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생전 처음 강연료쪼로 정신세계사에서 돈을 받은 것과 또 이번 달에 생전 처음 인세 계약으로 책을 내게 된 것은 제게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모두가 제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꾸준히 해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저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공부한 성과를 꾸준히 나눈 결과입니다.

그러니 이제 먼저 줌으로써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체험한 셈입니다. 2015년 가을 만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진짜 삶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4년 동안 나눔을 했더니 강연 부탁을 받았고 오프에서 함께 공부하려는 분 십여 명을 만난 것입니다. 번역의 경우는 우선 삶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제 관심에 부응하는 것들을 여가 시간에 번역했다가 출판사를 노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무료로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나눌 것이 있어야 먼저 줄 수 있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은 명상에서 얻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은 지 2년만에 명상을 꾸준히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비애감과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그 바탕에서 노동과 독서를 꾸준히 할 수 있었고 여타 거의 모든 환경이 개선 향상했습니다. 심지어는 5년 동안 2017년엔 월급이 33% 한 번, 25% 한 번 - 그렇게 커지기도 했습니다(기저효과도 감안해야 합니다. ㅎ).

요컨대 먼저 세상에 무언가 베푸는 일은 돈을 모으는 데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풍요와 전능의 원천인 신 의식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내 문제를 상의하며 그쪽에서 주시는 답에 호응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은 이것이 주역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가 맞는다 함은 언제나 무극 또는 태극에 일치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자리와 깊은 교감을 이룰 때 진정한 창의와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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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매월 모이는 동기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당구를 치고 저녁을 먹는 모임입니다. 정치적 견해가 확연히 달라 소위 '스몰 토크'만 하니 재미가 없지만 당구 게임을 하면서 수행 공부에 대한 시사를 받는 일은 매우 유익합니다.

몸이, 또는 행이 생각대로 될 때까지 셀 수 없이 단순한 동작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는 것이죠. 저는 붓다께서 보리수 나무 밑에서 6년을 명상했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다는 것이냐? 스승들 말씀 듣고, 경전 읽고, 명상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노동도 하셨을 겁니다.

단 하나의 길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거기에 딱 맞는 자세로 정밀하게 몸을 움직여 공을 맞추기 위해서는 수천 번, 심지어 수만 번의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이블에 따르면 수행의 길은 곧고 좁습니다.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길을 정확하고도 정밀하게 처신하며 앞으로 가지 않으면 바로 미끄러질지 모릅니다. 스승의 언행이 몸에 밸 때까지 읽고 실천하기를 수천 번씩 해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매일 정좌 내지 좌선을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얼벗 김동택 님이 운영하는 커뮤니티 '재미있는 한자 이야기' 어제 글을 보면 '禪이란 祭天也(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모든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결국 신성을 찾고 그로써 풍요 이상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는 것이 종교, 과학 등등인 반면 내면에서 찾으려는 게 영성 내지 신비주의입니다.

오늘날 이 둘이 수렴 내지 통합의 길을 가는 게 관찰되지만 제 경험상 종교는 실패했고 신비주의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여러번 썼지만 신비주의 실천은 영적 독서와 명상이고 그것을 실천하신 분이 붓다와 그리스도라고 보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관한 대중서를 번역해서 쉰 분 넘게 나눠드렸는데 필요한 분은 이메일만 주시면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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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간 하와이에서 놀다 왔습니다. 9일날은 일몰 보러 마우나 케아 4200미터 정상엘 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누군가가 'Don't worry. Be happy'를 틀었는데 제게는 동아시아 모든 선사들의 설법을 요약한 제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어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떠들었는데 이곳에도 적어 보겠습니다.

요컨대 서양 애들이, 염려를 없애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데까지는 알지만 그 방법을 아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식념망려(息念忘慮)는 황벽 선사의 전등록에 있는 말인데 결국 이분법을 벗어나고 이름 붙이기를 중지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념망려로써 염려를 없애는 방법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완전히 항복하라고, 다른 말로 'surrender'하라 했더니 너무 세다고 해서 답하길 임종때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항복이 아니겠냐고 답했습니다. 호킨스 의식지수 600의 깨달은 사람은 이승과 저승 간 선택에 아무런 선호가 없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포기 내지 내려놓기(letting go)를 했을 때 역설적으로 행복감이 극에 이를 뿐 아니라 그 행복감은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합친 것보다 크다는 것이 스승들 말씀입니다. 이 일은 마태복음 16:24절이 말하는 자아 포기에 정확히 부응한다고 저는 봅니다.

자아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노선대로 자신의 의지는 사라지고 신의 의지대로 사는 경지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다른 모든 세상사에서도 우리는 불가능에 도전해보라고 말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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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을 위해, 원만함을 위해 복을 빌 수는 있지만 복은 비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는 것쯤은 주지하시는 대로입니다. 카르마 법칙이 상선벌악만 말하고 말면 아직 낮은 수준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의식이고 이제까지의 의식을 비워내거나 닦아내고 높은 의식, 즉 붓다 의식이나 그리스도 의식에 가까이 갈 때 기하급수적으로 복을 느끼게 되고 고통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 안다면 교회나 절간, 또는 일출일몰터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집니다.

안팎이 똑같도록 매순간 내면을 돌아보고(誠의 실천) 과거와 미래에 관한 모든 생각을 비워내면서(息念亡慮) 오직 희로애락이 나오기 전의 공적영지 또는 허령불매 자리(中)에 언제든 들어앉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을 악기연주자처럼 무술을 닦는 자처럼 매일 반복할 때 점점 붓다 의식 또는 그리스도 의식과 닮게 된다는 것이 제가 파악한 동서 신비주의 수행의 핵심이자 공통점입니다.

그렇게 매일 연습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얼마나 하는지는 남들이 알기 전에 자신이 압니다. 게다가 그 결과를 얻는 것까지 지금 여기서 정해지는 것이지 사후에 정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매일이 최후의 심판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비약인 듯 아닌 듯, 비약하자면 4.15 총선 결과도 어제 오늘 다 나와 있던 걸요! 모쪼록 제 블로그 독자님들은 묵묵히 매일 복을 지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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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가는 해 마지막 날 제 공부 얘길 많이 했더군요. 맹자께서 진작에 천작과 인작을 나누어 공부를 보셨고 논어 학이편의 공부란 수덕 공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겉모습에 사로잡힌 오늘날 교육체계가 인작으로 천작을 대봉치고 만 덕분에 저를 포함해서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합니다(물론 누구나 시행착오와 과실을 통해 진화의 길을 갑니다만).

돌아보면 2014-15년간 물에 빠진 자가 허우적대듯 매달리며 공부했고 15년말 '그리스도의 편지'를 만나면서 거기에 '올인'한 지 약 2년만에 매일 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균 50분정도 매일 정좌를 합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조금 더 가면 호색보다 호덕을 더 좋아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을 다른 무엇보다 더 좋아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말 꺼낸 김에 가장 분명히 달라진 것을 말하라면 과거에는 불쾌한 꿈을 꿀 때면 매우 육감적인 것들이 올라왔는데 요즈음엔 아직 다정한 정을 나누진 못하지만 그리운 아버지 모습을 가끔 본다는 것입니다. 잘 해 드리지 못했고 그런 반성도 거의 해본 적 없거든요! 하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바라듯이 내가 최고선에 가까울수록, 즉 지어지선(止於至善)할수록 효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에도 효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결의 하나만큼은 엊그제 거론했듯이 불퇴위에 다달아 있습니다. 모쪼록 동학들께서도 천작에 있어 매일, 매년 향상하시길 빕니다. 그렇게 하면 수신제가는 물론 나라도 저절로 나라다워진다고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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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를 기본 교재로 삼아 수행공부를 함께하는 세 분이 모처럼 영종까지 오셨습니다. 운양호 사건때 일본군한테 30여 명의 군인이 희생된 영종진과, 금년에 다리로 연결된 무의도를 둘러봤습니다. 이어서 공항도시 회타운에 들러 해물찜에 막걸리를 먹으며 사는 얘기와 공부 얘기를 나눴습니다.

비망용으로 요점만 적어 봅니다. (1) '그리스도의 편지' 의식지수가 1,000이라는 것. (2) 시크릿류의 방편에서 결한 것은 에고소멸의 중요성이라는 것. (3) 명상의 가장 큰 효과는 근심걱정의 소멸, 직감의 계발이라는 것. (4) 기독교 기반의 서양 문화가 죄감문화라면 송명이학 기반의 동아시아 문화는 낙감문화라는 것(리쩌허우). (5) 기본소득제는 우리 사회 문제 해결의 킹핀이 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공부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기 공부를 점검하고 공부의 진보에 뜻을 모으기 위해 불원천리 달려가는 것을, 고도의 미감에서 나오는 즐거움으로 본 것이 논어 1장입니다. 리쩌허우는 이러한 것이 바로 동아시아 사람들의 낙감문화라 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미 세속화하고 자본주의 도구화한 기독교를 송명이학의 언어로 풀어내 봤으면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말 불교 극복을 위하여 선불교를 유교의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주렴계 주희를 거친 송명이학 탄생의 계기를 마련한 이고 선생이 한 일과 비슷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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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창원에 있는 친구 보러 7명이 뭉쳐 1박2일 여행했습니다. 윤이상 선생, 박완서 선생, 박경리 선생 등이 사셨던 발자취도 구경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깊은 것은 차 안에서 아무말 대잔치 하듯 스몰 토크에서 빅 토크까지, 정치에서 사상까지 뱉어냈는데 엔진 소음, 바깥 소음 때문에 각자 듣고 싶은 소리만 들었을 겁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저녁엔 대취할 사람은 대취하고, 끝까지 마음에 있던 질의, 응답까지 마치 여한없이 떠날 사람들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 이 시간까지 뇌리에 있는 말은 "자네 도통했는가? 깨달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제 답은 사이다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가는 중"이라 답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내가 이제 길은 알았으니 같이 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답이 마치 숨겨져 있는 것처럼, 누군가 도통한 사람만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들이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길은 이미 다 알려져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곳에 썼지만 그것은 '매일 일정 시간 정좌 내지 정관(静观, contemplation)을 실천하고 신적 독서(Lectio Divina)와 내려놓기(放下)를 끝없이 행하면서 무조건적 사랑이 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게 가면서 제가 관찰하는 풍경, 즉 내면의 풍경과 외적 변화를 적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이 공부를 잘 요약한 문구가 있어서 가져옵니다. 무조건적 사랑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존재상태이며 그 존재상태에서 저절로 발하는 것이 덕이고 보시(布施)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끝없는 상승의 길이기에 언제나 '진행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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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1차 대학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면접에서 무얼 전공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철학'이라고 답한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은퇴후 가장 호젓하고도 뜻있는 시간을 보내는 두 달 반이 지난 지금 어쩌면 제대로 철학을 한다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저런 답을 한 동기는 짐작컨대 10대후반 육신과 정신의 갈등 속 나름 고통스런 실존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달 내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으면서 13-14세기를 사신 그분이 부딪친 문제도 바로 사람들의 실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만난 '신적 위로의 책'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설교 내지 강론의 하나인데 집필 동기가 바로 제가 이곳에 수차 거론한 적 있는 세 가지 인생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바로 손재수와 이별수, 그리고 건강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이나 신학, 형이상학은 저로서는 어마무시하게 어려워서 그저 페이지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설교들은 바로바로 이해됩니다. 전에 소개한 '훈화' (혹은 '영적 강화)도 초보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면서도 그의 철학의 기본 생각을 논한 것인데 신적 위로의 책도 일반 신자들을 위한 말씀들입니다.

이 설교들이 얼마나 우리 심중 깊은 곳을 건드리는지, 또 얼마나 상식에 가까운 것인지 반색할 만한 대목 두어 개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외적 사물을 잃은 손실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면 이는 내가 외적 사물을 사랑함과 함께 진정으로 고통과 슬픔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징표가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고통과 슬픔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면 이럴 때 내가 고통에 빠져든다는 것이 뭐가 그릴 놀랄 일이겠는가?"

위 말씀은 제가 현대 최고 영성으로 여기는 호킨스 박사 말씀과 동일합니다. "모든 위로가 나오게 마련인 신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린다면 그럴 때 내가 고통에 빠져 슬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그대가 위로받으려면 그대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라." 이상 문구의 인용처는 이부현 편집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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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좌(靜坐)'가 무엇이냐고 물어주신 분이 계셔서 제 글쓰기가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좌는 유교 체계 내에서 명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천은 같아도 말이 문화적 DNA를 그대로 달고 다니기 때문에 어휘 선택이 중요합니다. 명상이라고 하면 나름 떠올리는 선입견으로 판단하거나 심지어 하지도 않으면서 '다 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조건 시간을 내서 10분씩 앉아 있자고 크게 결단하고 1년이고 2년이고 행하다보면 동서양 신학과 철학 등등에서 말하는 진리에 다가가게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경전 독서가 그 보조 수단으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교문화권에서는 제사로 때우는 것이고 기독교 문화에서는 미사 참석이나 설교 듣기로 퉁치는 것입니다.

'격물치지'도 이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얘기하는 것보다 2010년 한겨레에서 보도한 광주 대성여고 학생이 학교에서 실천했던 명상에 대한 평을 공유하는 것으로 제 메시지의 핵심을 전하고자 합니다. 

조하선양은 “사실 처음엔 명상이라는 말의 어감이 ‘수행’이나 ‘도 닦는 것’ 정도로 느껴졌는데 이젠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명상의 효과를 지나치게 학업성적이나 학습능력의 향상 여부로 평가하지 말아주세요. 학습능력이 향상되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덤이구요. 명상을 통해 매 순간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삶의 질이 향상되고, 통찰력이 생겨 진짜 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게 진정 명상의 가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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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퇴직 무렵부터 '반일정좌 반일독서'를 실천했다면 수십년의 삶을 아꼈을텐데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주희가 송명이학을 집대성했지만 그가 정좌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작업들이 생명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주 떠나기 전 근본 결단을 하고 다시 도시생활을 하면서 일하는 시간외에는 독서만 하다가 약 2년 전부터는 정좌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검색하다보니 '반일정좌 반일독서'는 주희가 곽덕원이라는 제자에게 처음 한 말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

주희는 반나절을 정좌하고 반나절을 독서하되 1, 2년을 지속하면 모든 우환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만물의 이치를 탐구(궁리라고 하는데 격물치지와 같습니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이 궁리로써 마음을 비우고 근심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경우 초중고대, 군대, 직장, 통틀어 거의 반 세기 동안 바깥 것들을 기준으로 살다보니 (물론 교회 영향으로 왔다 갔다 하긴 했습니다) 나만의 격물치지가 안 되어 그저 관성대로 살다가 큰 어려움을 겪고 근본결단을 한 셈입니다. 한편 전성기도 끝났기에 오직 근신하고 궁리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긴 했지요.

하지만 주희 선생 말씀대로 제 경우 모든 우환이 사라지고 이젠 어떠한 병고도 '고통 없이 고통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달리 어떤 환경에서도 내면이 거의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혼자 있어도 전에 느끼던 비애감이나 고립감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외적으로 인증된 것인지 몰라도 내일은 제 독서 경험과 명상 경험을 발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대문에서 30명 못 되는 분들께 말씀드릴 예정인데 혹여 관심 있는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두세 자리가 남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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