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끝까지 파기

목운 2020. 3. 2. 10:09

맹자를 복습하는데 뒤에서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대개 경전 읽기를 하다보면 앞에 너무 비중을 두게 되어 뒷부분이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읽다가 그만둔 적도 많고요~

며칠간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 대목은 진심 상편의 우물 파는 비유입니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팠더라도 물 나오기 전에 중단하면 애초에 포기한 것과 다름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주어는 그냥 '행하는 자(有爲者)'로 되어 있는데 저는 행함의 목적어를 유교의 이상인 내성외왕(內聖外王) 가운데 내성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심장 앞의 고자 상편에서 천작과 인작을 나누어 반드시 천작이 앞서야 한다고 하였고 고자 하편에선 의식주와 예를 비교하여 다시 본말을 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오늘에나 세상의 직위와 직책(인작)을 우선시하다 보니, 진심 하편에서 향원을 다루면서 향원과 더불어 기피할 대상인 사이비가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교의 이상사회가 펼쳐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오직 화력의 우위에 기댄 사이비 기독교도들에게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은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땅에도 내성을 추구하는 일에서 아홉길만 판 사이비가 많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세력을 떨치는 기독교 문화권 사람들 대부분도 자기네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아홉길만 파고 다 판 척하는 부작용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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