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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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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초점

2019.01.09 07:52 | Posted by 목운

어제는 제가 근무하는 건설현장 경비실로 잠시 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쑥스러운 듯 이것저것 자기자랑 삼아 이야기하다가 저보고 교회 나가냐고 합니다. 저는 교회 졸업했다고 답했습니다. 까딱하면 예수 믿고 천국 가라고 할까봐 저어되었지요!

그리고 조금 심사가 뒤틀려 덧붙이기를 우리에게 동학이 있는데 기독교 못지 않은 가르침이고 일제 강점 때문에 전통이 끊겨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얕고얕은 지식이지만 실제로 동학은 유불선을 잘 종합한, 그리고 우리가 도달한 최고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대 김기동 선생 강의를 들으면 중용이 영성의 핵심을 콕 집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참나를 따르는 것(率性)이 도(道)인데 솔성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수도(修道)고 수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종교를 비롯한 모든 교(敎)인 것입니다. 실상 제가 공부한 거의 모든 서양 영성은 여기에 붙인 주석이라 생각합니다.

수행이란 행을 닦는다는 것인데 위의 수도와 같은 말로 보면 됩니다. 행을 닦는데 좋은 요령이 있지 싶어 설(說)이 길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왕초보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라며 매일 행을 닦는다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까요? 일단 명상은 기본입니다. 다음에 관찰은 각자 내면을 철저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치 여성들이 화장을 하듯 매일 내면 성찰을 할 때 분명히 진보할 것입니다. 제 경우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공부의 계기입니다. 거기에 제거할 무엇, 닦아야 할 무엇이 있습니다. 일단 기록하면서 없어질 때까지 간구하고 내려놓기(letting go)를 철저히 합니다. 두번째는 꿈을 적습니다.

이 두 가지에서 반복되는 것은 극복되지 않은 것이고 언제 무엇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은 완전히 극복된 것입니다. 경험해보니 꿈이 매우 정확합니다. 요컨대 열심히 적고 기도하고 내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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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서 느끼는 것

2019.01.08 05:33 | Posted by 목운

현재 제가 전력을 기울이고 무엇보다도 우선 순위를 두어 하는 공부는 '신 의식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공부'입니다. 계기는 인생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오직 철저히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과 탐진치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목숨을 구한다는 절실함으로, 절대로 뒤로 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과거 공부를 모두 복습하면서 가장 확실한 공부 방법을 찾아갔습니다. 답은 완전히 투명해지는 일, 우리 전통에서는 성(誠)의 실천이 하나요, 매일 신 의식을 만나기 위해 고요히 침잠하는 일, 우리 전통에서는 중(中)과 화(和), 또는 지관(止觀)의 실천이 그 둘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을 꺼내는 것은 오늘 깨달은 일 때문입니다. 제가 이 공부와 더불어 물처럼 많은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서 매일 영어와 중국어 공부를 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지만 지금은 매 순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행 공부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공부가 잘 된다, 안 된다 하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지만 지금은 최소한 공부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알아챕니다. 스승들 가르침에 따르면 정상에 이르기까지 길은 곧고 좁습니다. 게다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아름다운 산을 오를 때처럼 혹하는 풍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정상을 향해 걷고 또 걷기만 하는 것이 산행입니다. 정상에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저 걷는 것입니다. 정상에서 누릴 자유가 이승과 저승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저 걷습니다. 길이 험하고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을 체험한다면 지금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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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항해 지도

2019.01.04 06:39 | Posted by 목운
주지하시듯 세상을 건너는 완벽한 지도는 이미 모두 알려져 있습니다. 비지니스를 하는 교단과 사이비 스승들이 있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거나 잘못 실천할 탓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참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세 분에게서 요점을 뽑아 봤습니다.

(1) 억지로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모든 통제, 저항 및 손익에 대한 환상을 뿌리까지 버림으로써 신께서 변화시켜 주시도록 하는 게 필요할 뿐입니다. 환상을 제거하거나 공격할 게 아니라 그저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2) 이 세상에서 자유케 되려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러고나면 온 우주가 당신 것이 되며 당신 몸이 될 것이며 당신의 표현이자 도구가 됩니다. 완벽하게 자유롭게 됨으로써 생기는 행복은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 매일 깊은 명상중에 신과 친교를 나누고 당신과 하나가 된 조건없는 사랑과 인도하심을 당신이 수행할 일상사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항구한 평화와 행복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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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페이스북에 '그리스도의 편지 읽기'라는 그룹을 운영하는데 오늘 우리 공부는 편협한 기독교의 독선과 관계 없는 보통명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서 보통명사로서의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하는 공부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습니다.

제가 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저에게 탐심도 진심도 거의 없다고 여겨서 사실상 치심에 젖은 상태였습니다. 비로소 공부 시작했을 때는 탐심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죠! 나름대로 탐심이 엷어졌나 한 순간에 돌아보니 성내는 마음이 마구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그렇지만 자본가들 선전선동에 휘둘리거나 기레기들처럼 앞잡이가 된 자들,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마구 경멸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그 편린입니다. 하지만 일단 알고 인정하는 것은 극복의 시작입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일종의 과학입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기본 사양(?)은 누구에게나 같기 때문에 잘 관찰하고 기록하면 범용성이 생깁니다. 마치 세탁기나 냉장고를 발명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제 체험을 적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부 동지(同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요점은 자신을 잘 관찰하고 꿈을 포함해서 체험을 잘 적으면서 극복을 위해 열심히 하늘에 빌고(즉 매일 명상하고) 하루하루 마음밭의 농사꾼처럼 살면 분명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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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극복하는 공부

2019.01.02 06:02 | Posted by 목운

어제는 15년 전 돌아가신 제 부친과 동갑이신 장모님을 뵈러 동네 요양원엘 다녀왔습니다. 몸은 이미 유아상태와 흡사하게 되셨고 의식은 그저 이것저것 안부하시고 미안해하시는 마음만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을 전혀 알아보시지 못합니다. 아마도 기억이 다 지워지신 듯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진보했는지 어떻게 알아봅니까?" "얘야 전에는 화가 나던 일이 이제 웃음이 나지 않더냐? 그럼 나아진 게지!" 또 하나는 월쉬 책에서 읽은 것인데 깨달은 후에도 청구서는 날아오고 고통도 받지만 고통 없이 고통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요컨대 내면이 완전히 바뀌는 게 공부의 결과라는 것 같습니다.

어느 직장에서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나는 고통과 더불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 고통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불러들인 게 나요 그 사람은 내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카르마와 여정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공부가 안돼'라는 진심(嗔心)이 일어나지만 이 마음이 '공부란 농부가 같은 일을 묵묵히 정성들여 또 노고를 들여 하듯 매일매일 하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바뀔 때까지 그저 열심히 하고자 합니다. 특히나 마음 밭에 있는 돌멩이와 잡초를 열심히 들어내는 것이 공부라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 바탕이 완전히 바뀌어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친절할 수 있을 때 공부가 꽤 나아간 줄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겉으로만 그럴 듯하다면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치매에 걸리면 진심이 남아 있을 경우 의심하고 소리치고 때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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