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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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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2019.06.24 14:47 | Posted by 목운
요새 독서는 Carl McColman이란 미국인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Neale D. Walsch의 '신과 나눈 이야기'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 배운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적 수행법 가운데 신적 독서(Lectio Divina)가 초기 수도원에서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출처를 신에게 돌릴 수 있는 책을 읽고 감도를 느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취지로 짐작되는 것은 수도자가 되기 전에 습득한 생각, 개념, 이념 등은 에고 또는 소아에 근거한 것들이므로 신적인 생각으로 채우면 우리 삶이 거룩하게 된다는 믿음에서 나왔으리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신나이'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만한 말씀을 만났기에 인용합니다.

"지금 네 정신은 낡은 사고로 가득차 있다. 낡았을 뿐 아니라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다. 뭔가에 대한 네 마음을 바꾸자면 지금이 기회다. 이것이 바로 진화다. (신나이 1, 277쪽)" 출처를 신에로 돌릴 수 있는 책은 수천 년을 견딘 경전이 가장 좋을 것이고 호킨스 의식지수로 540 이상이면 믿을 만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는 지점은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되는 것인데 보살이 되는 것이 바로 우주를 장엄하는 일이고 그 길을 상세히 안내한 경전이 화엄경입니다. 보살이 되어 우주를 장엄한다 함은 대승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근원을 공유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호킨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 뜻을 따르옵니다. 주님, 제가 당신 종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무한한 잠재력을 성취하여 당신 영광에 기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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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극복

2019.06.20 18:58 | Posted by 목운

비번이어서 괜찮은 영화를 찾다가 '인 디 아일(in the aisles)'이라는 독일 영화를 봤습니다. 꽤 수준 높은 영화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두 가지가 인상 깊었습니다. 첫째는 전세계적인 현상인데 세계화로 인한 제3세계화의 질곡을 겪는 생존선 상의 인민들은 어디든 똑같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는 주로 동독 출신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 기생충과도 맥이 닿습니다. 경제적으로 저 인민들은 강고한 시스템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자유를 못 누리는 게 감옥생활이나 다름없다는 느낌입니다. '인 디 아일'에서는 버티다 못한 부르노가 자살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기생충에서는 폭발적 파국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의 파국은 매우 한국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특별히 감옥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꿈꾸는 것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해방인데 이 영화에서는 파도소리 들리는 바다와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쇼생크 탈출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조금 의식이 낮은 브룩스는 석방된 후 자살을 하는데 저 독일 영화의 브루노와 겹쳐 보입니다. 하지만 쇼생크의 주인공은 많은 이의 꿈대로 바닷가에서 편안한 삶을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지지요!

제 나이 정도의 체험으로는 저들의 실패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답과 개인적 답을 제안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정치사회적으로는 기본소득제를 골인점으로 두고 계속 복지국가로 가는 것이 답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복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이요인론'에 따르면 위생요인(즉 경제문제)의 해결이 정신의 문제(사기요인, 즉 삶의 의미)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정신의 문제는 공자님의 종심소욕불유구나 선가귀감의 세간을 벗어난(출세) 자유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 독일 영화도 계속 외로움의 문제를 던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동병상린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아일여와 물아양망을 통해서 모든 존재와 하나임을 알고 체험하는 출세자유인의 경지를 모르면 외로움의 문제는 극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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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는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발전된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도저히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실익이 있는 교리인지 하는 의문은 충분히 가질 만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시적 표현이나 신비적 표현으로 보면 상당히 높은 의식수준 또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인정할 부분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들도 그리스도처럼 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동서 영성 모두 인정합니다(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아시아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자손[天孫]이라 하지요).  아들 하느님, 즉 성자(聖子)는 아버지 하느님(聖父)과 구별되지만 하나인 신이기도 하다는 게 삼위일체 교리이므로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신나이' 1권의 말씀을 인용해 봅니다. "모든 선각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가르침을 전했다. 나는 곧 너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도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이 이상 가는 것도 하게 되리라." 이 점은 요한 복음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요컨대 우리가 신이지만 아버지 하느님과는 다른 아들 하느님이라고 보면 우리 모두의 성자성(聖子性)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영(靈) 하느님이 다르면서 하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나이'가 시사하는 보다 중요한 가르침이 여기에서 도출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참된 정체성, 다른 말로 참나란 바로 신성이기 때문에 신성으로서의 자각과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매일 명상을 하고 신적 독서(Lectio Divina)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계정혜의 실천(또는 6바라밀의 실천, 또는 기독교적 양심성찰, 또는 유교적 사단[四端]의 발휘)을 통해서 최대한 신성을 구현해내는 것이 사는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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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내 초기 제자들과 안티옥 수임 이후의 바울이 유대인들을 최대한 한데 뭉치게 하고 이방의 개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종교다... 너희 영적 발전은 오로지 존재의 법칙과 <너희를 존재하게 한 그것>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인식과 이해로부터만 일어날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의 영적 근원을 알지 못함으로 해서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고 인간 의식을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온갖 고난을 낳는 근원인 지상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희가 배운, 혹은 전통이 전해준 그릇된 믿음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실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쌓을 수 있도록 <존재의 진실>을 이해가능한 현대 언어로 너희에게 전하기 위해 <내 그리스도 의식을 온통 쏟아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편지, 270~271쪽)

-- 저처럼 소년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신 분들은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 영향력이 압도적이어서 오히려 종교로 인한 깊은 고난과 좌절의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위에 써 있는 대로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초기 교회 다음엔 로마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 이후 로마제국 통치의 하위 수단, 즉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위에 써 있는 대로 '편지'의 기본 태도는 과학적입니다. 인류 고통의 원인인 전쟁(기록된 역사의 약 93% 이상이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이 없었을 때는 페스트와 같은 전쟁에 버금가는 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고 영적 발전을 꾀함으로써 모든 창조의 근원인 집단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매우 합리적인 하화중생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는 방법

2019.06.14 07:40 | Posted by 목운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원한다(wanting)'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원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현재 결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당장 이뤄지지 않습니다. 즉 현재 이뤄지지 않고 미래 어느 시점에 막연히 이뤄지기를 현재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는 상태가 됩니다. 대부분 우리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대개는 믿는다고 기도합니다. 물론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했으니 이것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아는(knowing) 것입니다. 아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며 그보다 조금 못한 것으로 내 체험을 종합해보니 마치 법칙처럼 확실하더라고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한국인이 되면 나는 한국에 대해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뜻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방법은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신처럼 창조자가 됩니다. 신이 아는 것을 모두 압니다.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신을 아는 것입니다. 신처럼 생각하고 신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들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는 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있고 신처럼 창조할 때 신적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뜻하는 것을 이루는 차선책으로는 과거를 돌아볼 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이뤄졌다는 것을 체험상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모든 필요가 채워지리라는 것을 그냥 아는 것입니다. 제 경우 여기에 해당하면서 신이 되는 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신비주의가 신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일에 몸바친 사람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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