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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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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참나와 성인의 참나가 같습니까?” “걸왕 주왕의 참나는 요순의 참나와 같습니다. 그들이 참나를 보지 못한 이유는 욕망과 악을 좋아하여 어두워진 때문이지 참나의 탓이 아닙니다.” “악을 하는 것은 참나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에고의 작용입니다. 에고에는 선악이 있지만 참나에는 악이 없습니다. (問曰. 凡人之性, 猶聖人之性. 故曰. 桀紂之性, 猶堯舜之性也. 其所以不覩其性者, 嗜欲好惡之所昏也, 非性之罪也. 曰. 爲不善者, 非性也. 曰. 非也. 乃情所爲也. 情有善有不善, 而性無不善焉.) 


맹자[告子上]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은 낮은 데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 없다. 만약 물을 쳐서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 높이를 넘어가게 할 수 있고 물결을 막아서 거슬러 올라가게 하면 산 위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 때문이겠는가?’ 억지로 끌어들이는 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나는 모두 선하므로 그 악한 것은 모두 물의 예와 같습니다.” (孟子曰.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夫水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 其所以導引之者然也. 人之性 皆善, 其不善亦猶是也.)


“요순에게 어찌 에고가 없습니까?” “성인은 지극히 온전합니다. 요순은 16명의 재상을 천거해서 썼지만 사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공공과 환도를 유배 보내고 우임금의 부친인 곤을 처형하고 삼묘를 토벌했지만 개인적 감정으로 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절도에 맞았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 모범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問曰. 堯舜豈不有情耶. 曰. 聖人至誠而已矣. 堯舜之擧十六相, 非喜矣. 流共工, 放驩兜, 殛鯀, 竄三苗, 非怒也. 中於節而已矣. 其所以皆中節, 設敎于天下故也.) 


주역에 말하길 ‘변화하는 도리를 안다는 것은 신명의 작용과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중용에 말하길 ‘희로애락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중이라 하고 드러나면 모두가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합니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며 화는 천하의 끝까지 통하는 원칙입니다. 중화가 이뤄지면 천지가 모두 제 자리를 찾고 만물이 생장합니다. (易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中庸曰.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下位焉, 萬物育焉.)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길 ’덕행이 깊으니 천하만물의 마음에 통하고 날카로운 예지로써 지극히 어려운 일을 이루고 수양이 신령한 데 이르러 재주가 둔한 것 같지만 실제 움직임은 재빨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목표를 달성하고 있습니다. 이를 일러 성인의 경지라고 합니다.” (易曰. 唯深也. 故能通天下之志. 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 唯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 聖人之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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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3

2016.04.01 20:24 | Posted by 목운

이르기를 감히 묻습니다. 참된 앎에 이르려면 먼저 사물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여 답합니다. “물이란 모든 것을 말하고 격이란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 닥쳐올 때 마음을 맑게 하고 자명하게 판단하여 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지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曰. 敢問. 致知在格物, 何謂也. 曰. 物者, 萬物也, 格者, 來也, 至也. 物至之時, 其心昭昭然明辨焉, 而不應於物者, 是致知也,)


이 지혜는 두루 미칩니다. 지혜가 두루 미치기 때문에 뜻이 투명하며 뜻이 투명한 때문에 마음이 바르고, 마음이 바른 때문에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때문에 집안이 가지런해지며, 집안이 가지런해지기 때문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때문에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비로소 창조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는 성인의 경지입니다. (是知之至也. 知至故意誠, 意誠故心正, 心正故身修, 身修而家齊, 家齊而國理, 國理而天下平. 此所以能參天地者也.)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기를 성인의 행실이 우주의 도리에 맞기 때문에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지혜가 만물에 두루 미쳐 진리로써 구제하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빗나가 흐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즐거이 따르기 때문에 근심이 없습니다. 본분을 지키고 어짊이 두터우니 능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易曰. 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세상을 기르고 지탱하면서 실수가 없고 빈틈이 없습니다. 음양운행의 이치를 분명히 알아 모르는 바가 없어 성인은 그 변화를 헤아리기 어렵고 일정한 모습도 없습니다. 한 번의 양과 한 번의 음이 합쳐서 도를 이룬다는 것은 이것을 말합니다.'“ (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遺, 通乎晝夜之道而知. 故神無方而易無體. 一陰一陽之謂道, 此之謂也.)



자습노트)

세상의 경영, 자비의 실천이 모두 뜻의 투명함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때 비로소 사물이 변하는 대로 또 세상이 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경영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맑고 투명하여 언제나 하늘의 뜻에 순명한다면 하늘의 권능에 참여하는 성인의 경지에 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태극과 무극에 음과 양의 창조 추동력이 이미 내재하고 있으니 거기에 맞추는 것이 창조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에고를 잠재운 상태에서 하늘의 뜻을 분명히 인식하고 다시 에고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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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2

2016.03.30 20:40 | Posted by 목운

묻습니다. "아예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를 모른다면 소리가 나도 들리지 않고 사물이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답합니다.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면 어찌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똑똑히 보고 듣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에 휘둘려서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참나를 실현한 후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게 없고 하지 못하는 게 없으며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지혜의 빛으로 모든 것을 꿰뚫으니 그것은 의식이 맑고 투명한 때문입니다. (問曰. 本無有思, 動靜皆離, 然則聲之來也, 其不聞乎, 物之形也, 其不見乎. 曰. 不覩不聞, 是非人也. 視聽昭昭而不起於見聞者, 斯可矣. 無不知也, 無不爲也, 其心寂然, 光照天地, 是誠之明也.)


대학에 가라사대 "참된 앎에 이르려면 모름지기 먼저 사물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경(系辭上傳)에 가라사대 "주역의 정신은 생각도 걱정도 없어야 하고, 일부러 행함도 없어야 하니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물을 느껴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경지의 성인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이르겠는가?"라 하였습니다. (大學曰. 致知在格物. 易曰. 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자습노트)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서는 의식의 작용이 오히려 맑고 분명해지며 또한 에고의 욕심에서 나오는 사언행위가 없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사물에 대한 판단과 선택이 더욱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습관이 들면 무소부지, 전지전능의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모든 영성 수련 및 그와 유사한 수행이 지향하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꾸준히 닦을 때 우리는 점점 더 밝아지고 언젠가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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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도 생각도 없을 때 사물은 밖으로 향하고 감정은 안에서 작용하니 어떻게 그것을 제지합니까? 한가지 감정으로 다른 감정을 제어하는 게 가능합니까?" "에고란 참나의 치우친 작용이니 먼저 에고의 속성이 치우침에 있고 치우침이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그릇된 생각이 저절로 그칩니다. 오직 참나가 밝게 비추면 치우침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에고로써 에고를 그치게 하려는 것은 에고를 더 굳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問曰. 不慮不思之時, 物格於外, 情應於內, 如之何而可止也. 以情止情其可乎. 曰. 情者, 性之邪也. 知其爲邪, 邪本無有, 心寂不動, 邪思自息, 惟性明照, 邪何所生. 如以情止情, 是乃大情也. )


일곱가지 감정이 서로 돌아가며 작용한다면 어떻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주역(系辭下傳)에 말하길 '안회의 덕행이 거의 성인의 경지였다. 아직 모르는 자신의 결함이 있으면 그것을 알아내어 다시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또 말하길(系辭下傳)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멀리 가는 법이 없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 고치니 매우 훌륭하다.' 하였습니다." (情互相止, 其有已乎. 易曰. 顔氏之子,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不行也. 易曰. 不遠復, 無祗悔元吉.)


자습노트)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은 에고로 에고를 다스리려 하면 에고가 더 굳어진다(如以情止情 是乃大情也)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킨스 박사도 에고를 이해하고 자비롭게 대함으로써만 없어진다고 합니다. 안회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도 에고의 작용을 안 다음에는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며, 선지식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수행이란 6바라밀 또는 4단의 기준에 따라 매 순간 개과천선하여 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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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2

2016.01.13 11:47 | Posted by 목운

주역(乾卦 文言傳)에 이르기를 "무릇 성인은 그 덕이 천지에 부합하고, 그 밝음이 해와 달과 같으며, 그 질서는 사계가 바뀌듯 하고 길흉의 징조를 통찰하는 데는 신령과 같으니 하늘보다 앞서 가도 하늘에 어긋남이 없고 하늘을 뒤따르면 그 뜻을 받드니 어떤 사람이나 신령이 그의 뜻을 어길 수 있으랴? 그 모두가 몸 밖에서 얻는 게 아니고 참나가 드러나 발휘된 것일 뿐입니다." (易曰, 夫聖人者, 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已矣.)


자사가 말하길 "오직 하늘과 땅에 숨김이 없을 때 그 참나가 모두 발현하는 것이니 참나가 모두 발현하면 다른 이의 참나가 발현할 것이고 다른 이의 참나가 발현하면 사물의 본성이 발휘되고 사물의 본성이 발휘되면 세상의 생존을 돕는 것입니다. 세상의 생존을 도움으로써 천지와 창조 작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子思曰,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


그 다음에 빈틈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빈틈없이 드러내면 사사로움이 없게 됩니다. 사사로움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니 투명하고 투명하니 통하게 되고 그 결과 변화가 이뤄집니다. 그러니 빈틈없이 드러내고 사사로움이 없어야만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자습노트)

주역과 중용에서 묘사한 성인에 대한 해설입니다. 저는 호킨스 박사의 가르침에 비추어 읽었습니다. 즉 주역에서 핵심이 되는 문구는 '성인의 무한한 능력이란 어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움이 전혀 없을 때(즉 誠이 이뤄질 때) 참나가 드러나서 참나가 주도적으로 행함으로써 이뤄지는 것(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矣)'이라고 봅니다.


이어지는 중용 22장과 23장 자사의 언급도, 곡(曲)을 빈틈없이 정직한 것, 성(誠)을 사사로움이 없이 겉과 속이 다 드러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형(形)과 더불어 같은 경지를 다른 각도에서 기술한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60년 가까운 삶에서 가장 크게 반성한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의식에서 사사로움이나 비밀이 전혀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살자고 결심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것과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럴 때 다른 아무 노력을 하지 않고 의식을 깨끗하고 온전하게 가져가려는 노력이 바로 영적 수행 내지 수양의 시작이자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호킨스 박사는 영적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만이 세상에 제대로 기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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