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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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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언어는 거의가 이분법 내지 이원성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상대계라고도 하지요. 영적 삶에서의 공부란 육적 삶에서의 공부를 암암리에 전제합니다. 맹자에 따르면 세상 벼슬, 즉 인작(人爵)을 추구하는 공부가 있으면 천작(天爵)을 추구하는 공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의 고자(告子) 상편에 따르면 천작이란 인의충신과 선(善)을 즐기되 지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지극한 선에 이를 때까지(止於至善) 공부하라는 대학의 뜻과도 통합니다.

제가 말하는 공부는 영적 공부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 전통에서 천작을 구하는 공부라 생각합니다. 인작을 구하는 대표적인 노선이 제 경우는 예비고사였지만 요즈음은 수능이 될 것입니다. 수능에서는 시험치는 순간의 실력이 최대가 되도록 계속 연습을 거듭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언제나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대충 하거나 포기 상태의 사람은 부족한지 여부에도 별로 관심 없거나 공부에 무관심할 것입니다.

오늘은 공부의 진전이 얼마나 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방법을 전하려고 서두가 길었습니다. 20세기 영성 공부에 있어 마하리쉬 님과 더불어 최고봉을 이루신 분으로 여겨지는 마하리지 님이 제시하시는 공부의 진전 징후는 매우 친근할 뿐 아니라 상식적입니다. 요컨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금방 수긍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 첫째는 근심이 없어졌는지 보는 것입니다. 불안, 근심, 걱정이 공부 시작할 때보다 훨씬 적어졌습니까? 아니면 아예 없어졌습니까?

둘째, 평안과 기쁨을 얼마나 깊이 느낍니까? 자고 일어나면 전보다는 '아이고 힘들어' 또는 '지겨워'가 없어졌습니까? 셋째, 안에서는 깊은 평화가 느껴지고 밖으로는 풍요한 에너지를 느낍니까? 전보다 생활에 활력이 있어졌습니까? 하시는 일에서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커지고 있습니까? 그저 경전을 열심히 읽고, 일정 시간 명상을 하고, 약점에 대한 성찰을 하고, 기도를 했을 뿐인데 위 질문들에 '예'라고 할 수 있으면 공부가 진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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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성성(聖性)의 추구

2019.07.31 07:48 | Posted by 목운

일부러 을의 삶을 골라 살 필요는 없지만 세상 구조상, 그리고 각자 카르마에 따라 을의 체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을의 삶이라면 잘 인욕(또는 인내)하는 게 수행의 길입니다. 한편 교구의 주교보다 종지기가 더 성인이 되기 좋은 자리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직장에서 한번 혼나면 최소 48시간 의기소침해지는데 그때 오히려 더 철저히 공부할 자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삶은 카르마 상의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 그 가운데 가장 큰 과제는 나와 남을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케 되는 일입니다.

나와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함은 그와 나의 수많은 과오를 경멸심 없이, 이원적 판단을 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매사 현재 상태의 완벽함을 보고 따라서 아무도 용서하고 말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고의 이분법을 초월해서 신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하게 어려운 일이기에 평생이 걸리는 일이고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에고가 죽어야 하는데 실상 이 길을 가서 뚜렷한 성취를 보인 신비가들과 학인들이 있기에 도전을 포기 않는 것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말년을 한미하게 보낸 경허스님은 바보 천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번역하다 보니 성성(聖性)과 관조의 길은 한편 바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인용합니다.

"독일어의 '어리석다(selig)'에는 '복받은(blessed)'의 뜻이 있다. 관조(contemplation)란 신과 신의 사랑을 위해 바보처럼 보낸 시간이다. 그것이 바보인 이유는 통제할 수도, 터득할 수도, 계획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로 명상의 길은 바보만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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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정화방법

2019.07.25 08:03 | Posted by 목운

355쪽부터 380쪽까지는 어떻게 의식을 정화시킬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우주의식과 신의식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는데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제 경우 동양 영성에서 무극과 태극, 그리고 음양의 작동 원리에 해당한다고 느꼈습니다. 실천적으로 보다 중요한 말씀은 "창조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주의식의 본질과 품성이 찬란히 빛나는 환희와 충만과 행복임을 이해하고 그러한 영광스러운 초월적 존재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열망"(358쪽)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열망이 깊고 큰 것이기에 세상에서 보거나 배운 그 무엇에도 우리는 만족을 못하며 마침내 우리를 존재하게 한 신 의식에 접속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명상을 통해서 '신성한 평형상태'를 잠깐이라도 느낌으로써 공허감을 극복하게 된다(359쪽)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 길을 가지 않았을 때 제 경우는 밖에서 몰입거리와 과시거리를 찾아나서고 또 투명성에 벗어난 즐거움을 추구하느라 소위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경우에도 공허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직 소아 망실 내지 멸각, 다른 말로 의식의 정화(이것은 또 마태복음 16:24의 실천입니다)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을 잡아라(允執厥中)

2019.07.14 07:35 | Posted by 목운

제가 경전을 인용해서 풀면 꼭 어렵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지배와 통제를 통해서 독점적으로 권세를 누린 자들이 어렵게 느껴지도록 해왔을 뿐 아니라 거짓과 왜곡을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가르침도 예수께서는 가장 당대인들이 알기 쉽게 말하셨고 수시로 간략한 요약 및 해석을 덧붙이셨지만 후대인들이 교묘한 장난을 쳐서 복잡하게 만든 측면이 농후합니다.

대표적으로 중용에서 '중'이 천하지대본이라 했으면 그것을 쉽게 풀고 실천방법을 전수했어야지 이것을 바꾸어서 대중을 향해 '농자 천하지대본'으로 바꿔 써먹습니다. 농업사회에서 '농'이라 하면 바로 생산력이고 생산력이 세상의 근본이라 풀면 뭐가 떠오릅니까? 그것이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유물주의고 어쩌면 조선이 망한 것은 오늘날 소비에트연방이 망한 이유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유물주의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경영학의 '이요인론'만 알아도 이해됩니다. 아무리 물적 조건을 갖춰줘도 사기를 올리는 요인은 물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게 이요인론의 요지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대승불교와 똑같으니 예수께서 요약한 신애와 인인애 실천이 핵심중 핵심입니다. 그리고 대승 정신에서 벗어나는 게 전혀 없는 중용과 주역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중을 잡고 그것을 세상에서 구현하라(和)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을 잡는 실천방법이 제가 앞서 써놓았지만 '생각없이 행함없이 고요함에 머물러 우주와 소통하는(感而遂通天下)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매일 일정시간 홀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소리를 못하는 게 오늘날 동서 모든 교육기관의 허점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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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비가

2019.07.13 06:15 | Posted by 목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초벌 번역을 마쳤습니다. 열심히 교정해서 여기저기 노크한 다음 책이 될 팔자(?)가 있으면 책이 되리라 봅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기독교에만 해당한다고 본다고 느껴서 거부감이 있었지만 일단 객관적으로 들여다 본다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방문하시는 분들과 핵심 메시지를 공유코자 조금 소개해보면 쉽게 얘기해서 단순한 그리스도인은 교회 잘 출석해서 통상 행하는 예식에 참여하고 기도를 바치는 사람인 반면 그리스도교 신비가라면 관조의 생활(contemplation)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이 말의 어원에 점을 친다는 뜻이 있었으나 기독교에서 쓰이면서 그 뜻이 배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주역이 떠올랐습니다. 역경의 원래 취지는 생각도 없고 행위함도 없이(無思也 無爲也) 고요한(寂然不動) 신의 경지에 맞춰 살고자 하는 것인데 오히려 점술로 이해하는 속인이 많은 것과 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요점을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란 신의 현존체험을 고취하기 위해 신에게 몰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가 요약한 두 가지 계명 가운데 신애(神爱)의 실천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다른 모든 행이 신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되도록 하자는 영성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요점이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중을 잡고(允執厥中) 그 정신으로 모든 덕을 닦는(和) 중용의 정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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