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58

신과의 입맞춤~ 시간(13)

분명 모든 구분을 뛰어 넘는 기저(초신)에 관해 말하려는 것, 모든 이름과 이미지를 넘어 있고 "이성적인 게 아닌" 신에 관해 말하려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영혼 안의 불꽃에 대해 말하는 데는 묘사적 대화가 아닌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자명하게도 형언불가능한 것(신)을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존재의 기반인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슈어만이 말한바 대로 "에크하르트는... 철학자의 과업이 이론적이든 실제적이든 인간의 모든 노력을 지지할 최종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실로 에크하르트는 삶의 이유란 주어지는 게 아니며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즉 "삶에 대하여 아주 오랜 동안 '왜 사는가?' 하고 물어서 답해야 한다면 '살기 때문에 산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것..

신과의 입맞춤~ 시간(12)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두 가지 사람"이 있는데 내면의 사람은 내향성을 가리키는 반면 외면의 사람은 우리 감각을 가리킨다. 우리가 초탈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사람을 통해서다. 다른 한편 둘 간에 무차별성이 있다. 즉 "내면의 사람이 완전히 자유롭고 움직일 수 없는 반면 외면의 사람은 활동적일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내면의 사람과 외면의 사람 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경첩 위의 문을 비유로 사용한다. 즉, "문의 바깥에 있는 널판지를 외면의 사람에, 경첩을 내면의 사람에" 비유한다. 이 비유는 외면의 사람과 내면의 사람 간에 차별성이 없음을 말하며(문의 여닫힘과 바깥 널판지는 경첩에 영향을 주지 않음) 동시에 외면의 사람이 내면의 사람에 의존함(널판지는 경첩 없이 견딜 수 없음)을 말해준..

신과의 입맞춤~ 시간(11)

상술한 것처럼 창조와 초탈의 밀접성이 가리키는 것은 창조를 특정 시점에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밀접성을 "말하기"라는 생각으로 표현하는데 그로써 초탈에서 신과 가까와지는 것과 창조의 "순간"을 잘 드러내 준다. 창조는 단순한 산출이 아니라 신이 영혼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를 순간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초탈을 통하여 "창조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창조와 초탈 간의 이러한 긴밀성에 비추어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이 무엇인지 하는 의문은 다시 취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주장하려 하는 것처럼 인간은 초신과의 관계성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면 에크하르트가 초탈에 비추어서 인간 존재를 생각했는지 하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설교 15에서 에..

신과의 입맞춤~ 시간(10)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형언 불가능한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즉 말하길 "신이 동시에 만든 만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시간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시간과 영원 간의 구분을, 영원 속의 "동시성"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즉 "한번에 그리고 그때 그는 신이었고 그때 함께 영원히 아들을 신으로 얻었는데 아들은 모든 것에서 자신과 같고 그도 또한 세상을 창조하였다." 거기에는 영원히 시간성과 함께함으로써 서로 반대되는 면을 대체한다는 그런 뜻이 있다. 그러나 동시성은 여전히 시간을 전제하며 따라서 시간과 영원 간의 대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가 신의 기반과 인간 존재(초신과 초탈)를 표현하려 한 두 번째 방법은 시간적 은유 대신 공간적 ..

신과의 입맞춤~ 시간(9)

모든 차이, 특히 시간과 영원 간의 차이를 넘어선 단순한 기반이라는 동일한 생각은 창조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사상에 적용된다. 즉 "유출(bullitio), 또는 자신을 낳는것... 자신 안에 빛나는 것과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 안으로 녹아들고 끓는 것은...스스로 쏟아내어 붓고 밖으로 끓으며 유출하기(ebullitio) 전에 우선 전적으로 스스로 돌파하고 각 부분이 다른 부분으로 스며들어 간다." 그리하여 신의 자기 창조와 다른 존재의 창조가 동일한 과정임을 가리킨다. 나아가 영혼이 신의 기반(detachment)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것은 그로부터 만물이 나오고 또 거기로 되돌아가는, 신의 심층인 환희이자 숨겨진 기반 또는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신의 유출과 분리할 수 없다. 초탈과 유출의 교차는 창조를 ..

신과의 입맞춤~ 시간(8)

신과 하나이며 동일한 기반을 가진다는 것은 "중개 없이" 신과 가까이 함을 의미한다. "나는 신이 되어야 할 뿐이며 신은 내가 되어야 한다." 아니면 에크하르트가 다른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몇몇 소박한 사람들은 신이 거기 있었고 자기들이 존재하듯이 신을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이 아니다. 신과 나는 하나다." 이렇게 중개자 없이 신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초탈이 "초월"이라는 서투른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초탈은 존재의 지적 영역과 감각적 영역 간에 존재하는 계층적 차이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상은 하이데거가 주장하듯 만약 다른 존재 영역 간의 순진한 차별을 하는 존재론적(또는 존재적) 근거로서 '시간'이 작용하면 초탈에는 (피조물의) 시간과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

신과의 입맞춤~ 시간(7)

인간이 초탈을 통하여 초신과 합일할 수 있다면 과정(펼쳐짐, 정수[精隨]가 되기)으로 이해되는 초신과 초탈을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초신과 합치하는 것뿐 아니라 초신을 하나의 똑같은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신이 바로 온전한 합일이다. 참말로 에크하르트는 초탈을 통하여 "신의 기반(ground)이 내 기반이고 내 기반은 신의 기반이다."라고 말한다. "신의 기반과 영혼의 기반은 하나의 기반"이며 그 하나의 기반은 바로 무다. 이렇게 그 기반이 같다는 것은 에크하르트가 초탈을 통한 그 관계로부터 인간과 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유출(ebullitio)은 피조물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전제하며 신이 신인 것은 이 관계성을 통해서 그러한 것이다. 에크하..

신과의 입맞춤~ 시간(6)

이러한 문구들을 보면 에크하르트의 신 개념을 존재와 같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왜 "초신이 신을 초월하는지 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체험과 '창조주', '아버지', '구세주' 등으로 표현하는 신을 넘어 돌파하는 것과 같은 체험 때문이다." 신과 초신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를 보면 에크하르트가 그 차이를 밝히려고 한 일을 알 수 있다. 즉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초본질적 본질(uberwesenliches Wesen)에 대해 주로 말한다. 그가 진짜 관심을 가진 것은 신이 아니라(신은 그저 가설적 대상[vorlaufiger Gesenstand]임) 초신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신"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초신이다. 즉 deus가 아닌 deitas, ens가 아닌..

신과의 입맞춤~ 시간(5)

창조란 신이 인간에게 존재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즉 "신이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비존재가 존재로 변모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명하게도 창조란 피조물을, "홀로 온전히 존재하는" 신의 지위로 올려주지 않는다. 존재와 무 간의 차이, 즉 신과 존재 간의 차이가 유지되려면 인간 안에 무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일컬어 "영혼 안의 불꽃", "작은 성", "특성을 벗어나 있는", "창조될 수 없는", "단순한 것"이라 한다. 피조물의 기원을 의미하는 이러한 무의 개념은, 피조물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적인 시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언제나" 함께하는, 그 존재에 관한 하나의 원칙이다. 인간됨에 관한 이런 원칙으로서 영혼의 이러한 "부분"은..

신과의 입맞춤~ 시간(4)

에에크하르트의 창조 개념은 신과의 합일을 위해서 왜 피조물에서 완전히 이탈해야 하는지 하는 것뿐 아니라 (창조되지 않은) 신과 (피조물인) 인간 간의 관계를 밝혀 준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창조란, 거기로부터 모든 것이 유출되고(exitus, effluxus, uzvliezen), 이 형언할 수 없는 근원(radius, reflexus, durchbrechen, inganc)으로 모든 것이 되돌아가게 하는 기초 법칙을 가진 동적 시스템이다. 이러한 창조에는 두 개의 큰 단계가 있는데 그 하나는 삼위가 내적으로 발산하는 것(bullitio), 그 둘은 만물의 창조(ebullitio)다. 흘러 나감의 이미지는 기술적 생산에 기초한 창조 개념을 대체하려는 뜻이 있다. 신의 창조를, 현존하는 사물에 형체를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