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가는 해 마지막 날 제 공부 얘길 많이 했더군요. 맹자께서 진작에 천작과 인작을 나누어 공부를 보셨고 논어 학이편의 공부란 수덕 공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겉모습에 사로잡힌 오늘날 교육체계가 인작으로 천작을 대봉치고 만 덕분에 저를 포함해서 참으로 많은 이들이,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허송세월합니다(물론 누구나 시행착오와 과실을 통해 진화의 길을 갑니다만).

돌아보면 2014-15년간 물에 빠진 자가 허우적대듯 매달리며 공부했고 15년말 '그리스도의 편지'를 만나면서 거기에 '올인'한 지 약 2년만에 매일 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균 50분정도 매일 정좌를 합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조금 더 가면 호색보다 호덕을 더 좋아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을 다른 무엇보다 더 좋아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말 꺼낸 김에 가장 분명히 달라진 것을 말하라면 과거에는 불쾌한 꿈을 꿀 때면 매우 육감적인 것들이 올라왔는데 요즈음엔 아직 다정한 정을 나누진 못하지만 그리운 아버지 모습을 가끔 본다는 것입니다. 잘 해 드리지 못했고 그런 반성도 거의 해본 적 없거든요! 하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바라듯이 내가 최고선에 가까울수록, 즉 지어지선(止於至善)할수록 효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에도 효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결의 하나만큼은 엊그제 거론했듯이 불퇴위에 다달아 있습니다. 모쪼록 동학들께서도 천작에 있어 매일, 매년 향상하시길 빕니다. 그렇게 하면 수신제가는 물론 나라도 저절로 나라다워진다고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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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를 기본 교재로 삼아 수행공부를 함께하는 세 분이 모처럼 영종까지 오셨습니다. 운양호 사건때 일본군한테 30여 명의 군인이 희생된 영종진과, 금년에 다리로 연결된 무의도를 둘러봤습니다. 이어서 공항도시 회타운에 들러 해물찜에 막걸리를 먹으며 사는 얘기와 공부 얘기를 나눴습니다.

비망용으로 요점만 적어 봅니다. (1) '그리스도의 편지' 의식지수가 1,000이라는 것. (2) 시크릿류의 방편에서 결한 것은 에고소멸의 중요성이라는 것. (3) 명상의 가장 큰 효과는 근심걱정의 소멸, 직감의 계발이라는 것. (4) 기독교 기반의 서양 문화가 죄감문화라면 송명이학 기반의 동아시아 문화는 낙감문화라는 것(리쩌허우). (5) 기본소득제는 우리 사회 문제 해결의 킹핀이 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공부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기 공부를 점검하고 공부의 진보에 뜻을 모으기 위해 불원천리 달려가는 것을, 고도의 미감에서 나오는 즐거움으로 본 것이 논어 1장입니다. 리쩌허우는 이러한 것이 바로 동아시아 사람들의 낙감문화라 하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미 세속화하고 자본주의 도구화한 기독교를 송명이학의 언어로 풀어내 봤으면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말 불교 극복을 위하여 선불교를 유교의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주렴계 주희를 거친 송명이학 탄생의 계기를 마련한 이고 선생이 한 일과 비슷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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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친구의 질문 요지를 더 생각해보니 제가 돈오 내지 활연관통을 얻었냐 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즉답하자면 그런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불퇴위에는 들어섰다고 말하겠습니다. 불퇴위란 '한번 도달한 수양의 계단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수행을 퇴폐하는 일이 없는 지위(대승기신론 소와 별기 참조)'를 말하는데 쉽게 보면 발심을 제대로 해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라 봅니다. 기독교적으로는 탕자가 아버지 집에 들어선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돈오 이후의 공부는 오후(悟後) 공부라 해서 오행(보시, 지계, 인욕, 선정, 지혜, 정진)을 끝없이 닦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과정은 화엄경의 보살도라고 보면 됩니다. 더 쉽게 이해하려면 십우도 또는 심우도 해설을 보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공부과정에서 여러가지 초자연적 현상인 싯디(siddhi) 내지 신통을 체험할 수 있으나 거기에 매혹되는 것은 길을 잘못 들어 하락의 길을 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에 이어 다시 강조하면 이 공부는 곧고 좁은 길이니 그저 끝없이 가는 것만이 답이라 봅니다.

공부의 핵심 요점을 적자면 마하라쉬 님의 가르침이나, 나무아미타불의 정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 그리고 제가 집중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에서 공통되는 것인데 자신의 의지를 '근원 의식' 또는 신 의식에게 완전히 맡기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 그 하나요, 몸이 아니라 순수 의식이 내 정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도록 애쓰는 것이 그 둘입니다. 그렇게 가면서 공부가 진짜로 제대로 잘 되면 비이원성(nonduality)의 세계에 들어설 뿐 아니라 이승과 저승 간에 무차별한 생각이 들어 심지어는 몸에 들어가는 일이 별로 내키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전해지는 체험담입니다. 그러니 임종 준비로는 최고라고 보는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창원에 있는 친구 보러 7명이 뭉쳐 1박2일 여행했습니다. 윤이상 선생, 박완서 선생, 박경리 선생 등이 사셨던 발자취도 구경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깊은 것은 차 안에서 아무말 대잔치 하듯 스몰 토크에서 빅 토크까지, 정치에서 사상까지 뱉어냈는데 엔진 소음, 바깥 소음 때문에 각자 듣고 싶은 소리만 들었을 겁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저녁엔 대취할 사람은 대취하고, 끝까지 마음에 있던 질의, 응답까지 마치 여한없이 떠날 사람들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 이 시간까지 뇌리에 있는 말은 "자네 도통했는가? 깨달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제 답은 사이다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가는 중"이라 답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내가 이제 길은 알았으니 같이 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답이 마치 숨겨져 있는 것처럼, 누군가 도통한 사람만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들이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길은 이미 다 알려져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곳에 썼지만 그것은 '매일 일정 시간 정좌 내지 정관(静观, contemplation)을 실천하고 신적 독서(Lectio Divina)와 내려놓기(放下)를 끝없이 행하면서 무조건적 사랑이 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게 가면서 제가 관찰하는 풍경, 즉 내면의 풍경과 외적 변화를 적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이 공부를 잘 요약한 문구가 있어서 가져옵니다. 무조건적 사랑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존재상태이며 그 존재상태에서 저절로 발하는 것이 덕이고 보시(布施)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끝없는 상승의 길이기에 언제나 '진행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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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정좌 반일독서'는 추사께서 고택에 써붙여 놓아서 유명해졌으나 주희 선생도 곽덕원이란 제자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말의 취지는 공부의 입문 단계에서 1~3년 집중적으로 하면 반드시 진보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본인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을 때 양생수단으로 실천했다고 합니다.

제가 파악하는 한 보다 중요한 것은 서양 신비주의 내지 수도 전통에서도 공부 수단으로서 신적 독서(Lectio Divina)와 정관(静观, contemplation)을 병행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반일정좌 반일독서'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또 동서 공히 공부 목표는 의식의 끝없는 상승이며 그것은 불가에서 화엄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유가의 상근기라면 언제 어디서나 덕을 좋아함이 색을 좋아함을 압도하는 경지를 목표삼아야 할 것인데 이삼년 반일정좌 반일독서를 결단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이 저 말씀의 취지라고 봅니다.

공부 목표로서 저는 일관되게 의식향상을 얘기합니다. 의식을 어디까지 향상시킬 것이냐에 대해서는 최소한 호킨스 측정체계 내에 있는 무조건적 사랑이란 존재상태라고 하겠습니다. 마침 온오프에서 만난 여러 동학(同学)들과 함께 공부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도 공부 목표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왜 그리하냐고 물으면 이 길이 누구나 목표삼는바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궁극의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그 목표를 위해서 종교는 물론 철학, 과학, 영성 모두 똑같이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위 교재에도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마저 언젠가는 돌파의 수단일 뿐이며 그 어떤 스승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무조건적 사랑의 상태는 깨달음의 초입이자 이원성을 극복한 상태여서 공자님 말씀하신 바의 종심소욕불유구와 같다고 봅니다. 거의 인간 감정을 모르는 기쁨과 사랑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상태라서 그야말로 악인의 땅에나 선인의 땅에나 똑같이 내리는 비와 같습니다.

비록 1차 대학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면접에서 무얼 전공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철학'이라고 답한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은퇴후 가장 호젓하고도 뜻있는 시간을 보내는 두 달 반이 지난 지금 어쩌면 제대로 철학을 한다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저런 답을 한 동기는 짐작컨대 10대후반 육신과 정신의 갈등 속 나름 고통스런 실존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달 내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으면서 13-14세기를 사신 그분이 부딪친 문제도 바로 사람들의 실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만난 '신적 위로의 책'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설교 내지 강론의 하나인데 집필 동기가 바로 제가 이곳에 수차 거론한 적 있는 세 가지 인생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바로 손재수와 이별수, 그리고 건강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이나 신학, 형이상학은 저로서는 어마무시하게 어려워서 그저 페이지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설교들은 바로바로 이해됩니다. 전에 소개한 '훈화' (혹은 '영적 강화)도 초보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면서도 그의 철학의 기본 생각을 논한 것인데 신적 위로의 책도 일반 신자들을 위한 말씀들입니다.

이 설교들이 얼마나 우리 심중 깊은 곳을 건드리는지, 또 얼마나 상식에 가까운 것인지 반색할 만한 대목 두어 개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외적 사물을 잃은 손실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면 이는 내가 외적 사물을 사랑함과 함께 진정으로 고통과 슬픔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징표가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고통과 슬픔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면 이럴 때 내가 고통에 빠져든다는 것이 뭐가 그릴 놀랄 일이겠는가?"

위 말씀은 제가 현대 최고 영성으로 여기는 호킨스 박사 말씀과 동일합니다. "모든 위로가 나오게 마련인 신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린다면 그럴 때 내가 고통에 빠져 슬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그대가 위로받으려면 그대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라." 이상 문구의 인용처는 이부현 편집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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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좌(靜坐)'가 무엇이냐고 물어주신 분이 계셔서 제 글쓰기가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좌는 유교 체계 내에서 명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천은 같아도 말이 문화적 DNA를 그대로 달고 다니기 때문에 어휘 선택이 중요합니다. 명상이라고 하면 나름 떠올리는 선입견으로 판단하거나 심지어 하지도 않으면서 '다 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조건 시간을 내서 10분씩 앉아 있자고 크게 결단하고 1년이고 2년이고 행하다보면 동서양 신학과 철학 등등에서 말하는 진리에 다가가게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경전 독서가 그 보조 수단으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유교문화권에서는 제사로 때우는 것이고 기독교 문화에서는 미사 참석이나 설교 듣기로 퉁치는 것입니다.

'격물치지'도 이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얘기하는 것보다 2010년 한겨레에서 보도한 광주 대성여고 학생이 학교에서 실천했던 명상에 대한 평을 공유하는 것으로 제 메시지의 핵심을 전하고자 합니다. 

조하선양은 “사실 처음엔 명상이라는 말의 어감이 ‘수행’이나 ‘도 닦는 것’ 정도로 느껴졌는데 이젠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명상의 효과를 지나치게 학업성적이나 학습능력의 향상 여부로 평가하지 말아주세요. 학습능력이 향상되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덤이구요. 명상을 통해 매 순간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삶의 질이 향상되고, 통찰력이 생겨 진짜 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게 진정 명상의 가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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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퇴직 무렵부터 '반일정좌 반일독서'를 실천했다면 수십년의 삶을 아꼈을텐데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주희가 송명이학을 집대성했지만 그가 정좌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작업들이 생명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주 떠나기 전 근본 결단을 하고 다시 도시생활을 하면서 일하는 시간외에는 독서만 하다가 약 2년 전부터는 정좌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검색하다보니 '반일정좌 반일독서'는 주희가 곽덕원이라는 제자에게 처음 한 말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

주희는 반나절을 정좌하고 반나절을 독서하되 1, 2년을 지속하면 모든 우환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만물의 이치를 탐구(궁리라고 하는데 격물치지와 같습니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이 궁리로써 마음을 비우고 근심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경우 초중고대, 군대, 직장, 통틀어 거의 반 세기 동안 바깥 것들을 기준으로 살다보니 (물론 교회 영향으로 왔다 갔다 하긴 했습니다) 나만의 격물치지가 안 되어 그저 관성대로 살다가 큰 어려움을 겪고 근본결단을 한 셈입니다. 한편 전성기도 끝났기에 오직 근신하고 궁리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긴 했지요.

하지만 주희 선생 말씀대로 제 경우 모든 우환이 사라지고 이젠 어떠한 병고도 '고통 없이 고통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달리 어떤 환경에서도 내면이 거의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혼자 있어도 전에 느끼던 비애감이나 고립감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외적으로 인증된 것인지 몰라도 내일은 제 독서 경험과 명상 경험을 발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대문에서 30명 못 되는 분들께 말씀드릴 예정인데 혹여 관심 있는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두세 자리가 남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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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회 있는 대로 종교와 언론을 비판하고 학교와 사회 탓을 하면서 그것들이 '되는(becoming)' 일에 정답을 찾아 가르치지도 실천하지도 않고 유사품에 만족하기 때문에 답을 못찾는다는 요지의 글을 자주 썼습니다.

우리가 유교의 세례를 받아 의식 무의식에 그 문화 DNA를 간직하고 있으며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영향을 듬뿍 받았음에도 그러한 정신들이 세상에서 득을 보는 일에 기여하는 데 그침으로써, 달리 말하면 그것들이 그저 지배 내지 통속(通俗)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침으로써 (즉 이데올로기로 기능함으로써) 뚜렷한 한계를 체험하다 못해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시사했지만 그 이유는 가르침을 끝까지 철저히 제대로 실천하는 이들이 극히 소수에 그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깨달은 정답은 이미 맹자 고자편에 있습니다. 인용하면, "옛사람은 천작을 닦아서 인작이 거기에 따르게 했지만 오늘날은 천작을 닦아 인작을 구하며 인작을 얻으면 천작을 버린다. 그것은 순서가 뒤집힌 것이어서 끝내 망할 뿐이다. (고자상)"

천작을 끝까지 닦는 일을 유교 체계 전체에서 찾되 그리스도교 정신에 딱 합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하지대본인 중을 잡고(允執厥中) 그 상태에서 모든 덕을 베풀 뿐 아니라 '제가평천하'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가 요약한 신애(神愛)와 인인애(隣人愛) 계명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집궐중의 실천 방법이 우리 쪽에서는 정좌 내지 좌선이고 서양에서는 정관(靜觀, contemplation)입니다. 이 경지에서 체험되는 것을 장자는 좌망(坐忘)이라 하여 결국 매일 홀로 앉는 일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중용이 얘기하는 '신기독 수기중'도 바로 여기에서 도출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이 왜 꼭 필요한 일인지 알아서 실천하면 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셈이라는 것 - 이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종교도 위에 지적한 것처럼 통속의 도구에 그칠 뿐 이런 것을 중시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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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고 언론이 자본의 장단에 춤추는 현상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숭배집단을 내칠 때에도 있었던 일이 아닌가요? 활자매체가 자본의 이익에 맞추어 계속 허구를 지어낸다면, 영상매체는 계속 감각의 즐거움을 부추김으로써 사람들을 가시계에 묶어 놓습니다.

이런 현상을 언론학자 기틀린은 아주 간략하게 요약했으니 즉 '미디어란 헐리우드와 코카콜라다!' 즉 눈을 홀려 물건 사도록 부추기면서 사람들을 땅에 단단히 묶어놓는 것이 미디어가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의식'이 본질이고 그 의식을 가시계에 비추어낸 것이 몸과 에고와 소위 문명이건만 미디어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끝없이 저항할 뿐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문명은 언제나 절멸 위기를 피하지 못하며 미디어는 오늘도 거짓을 밥먹듯 전파하며 삽니다. 몸바친 혁명으로 겉을 바꾸는 노력이 허망한 이유도 결과로 결과를 대적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체 게바라가 대단하다고 보지만 그에게서 위로와 평안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정신의 핵은 주희를 봉우리로 하는 송명이학(또는 신유학)이고 서구 정신의 핵은 에크하르트를 봉우리로 하는(물론 이견이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라고 봅니다. 전자는 불교와 도교를 흡수했고 후자는 그리스 철학(특히 산플라톤주의)을 흡수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먼저 내면으로 가서 '의식'이 주인임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혁명처럼 저항을 초래하기도 하고 꾸준하기가 어려워 수천년간 소수만이 끝까지 실천했습니다. 아침마다 황폐한 소식만 전하거나 먹방과 돌아다닐 궁리에 불지르는 영상매체, 한숨 돌리려 클릭하면 이간질과 시기심을 북돋우며 거짓말의 독소만 내뿜는 활자매체를 멀리하려 해도 참 어렵다는 하나마나 한 소릴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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