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325

종교가 불필요한 새 밀레니엄

어제 글 쓰다 신비가에 대한 부분이 매끄럽지 않아서 정정했는데 알아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비주의란 한 마디로 궁극의 실체 또는 신성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며 서양은 플로티누스를 비조로 삼습니다. 그 실천자를 미스틱(mystic)이라 하는데 신비주의자보다는 신비가로 번역하는 게 나아보입니다. 각 문화마다 신비주의가 있지만 학계의 철학 또는 형이상학 체계에 맞게 잘 정리한 사람이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은 플로티누스를 계승한 에크하르트에 의존하는 바가 크고 우리의 경우는 주돈이, 주희, 왕양명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동아시아 영성이란 유불선이 융합된 것이어서 아무리 척불을 외쳐봐야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신유학은 안사의 난에서 충격을 받은 지성인들이 불교를 배..

단상 2021.08.07

가르침을 왜곡한 도적의 역사

기독교의 하나님이 경멸을 받거나 심지어 죽었다는 소릴 듣는 원인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 말을 쓰는 동시에 거기다 아상을 그려넣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차라리 종교 냄새를 풍기지 않는 '존재의 근원', 달리 말하면 우리 존재가 나온 자리라고 말하는 게 조금 낫습니다. 그렇게 보면 중용의 '중자 천하지대본'은 '가장 깊은 내심(中)이 존재의 근원'이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존재의 근원이란 말에도 아상을 그려넣으면 (사실상 유물론자인) 일부 성리학자들처럼 육신의 부모가 존재의 근원이 되어 또 다시 신은 죽었다와 같은 비판에 직면합니다. 예를 들면 공자가 죽어야 세상이 바로 된다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중이란, 감정이 나오기 전의 마음상태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고지선한 지성과 의지, 그리고 인(仁)이 나온다고..

단상 2021.08.06

민주정에서의 왕노릇

민주정(democracy)만 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도 엘리트의 술책이라는 음모론이 있습니다. 어쨌든 민주정에서는 선출직으로 곳곳에 대리인을 두지만 주권자가 왕노릇을 위한 식견과 자질을 갖추는 노력을 쉬면 직무태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정론이기보다 소음을 내는 집단인 미디어를 제끼고 또 SNS도 진위를 검증해가며 자신의 촉을 정확히 갈고닦지 않으면 경제사회적 삶에서 덜 고통받기가 어려워집니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결정되는 날이 9월 5일이니 49일 남았습니다. 그날 과반 득표 후보가 없으면 9월 10일 이내에 결선투표를 하게 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민주정에서도 왕도정치 이념은 그대로 적용할 수 있고 따라서 주권자가 왕노릇을 해야 하며 제대로 왕노릇을 하려면 모두 ..

단상 2021.07.18

무엇이 중한데?

하늘이라 할 때 하늘에 두 가지가 있는 거 아세요? 눈으로 보는 하늘이 있고 눈 감고 조용히 있을 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텅 빈 상태가 있습니다. 후자도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텅 비었다는 말인 공(空)을 일본인은 하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고 나서 동아시아의 천인합일 사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도대체 밖에 있는 하늘과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종교학자 길희성 님은 동양 종교는 근본적으로 신비적 합일의 종교라고 합니다. 저 내면의 하늘을 중용의 중, 즉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중과 같다고 보면 비로소 중이 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승들은 미발의 중으로 존재하는 가장 유사한 상태를 갓난아이라 했습니다. 거기에 천국이 있다..

단상 2021.07.06

식자(또는 학인)의 의무

대학물 먹어서 먹고 사는 일 말고 뭐했는데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까? 부모님 소망이 겨우 그것이었을까? 과거(科擧)에 올인했던 선비들은 무엇을 남겼나? 권세를 부리고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 전부인가? 왕권을 지키는 데 기여한 것이 다일까? 조선이 망하는 과정을 보면 왕권이란 게 얼마나 웃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위 물음들에 대해 사(私) 없이 공(公)에 무슨 이익을 주었는지 답하는 게 소위 식자(또는 학인)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사서삼경 말씀이 모두 여기에 모아져 있다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부가 제대로 됐다면 이순신 장군에게서 보듯 공에 철저한 삶이 왕권에 기여하거나 민생에 기여하거나 하는 것은 그때그때 다르게 구현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 없이'를 실천하기 위해 규칙적으..

단상 2021.06.26

블로그를 책으로 내기

페이스북 대문에 책 쓴다고 광고를 해놓았습니다. 칠순을 목표로 유유자적하며 원고를 만드는데 80%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3부로 틀을 짜고 1부는 '그리스도의 편지' 묵상집, 2부는 '편지'의 논설과 메시지 번역입니다. 3부는 제 독학 내용을 소개하는 에세이입니다. 에세이는 이고 선생의 복성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훈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레팅고를 독해하면서 수행법을 소개하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명상의 의의, 근거, 방법 등에 더하여 마음을 정화하고 비우는 비법을, 동서고금 (그리스도와 붓다를 제외하고) 최상급에 드는 스승들의 텍스트라서 지인들과 공유하려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꿰는 일이 힘들지만 몰입도 되고 쓰는 과정에서 저절로 심도 있게 공부를 하게 됩니다. 칠순까지 아..

단상 2021.06.13

수행과 임종대책

수도라는 말은 중용의 말이고 수행이라 하면 불교 느낌이 납니다. 중용에서 수도란 천하지대본인 중을 지키는 삶에 저해가 되는 모든 것을 막고 치우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실상 6바라밀의 실천을 말하기에 출가-재속 가릴 것 없이 요점은 같습니다. 선불교를 계승한 이고 선생의 복성서는 4서3경으로 불교 수행을 설명한 논문입니다. 대학과 중용을 기둥으로 삼은 전통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불교를 너무 싫어했던 주희가 이고 선생을 계승한 주렴계를 비조로 삼음으로써 복성서는 그 위상을 못 찾고 있습니다. 복성서의 요점은 중용의 노선에 따라 수기중과 격물치지(이고 선생에 따르면 中과 和 가운데 和의 실천방법입니다.)로 조건없는 사랑의 다른 말인 인(仁)의 자리에 들어앉아 황급하거나 걸려넘어지는 순간에도 인에서..

단상 2021.06.08

공자님과 예수님의 공통점

제가 쓰려는 책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 빼고 다 버리고 유교에서 공자 빼고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쪽의 원리주의자들은 스승이 당대 여건에서 대부분이 하근기인 주변 사람들과 논의했던 것까지 최상의 규율로 여김으로써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하거나 핵심적인 것을 결과적으로 등한시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이쪽에선 3년상 논쟁이 그렇고 저쪽에선 이혼 논쟁이 그렇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론 공자님 실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안회와의 대화입니다. 그것이 장자에 실려 있다고 경시하는 것 같은데 실은 안회가 왜 유교의 성인인지 하는 판단의 근거는 거기서 논의한 심재-좌망의 가르침에 있다고 봅니다. 심재와 좌망을 기초로 하고 조건 없는 사랑의 다른 표현인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안회가 ..

단상 2021.06.05

신유학과 지어지선

종교학자 길희성 님에 따르면 "동양 종교는 절대적 실재가 인간 심성 안에 이미 완전하게 내재한다고 보고 다만 그것을 깊이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자기 발견과 실현을 통해서 인간은 절대와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의 종교다."라고 합니다. 간단히 동아시아의 천인합일 사상이 그것이라고 봅니다. 신비적 합일이란 서양 신비주의에서 나온 말로 플로티누스의 일자 체험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지자면 내재하는 신(Immanent God)을 강조하는 전통이며 동아시아에서는 하늘, 불성, 하늘의 뜻이기도 한 성(性) 등이 모두 내재하는 신과 같은 절대적 실체를 가리킵니다. 유불선의 융합인 신유학에서..

단상 2021.05.16

사랑의 기술

싼 맛에 아마존 전자책을 애용하는데 학부 초년에 읽었던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다시 읽습니다. 구절마다 생각할 게 많습니다. 사람은 보통 사랑이란 그 대상이 얻어 걸리는(?) 문제로 생각하지만 실은 능력의 문제라는 말처럼 많은 부분 우리가 실천 못하는 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저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첫 페이지부터 매우 비판적입니다. 즉 남들에게 얻어 걸리게 하는 전략으로 남자들은 성공을, 여자들은 매력을 무기로 갈고 닦는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리스도의 편지' 묵상집을 쓰고 있는데 최근 다룬 주제와 통하는 점이 있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종교들이 말하는 황금률이나 이웃사랑도 "이러저렇게 해야지~" 하는 에고 드라이브나 계명과 같은 강제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먼저 그러한 역량을 ..

단상 2021.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