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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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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2019.08.22 07:52 | Posted by 목운

동아시아의 사상 또는 학문이란 결국 이곳에 살던 이들이 이승의 고통을 벗어나면서도 세상 경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추구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이곳에서 발흥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와 유교에 불교가 더해지면서 통합적인 답을 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답을 쉽게 풀면 '규칙적으로 정좌하여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고 거기서 자명하게 얻어지는 매 순간의 실천방안을 세상에 펼치자'쯤 되는데 이렇게 말하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경전을 인용해서 풀면 어려워서 모르겠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짧은 공부지만 나름대로 근거를 밝혀가며 쓰는 이유는 동아시아 지성인이 수천년간 실천한 것이 같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분이라도 학우를 얻으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 큰 기여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비슷한 결론을 조금 바꾸어 써보겠습니다.

우리 삶에서 성공의 토대는 신인합일을 이루는 데 있으며 그러기 위해 실천적으로는 모든 일에서 최우선적으로 존재의 근원(또는 제1원인, 신 의식, 불성)을 만나야 합니다. 이 경지는 반드시 규칙적인 명상과 자명한 선택을 꾸준히 함(대승의 지관문)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한편 지관문을 포함한 오행(6바라밀)의 실천 동력 내지 인센티브는 외력이나 에고의 분발 기타 세상의 인센티브가 아니라 신 의식 쪽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어떤 벗님이 이것을 무한 반복하냐고 묻는데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에 있는 천국을 이곳에서부터 누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비결이라고 봅니다.

저는 유불선뿐 아니라 기독교 텍스트가 이 점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세부 사항과 표현방법은 무수히 다양하다고 봅니다. 특히 역경(주역)의 실천은 매 순간 변화하는 사물을 만날 때마다 신 의식께 묻고 청하며 자명한 선택을 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의식을 변화시키고 내 의식에서부터 새로운 창조를 꾀하는 노력이 바깥 현상을 바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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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비주의인가?

2019.08.16 16:58 | Posted by 목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삼교를 마치고 마지막 부분이자 의미심장한 부분을 인용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서 월시의 '고통 없이 고통받기'라는 말과 앤소니 드 멜로의 깨달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신비주의는 궁극적으로 당신이 죽기 전에 천국에 드는 기술일 뿐이다. 아니 더 적합하게 말하면 천국이 당신 안에서 지금 드러나도록 하는 기술이다. 신비주의는 당신의 죄나 아픔과 고통 또는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또 당신이 사는 세상의 부조리, 또 영원의 이쪽에서 계속 살아낼 세상의 부조리를 없애 주지도 않지만 신비주의는 이 모든 것을 바꿔준다.

신비주의에서 당신은 삶이 당신의 길에 던지는 모든 것에 대해 신이 개입된(God-infused) 선택과 응답을 하는 힘을 얻으며 그 일을 하는데 아주 건강한 아이들처럼 자의식이 전혀 없이 하게 된다. 신성에 참여하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그것을 단순하고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관조적 여정의 끝에서 찾으리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종착지는 계속 새로운 시작으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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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의 치료약

2019.08.11 08:19 | Posted by 목운

오늘은 번역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님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등의 방법으로 독일어의 수준을 크게 높이는 일도 했다 합니다. 똑같은 언어라도 의식 수준에 따라 의미와 용도가 다릅니다. 천 년 가까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비 신학가의 한 분이시기에 당시 쓰이는 용어들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제가 사숙하는 호킨스 박사도 그런 편인데 그의 텍스트에는 'positionality'라는 말이 꽤 의미심장합니다. 몇 년을 숙고해도 가장 적당한 우리말 번역이 안 떠오르다가 최근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대단한 성취를 한 사람이라면 조어도 할 수 있겠지만 차선책으로 정한 게 '아집(我執)'입니다. 더 좋은 생각이 있으신 분께 조언을 구합니다.

'위치성'이나 '자리잡기'와 같은 것은 단번에 느낌도 안 오고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원성에 기반해서 한 가지 입장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남을 심판하며 나아가 교만을 떠는 성향을 말합니다. 이 한 가지만 극복해도 우리 의식이 엄청 높아진다고 보아 박사는 자주 거론합니다.

관련 구절 하나 옮깁니다. "교만의 치료약은, 중요하다거나 올바르다는 의식, 맞먹거나 되갚으려는 것, 비난하기를 즐기는 것, 칭송 받기를 추구하는 것 같은 '아집' 대신 겸손과 투명성을 취하는 것입니다. 성취에 대한 모든 영예는 에고가 아니라 신성의 현존인 신에게 돌립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성취하면 비난에 쉽게 노출되는 자부심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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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성성(聖性)의 추구

2019.07.31 07:48 | Posted by 목운

일부러 을의 삶을 골라 살 필요는 없지만 세상 구조상, 그리고 각자 카르마에 따라 을의 체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을의 삶이라면 잘 인욕(또는 인내)하는 게 수행의 길입니다. 한편 교구의 주교보다 종지기가 더 성인이 되기 좋은 자리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직장에서 한번 혼나면 최소 48시간 의기소침해지는데 그때 오히려 더 철저히 공부할 자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삶은 카르마 상의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 그 가운데 가장 큰 과제는 나와 남을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케 되는 일입니다.

나와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함은 그와 나의 수많은 과오를 경멸심 없이, 이원적 판단을 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매사 현재 상태의 완벽함을 보고 따라서 아무도 용서하고 말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고의 이분법을 초월해서 신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하게 어려운 일이기에 평생이 걸리는 일이고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에고가 죽어야 하는데 실상 이 길을 가서 뚜렷한 성취를 보인 신비가들과 학인들이 있기에 도전을 포기 않는 것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말년을 한미하게 보낸 경허스님은 바보 천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번역하다 보니 성성(聖性)과 관조의 길은 한편 바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인용합니다.

"독일어의 '어리석다(selig)'에는 '복받은(blessed)'의 뜻이 있다. 관조(contemplation)란 신과 신의 사랑을 위해 바보처럼 보낸 시간이다. 그것이 바보인 이유는 통제할 수도, 터득할 수도, 계획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로 명상의 길은 바보만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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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을 잡아라(允執厥中)

2019.07.14 07:35 | Posted by 목운

제가 경전을 인용해서 풀면 꼭 어렵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지배와 통제를 통해서 독점적으로 권세를 누린 자들이 어렵게 느껴지도록 해왔을 뿐 아니라 거짓과 왜곡을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가르침도 예수께서는 가장 당대인들이 알기 쉽게 말하셨고 수시로 간략한 요약 및 해석을 덧붙이셨지만 후대인들이 교묘한 장난을 쳐서 복잡하게 만든 측면이 농후합니다.

대표적으로 중용에서 '중'이 천하지대본이라 했으면 그것을 쉽게 풀고 실천방법을 전수했어야지 이것을 바꾸어서 대중을 향해 '농자 천하지대본'으로 바꿔 써먹습니다. 농업사회에서 '농'이라 하면 바로 생산력이고 생산력이 세상의 근본이라 풀면 뭐가 떠오릅니까? 그것이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유물주의고 어쩌면 조선이 망한 것은 오늘날 소비에트연방이 망한 이유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유물주의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경영학의 '이요인론'만 알아도 이해됩니다. 아무리 물적 조건을 갖춰줘도 사기를 올리는 요인은 물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게 이요인론의 요지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대승불교와 똑같으니 예수께서 요약한 신애와 인인애 실천이 핵심중 핵심입니다. 그리고 대승 정신에서 벗어나는 게 전혀 없는 중용과 주역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중을 잡고 그것을 세상에서 구현하라(和)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을 잡는 실천방법이 제가 앞서 써놓았지만 '생각없이 행함없이 고요함에 머물러 우주와 소통하는(感而遂通天下)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매일 일정시간 홀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소리를 못하는 게 오늘날 동서 모든 교육기관의 허점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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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비가

2019.07.13 06:15 | Posted by 목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초벌 번역을 마쳤습니다. 열심히 교정해서 여기저기 노크한 다음 책이 될 팔자(?)가 있으면 책이 되리라 봅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기독교에만 해당한다고 본다고 느껴서 거부감이 있었지만 일단 객관적으로 들여다 본다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방문하시는 분들과 핵심 메시지를 공유코자 조금 소개해보면 쉽게 얘기해서 단순한 그리스도인은 교회 잘 출석해서 통상 행하는 예식에 참여하고 기도를 바치는 사람인 반면 그리스도교 신비가라면 관조의 생활(contemplation)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이 말의 어원에 점을 친다는 뜻이 있었으나 기독교에서 쓰이면서 그 뜻이 배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주역이 떠올랐습니다. 역경의 원래 취지는 생각도 없고 행위함도 없이(無思也 無爲也) 고요한(寂然不動) 신의 경지에 맞춰 살고자 하는 것인데 오히려 점술로 이해하는 속인이 많은 것과 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요점을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란 신의 현존체험을 고취하기 위해 신에게 몰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가 요약한 두 가지 계명 가운데 신애(神爱)의 실천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다른 모든 행이 신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되도록 하자는 영성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요점이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중을 잡고(允執厥中) 그 정신으로 모든 덕을 닦는(和) 중용의 정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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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 윤집궐중, 지관

2019.07.09 09:09 | Posted by 목운
그제 명상시간 이후 최대 묵상거리는 '신 의식'의 화현이 되자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애(神爱)의 다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동시에 바오로가 거론한 쉬지 않고 기도하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중용 또는 중도를 잡기 위한 선행조건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중(中)을 잡는다(允執厥中) 할 때 중에서 벗어나면 과(過)하거나 못 미치게(不及) 되는데 따라서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중에 머무는 것이 바로 신 의식에 일치한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종교와 통속을 같은 꽈로 보며 기독교가 '모든 경전의 정신이 신애와 인인애'라 하신 예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신애의 길은 대승불교에서는 지관이요 기독교에서는 렉티오 디비나와 쉼 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과 하나 되는 데 있다고 보는데 두 길은 실천적으로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에고로 에고를 다스리려는 것은 오답(以情止情, 是乃大情)이니 꼭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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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심지여와 심생멸

2019.06.26 07:34 | Posted by 목운

어제는 고전음악에 대한 책을 읽다가 servant가 valet보다 아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략 18세기 음악가들은 궁정에 채용되지 않으면 생계가 매우 어려워지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출신이 대개 servant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모차르트는 여기에 반기를 들고 최초로 프리랜서를 선언한 음악가라 합니다.

각설하고 저쯤에서 자유라는 말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영성 깊은 말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자유란 영어로 하면 'from self'죠. 밖의 것, 또는 밖에서 주입된 모든 것을 부인하고 내면의 것만 따라서 산다면 비로소 자유롭다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self와 Self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1~2세기에 정리된 대승기신론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즉 심진여를 Self, 심생멸을 self로 따로 구분하지 않으면 바로 혼란에 빠집니다. 그렇게 해서 마태오 16:24의 '자기를 부인하라(forget self)' 할 때도 심 생멸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경전들의 회통도 되고 요새 경영학이나 자기개발서들이 말하는 '자아실현'이란 말도 명료해집니다.

요컨대 자유란 세상 살기와 몸의 진화에 복무하는 소아 또는 심생멸이 아니라 하늘의 프로그램이 새겨진(天命) 참나(性) 또는 심진여에 따라 살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저는 공자께서 종심소욕 불유구를 말하실 때의 마음도 심진여라고 보는 겁니다. 심진여에만 의지해서 사는 데 꼭 필요한 수련이 명상이며 이 수련은 밥먹고 양치질하듯 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영성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데 서양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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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8:58 | Posted by 목운

비번이어서 괜찮은 영화를 찾다가 '인 디 아일(in the aisles)'이라는 독일 영화를 봤습니다. 꽤 수준 높은 영화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두 가지가 인상 깊었습니다. 첫째는 전세계적인 현상인데 세계화로 인한 제3세계화의 질곡을 겪는 생존선 상의 인민들은 어디든 똑같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는 주로 동독 출신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 기생충과도 맥이 닿습니다. 경제적으로 저 인민들은 강고한 시스템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자유를 못 누리는 게 감옥생활이나 다름없다는 느낌입니다. '인 디 아일'에서는 버티다 못한 부르노가 자살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기생충에서는 폭발적 파국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의 파국은 매우 한국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특별히 감옥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꿈꾸는 것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해방인데 이 영화에서는 파도소리 들리는 바다와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쇼생크 탈출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조금 의식이 낮은 브룩스는 석방된 후 자살을 하는데 저 독일 영화의 브루노와 겹쳐 보입니다. 하지만 쇼생크의 주인공은 많은 이의 꿈대로 바닷가에서 편안한 삶을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지지요!

제 나이 정도의 체험으로는 저들의 실패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답과 개인적 답을 제안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정치사회적으로는 기본소득제를 골인점으로 두고 계속 복지국가로 가는 것이 답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복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이요인론'에 따르면 위생요인(즉 경제문제)의 해결이 정신의 문제(사기요인, 즉 삶의 의미)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정신의 문제는 공자님의 종심소욕불유구나 선가귀감의 세간을 벗어난(출세) 자유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 독일 영화도 계속 외로움의 문제를 던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동병상린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아일여와 물아양망을 통해서 모든 존재와 하나임을 알고 체험하는 출세자유인의 경지를 모르면 외로움의 문제는 극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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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극기복례인가?

2019.05.08 05:56 | Posted by 목운

우리가 살면서 오감을 기초로 얻는 사유로부터 통속성과 세상 즐거움 이외에는 없다는, 즉 보이는 게 전부라는 신화를 받아들인 결과가 지금 세상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통하면 된다는 의미의 통속성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면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실천하게 되고 희소성 원리 위에 세워진 경제성 원리에 따라 살게 되고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수월성 원리(사실상 우리 교육의 바탕이죠!)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1등을 하여 잠시 세상에서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데 투철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입증한 대표적 인간들이 박근혜와 양승태라고 봅니다.

이들 사회진화론, 경제논리, 수월성 원리 위에 세워진 세상을 바꾸려면 그것들이 사회운영에 꼭 필요하더라도 반드시 우리 전통의 극기복례 원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극기복례에서 '돌아갈 예(복례)'란 우주의 근본 원리(天理)이며 중용의 도(道)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경영할 자리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에 따라 살 때 평천하, 즉 평화로운 세상이 구현된다고 본 것이 대학의 요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나 인도에도 그대로 있으니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동굴의 우화는 붓다의 마야에 대한 가르침과 같은바 세상 모든 것이 홀로그램인 것이니 에고를 초탈(극기)하는 것이 제대로 된 답이라는 것입니다. 가시계는 모든 이들 의식이 집단으로 매순간 창조하는 것들이 스크린처럼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라는 것(이것은 한편 첨단 과학인 홀로그램 이론으로도 입증됩니다), 이러한 세상에 우리 참나가 잠시 만들어낸 몸을 의탁하고 그 몸을 써서 작품을 만들고(즉 창조에 참여하고) 있지만 우리 참나는 세상 것이 아니니 세상을 그저 가운 걸친 것처럼 살다가 다음 차원으로 더 높이높이 날아 올라가는 것이 우리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의 진화는 계속 더디기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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