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삶(1)

목운 2019. 12. 1. 15:32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당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다. 하지만 그 생각이 그토록 복잡하고 도전적이었으며 그래서 아주 쉽게 오해받았던 사상가는 중세에 거의 없었다. 그가 비유론, 표상의 형이상학, 인간 영혼의 형성, 인식론(지식론) 및 존재론 등과 같은 중세 신학의 거시 기술적 주제를 많이 탐구한 점에서 그 사상 체계는 무엇보다 심하게 복잡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작품에는 형이상학적 비전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명민하게 사용하고 언어의 형태와 구조를 다루는 거장다운 능력에서 나온 표면적 복잡성도 그에 못지 않다.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위대한 독창성을 보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당대에, 혹은 실로 그 어떤 시대에든 가장 흥미진진하고 근원적인 사상가로 드러나게 하는) 형이상학적 열정을 체험하는 것은 주로 이러한 수사학적 솜씨에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도미니코 회원

   삶(1)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 태어나 아마 15살에 이웃 에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회 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 설교자의 일원이 되었기에 그 능력에 상응하는 교육을 보장해주는 안정적인 길을 밟았다. 즉 연구 기회, 가르치고 여행할 기회 등이 그것이다. 에크하르트는 당대 가장 우수한 학생들에게 전형적인 도미니코회 코스를 간 것 같다. 그는 고향 독일과 아마도 파리에서 문법, 논리 및 수사학 등 인문학 초기교육을 받은 듯한데 파리는 중세 학문적으로 탁월한 중심부였다. 그러나 1294년에 '명제집 독서자'로서 파리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름이 말해주는 대로 그때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Sentences)' 공부를 하였는데 그 교재는 중급 신학 연구의 기초를 이루는 중세의 주된 교재였다. 그는 곧 에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분원장 자리를 위해 파리를 떠났다. 거기에서 그는 초기 '훈화(또는 영성지도)'를 썼으며 아마도 (오늘날의 강론[Sermon] 1과 2를 포함하여) 많은 초기 강론을 썼다. 이 책에 있는 '훈화'는 이 단계에서조차 에크하르트의 상대적 성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이렇게 흥미 있는 초기 저작과 좀 세련된 후기 강론 간에는 사고구조상 주된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게 정말 놀랍다. 1302년에 에크하르트는 에르푸르트를 떠나 파리로 갔는데 이때는 도미니코회 신학 교수직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손을 떠나 존재하게 된 (라틴어만으로 된) 광범한 성서 논평의 일부를 쓴 것 같다.

신학자로서의 에크하르트의 성공은 행정가로서의 인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303년 색소니아의 도미니코회 새 관구 초대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임기 동안 아주 유능하고 열정적으로 직을 수행했던 것 같다. 1311년 튜토니아 관구로 에크하르트를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0년 전에 재직했던 파리의 도미니코회 교수직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행정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데 더하여 에크하르트는 파리 대학의 신학 교수직을 두번 맡았는데 그와 같은 성취는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밖에 없다. 

에크하르트가 다음으로 옮겨간 것은 1313년 스트라스부르크인데 거기에서 그는 독일 남서부의 많은 수녀원 감독을 맡은 주교대리로 일했다. 파리의 교수는 보통 자기 고향 관구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이동은 비정상적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스트라스부르크로 온 것은 비엔나 공의회(1311-1312)에서 결의된 조례의 결과인 듯한데 이 공의회는 베귄이라 알려진 많은 종교적 여성들을 이단 사상가로 기소했다. 유럽 대륙의 많은 베귄 공동체는 한동안 주교들에게 위협이 되었는데 그것은 이들 독실한 여성들이 일시적인 서약과 때로는 탁발 수행으로 여성의 종교생활로서 현존하는 어떤 부류에도 쉽게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13세기 동안 그들은 점차 위협으로 여겨졌으며, '선량한' 베귄과 '악한' 베귄을 구분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자유 영'(이들은 신과 일치를 이룬 영혼은 전통 도덕 규범에서 해방된다고 가르친 것으로 여겨진다)이라 불린 이단의 처소가 되었다고 기소된 두 조문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조문 가운데 하나는 '독일 땅'의 베귄이 가진 문제를 특정하여 지적하고 있으며 두 조문 모두는 공의회의 유명한 두 독일 수도원장, 즉 쮜리히의 요한(스트라스부르크 주교)과 비르네부르크의 헨리 2세(콜로뉴의 대주교)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 같다. 비엔나 공의회의 정치적 의미는 컸는데 그것은 많은 베귄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들 공동체는 종종 두 탁발 수도회 가운데 하나에 느슨하게 연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가 1313년에 스트라스부르크로 온 것은 도미니코 수도회가 주교들과의 임박한 갈등에 직면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로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도미니코회가 사목적으로 밀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어떤' 여성들의 파문 문제에 집중될 것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이 기간 동안이 아마도 에크하르트의 골칫거리가 시작된 때였다. 그가 Liber Benedictus('신적 위안의 책'과 '고귀한 사람에 관하여'가 이 책에 수록됨)를 쓴 것은 이곳이며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비판의 대상이 됐음을 시사하는 '모르는 사람들'이란 언급을 보기 시작한다. 또한 콜로뉴에서의 이어진 기간 동안 그의 작품에 대한 첫 번째 재판에서 사용된 많은 구절이 Liber Benedictus에 있다. 그러나 1323년경 콜로뉴에 왔을 때 그는 그리스도교의 지도적 학자이자 도미니코회의 원로였다. 

그러나 1325년 스트라스부르크의 니콜라스는 튜토니아의 도미니코회 관구에 교황이 파견한 방문자이자 에크하르트의 학문적 수하였는데 그의 작품을 조사하여 정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이 콜로뉴 대주교로부터의 더욱 심각한 위협을 미리 회피하기 위한 시도로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대주교는 1326년 에크하르트에 대한 종교재판 절차를 개시했다. 그에 대한 기소는 중대한 이단죄 명목이며 어떤 점에서 비정상적인 고발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종교재판소에 이단으로 기소된 최초이며 유일한 도미니코회원이었으며 이 특별한 기소에 직면한 최초의 고위급 신학자였다. 이단은 의지의 문제이고 단순한 신학적 과오 전파에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신학자는 신앙의 조사를 받는 게 보통이다. 그에 대한 기소는 그의 재판이 마침내 '거룩한 관찰(Holy See)'에 붙여지자 즉각 축소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에크하르트는 고발자들이 제기한 혐의 리스트에 변론문으로써 대응했는데 변론서들이 오늘날 남아 있다. 이 문서와 그가 했던 변론에서 취한 그의 태도는, 가톨릭 교회 교의와 다르거나 우월한 새로운 가르침을 도입한 것이 아닌 정통적 전통 안에 있는 것이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고발자들이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다면 그는 그들을 멍청함으로 고발한 셈이었다.  

 ※이상은 1994년 펭귄북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올리버 데이비스)에 있는 입문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