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수록된 에크하르트 작품은 학자로서라기보다 설교가로서의 그의 활동을 보여준다. 도미니코회는 수도자 설교회로도 알려져 있지만 설교의 역할에 대해 크게 강조하는 복음적 수도회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관행을 '사람들에게 명상의 열매를 전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입장은 이러한 복음 선포의 전통 안에 있는 것이며 그의 철학적 배경은 자신의 신비적 환시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일에 크게 기여한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근본적 구조를 형성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요소(대담하게 도전적인 철학-신학 및 초월적 의식 상태에 대한 개인적 영감)가 우연히 합치한 데 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언어 사용을 촉발한 것은 이 두 요소의 상호작용이다. 주로 독일어 강론에서 그는 그 자신만의 지식과 체험에 적응하려는 청중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수사학적 영상언어와 급진적 언어전략을 구사한다. 모순 가득하고 또 풍성한, 형이상학적 드라마 및 과장법이 가득한 강론에 수사학적 표면을 입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과거에 때때로 배운 사람들은 에크하르트를 혼란스런 사상가로 생각하고 덜 배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심하게 신비적인 종교를 설파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러한 데 기인하다.

 

한 평자는 에크하르트가 진리를 찾는 사상가라기보다 진리를 알기 쉽게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참으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조직 신학자 가운데 가장 비조직적인 사람이게 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 선포자로서 가지는 요소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 체계를 부여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중세에 관한 위대한 학자인 에티엔 질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자기만의 확신으로 에크하르트를 하나의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렇게 했을 때의 문제는 그것이 그 무엇에 못지 않게 진정성 있는 텍스트에 기반했더라도 아주 쉽사리 전혀 다른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에크하르트가 보여주려 노력하는 바로 그 진리란 정의상 체계화를 불허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엔 쓸모없는 일이 된다. 에크하르트가 청중의 마음에 자라나길 바랐던 일 가운데 드디어 신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는 안이한 느낌이 드는 일은 가장 아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가장 큰 과오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강론 28).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은 조직적 절차를 뒤집고 청중의 마음 안에서 참으로 초월적 지식의 가능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사용한 다양한 전략에 집중된 것이다.

 

그럼에도 에크하르트가 사용한 모순되고 부정확하고 비체계적인 특정 방법들이 어느정도 체계화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경향은 신에 대한 신학을 제시할 때 보이는 모순이다. 이것은 주로 라틴어 작품에 해당하는데 거기에서 신은 '존재(being)', '벗겨진, 노출된 존재', '존재의 순수성', '일자성' 또 '지성'이나 '이해(앎)' 등 여러가지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강론 W67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장 높은 천사가 날벌레보다 높은 것처럼' 존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종합컨대 그러한 변형들은 신이란 말로 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그토록 강하게 되새기는 청자의 마음에, 시기상조가 될 수 있는 자기만족을 조금이라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에크하르트는 마치 언어의 그물을 벗어나기 위한 것처럼 '영혼의 근저'에 관한 그 모든 비유를 잔뜩 내어놓을 때의 독일어 강론에서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독일어 강론에서 그에게 다양한 이미지와 신학적 개념을 제시하는 다양한 성서 구절에 대응한다는 사실에서 부분적으로 발생하는 다른 종류의 '혼란'도 있다. 그는 이러한 문구를 자신만의 사고 방식에 맞추며 그렇게 할 때 종종 다른 곳에서 한 말과 쉽게 모순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과의 합일이 사랑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하고(강론 W72),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 하기도 한다(강론W77). 영혼 안에서의 신의 탄생에 대해 말할 때도 그것이 지성이라고도 하고(강론 23) 지성이 아니라고도 하며(강론 W68), 한 강론(W68)에서는 은총과 같다고도 하고 다른 강론(W41)에서는 같지 않다고도 한다. 그러한 부정확성은 에크하르트가 신학적 개념과 이미지를 얼마나 두리뭉실하게 쓰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영혼 안에서 신의 탄생'이나 심지어 '영혼의 근저나 불꽃' 같은 중심이 되는 묘사들도 계산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비유'로 작용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세한 논의라기보다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려는 표현 수단인 것이다.  

고교 졸업한 지 반세기가 다가오니 친구들 만나면 주체하기 어려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과 간접적 표현이나마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까 하는 게 공통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정치 얘기와 자녀 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역시 친구들과 적당히 즐기기엔 산행과 당구 게임만한 게 없지 싶습니다(제가 골프 칠 만한 클래스가 아니라서... 하긴 어제 어울린 친구 하나는 호주 시민권자인데 거기선 골프가 그냥 대중적인 놀이라고 합니다). 

오늘 얘깃거리로서 더 중요한 것은 아직은 부모님 가운데 한 분 정도는 계시는지라 곡기 끊는 일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저는 제가 많이 생각하는 일이라 우리는 '좌탈입망(坐脫立亡)' 할 수 있게 매일 준비해야 한다고 했더니 수긍하는 듯했습니다. 그 노하우에 대해서는 이곳에 아주 여러번 썼는데 매일 정좌(靜坐)하고 경전 독서를 함으로써 멸정복성(극기복례와 같다고 봅니다)을 이루고 몸이 나라는 고정관념을 없앨 때 대자대비 상태(무조건적 사랑의 상태)가 된다고 봅니다.

우리도 동서양 고승들처럼 가고 싶은 날 정해서 '안녕' 하고 갈 수 있도록 공부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 가운데 제대로 된 선비는 모두 '반일 독서, 반일 정좌'를 실천했고 그 증거로 우리가 문화적 DNA로서 책상다리를 물려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이삼년 이상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란 어렵고 복잡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좌와 독서를 매일 하는 분은 신비주의적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면 우리는 비로소 신 의식(궁극의 실체 또는 순수 의식)이 지배하는 상태가 되어 살 때나 죽을 때나 두려움 없이 끝없는 진화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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