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페이스북에 '그리스도의 편지 읽기'라는 그룹을 운영하는데 오늘 우리 공부는 편협한 기독교의 독선과 관계 없는 보통명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서 보통명사로서의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하는 공부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습니다.

제가 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저에게 탐심도 진심도 거의 없다고 여겨서 사실상 치심에 젖은 상태였습니다. 비로소 공부 시작했을 때는 탐심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죠! 나름대로 탐심이 엷어졌나 한 순간에 돌아보니 성내는 마음이 마구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그렇지만 자본가들 선전선동에 휘둘리거나 기레기들처럼 앞잡이가 된 자들,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마구 경멸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그 편린입니다. 하지만 일단 알고 인정하는 것은 극복의 시작입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일종의 과학입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기본 사양(?)은 누구에게나 같기 때문에 잘 관찰하고 기록하면 범용성이 생깁니다. 마치 세탁기나 냉장고를 발명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제 체험을 적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부 동지(同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요점은 자신을 잘 관찰하고 꿈을 포함해서 체험을 잘 적으면서 극복을 위해 열심히 하늘에 빌고(즉 매일 명상하고) 하루하루 마음밭의 농사꾼처럼 살면 분명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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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극복하는 공부

2019.01.02 06:02 | Posted by 목운

어제는 15년 전 돌아가신 제 부친과 동갑이신 장모님을 뵈러 동네 요양원엘 다녀왔습니다. 몸은 이미 유아상태와 흡사하게 되셨고 의식은 그저 이것저것 안부하시고 미안해하시는 마음만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을 전혀 알아보시지 못합니다. 아마도 기억이 다 지워지신 듯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진보했는지 어떻게 알아봅니까?" "얘야 전에는 화가 나던 일이 이제 웃음이 나지 않더냐? 그럼 나아진 게지!" 또 하나는 월쉬 책에서 읽은 것인데 깨달은 후에도 청구서는 날아오고 고통도 받지만 고통 없이 고통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요컨대 내면이 완전히 바뀌는 게 공부의 결과라는 것 같습니다.

어느 직장에서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는 고통과 더불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고통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불러들인 게 나요 그 사람은 내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카르마와 여정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공부가 안돼'라는 진심(嗔心)이 일어나지만 이 마음이 '공부란 농부가 같은 일을 묵묵히 정성들여 또 노고를 들여 하듯 매일매일 하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바뀔 때까지 그저 열심히 하고자 합니다. 특히나 마음 밭에 있는 돌멩이와 잡초를 열심히 들어내는 것이 공부라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 바탕이 완전히 바뀌어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친절할 수 있을 때 공부가 꽤 나아간 줄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겉으로만 그럴 듯하다면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치매에 걸리면 진심이 남아 있을 경우 의심하고 소리치고 때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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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환에 삶이 있음(生於憂患)

2019.01.01 06:30 | Posted by 목운

인상깊은 무엇인가를 적으려고 이것저것 한참 뒤적이다가 문구 두 개 찾았습니다. 어쩌다 바깥 세상에 초라한 책 하나 내보낸 것이 기승전'명상'을 얘기한 책이었는데 책이 나올 즈음 저는 나름대로 깊은 바닥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기본 개념이 제가 깊이 공감하고 큰 영감을 받은 필자 월쉬에게서 온 것이란 걸 확인했습니다. 월쉬는 그의 책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우리 안락한 세상이 끝날 때 삶은 시작된다. 그러니 지금 편치 않다면 삶에서 변화가 끝난 게 아니라 시작된 것임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월쉬와 잠시 함께 일했던 퀴블러 로스는 '죽음학'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다음 사진을 가져오려고 서론이 길었습니다. 쉬운 말이지만 옮깁니다. "우리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패배를 겪고, 고통을 겪고, 고투를 겪고, 상실을 겪고 바닥 깊은 데를 헤쳐나온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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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와 무지

2018.12.29 03:54 | Posted by 목운

제가 보기에 호킨스 박사, 20세기 인도 성자로 여겨지는 마하리쉬-마하리지, 그리고 도덕경과 금강경의 이상을 공통적으로 엮어주는 경지는 비이원성입니다. 선악 이분법을 초월하여 일자(Oneness)를 체험한 경지입니다. 그 근거는 이들의 체험에서 나온 진술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도덕경 10장의 다른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많아 의견이 분분하지만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지만 하는 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愛民治國, 能無爲乎)이고, 둘은 완전히 꿰뚫어 알지만 모른다 할 수 있는가(明白四達, 能無知乎)입니다. 

앞 구절은 "수없이 많고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실로 구제받은 중생은 없다"는 금강경 말씀에 통하며 금강경은 이것을 무위법(無爲法)이라 콕 집어 말합니다. 뒤 구절은 지극한 앎이기도 한 '위없이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이란 앎을 얻은 게 조금도 없는(無有少法可得) 것이라는 말씀에 통합니다. 이 모든 경지는 '내가 없다는 체험(無我法)'에서 나온다는 것을 금강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경이나 금강경의 '무위'란, 실상 세상 구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지만(無不爲), 무언가 했다는 의식이 들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순은 실제로 우리에게서 아상(에고)이 없어져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예의를 차린 말에서도 드러나는바 무언가 큰 일을 한 사람이 빈 말로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을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아상을 없애는 일은 누차 거론했지만 장자에서는 좌망(坐忘, 大宗師 7장)으로 기독교에서는 자신을 부인 내지 잊어버리라는(마태 16장 24절)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서 공히 아상을 없애는 길은 초월적 도움으로 가능하며 우리쪽에서는 명상을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게 필요합니다. 수많은 지식 습득과 경전 독서가 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루가복음 16장 20절의 어리석은 부자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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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無爲)와 무소주(無所住)

2018.12.28 07:57 | Posted by 목운

무집착의 문제는 도덕경의 무위자연과 금강경의 무소주(無所住) 실천에까지 닿는 문제입니다. 한편 1천 여년에 걸친 선불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믿음체계의 하나지만 실상은 노장 사상과 인도 불교가 융합된 체계라는 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니 무위와 무소주는 같다고 봐도 됩니다.

그렇게 보면 무위자연이 실천에서 동떨어진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금강경 정신에 따라 내가 없이 하고 한다는 생각 없이 한다는 것은 아상(我相, 즉 에고)이 없어진 상태에서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월쉬에 따르면 정신이 나간(mindless) 경지입니다. 

체험상 거기에 조금이라도 비슷할 거라고 여겨서 제 금연 체험을 말씀드렸는데 언젠가도 써먹은 표현이지만 나 자신은 물론 타인과 기타 사물을 '처삼촌 벌초하듯' 무심하게 보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제가 겪은 일로는 회의실에 어제 손님들이 남긴 과자를 보고 미세하지만 집고 싶은 마음을 의식했습니다. 이런 정도의 마음도 안 일어나야 정신이 나간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은 에고 차원의 단단한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규칙적으로 명상을 해서 시공을 초월한 체험이 습(習)이 되고 그야말로 높은 에너지 파장과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명상과 더불어 에고를 철저히 이해하고 그야말로 마스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신 의식의 대리인이 되고 무조건적 사랑과 무한한 창조력까지 상속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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