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신과의 입맞춤~ 시간(11)

목운 2023. 6. 6. 09:28

상술한 것처럼 창조와 초탈의 밀접성이 가리키는 것은 창조를 특정 시점에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밀접성을 "말하기"라는 생각으로 표현하는데 그로써 초탈에서 신과 가까와지는 것과 창조의 "순간"을 잘 드러내 준다. 창조는 단순한 산출이 아니라 신이 영혼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를 순간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초탈을 통하여 "창조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창조와 초탈 간의 이러한 긴밀성에 비추어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이 무엇인지 하는 의문은 다시 취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주장하려 하는 것처럼 인간은 초신과의 관계성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면 에크하르트가 초탈에 비추어서 인간 존재를 생각했는지 하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설교 15에서 에크하르트는 복음서 인용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즉 "고귀한 사람이 있었는데 자신을 떠나 외지로 갔다가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 "외지로 갔다."는 것은 신에게서 유출(ebullitio)됨을 상징하는 반면 귀향은 초신과의 합일인 돌파를 뜻한다. 인간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창조된 이미지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그것은 자신에게서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초탈은 비록 겸손과 반대로 사물을 향하여 나아갈 필요가 없지만 완전한 겸손과 똑같이 "자아의 소멸에서 시작해서 나아간다." 게다가 초탈한 사람은 바라는 게 없고 아는 게 없으며, 가진 게 없고 갈구하는 게 없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욕망이 없다는 의미에서 가난하다. 앞서 기술한 대로 에크하르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것과 반대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집착(eigenschaft)"이란 말을 사용한다. 'Eigenschaft'는 "자질", "특징" 또는 "성질"을 뜻한다. 그 어떤 성질도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실로 'Eigenschaft'의 일부인 'eigen'은 '분리'뿐 아니라 '소유'를 뜻한다. 'eigen'과 'eigenschaft'의 독특함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자질(Eigenschaft)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떨어져 있음(detached)을 뜻할 뿐 아니라 자아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뜻하며 무(無)인 자신의 기원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진짜로(eigentlich) 자신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거의 모순되게 말했듯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탈(버리고 떠나 있음)은, 집착 속에서 매일 존재하는 것보다 더욱 원초적인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초탈은, "참으로 완전히 초탈한 사람은 자신을 죽은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아소멸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인간 존재를 집착감 속에 두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내면적인 사람과 외면적인 사람 간의 구분을 조건으로 초탈과 집착의 관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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