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405

프리즘과 색깔

오늘 청혜스님 법문은 프리즘과 거기를 통과한 빛이 색으로 드러나는 것을 비유로 본래 면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우리 본래 면목은 투명한 프리즘이고 생각과 감정, 그밖의 모든 알음알이가 색깔이라는 것이다. 본래 면목을 체감하려면 그 어떤 분별이나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정지하라고 한다. 그때 마치 베일이 벗겨지듯, 장막이 찢어지듯 환하게 된다고 체험자들이 증언한다.색깔을 닦아 투명하게 되려는 것은 에고로 에고를 닦으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또는 '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유위(有為)가 되어 무위(無為)로써 이루려는 불가나 도가의 길이 아니다.알음알이로 본래면목을 체험하는 것은 끝내 달은 못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일이어서 개운하고 말끔하지 못하다고 한다. 손가락 없이 달을 보는 것, 즉 ..

신비 체험

신비주의는 '나'라고 할 것이 사라져 인간이 신성 또는 불성과 하나가 된 체험에 관한 것이며 동양이나 서양 불문하고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그런 경지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지만 그것을 체험한 신비가들의 글을 보면 공통점이 많다. 남녀간 로맨스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신비 체험을 닮아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곳에 계속 소개하고 있다.오늘은 로마 교회 소속의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의 글이다."저는 이미 당신 것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만드시고, 용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제가 당신께 돌아가기를 기다리셨고, 저를 당신의 소유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이 가련한 제가 당신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사랑의 눈으로 저를 보시고 당신의 목적에 맞게 저를 빚어 주셔서, 마음과 몸과..

단상 2025.05.11

신비가와 로맨스

계속해서 신비가들의 사랑 고백을 옮깁니다. 이들이 체험한 경지가 진정한 로맨스의 원류라고 저는 봅니다."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은 오직 내 사랑 당신뿐입니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성공, 실패, 그리고 내 삶까지 당신은 내 전부입니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요구하셨을 때, 나는 당신께 나를 맡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나는 당신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숨어 계신 당신을 발견했고, 그 덕분에 나는 환상의 바다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힌두교 성자 마하리쉬)""친구여, 내 모든 여정 동안 당신은 내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내 동반자이자, 숨결이자, 희망입니다. 내 기쁨입니다. 내 갈증을 채워주고, 길의 끝까지 함께 걸어..

단상 2025.05.08

선과 신비주의

신비가란 궁극의 실체와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동서의 신비주의는 저 내재적이고 초월적이면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체(이것도 명사이기 때문에 그것이란 표현이 조금 더 낫다)와 하나가 되려는 관점이나 노선이다. 제가 이곳에 줄곧 올리고 있는 선(禅)이 바로 동아시아의 신비주의다. 요즘 동서 신비가들의 어록을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발견하는 게 문학이나 음악 등 예술이 추구하는 남녀간 로맨스는 모두 신비가의 체험을 모사(模寫)한 것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인간의 로맨스는 유한하고 가시적인 범위에서 이뤄지기 때문인지 쉽사리 깨지거나 부패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지루해지거나 심지어 추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비가의 로맨스(?)는 지칠 줄 모르고 그야말로 신비하다. 오늘부터는 그들이 체험한 신비를 수..

단상 2025.05.06

임종 대비책

거의 매일 청혜선원 법문을 듣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고교 동창한테도 강추한 선원이다. 스님의 도력이 클 뿐 아니라 두세 시간 법회 동안 참가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모두 촌철살인 급이어서 공부에 크게 유익하다.엊그제 법문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않을 수 있는지',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질문하며 완전히 아상이 없어지는 것이 공부의 바른 방향이라고 하여 여운이 크게 남는다.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모습 또는 현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면 바로 해탈(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라는 금강경 가르침의 응용이다.전심법요 또한 임종 때 참마음이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어서 무심무아(無心無我)일 때 과거 현재 미래에 걸림이 없고 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히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

다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십여 년 전 사진을 살피다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훈화 말씀을 다시 접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나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마태 16:24).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자신을 살펴보고 어디에서든 자기가 있으면 자기 자신을 떠나라. 이것이 최상책이다."이 말인즉슨 요즘 몰입하고 있는 선(禅)의 가르침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에크하르트의 신을, 선가의 '나지도 죽지도 않고 이름도 모양도 없는 한 물건'과 같다고 보면 그분의 말은 선가의 법문과 다르지 않다.동시에 신을 도가(道家)의 '도라 할 수 없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것과 같다고 보면 에크하르트는 도가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어설프게 짜깁기한 신 개념은 원래 유태교의 야훼에 기원한 것이고 야훼란 '이름없음(無名)'이란 말..

선종(善終)의 비결

여섯 살에 4.19, 일곱 살에 5.16이 있었지만 그때 내가 있었다는 기억이나 어떻게 생활했는지 하는 기억이 전혀 없다. 심지어 열일곱 살에 유신 쿠데타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관심 가진 바 없다. 과거 체험은 먼 과거일수록 꿈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다섯 살 이전에 골목에서 자전거에 치어 머리에 뚜렷한 상흔이 있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라는 의식을 아상이라 하는데 그것은 뒤늦게 반복을 통해 학습되고 축적된 것 같다.마음의 평온, 나아가 생사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되어 좋은 최후를 맞이하려는 것도 욕심이긴 한데 지금 가장 바람직한 소망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닐곱 살 때와 같은 마음 상태가 되면 될 것 같다. 의지하는 말씀으로는 맹자의 적자지심 가르침이다. 내 예닐곱 살 ..

다시 공부의 요점

불이문이 왜 견성의 핵심 방편인지를 몰랐다. 대승기신론이 심진여와 심생멸을 가르쳤지만 그것들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속은 셈이다. 청혜스님은 컵으로써 설명한다. 내가 컵이면서 흙임을 체득하려면 이제까지 습득한 모든 고정관념과 분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혜능 이후 동아시아 선(禅)의 공통 과제였다.그래서 이 문에 들어오려면 모든 알음알이를 버려야 한다(入此門來 莫存知)고 했고 좋고 싫음만 없으면 뚜렷이 알게 된다(但莫憎愛 洞然明白)고 한 것이다.

禅과 놓아버리기

견성을 위한 선 공부란 일어나는 마음을 조작하거나 변화시키는 게 아니고 그것뿐인 듯이 바라보는 것이라 한다. 동시에 자기(Self)에게 온통 내어맡기라 한다. 청혜스님이 말하는 저 '자기'란 참나인 것 같다. 참나-에고 또는 영혼-육신의 언어 사용은 이분법에 빠지게 하는 약점이 있다.견성하고 나면 마치 에고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참나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그 빛이 에고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방법론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은 모두 자기(Self)의 작용이리라. 평상심이 도(道)며 분별망상에 속지 않으면 바로 참나의 작용이라 말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 같다. 선(禅)은 감정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느껴주라는 놓아버리기 방법과 통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선 공부가..

禅 공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공부하라는 것은 꼭 그대로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들어가라는 것이란다. 다급한 마음으로 전심전력 공부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현상이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 즉 홀로그램임을 즉각 인지하라는 것이다.물질 세계에서 생존하도록 하기 위해 심어진 본능과 지능, 수많은 생명 현상과 물리 현상을 체험하도록 한, 이 존재와 삶 자체가 그저 우주심의 바라봄이라면 -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면 모든 것이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不曾生不曾滅) 것이다. 그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應觀法界性) 견성하는 것이리라. 나라는 것, 내가 있다라고 하는 것 모두가 관념이기에 그것을 아상(我相)이라 한다. 아상이 없다면, 그리하여 내가 죽어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