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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

명상의 목적은 마음과 그 활동 그리고 지각의 한계를 초월하고 그로써 이원성을 초월하여 을 점점 더 깨닫기 위함입니다. ---*---의식지수 600(상 이 출현하는 수준임)을 초월하려면 목격하기(관찰하기)와의 동일시를 포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격(관찰)은 의식 자체에 내재하는 사실상 자동적인 특성입니다. 깊이 명상해보면 우리가 이러한 특성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목격자나 관찰자가 됨으로써 생기는 환상이나 대가를 포기하는 게 필요합니다. 목격하기와 관찰하기는 자동적인 것이며 목격과 관찰을 하는 "사람"이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명상의 지향은 집착끊기입니다. 특히 생각이 "내것"이고 "나"를 드러낸다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실상 생각..

멸정복성 2015.03.06

제2부 제6장

제6장 : 명상 소아를 초월하기 위한 전문화된 방법이 명상입니다. 호킨스 박사는 눈 감고 앉아서 하는 명상의 한계로서 (우리가 한가지 일을 할 때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하니까) 일상생활과 영적 수행을 양극화시킴으로써 세상일에 무심하게 만드는 것을 듭니다. 이 주목할 만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그 수준이 다양한 학인들의 (마음을 초월하기 위한) 수행길에서 마음을 훈련할 방편이 되어줍니다.

멸정복성 2015.03.06

5장 3

의식(인식)은 관찰자(주시자) 기능의 바로 밑 또는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나 우주처럼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습니다. 기대하기, 집착하기, 쾌락을 구하기 또는 불쾌를 피하기 등을 그만둠으로써 면도날과 같은, 흘러가는 순간의 물마루에 균형있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리를 잡을 때 마음의 활동과 영상작업은 (생각하려는 욕망과 의도가 바탕에 깔린 장을 활성화하는 것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점차 수그러듭니다. 초점과 관심이 내용물에서 관찰자(목격자)로 이동하면서 관찰자(목격자)란, 의식이 알아차림이란 형태로 분출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의식이란 일차적이며 타고난 것이면서 자동적인 (동시에 비선형적이고 비독자적인) 것입니다.---*---주의력이란 임의로 고른 가치에 기반한 선택적인..

멸정복성 2015.03.06

5장 2

목격하고 체험하거나 관찰하는 "누구"라 할 게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타고난 성질인데 그 과정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라는 에너지의 소모 없이 무리없이 작용합니다. 삶의 모든 것은 하나의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면 독자적인 "나"라고 하는 감각은 줄어들면서 내용물에 대해 생각하기를 뛰어넘는 (하지만 그것을 포괄하는) 원래 거기 있는 참나의 현존을 만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이 우리가 마음으로 또 감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입니다. 이 깨달음 덕분에 이제는 조명을 받는 세부사항에 초점을 두기보다 빛의 근원을 찾아 내면으로 초점을 옮겨 갑니다. 우리가 마음의 내용물을 알아챌 수 있는 것도 오직 이 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이나 생각..

멸정복성 2015.03.05

5장 1

마음의 장 전체를 관찰해보면 생각의 흐름 자체에서 나오는 특정 내용물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고 의식의 다음 차원으로 들어가서 생각의 흐름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알아차리고 등록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눈이 관찰 대상에게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귀가 들리는 것에 영향받지 않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현재 진행중인 목격의 과정은 목격되는 대상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한 생각을 하는 주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격하는 행위 뒤에 목격자가 있는 게 아닙니다. 목격하는 일은 독자적인 일이 아니며 의식 자체의 타고난 측면이자 특성입니다. 우리는 생각의 내용물에 개입하지 않고 떨어져 있을 수 있으며 관찰이나 목격을 할 때 특정 관점을 취할 자유가..

멸정복성 2015.03.05

4장 4

에고(마음)와의 동일시를 해체하는 과제는 영적 진화의 주된 초점이며 역사상 가장 학식이 있는 사람들까지 좌절했던 난제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에고(마음)가 자신을 처리 기능과 동일시하는 오류인데, 즉 현상이 선형 세계에 자리하기 때문에 저절로 선형 세계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삶의 체험이 몸이기 때문에 물질적 실체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자연적 결과입니다. 주된 문제는 주관성의 실제 근원을 잘못 아는 것과 그것이 비국지적임에도 국지적인 것으로 잘못 추정하는 데 있습니다. ---*---영적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는 특정한 "나" 또는 한계지어진 "나"가 아니라, "나임"(즉 "나다"라는 것)을 아는 (그리고 "나다"라는 것의 존재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를 기대합니..

멸정복성 2015.03.05

4장 3

에고(마음)는 새로운 것에 끌리고 따라서 재미있는 형상과 감각을 열광적으로 추구합니다. 언제나 현존하며 그저 주시하기만 하면 되는 고요하고 형체없는 바탕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저런 상황을 거부하고 대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요한 배경이 없으면 소리를 분간할 수 없는 것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인생에서 불가피한 것들을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종교적(영적) 회의주의자라 하더라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본적이고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생명의 내면적 특성인 인식 능력과 의식, 그리고 주관성이라는 바탕이 존재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없으면 개인은 "알지"(즉 자기가 "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이란 그 존재의 내용물과 관계없는 존재의 ..

멸정복성 2015.03.03

4장 2

결국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내용물이나 자료가 아니고 프로그램의 내용물에서 여러 단계가 제거된 비독자적인 장(場)라는 깨달음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참여자나 주체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엇에 관하여 안다"는 것은, 정보 자체는 친숙하지만 그 실체와 진실은 여전히 경험하지 못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확실성에 도달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참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무엇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 주체와 아는 자는 하나가 됩니다. "무엇에 관하여 아는 것"이 심리적인 것인 반면 경험으로 아는 것은 확실성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의식적 앎의 장은 시간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고요하며 자동적이고 수고할 필요가 없고 평화로우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프로그..

멸정복성 2015.03.03

4장 1

답은 간단합니다. 초점을 안으로 돌려 모든 것을 체험하는 절대적 주관성에 집중하세요. 삶의 모든 표현에 수반되는 주체감의 성격을 관찰하세요. 딱지를 붙이지 말고, 언제나 거기 있으면서 더 이상 축소되지 않는 주관성의 기저를 항상 (모든 찰나와 모든 순간과 모든 환경에서) 주시하세요.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보는 것, 아는 것 등 어떤 형식이든 체험의 본질은 바로 이 주관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주관적 체험이 바로 언제나 있던 것임을 깨우치세요.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겁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물으십시오. 이 질문이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무언중에 ..

멸정복성 2015.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