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입문

황벽 선사의 한 마음

목운 2020. 10. 7. 18:55

황벽 선사는 개념적 사고의 범위를 초월하는 형언할 수 없는 궁극의 실체를 가리키기 위해 '마음'이란 말을 썼지만 거기에 온전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이상 '한 마음'이란 것이 진짜 '마음'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음'은 이미 그의 전임자들이 종종 사용했던 말이었다. '마음'이 불가해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특히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통상 인간 몸에 거주하는 개별적 실체로 간주되는 인간의 그 부분이 실상 그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모든 사람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어에서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뿐 아니라 '심장' 그리고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이나 '혼' - 요컨대 소위 참사람[眞人], 즉 몸이라는 집에 거주하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도 참고해야 한다.) 우리가 그 대신 '절대성'이란 말(황벽 선사는 때때로 이 뜻으로 사용했는데)을 쓰려고 한다면 '절대성'의 뜻에 대해서 어떤 선입견 있는 뜻을 넣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물론 '한 마음'에 대해 황벽 선사가 의도했듯이 모든 선입견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전 번역에서 나는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을 기대하면서 '한 마음' 대신 '우주심'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여러 비판이 있어서 내 용어 선택이 여러가지 오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한 마음'을 고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적어도 문자대로 번역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선 수행

이 책은 종종 명상이나 관상이라 부르는 수행에 관하여 거의 논하고 있지 않다. 불행하게도 이 두 단어는 그 어떤 목적을 시사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무목적을 전제하면 멍하거나 잠자는 것 같은 상태에 빠질 수 있는데 그러한 상태는 전혀 선의 목적이 아니다. 황벽 선사는 이 수행에 대해서 물론 열심한 불자가 대개 행하듯이 청중들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간주했던 것 같다. 그는 어떻게 '명상'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지만 무엇을 피해야 할지는 말한다. 만약 현상 세계를 환상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막아 버리려 한다면 우리는 '실상'과 '비실상'을 잘못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무엇도 막아버리지 말고 모든 분별을 헛된 것인지 아는 지점, 즉 그 무엇도 바람직하거나 회피할 것이라든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한 게 없는 지점까지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멍한 상태로 두라는 게 아닌 것은 그랬다가는 나무 토막이나 돌덩어리와 다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상태로는 일상생활 환경에 대처할 수 없거나 '배고플 때는 먹어라'는 선의 가르침에도 벗어날 것이다. 그러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여 사물의 끌림이나 끌리지 않음이란 특성이 전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그것이 이뤄질 때 순식간에 일어난다. 점진적인 깨달음도 부분적인 깨달음도 있을 수 없다. 고도로 훈련되고 열심한 수행자가 깨달음을 위해 잘 준비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깨닫는 법은 없는데 그것은 한 방울의 물이 점점 뜨거워질 수 있겠지만 그러고 나서 갑자기 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그 어떤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끓는다는 것은 없으며 끓을 때까지 그 어떤 질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상 세 단계를 거치는 듯하다. 즉 깨닫지 못한 두 단계와 깨달은 하나의 단계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 달은 달이고 나무는 나무다. (실로 이 단계보다 높은 단계는 아닌데) 다음 단계는 '모든 것이 한 마음'이기 때문에 달과 나무가 보이는 것처럼 전혀 달과 나무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 단계가 되면 모든 차별이 공(空)한 거대한 단일성 개념을 가진다. 그리고 일부 수행자에게 이 개념은 이전에 달과 나무가 '진짜'였던 것처럼 실제 인식될 수도 있다. 깨달음이 실제 일어날 때 달은 다시 완전한 달이고 나무도 정확히 나무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깨달은 사람은 하나임과 다양성 사이에 그 어떤 모순도 없이 그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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