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양식의 표현에서 더 나간 요소는 '이상적' 입지에서 이야기하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이미 신과 합일한다면 '진실일'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다. 그가 언급한 대로 '신의 안목'에서 보고 그것이 청중의 독자적 실체인 듯이(강론 11)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의도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강론 22)와 같은 강론은 그런 말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청중들에게 그들이 창조되기 전처럼 되라고 촉구한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이도록 의도한 게 아니라 청자들 앞에서 그들 본성의 초월적 가능성을 취하도록 한 시도이며 그런 것들은 또 에크하르트 자신이 한 때 '강조해서 말하기'로 인정한 것에 속한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 신을 향한 돌파는 지식의 돌파다. 낮은 형태의 지식은 영혼에게서 신을 흐리게 하고 영혼을 그 초월적 본성에서 흐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문제로 돌아오는데 그것은 (에크하르트가 아는 대로) 문제의 근본적 부분이다. 언어는 시공상 유한성을 지닌 채 우리에게 세상을 매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에게 사용될 때 신을 대상으로 만들고 그 창조된 바 없는 본성에 대한 부적절한 개념과 이미지로 신을 덮음으로써 방해가 된다. 그러나 언어가 장애물이라면 그것은 또 역설적으로 구원의 장소이기도 한다. 언어를 정화하여 그 가장 추상적이고 내적인 형태로 만들어 자유분방하게 신에 대해 비유적인 언어를 씀으로써 에크하르트는 그에게 있어 신과 하나인 초월적 지식으로 돌파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신은 (무한히)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아는 한편 에크하르트는 또 진실되게 언어의 파괴적인 비평을 통해서 신을 참되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참말로 이것은 '언어가 말씀으로부터 온다'라는 에크하르트의 말로 요약된다. 이 공식은 또 에크하르트가 '왜' 언어가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지 말해준다. 지성처럼 언어는 '사물'과 감각으로 된, 유한하고 조잡하고 다수인 세상에 영원히 반대되는 '말씀'과 '모상'으로 된 '영적이고' '마음과 관련되고' '하나인'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후자의 실체는 추상적이고 신적인데, 삼위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인 '말씀' 안에서, 즉 인간 지성이 창조된 바의 '모상'과 거기에서 '말씀이 오는' 그 모상 안에서 확인된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표면이 때때로 아무리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주된 구조는 놀랍도록 일관성 있다. 그것들은 바로 한편은 신적인 일자이고 다른 한편은 신의 자기 복제(탄생, 모상)다. 신플라톤주의에서 대부분 가져온 전자와 성서 전통에서 나온 후자를 보다 진화한 윈칙으로 쓸 수 있는데 바로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신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가까이 있다는 것, 즉 위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에크하르트 사상이 나아가는 곳은 바로 이 두 극단 사이이며 함께 변증을 이루는 것도 이 두가지인데 그 자신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변증의 효과는 에크하르트가 논하는 모든 것 안에서 특별한 추진력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때때로 에크하르트가 가르치는 내용을 형성하는 개념과 생각의 유형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가르침들이 이들 두 기초적이고 상호 밀접한 원칙 가운데 한 가지 목적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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