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입문

다른 종파에 대한 황벽의 태도

목운 2020. 10. 9. 08:32

이 번역본은 소승 불자 또는 선 불교를 제외한 대승 불자들이 볼 가능성이 있으므로 오해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해 몇 가지 설명을 붙이고자 한다. 전심법요나 다른 선불교 저작을 얼른 보면 선불교가 아닌 불교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황벽은 이미 굳세고 열심인 불자를 주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록된 것들은 그 맥락을 벗어나거나 설법이 벌어진 환경을 도외시하고 보면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비불자에게 말하고 있었다면 '삼승'에 대한 그의 언급은 다른 식으로 말해졌을 것이다. 전심법요를 잘 연구해보면 황벽이 그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 불자들의 덕성을 격하하려는 뜻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황벽은 선의 방법이 매우 빠른 성과를 얻는 데 효과가 있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경전 공부와 선행 실천은 유한한 마음의 개념형성 과정을 적당히 통제하지 않으면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이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 선행과 올바른 생활에 대해 말하자면 배휴등에게서 그들의 삶의 양식이 고양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는 선행 자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계속 싸웠다. 게다가 불자가 이원성을 넘어갈 수 있도록 훈련할 때가 왔을 때 그는 선악 개념이 다른 이원성의 형태처럼 초월해야 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스승은 그가 설법을 해주는 많은 불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선업을 쌓으려는 의식적 욕망을 가지고 선행을 하려는 아주 흔한 과오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욕망은 다른 형태의 집착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해가 된다. (나는 고귀한 삶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타인의 행복을 해치는 행동을 수시로 저지르는 '성실한' 불자를 여럿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종단에 규칙적으로 헌금하고 절의 예식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면서 자기들 어리석음과 타인에 대한 무자비함에서 나오는 결과를 없애줄 선업을 충분히 쌓고 있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불교 경전과 모든 저작 연구에 관해서 황벽은 가르침을 받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가 있는 산으로 오는 많은 이들이 이미 불교 가르침에 친숙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마음 다스리기(正定)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말에서 보건대 초심자들에게 책과 다양한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부처님이나 다른 위대한 스승이 전한 서책을 통해서 먼저 신비주의에 끌리지 않았다면 황벽 가르침의 중심 축인 마음 다스리기의 필요성을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희귀한 사례들을 제외하면 말없는 가르침에는 반드시 말로 하는 가르침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황벽이 '삼승'을 격하시킬 의도가 없었다고 확신하지만 이미 그런 가르침에 깊이 물든 청중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그는 마음 다스리기(正定, Sammasamadhi)가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열반이라 부르는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가져오는 신비적 직관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다른 모든 수행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종파의 불자들은 대개는 무지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종파에 대해서 황벽보다 훨씬 포용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토종은 '비불자'니 '불교의 이단'이니 하면서 무시하거나 낙인을 찍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정토종 진도들이 자기들 종파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일에 부분적으로 기인하지만 그 신도들 대다수의 대중적인 믿음에 의해서 그 장단점이 판정된다고 해서 어떤 종교나 종파를 마땅히 우습게 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실상 정토종이 그 순수한 형태라면 뛰어난 불교인데 그것은 아미타불이 법신(절대자와 하나가 된 부처)을 상징하며 정토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실재와 하나라는 직관적 통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즈끼 교수는 어디선가 선 수행자보다 정토종 신도가 더 많이 돈오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 정정(正定)에 드는 우수한 방법이어서 '아미타불'과 '정토'의 의미를 모르는 단순한 사람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서구의 불교 작가에게서 악평을 받는 불교 종파는 영국에서는 라마교로 알려진 종파다. 라마교는 학력이 없는 티베트인들의 미신(이는 꽤나 '선진국인 나라'들에서볼 수 있는 무지한 미신과 다를 바 없음)과 타협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에반스-웬츠 박사가 훌륭하게 편집한 옥스포드 피베트 시리즈는 그 반증이 되는 반박불가능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종파에 대한 황벽의 일견 심한 말은 정정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려는 한결같은 욕망이 절실하고 진실한 때문인 것으로 정당화된다. 여러 종파 작가들이 보여주는 심한 말들이 그보다 더 정당한 것도 아니다.

'전심법요 입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문 초록 및 영문 번역 1  (0) 2020.10.09
배휴의 서문  (0) 2020.10.09
황벽 선사의 한 마음  (0) 2020.10.07
황벽 선사와 선 사상  (0) 2020.10.07
선불교의 기원, 성장 및 전파  (0) 202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