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도미니코 회원

 

   삶(2)

 

그의 재판이 당시 교황 22세가 망명중이었던 아비뇽으로 이관되었을 때 도미니코회 튜토니아 관구의 헨리쿠스 데 시그노와 세 강사에게서 측면 지원을 받았다. 지방으로부터 그렇게 강력한 지원을 받았음에도 도미니코회 수도회 전반적으로는 1325년 베니스, 그리고 이어서 1328년 툴루즈에서 있었던 수사회 총회 동안 이미 에크하르트를 멀리하고 있었으며 두 총회는 그의 유죄판결의 길을 준비했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의 유죄판결은 교황 칙서 'in agro dominico'의 발간과 더불어 에크하르트 사망 직후 1329년 3월 27일에 정식으로 내려졌다. 여기에는 28개 조문이 적시되었는데 17개 조문은 '오류나 이단의 징표를 포함하는' 것으로, 7개 조문은 '악에 관련되고 무모하며 이단혐의가 있는' 것으로 판결됐다. 우리는 이미 에크하르트에 대한 기소의 비상한 성격을 지적했으며 그에 대한 판결은 그야말로 이상하다. 우선 에크하르트가 에르푸르트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살고 가르쳤음에도 콜로뉴에서만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 칙서는 그가 죽은 뒤 에크하르트의 설교에서 나올 수 있는 그 어떤 위협이 있다 하더라고 이성적으로는 이미 영향력이 없는 때 출간되었다. 'in agro dominico'는 유럽의 중세 가톨릭 역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유죄선고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실은 에크하르트에 대한 기소와 유죄판결을 둘러싼 모든 이례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완벽히 일관된 설명이 있다. 그것은 에크하르트에 대한 종교재판 진행을 부추기고 '거룩한 관찰'에 맡겨달라는 에크하르트의 호소에 반대한 것은 콜로뉴 대주교였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이 나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요한 22세에게 편지를 쓴 것도 헨리였다. 교황칙서가 콜로뉴에서만 선포된 사실은 이 사건에서 헨리의 핵심적 영향력을 보여주며 우리는 교황이 왜 헨리에 대해 반대할 수 없었는지 혹은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그 사건을 그대로 묵혀두었는지 하는 것만을 물어볼 필요가 있다. 한 저명한 도미니코 회원을 단죄하는 것은 교황과 그의 가까운 동맹인 도미니코회를 곤란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14세기 첫 10년에 교황제가 놓인 정치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얻어진다. 1309년 교황의 아비뇽 망명 이래 클레멘트 5세와 그를 이은 요한 22세는 이태리로 돌아갈 야심을 지녔다. 특히 요한 22세는 독일 황제인 바바리아의 루이스의 이태리에 대한 야심을 크게 불길하게 느끼며 루이스의 이태리 침공이 북쪽의 우호적인 합스부르크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돌아갈 희망을 망칠까 두려워 했다. 따라서 교황은 1324년에 그 파문이 완결된 루이스와의 치열한 논쟁에 들어갔다. 이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서 비르네부르크의 헨리의 역할은 왕권에 대한 루이스의 도전자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프레데릭을 앞장서서 옹호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그는 요한 22세의 주요한 동맹의 하나였다. 교황이 대주교에게 얼마나 채무를 느꼈나 하는 것은 1324년 6월 3일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루이스에 대한 출두 영장을 발급하도록 재촉했다(그때까지 지역에서의 반대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다). 유인책으로서 교황은 전에 라인란트 지역에서 있었던 관세 전쟁 동안 알브레히트 왕이 뻿었던 관세 징수권을 어떻게든 되돌려주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대주교가 해야 하는 모든 것은 그 권리가 누구에게 속하는지 그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에크하르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교황이 콜로뉴 대주교에게 채무가 있다고 믿어 공개적으로 그에게 혜택을 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비르네부르크의 헨리가 자기 마음대로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무자비하게 끝까지 추궁할 정도로 그에 대해 분개했던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 답은 아마도 베귄에 대한 헨리의 투쟁에서 찾아야 한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회를 대신해서 그리고 나아가 간접적으로는 도미니코회의 사목대상이었던 베귄을 대신해서 그 논쟁에 개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동정심 없는 이들이 보기에 에크하르트 자신이 베귄이 기소받게 된 바의 이단을 가르친 것이었다. 에크하르트가 했다고 하는 강론에서는 잠재적으로 윤리적 내용이 제기된 신비 종교를 옹호하는 것으로, 맥락과 동떨어져 보면 그런 진술을 찾기 어렵지 않다. 참으로 어떤 부분에서는 그의 강론이 이런 식으로 읽힐 가능성이 컸다. 에크하르트 자신도 수사적 열정에서 미묘하게 표현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았으나 변호할 때 그가 했다고 하는 많은 진술에 대해서 부인도 했다. 그리고 물론 그는 도덕의 처소이자 관습의 처소로서 교회의 위치를 강조하여 그의 생각을 반율법적인 것으로 오독하지 말도록 자주 경고했다.

 

되돌아보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그의 사고에 전적으로 뚜렷한 색깔을 부여한 몇몇 철학적 전제를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단호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재판을 둘러싼 고약한 일들은 당시의 정치적 음모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가 애초 의도한 것과 동떨어진 목적으로 그의 내심을 오독하고 그의 가르침을 악용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도 환기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매우 공들인 수사학에 대한 편애를 종종 보인 결과이긴 하지만 그의 사고의 깊은 구조와 그의 상상력 및 언어의 명민한 외관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전체의 맥락 안에서 에크하르트 작품이 차지하는 어떤 한 부분, 그리고 당시 지적, 사회적 세계의 맥락 안에서 전체를 보지 못한 과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당시만큼 위험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당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다. 하지만 그 생각이 그토록 복잡하고 도전적이었으며 그래서 아주 쉽게 오해받았던 사상가는 중세에 거의 없었다. 그가 비유론, 표상의 형이상학, 인간 영혼의 형성, 인식론(지식론) 및 존재론 등과 같은 중세 신학의 거시 기술적 주제를 많이 탐구한 점에서 그 사상 체계는 무엇보다 심하게 복잡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작품에는 형이상학적 비전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명민하게 사용하고 언어의 형태와 구조를 다루는 거장다운 능력에서 나온 표면적 복잡성도 그에 못지 않다.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위대한 독창성을 보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당대에, 혹은 실로 그 어떤 시대에든 가장 흥미진진하고 근원적인 사상가로 드러나게 하는) 형이상학적 열정을 체험하는 것은 주로 이러한 수사학적 솜씨에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도미니코 회원

   삶(1)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 태어나 아마 15살에 이웃 에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회 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 설교자의 일원이 되었기에 그 능력에 상응하는 교육을 보장해주는 안정적인 길을 밟았다. 즉 연구 기회, 가르치고 여행할 기회 등이 그것이다. 에크하르트는 당대 가장 우수한 학생들에게 전형적인 도미니코회 코스를 간 것 같다. 그는 고향 독일과 아마도 파리에서 문법, 논리 및 수사학 등 인문학 초기교육을 받은 듯한데 파리는 중세 학문적으로 탁월한 중심부였다. 그러나 1294년에 '명제집 독서자'로서 파리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름이 말해주는 대로 그때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Sentences)' 공부를 하였는데 그 교재는 중급 신학 연구의 기초를 이루는 중세의 주된 교재였다. 그는 곧 에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분원장 자리를 위해 파리를 떠났다. 거기에서 그는 초기 '훈화(또는 영성지도)'를 썼으며 아마도 (오늘날의 강론[Sermon] 1과 2를 포함하여) 많은 초기 강론을 썼다. 이 책에 있는 '훈화'는 이 단계에서조차 에크하르트의 상대적 성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이렇게 흥미 있는 초기 저작과 좀 세련된 후기 강론 간에는 사고구조상 주된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게 정말 놀랍다. 1302년에 에크하르트는 에르푸르트를 떠나 파리로 갔는데 이때는 도미니코회 신학 교수직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손을 떠나 존재하게 된 (라틴어만으로 된) 광범한 성서 논평의 일부를 쓴 것 같다.

신학자로서의 에크하르트의 성공은 행정가로서의 인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303년 색소니아의 도미니코회 새 관구 초대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임기 동안 아주 유능하고 열정적으로 직을 수행했던 것 같다. 1311년 튜토니아 관구로 에크하르트를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0년 전에 있었던 파리의 도미니코회 교수직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행정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데 더하여 에크하르트는 파리 대학의 신학 교수직을 두번 맡았는데 그와 같은 성취는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밖에 없다. 

에크하르트가 다음으로 옮겨간 것은 1313년 스트라스부르크인데 거기에서 그는 독일 남서부의 많은 수녀원 감독을 맡은 주교대리로 일했다. 이 이동은 파리의 교수는 보통 자기 고향 관구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볼 때 비정상적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스트라스부르크로 온 것은 비엔나 공의회(1311-1312)에서 결의된 조례의 결과인 듯한데 이 공의회는 베귄이라 알려진 많은 종교적 여성들을 이단 사상가로 기소했다. 유럽 대륙의 많은 베귄 공동체는 한동안 주교들에게 위협이 되었는데 그것은 이들 독실한 여성들이 일시적인 서약과 때로는 탁발 수행으로 여성의 종교생활로서 현존하는 어떤 부류에도 쉽게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13세기 동안 그들은 점차 위협으로 여겨져 '선량한' 베귄과 '악한' 베귄을 구분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자유 영'(이들은 신과 일치를 이룬 영혼은 전통 도덕 규범에서 해방된다고 가르친 것으로 여겨진다)이라 불리는 무리가 이단의 처소가 되었다고 기소한 두 조문에 저촉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문 가운데 하나는 '독일 땅'의 베귄이 가진 문제를 특정하여 지적하고 있으며 두 조문 모두는 공의회의 유명한 두 독일 수도원장, 즉 쮜리히의 요한(스트라스부르크 주교)과 비르네부르크의 헨리 2세(콜로뉴의 대주교)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 같다. 비엔나 공의회의 정치적 의미는 컸는데 그것은 많은 베귄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들 공동체는 종종 두 탁발 수도회 가운데 하나에 느슨하게 연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가 1313년에 스트라스부르크로 온 것은 도미니코 수도회가 주교들과의 임박한 갈등에 직면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로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도미니코회가 밀접한 사목적 책임을 지고 있는 '어떤' 여성들의 파문 문제에 집중될 것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이 기간 동안이 아마도 에크하르트의 골칫거리가 시작된 때였다. 그가 Liber Benedictus('신적 위안의 책'과 '고귀한 사람에 관하여'가 이 책에 수록됨)를 쓴 것은 이곳이며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비판의 대상이 됐음을 시사하는 '모르는 사람들'이란 언급을 보기 시작한다. 또한 콜로뉴에서의 이어진 기간 동안 그의 작품에 대한 첫 번째 재판에서 사용된 많은 구절이 Liber Benedictus에 있다. 그러나 1323년경 콜로뉴에 왔을 때 그는 그리스도교의 지도적 학자이자 도미니코회의 원로였다. 

그러나 1325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니콜라스는 튜토니아의 도미니코회 관구에 교황이 파견한 방문자이자 에크하르트의 학문적 수하였는데 그의 작품을 조사하여 정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이 콜로뉴 대주교로부터의 더욱 심각한 위협을 미리 회피하기 위한 시도로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대주교는 1326년 에크하르트에 대한 종교재판 절차를 개시했다. 그에 대한 기소는 중대한 이단죄 명목이며 어떤 점에서 비정상적인 고발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종교재판소에 이단으로 기소된 최초이며 유일한 도미니코회원이었으며 이 특별한 기소에 직면한 최초의 고위급 신학자였다. 이단은 의지의 문제이고 단순한 신학적 과오 전파에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신학자는 신앙의 조사를 받는 게 보통이다. 그에 대한 기소는 그의 재판이 마침내 '거룩한 관찰(Holy See)'에 조회되자 즉각 축소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에크하르트는 고발자들이 제기한 혐의 리스트에 변론문으로써 대응했는데 변론서들이 오늘날 남아 있다. 이 문서와 변론에서 여타 지점에서 취한 그의 태도는 가톨릭 교회 교의와 다르거나 우월한 새로운 가르침을 도입한 것이 아닌 정통이 되는 전통 안에 있는 것이며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발자들이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다면 그는 그들을 멍청함으로 고발한 셈이었다.  

 ※이상은 1994년 펭귄북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올리버 데이비스)에 있는 입문을 옮긴 것입니다.

어제는 아내와 이야기 중에 '내가 실은 고교때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그저 내키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꿈이 지금 이뤄졌습니다. 공부만 하면서 두 달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사람(공부인), 배우는 사람(학인)이란 말은 요즈음엔 잘 안 쓰지만 제가 사숙하는 백봉 선생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공부인으로 살되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공부, 제 경우 오직 의식 향상에 도움이 되는 공부만 하고 있는데 노후 생활엔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혼자서도 가능한, 그야말로 가성비가 제일 좋은 일입니다. 프로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고 그야말로 취미삼아 하는 일입니다.

의식 향상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궁극의 공부이자 이승을 최선으로 살고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는 데 꼭 필요한 노하우를 수련하는 일이자 화엄경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번역하신 탄허스님 좌우명인 '향상일로'의 속뜻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 죽는 날까지 팔 만한 공부는 '의식'이라 생각하며 동서 영성 내지 신비주의 영성을 '의식'으로 꿰어 보려고 합니다. 게다가 요즈음 첨단 물리학에서도 의식이 최대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AI의 연구는 바로 의식 연구의 응용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에서는 신경생리학, 정보이론, 뇌과학 등등이 인접 과목입니다. 어쨌든 무언가 건지는 게 있으면 레포트 하나 남기고 갈 요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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