其中)'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람은 이성과 의지 등 두 개의 능력을 갖고 계속 자신을 드높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최고 수준에서 자신의 최상의 것을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일체의 해악에 대하여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사려 깊게 자신을 지켜내어야 한다. (24쪽)" -- 이 말씀은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정신입니다.

이 복잡한 인물을 찬찬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 지적 생활의 진화에서 그가 결정적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클레멘트 4세가 1267년에 도미니코회로 하여금 여성 종교 공동체에 대한 사목을 맡도록 했는데 그때 비로소 설교 목적으로 독일어를 쓰게 된 것이며 그 이전에 모든 지적 사상은 라틴어로 쓰였다. 도미니코회 첫 세대의 업적이 무엇이었든(그것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차세대에 속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에서 유럽의 평민 언어로 된 수준 높은 철학적 신학적 논의의 상당량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초유의 환경으로 기록될 텐데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의 뛰어난 철학과 신학 전통의 비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참말로 에크하르트에게는, 수 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어지는 뚜렷히 독일적인 철학적 사상을 가진 학파들을 가리키는 많은 것들이 있다. 에크하르트와 독일 도미니코회 학파를 특징짓는 지성과 인간 정신의 탁월함은, 19세기 독일 관념론의 예표이며,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자기 생각을 전하기 위해 의지했던 언어의 수사학적 재료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나 마틴 하이테커와 같은 현대 독일 사상가를 연상시킨다.

 

둘째로 에크하르트 신학은 그리스 사상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합을 성취하려는 중세의 위대한 노력의 하나로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토머스 아퀴나스의 경우 그리스 전통을 전한 사람은 새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에크하르트의 경우 프로클루스는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물려받은 철학적 유산을 제공한 것은 신플라톤주의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로클루스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안에서 신플라톤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이 우연히 일치하는 일은 더더구나 선구적 현대 사상가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다. 현대의 이러한 반응으로 해서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에크하르트 작품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피조물의 허무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동양종교 및 자신의 비관주의와의 유사점을 본 한편 헤겔은 철학과 종교의 종합을 제기한 에크하르트의 그러한 점에 흥미를 느꼈다. 20세기에 이러한 관심은 에른스트 블로흐에서 마틴 하이데거(그는 에크하르트의 '초탈'이란 말을 광범위하고도 표나게 사용했다)와 자크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철학계가 존재, 영혼 및 부정성과 같은 주제를 에크하르트가 다룬 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면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그에게서 초월 체험에 대한 감각에 기반한 종교의 강력한 변호를 발견했다. 그는 또 신학 용어의 부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던 것으로 여겨져 신선하고도 도전적인 방법으로 고전 종교의 주제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도든 아니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은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에서 '언어를 뛰어 넘는 신'이라고 하는 아주 낯선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한 스승의 말을 듣기 위해 중세 독일의 교회와 수도원에 모였던 사람들을 한때 감동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스타일의 따사로움, 심오한 사고방식 및 영적 비전을 발견했다.

 

에크하르트 양식의 표현에서 더 나간 요소는 '이상적' 입지에서 이야기하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이미 신과 합일한다면 '진실일'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다. 그가 언급한 대로 '신의 안목'에서 보고 그것이 청중의 독자적 실체인 듯이(강론 11)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의도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강론 22)와 같은 강론은 그런 말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청중들에게 그들이 창조되기 전처럼 되라고 촉구한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이도록 의도한 게 아니라 청자들 앞에서 그들 본성의 초월적 가능성을 취하도록 한 시도이며 그런 것들은 또 에크하르트 자신이 한 때 '강조해서 말하기'로 인정한 것에 속한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신을 향한 돌파는 지식의 돌파다. 낮은 형태의 지식은 영혼에게서 신을 흐리게 하고 영혼을 그 초월적 본성에서 흐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문제로 돌아오는데 그것은 (에크하르트가 아는 대로) 문제의 근본적 부분이다. 언어는 시공상 유한성을 지닌 채 우리에게 세상을 매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에게 사용될 때 신을 대상으로 만들고 그 창조된 바 없는 본성에 대한 부적절한 개념과 이미지로 신을 덮음으로써 방해가 된다. 그러나 언어가 장애물이라면 그것은 또 역설적으로 구원의 장소이기도 한다. 언어를 정화하여 그 가장 추상적이고 내적인 형태로 만들어 자유분방하게 신에 대해 비유적인 언어를 씀으로써 에크하르트는 그에게 있어 신과 하나인 초월적 지식으로 돌파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신은 (무한히)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아는 한편 에크하르트는 또 진실되게 언어의 파괴적인 비평을 통해서 신을 참되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참말로 이것은 '언어가 말씀으로부터 온다'라는 에크하르트의 말로 요약된다. 이 공식은 또 에크하르트가 '왜' 언어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지 말해준다. 지성처럼 언어는 '사물'과 감각으로 된, 유한하고 조잡하고 다수인 세상에 영원히 반대되는 '말씀'과 '모상'으로 된 '영적이고' '마음과 관련되고' '하나인'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후자의 실체는 추상적이고 신적인데, 삼위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인 '말씀' 안에서, 즉 인간 지성이 창조된 바의 '모상'과 거기에서 '말씀이 오는' 그 모상 안에서 확인된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표면이 때때로 아무리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주된 구조는 놀랍도록 일관성 있다. 그것들은 바로 한편은 신적인 일자이고 다른 한편은 신의 자기 복제(탄생, 모상)다. 신플라톤주의에서 대부분 가져온 전자와 성서 전통에서 나온 후자를 보다 진화한 윈칙으로 쓸 수 있는데 바로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신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가까이 있다는 것, 즉 위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에크하르트 사상이 나아가는 곳은 바로 이 두 극단 사이이며 함께 변증을 이루는 것도 이 두가지인데 그 자신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변증의 효과는 에크하르트가 논하는 모든 것 안에서 특별한 추진력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때때로 에크하르트가 가르치는 내용을 형성하는 개념과 생각의 유형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가르침들이 이들 두 기초적이고 상호 밀접한 원칙 가운데 한 가지 목적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수록된 에크하르트 작품은 학자로서라기보다 설교가로서의 그의 활동을 보여준다. 도미니코회는 수도자 설교회로도 알려져 있지만 설교의 역할에 대해 크게 강조하는 복음적 수도회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관행을 '사람들에게 명상의 열매를 전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입장은 이러한 복음 선포의 전통 안에 있는 것이며 그의 철학적 배경은 자신의 신비적 환시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일에 크게 기여한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근본적 구조를 형성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요소(대담하게 도전적인 철학-신학 및 초월적 의식 상태에 대한 개인적 영감)가 우연히 합치한 데 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언어 사용을 촉발한 것은 이 두 요소의 상호작용이다. 주로 독일어 강론에서 그는 그 자신만의 지식과 체험에 적응하려는 청중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수사학적 영상언어와 급진적 언어전략을 구사한다. 모순 가득하고 또 풍성한, 형이상학적 드라마 및 과장법이 가득한 강론에 수사학적 표면을 입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과거에 때때로 배운 사람들은 에크하르트를 혼란스런 사상가로 생각하고 덜 배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심하게 신비적인 종교를 설파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러한 데 기인하다.

 

한 평자는 에크하르트가 진리를 찾는 사상가라기보다 진리를 알기 쉽게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참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조직 신학자 가운데 가장 비조직적인 사람이게 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 선포자로서 가지는 요소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 체계를 부여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중세에 관한 위대한 학자인 에티엔 질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자기만의 확신으로 에크하르트를 하나의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렇게 했을 때의 문제는 그것이 그 무엇에 못지 않게 진정성 있는 텍스트에 기반했더라도 아주 쉽사리 전혀 다른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에크하르트가 보여주려 노력하는 바로 그 진리란 정의상 체계화를 불허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엔 쓸모없는 일이 된다. 에크하르트가 청중의 마음에 자라나길 바랐던 일 가운데 드디어 신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는 안이한 느낌이 드는 일은 가장 아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가장 큰 과오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강론 28).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은 조직적 절차를 뒤집고 청중의 마음 안에서 참으로 초월적 지식의 가능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사용한 다양한 전략에 집중된 것이다.

 

그럼에도 에크하르트가 사용한 모순되고 부정확하고 비체계적인 특정 방법들이 어느정도 체계화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경향은 신에 대한 신학을 제시할 때 보이는 모순이다. 이것은 주로 라틴어 작품에 해당하는데 거기에서 신은 '존재(being)', '벗겨진, 노출된 존재', '존재의 순수성', '일자성' 또 '지성'이나 '이해(앎)' 등 여러가지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강론 W67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장 높은 천사가 날벌레보다 높은 것처럼' 존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종합컨대 그러한 변형들은 신이란 말로 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그토록 강하게 되새기는 청자의 마음에, 시기상조가 될 수 있는 자기만족을 조금이라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에크하르트는 마치 언어의 그물을 벗어나기 위한 것처럼 '영혼의 근저'에 관한 그 모든 비유를 잔뜩 내어놓을 때의 독일어 강론에서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독일어 강론에서 그에게 다양한 이미지와 신학적 개념을 제시하는 다양한 성서 구절에 대응한다는 사실에서 부분적으로 발생하는 다른 종류의 '혼란'도 있다. 그는 이러한 문구를 자신만의 사고 방식에 맞추며 그렇게 할 때 종종 다른 곳에서 한 말과 쉽게 모순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과의 합일이 사랑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하고(강론 W72),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 하기도 한다(강론W77). 영혼 안에서의 신의 탄생에 대해 말할 때도 그것이 지성이라고도 하고(강론 23) 지성이 아니라고도 하며(강론 W68), 한 강론(W68)에서는 은총과 같다고도 하고 다른 강론(W41)에서는 같지 않다고도 한다. 그러한 부정확성은 에크하르트가 신학적 개념과 이미지를 얼마나 두리뭉실하게 쓰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영혼 안에서 신의 탄생'이나 심지어 '영혼의 근저나 불꽃' 같은 중심이 되는 묘사들도 계산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비유'로 작용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세한 논의라기보다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려는 표현 수단인 것이다.  

초탈

 

에크하르트에 있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수렴은 '초탈'의 개념에서 가장 뚜렷이 보인다. 이 영어단어는 중세 고급 독일어인 떼어냄(abgescheidenheit, 또는 gelazenheit)의 번역인데 세상에 있는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깨어난 영혼이 자유롭게 된 것을 뜻한다. 물론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는 인간이 영적 삶에서 진보하기 위해서 세속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고 언제나 강조했지만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뚜렷한 것은 이 도덕적 해방이 얼마만큼의  마음의 해방으로 여겨졌는가 하는 것이다. '초탈'은 욕망을 통한 사물에 대한 육체적 애착에서의 자유와 동시에 인지적 해방을 뜻한다. 즉 마음을 제약하고 그것이 그만의 초월 가능성에서 떨어지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물질적인 것의 영상에서 해방되는 것을 뚯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전통에 독특한 것이 아님에도(예를 들면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에 그에 버금가는 것이 있음) 그렇게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초탈한 사람'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 것이 아닌 사람이다(요한 17:16 참조). '신의 탄생'은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의 '본질에 대한 앎'은 신으로 가득하여 세상과 함께하지 않는다. 그 인간이 이제 그 안에서 관여하는 바의 영적이고 신적인 실상의 형이상학적 기조가 일자성이기 때문에 이 상태의 도덕적 드러남은 박애의 실천인데 즉 다른 사람을 자신인 것처럼 대하게 된다(레위기 19:18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복지를 돌보는 그만큼 다른 사람의 복지를 돌보게 되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겸손의 정신 안에 간직될 것이다. 참으로 초탈과 크게 연관된 모든 덕성 가운데 겸손은 가장 기본적이다. 매우 수사적인 명민함을 보이는 한 구절에서 에크하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의 '겸손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촉구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가장 낮은' 부분이지만 동시에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신은 거기에 계시면서 우리를 고양시키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핵심이기도 하기에 우리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다(강론 W 46).

 

초탈이 드러나는 두 번째 모습은 우리 안에서 신의 탄생의 결과로서 고통과 통증에 영향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발언은, 고통을 체험한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신의 탄생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거나 신의 의지에 전반적으로 순응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친구가 살아 있는지 여부'에 무관심해야 한다고 말할 때처럼 이상적이고 수사적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구절은 강론 21(여기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를 정확히 수정하는 것 같다)에서처럼 다른 것들과 더불어서 읽어야 한다. 우리는 뒤에서 에크하르트가 청중 앞에서 취하는 관점의 수사학적 방법을 거론할 것인데 그가 말하는 관점이란, 신에게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현재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잠재적이고 궁극적으로 신과 결합된 상태에서 나온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영혼의 '근저'나 '불꽃'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교의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모상에 관한 전통적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있는 모상을 통한 하나의 탐구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리고 '영혼 안의 신의 탄생'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은총교리와 비슷한 설명이라면 '초탈'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덕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상깊은 해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초탈한 사람'은 자애롭고 겸손하며 평온하고 지혜로우며 전적으로 신에게 사로잡힐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지성에 대해 에크하르트가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덕스런 영혼이란 '능력의 다수성'에서 단일한 근저로 철수해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그는 덕의 실천에 주된 장애물인 소아(小我)를 잃어버리고 지성의 핵심과 하나로 된다. 에크하르트 체계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덕스런 삶의 형이상학적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 즉 깨달은 또는 초탈한 자아 안에서 구분이 없는 상태다.

 

덕을 실존적인 면과 지성적인 면 모두에서 내적 상태로 보는 것의 주된 결과는 헌신적 과업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다. 에크하르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경견성을 매우 강조하는 시대를 살았고 그가 밀접하게 관련된 특별한 환경, 즉 여성들의 종교 공동체라는 환경은 이러한 추세를 아주 크게 반영했다. 그런 공동체의 기록에 따르면 14세기 종교적 여성들은 종종 영적 성취의 일부로서 극심한 금욕생활을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세 후기 여성들의 커다란 영적, 문학적 성취를 부인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때로 취한 극단적 금욕 관행이 그 시대를 지배한 여성 혐오와 가부장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신적 과업이 당대에 광범위한 영적 관습에 대한 미묘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과 관련해서 에크하르트가 내면성과 내적 '지향'에 대해 되풀이해서 강하게 촉구했다는 것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는 종교 생활 안에서 헌신적 수행 원칙을 (2세기 후에 몇몇 개혁가들이 했었던 것처럼) 그 자체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개인적이고 내적인 신과의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 그런 것들을 상대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현명하게 환기시키듯이 '신을 꼭 한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 취하는 자는 신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보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다'(강론 19). 

 

주) 위 강론 번호는 펭귄판 기준임.

영혼 안에 신의 탄생

 

에크하르트의 저술에는 신의 현존 인식 안으로 인간이 '돌파해 들어감(breakthrough)'이 영혼 안에 신의 탄생이란 비유로 나타난다. 이것은 멋진 장치이며 위에 든 모상 비유와 함께 뚜렷이 형이상학적이고 지적인 그의 감각을 그리스도교 전통 교리와 결합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우선 물론 탄생의 개념이 역사적인 육화, 즉 시공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교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삼위 안에서의 성자의 탄생 또는 출산을 가리킨다. 참으로 인간 영혼 안에서 성자의 탄생 주장은 우리가 삼위에로 돌아갈 가능성을 묘사하는 데 기여하는데 그리스도교 신학에 따르면 우리는 애초에 삼위에게서 나왔다. 그리하여 그것은 성부로서 삼위 안에서 성자를 낳고 또 같은 성부로서 인간 영혼의 심연에서 동일한 성자를 낳는 신과 내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모상이 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탄생 비유는 또 인간과 신성 간의 합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게 있다. 성자는 종종 '말씀'이라 말해지며 에크하르트는 영혼 안에서의 신의 탄생은 영혼의 근저에서 신이 그 말씀을 내놓는다고 한다. 영혼의 근저란 '지성'인데 말씀(성자)이 성부에 의해 발해지고 삼위 안에서 성부의 '모상'인 것과 똑같이 우리 안에 있는 신의 '모상'이다. 이제 '말씀'과 '모상'은 모두가 '내적으로 있으면서',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똑같은 성질을 가진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과 '모상'은 모두 신적-영적-지성적-통합된 영역에 속한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탄생의 비유를 '말씀'과 '모상' 같은 용어로 특별하게 다룸으로써 탄생이란 특색이 그 자체 지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탄생'과 '지성'을 묶는 데 성공하는데 이런 것들은 그가 초월성에 대해 사용하는 두 가지 중요한 표상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신의 탄생이 변화된 존재상태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된 '앎'의 상태라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우리 안에서 신의 탄생 비유는 에크하르트 체계 내에서 중심을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의 사고 내에서 많은 다양한 갈래에 대해서 동일한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에서 존재와 앎이 하나가 되듯이 초월성과 내재성이 하나가 되고 개인의 내면성이라는 주관적 차원이 그리스도교 교의라는 객관적 차원과 결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더 나아간 원칙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윤리와 도덕 원칙이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자연적이고 훈련되지 않은 자'가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반면 '신 안에 걷는 자'들만이 이 탄생을 이해할 수 일다고 말한다. 그 탄생을 통해서 우리는 '신처럼' 되고 거룩하게 되며 덕 안에 자리잡는다. 이것을 은총에 대한 스콜라 철학과 교부들 가르침에 대한 변형으로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은총이란 우리 안에 신적 도덕을 확립하는 신의 자유로운 활동이며 그로써 우리는 점차 신의 본성에 맞추어진다.

 

은총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는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정점에 이르렀는데 영혼의 탄생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은 이 논의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탄생의 비유에서 파리대학 교수인 에크하르트는 은총을 신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소통으로, 말하자면 인간과 신의 초월적 일치로 본다는 생각을 강하게 진술한다. 그는 언제나 '창조된' 은총이라는 게 신의 활동을 유한한 것들의 세상으로 밀어내는 매우 정통적 개념을 비웃었으며 반면 그에게 신의 본성은 그 자체 (탄생으로서) 순수한 하나의 활동이며 따라서 창조되지 않고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었다.

 

탄생의 비유를 은총에 관한 신비적 신학으로 본다면 여러가지 돌출점이 생긴다. 첫째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신의 합일에 기초하기 때문에 신비적이다. 둘째 은총이란 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정도라는 것을 강조한다. 은총의 절박함과 풍요함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신의 본성에서 나오는 결과인데 그것을 그토록 대단하게 파악한 신학자가 거의 없다. 에크하르트는 신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탄생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그것은 이것이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탄생에서 오는 영적 혜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자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우리의 피조물성이라는 진정한 실체가 무(無)임에도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신을 방해한다.

 

 

 

 

영혼의 근저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모상(模相, image)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에크하르트는 그 '모상'이 인간 마음이나 지성과 같다는 주장이 그리스 합리주의 및 신플라톤 전통을 배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 강론(sermon 23)에서 지성이 우리 안에서 신의 모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지금 여기와 떨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을 닮지 않았고', '순수하여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았으며', '활동적이며 그 자체 탐구적이다.' 고 한다. 실은 이런 특성들은 에크하르트가 신에 대해 말하는 용어에 매우 근접하다. 그리고 신성처럼 '모상'이나 '지성'은 천사보다 높고 '이름이 있다기보다 이름이 없는 쪽이며' '알려졌다기보다 미지의 상태다'(강론 3).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그것은 '단 하나의 일자성'이며 '신이 하나이고 단순한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이며 단순하고' '완전히 영적이다'(강론 1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상-지성이란 본질적으로 초월적 일자의 통일되고 신적이며 영적인 영역에 속하며 에크하르트가 거기에 적용하는 많은 비유들(즉 '불꽃', '왕관', '요새', '영혼의 근저' 등)은 일자와 마찬가지로 개념화가 전혀 불가능하며 인간의 생각은 그것을 한정시키고 부인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몇사람이 에크하르트가 베단타 전승의 브라만-아트만 체계에서처럼 우리가 자아 안에 신의 '일부'를 담고 있다고 전제한다고 믿게 한 원인이 된 것은 에크하르트가 우리 안에 신의 모상이 있다고 한 아주 고상한 용어들 때문이다. 그러나 콜로뉴에서 1327년 2월 13일 제시한 변론에서 에크하르트는 신적 불꽃이 어떤 의미에서든 영혼에 '부가된' 무엇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조심스레 지적했다. 이 진술이 뜻하는 바는 에크하르트가 신적 모상을 우리 안의 잠재력(potentiality)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즉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영혼이 신과 하나임을 알 수 있게 되는 영혼 안의 초월적 잠재력인 것이다. 디트리히의 용어로는 신이 '마음'인 것처럼 우리 인간 본성이 '지성'이나 '마음'이며 '마음'의 본성은 존재를 초월한 일자성이라는 인식과 같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모든 '지성'은 하나이며 영혼과 신은 그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에크하르트가 우리가 신이거나 신과 비슷한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크하르트의 전 체계는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말할 필요도 없는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지상의 존재로서 우리가 육화된 상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 잠재력에 비추어 될 수 있는 것에 호소하고 있다.

 

에크하르트가 인간 마음과 신의 마음 사이의 초월적 대칭을 근거지우는 주된 방식은 그의 모상론을 통해서다. 이는 그의 강론 20의 주제이지만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 두루 보인다. 모상이라는 그리스도교 개념은 원래 두 근원이 있다. 첫째는 창세기 1:26-27인데 거기에 인간은 신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고 둘째는 삼위일체 신학인데 성자가 성부의 '모상'이라고 주장한다. 그 의미는 성부가 성자를 낳았으나 둘은 같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쓰는 모상을 융합해서 에크하르트는 성부와 인간 지성 간의 동질성을 표현했다. 인간 지성은 신에게서 나왔지만 (잠재적으로) 신과 같다. 에크하르트는 한 모상의 출처는 그 모상 안에 온전히 있다고 한다. 그의 형이상학 용어로 그 모상은 그 근원 '안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모상 '안에' 있다. 그렇게 모상의 반복된 계기로 해서 에크하르트는 설혹 우리의 타락한 상태에서라도 우리 인간 본성 안에는 신과 아주 특별히 가까운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피조계 내의 그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

 

대부분의 다른 중세 조직신학자와 공통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창조과정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데 그는 창조가 계속 진행중인 것이며 시간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본다. 시간을 벗어나 있음에 대해 그는 특별히 대담하게 자주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이 영원에서부터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단죄된 바 있음)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속뜻은 시간 자체가 창조된 질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이 시간 안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란 영원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에크하르트에게 창조는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결과들을 지난 먼 과거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진행중이며 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또 다른 많은 중세 신학자들처럼 에크하르트는 그 창조된 상태에서뿐 아니라 신의 마음 안에 있는 피조물의 존재를 매우 강조하며 그의 강론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지식을 여기 아래에 잠시 존재하는 대로가 아니라 신의 마음에 영원히 존재하는 바대로 파악하도록 청중에게 촉구한다. 특히 우리가 영원에서부터 신의 마음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나 생각에 온전히 합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비슷하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피조물과 신의 관계에 대한 중세의 일반적인 질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이 분야는 비유론인데 가장 영향력 있는 비유 체계는 토머스 아퀴나스의 이름과 연관된 부분으로 창조된 질서에서 빌려온 용어는 신에게 적용될 때는 전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전적으로 정확하지도 않다. 그것들은 그 중간 어디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세속과 신 간의 정렬은 일치성의 하나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것 가운데 하나도 아니지만 불완전하더라도 실제 관계의 하나다. 이 체계의 더 나아간 특성은 비록 창조된 특성이 그 기원을 신에 두더라도 참으로 피조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토머스는 언제나 그 창조주의 초월성을 확인하면서도 피조물의 실 존재를 보존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문제를 조금 달리 강조하면서 다룬다. 그는 일반적으로 창조된 세계가 신 안에 남아 있는 정도를 강조하는데 관심이 있으며 따라서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그 존재는 오직 피조물에게는 '빌려온 상태'일 뿐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토머스에게 있어서 그러한 것처럼 참되게 그들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각개의 백색, 정의, 선 또는 그 무엇이 되었든 그 자질은 백색임, 정의 및 선의 일반 원칙과 일치하며 신 안에 남아 있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의 존재(being)로 하여금 신과 범신론적인 하나가 되지 않도록 하는 철학적 원칙은 특성들이 신 안에서 전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반면 개별 존재들 안에서 혼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무엇인 한에서'를 뜻하는 'inquantum'이란 말로 표시된다. 그리하여 누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선' 자체라는 것과 전적으로 같지만 '무엇무엇인 한에서'만 그들은 '선하다.' 우리가 '정당한' 한에서 우리는 '정의' 자체이지만 에크하르트는 '정의'가 그 사람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임을 잘 알고 있다.

 

신과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생각이 미친 일반적 영향은 신이 피조물 안에 얼마나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강조한 데 있다. 왜냐하면 사물을 그 상태로 만들기 위해 근본적으로 결합하는 특성들은 여전히 신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과 피조물을 구분하기 위하여 'inquantum' 원칙을 사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위에 논의한 바의 일자성-다수성 패러다임의 미묘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신 안에서 모든 특성은 하나인 반면 창조된 질서 안에서 그것들은 섞인 채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면 에크하르트가 알기에 신은 일자이며 따라서 신의 특성은 무엇이든 모두가 하나의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 반면 신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 다수성에 참여한다.

 

이 법칙에서 하나의 예외는 에크하르트가 때때로 '영혼' 또는 하나의 '빛', '영혼의 근저', '영혼의 불꽃'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그저 '지성'이라 부른 인간 안에 자리한 유일한 요소다. 어쨌든 통합되고 초월하면서 다른 피조물에서 우리를 구별해 주고 신에 대해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핵심에서 신적 현존이 되면서 우리의 올바른 행동의 기초이자 축복의 약속이 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삶과 사상을 공부하면서 무엇보다도 반가운 구절이 있어 옮깁니다. "에크하르트가 독일 도미니코회 학파와 함께하는 핵심 생각은 '지성'의 본성 및 의미에 대한 치열한 관심인데 여기서 지성이라 하면 현대 용어에서 '지성'보다는 '의식'과 관련된 무엇이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회에서 멘토인 디트리히의 생각을 취하여 이 의식이 인간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고 보고 그것('마음', 영혼, '의식' - 모두 같음)을 찾고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의 가장 내면적이고 친밀한 부분으로까지 찾아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앞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지적 배경' 참조). 

에크하르트를 거론하면서 루터가 영향받았다고 했는데 실상 루터의 주장은 신과 직접 통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 교회가 필요 없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융합을 꾀하다보니 교회가 가르치는 신관(神觀)에 저촉되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물론 에크하르트는 종교재판을 받으면서 '나는 교회를 등질 마음이 없다.'고 변호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계열은 직접적인 신체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체험을 생생히 한 사람들은 교회의 중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성공회 신도였다가 무신론을 거친 후 신체험을 하고 영성과 과학을 통합하고자 노력한 호킨스 박사의 경우 다음과 같은 체험을 고백합니다.

“신의 현존 속에서의 궁극의 깨달음과 앎은 평화다. 그 평화는 무한히 안전하다는 증거이자 무한히 보호받는다는 보장을 의미한다. 그 어떤 고통도 가능하지 않다. (The ultimate awareness and knowingness in the Presence of God is Peace. The Peace proclaims infinite safety and preservation with infinite protection. No suffering is even possible.)”

에크하르트는 플로티누스의 '일자'를 신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도 아님을 선언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통합을 시도했는데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일부 사람을 제외하면 기독교 없이도 사회적 손실을 감수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신비주의 노선을 가는 이들은 얼마든지 기독교를 포기하여도 신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자성

 

대사상가의 작업을 한 가지 아이디어로 줄인다는 것은 언제나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에크하르트의 경우 하나의 주된 관점이 다른 모든 것이 어느 정도 그 하위 개념이 되도록 지배적 원칙으로 작용한다고 보아도 어느 정도 정당한데 그것은 바로 일자성이다.

 

일자의 신학 또는 철학은, 우주의 궁극 원칙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이며 나눌 수 없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다른 모든 것과 구분된다고 하는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일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수이며 부분이며 나눠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자는 우주의 나머지와 동적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도 알려진다. 여타 우주는 일자에 기인하며 그래서 또한 그 근원을 '돌아본다'. 일자는 따라서 모든 것이 일자에 비추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체험의 대상이 다수이기 때문에 일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일자는 홀로 (만일 참으로 '존재'라는 말을 거기에 돌릴 수 있다면) 근원적이며 영원한 존재인 반면 다수에 속하는 모든 존재는 불가피하게 덧없다. 프로클루스나 플로티누스 같은 신플라톤주의자에게 구원이란 다수와 부분의 영역에서 마음의 지복을 통해 잡을 수 있는 근원인 일자에로 인간 마음이 상승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도미니코 회원인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도전과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계시의 맥락 안에 탄탄한 형이상학을 수립하는 것인데 그 일은 삼위일체와 육화의 교리 안에 신성(Godhead) 차원에서 다수성을 정확히 진술하는 것이다.

 

첫째로 에크하르트는 일자의 개념이 신을 말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본다. ('선'이신 하느님, '전능자' 등) 다른 모든 것은 거기에 무언가를 '보태는' 것이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을 가리는 것 같다. 일자성만이 신의 본성보다 인간 본성에 가까운 무엇을 돌리는 것 같은 개념으로 신을 감싸지 않으면서 말로 신의 본질을 근사하게 파악하게 한다. 그러나 물론 삼위일체 교리는 신 안의 다수성을 필요로 하며 에크하르트가 신의 일자성을 다자성 위에 두거나 적어도 신의 '일자성'을 '삼자성' 앞에 두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문구들이 있다. 그러한 문구들의 바탕에는 이름과 개념이 근본적으로 피조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에크하르트의 믿음이 깔려 있다. 즉 그런 것들은 특정하고 국부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에크하르트는 '일자성'이 아니라 '삼자성'을 그러한 개념 속에 포함시킨다(강론 30). 그러나 셋인 신을 버리고 하나인 신을 앞세우는 이런한 경향은 다른 것에 대항해서 놓여져야 하는데 다른 것이라 함은 에크하르트 사상에서 또한 강력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신은 물질적으로 '다산적(fertile)'이라는 믿음이다. '아버지 신'은 계속해서 '아들 신'을 낳는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은 언제나 동적이며 삼위와 인간 개개인 안에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에크하르트는 신의 이러한 산출 기능이 그 본성에 부차적인 게 아니라 본질적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을 취하고 그리스도교 교리를 거부했따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그의 사상은 토머스 아퀴나스 신학에서 발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에 필적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신플라톤주의 유산을 그리스도교 정통입장과 화합시키려는 대담한 시도로 보인다. 그 과업을 어떻게든 감행했었다는 것은 신플라톤 철학의 시간을 넘는 진정성에 대한 깊은 믿음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강한 신념의 결과다. 언젠가 그는 이교 철학자와 모세 및 그리스도가 다르게 설파했고 진리의 구현 정도가 다를지라도 (신플라톤주의자 같은 이교 철학자는 그리스도가 진리인 반면 진리를 가르치는 데 그쳤지만) 똑같이 진리를 가르쳤다고 썼다. 어쨌든 그 융합이 성공적이라고 판단하든 아니면 삼위일체와 육화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해설에 미진한 긴장이 있다고 느끼든 그의 작업은 중세에 있었던 철학과 신학의위대한 종합 노력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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