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가르침을 왜곡한 도적의 역사

목운 2021. 8. 6. 08:19

기독교의 하나님이 경멸을 받거나 심지어 죽었다는 소릴 듣는 원인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그 말을 쓰는 동시에 거기다 아상을 그려넣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차라리 종교 냄새를 풍기지 않는 '존재의 근원', 달리 말하면 우리 존재가 나온 자리라고 말하는 게 조금 낫습니다.

그렇게 보면 중용의 '중자 천하지대본'은 '가장 깊은 내심(中)이 존재의 근원'이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존재의 근원이란 말에도 아상을 그려넣으면 (사실상 유물론자인) 일부 성리학자들처럼 육신의 부모가 존재의 근원이 되어 또 다시 신은 죽었다와 같은 비판에 직면합니다. 예를 들면 공자가 죽어야 세상이 바로 된다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중이란, 감정이 나오기 전의 마음상태고 그 자리에서 바로 지고지선한 지성과 의지, 그리고 인(仁)이 나온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의 시원(始原)으로서 존재의 근원이다라고 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공자님 가르침을, 언제나 중의 상태에서 지고지선을 택하고 인을 실천하자, 그러기 위해 정좌와 독서는 필수다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과거를 보아도 그게 가능한 사람은 '생이지지'거나 공부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타고난 사람밖에 없어 대개는 (종교를 포함한) 세상 프로그램 때문에 혼란스럽거나 고통스런 삶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제대로 공자님과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을 실천하기 시작한 게 우리 나이 60이니 10살경의 유년기를 빼고라도 50년은 허송세월한 셈입니다.

요컨대 첫째 프롬의 연구처럼 야훼란 '무명(无名)'이란 말이며 서양의 신은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는 우리 가르침과 같으니 유일신을 말하는 기독교 대신 '존재의 근원'(그리스도가 말하는 '아버지'의 본 뜻)을 말하는 그리스도의 길만을 가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전통의 공부 또는 학이란 세상 지식으로 된 수많은 콘텐츠의 학습이 아니라 정좌와 경전 독서로 얻어지는 중의 상태에서 최고선을 창조하자는 것입니다.

샛째로 유교나 기독교나 몸의 생존-생활만을 최고선으로 아는 아상의 프로그램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제 경우처럼 평생 혼란만 겪게 하니 오직 공자님과 그리스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목욕물로 여기고 다 버리자는 것입니다. 대안으로는 신비주의를 제안하는데 종교학자에 따르면 동양종교는 신비적 일치를 추구하는 신비주의 계열이라 합니다.

미약하지만 신비주의 책 한 권 번역한 지식으로 말하면 동서양 신비주의의 공통점은 정좌 또는 명상, 그리고 영적 독서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또는 존재의 근원을 만나) 지고지선과 황금률을 실천함으로써 지상 천국 또는 요순시대를 구현하려는 데 있습니다. 동서양의 역사는, 공자님과 그리스도 가르침을 올바로 쓰기보다 세상에서 남을 이겨먹는 데만 썼기에 사실상 도적질의 역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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