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입문

황벽 선사와 선 사상

목운 2020. 10. 7. 08:46

6조 회능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수받은 때 선종은 이미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북부 지파는 깨달음의 과정이 점진적이라고 가르쳤는데 왕실 후원을 받는 동안 번성했지만 오래 존속되지 않았다. 반면 남부 지파는 돈오의 가르침으로 계속 확장하였고 나중에 세분화되었다. 6조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마조 도일인데 그는 788년에 사망했다. 마조와 1~2세대 차이가 있는 황벽은 말 없는 법을 임제 의현에게 전한 후 850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제는 중국과 일본에 널리 번성하고 있는 임제종의 설립자다. 따라서 황벽은 어떤 의미에서 임제종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다른 중국 스님들처럼 황벽은 이름이 여럿인데 평생동안 희운으로 불렸고 단제 선사라고도 불렸다. 사후 이름 황벽은 그가 여러 해 살았던 산 이름에 따른 것이다.
선 사상
선불교는 스즈키 박사의 광범하고 계몽적인 저작과 크리스마스 험프리 씨의 유쾌한 작품 '선 불교' 같은 서양 학자의 작품 덕분에 많은 서구인들에게 이미 친숙한 가르침이 되었다. 처음 접하면 선에 관한 저작은 아주 역설적이어서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것 같다. 어떤 페이지에서 만물은 나눌 수 없는 한 마음이라는 것을 읽고 다른 페이지에서는 달이란 바로 달이고 나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나무라고 하는 걸 본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오락용 역설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 없다. 왜냐하면 선을 삶에서 가장 진지한 것으로 보는 수백 만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불자는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을 시발점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궁극의 실재를 직면하게 해주는 초월적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선불교도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즉 그들은 불가피하게 고통과 무지에 얽매인 억겁 동안의 여러 생을 통하여 무한정 느린 속도로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이 '신성과의 합일'이라고 묘사한 '지고의 체험'에 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념적 사고를 넘어 깨달음에 핵심적 사실인 '직관적 지식'을 터득하려는 단호한 노력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게다가 그들은 그 체험이 갑작스럽고도 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력의 과정은 여러 해가 걸릴지라도 그 보상은 단번에 이뤄진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덕과 초탈의 실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거기에는 선과 악, 추구와 얻어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등과 같은 모든 상대적 개념을 초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신에 대한 기독교의 몇가지 생각을 살펴보자. 신은 제1 원칙으로서 원인이 없고 낳아지지 않았으며 논리상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통해서 찾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신은 선하다'는 개념이 나오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비가들이 지적하듯이 그 완전성을 해치게 된다. 왜냐하면 선하다는 것은 악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완전성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체성과 온전성을 불가피하게 훼손하는 한계를 가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은 악하다'라거나 '신은 선과 악이다'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가에게 신은 그 어느 것도 아닌데 그것은 신이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을 우주의 창조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원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즉 창조자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완전하지 못하게 되며, A가 B를 배제하거나 B가 A를 배제하는 곳에서는 일체성도 온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 수행자들(이들은 다른 신앙의 신비가들과 많은 점에서 일치함)은 신이라는 말의 이원성과 의인화를 초래하는 일을 경계해서 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성'이나 '한 마음'을 선호하는데 그 대신 유한한 무엇과 관련해서 강조점에 따라 많은 비슷한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부처(붓다)'라는 말은 깨달은 자로서 고타마 붓다를 뜻하는 것은 물론 절대성과 비슷한 말로도 사용된다. 왜냐하면 그 둘이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붓다의 깨달음이란 그가 절대성과의 합일을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을 가리키는데 그로 인해서 그의 육신이 죽은 후 그를 외견상으로도 구분할 것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성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전제할 수 없다. 즉 존재한다고 말하면 비존재를 배제하는 것이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존재를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 수행자는 절대성 또는 절대성과의 합일은, 얻어낼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 실상 '열반에 든다'고 하는 체험은 만물의 참 본성이기도 한 참나(self-nature)를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절대성 또는 궁극의 실재는 중생에게 두 측면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측면은 개별 현상들이 시공 안에서 순전히 무상하지만 분리된 존재를 지니는 상태다. 다른 측면은 시공을 벗어난 상태인데 여기에서는 모든 종류의 양극, 모든 분리와 각종 '실체'가 '하나'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측면도 많은 명상가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 홀로는 깨달음의 최고 결실은 아니다. 관조자가 진짜 깨달은 것 같은 것은 오직 양 측면을 인식하고 통합한 때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그는 관조자로 있지 않는데 그것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간의 분리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의 사용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더 큰 모순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나는 절대에 머문다'든지 '절대성이 내개 머문다'든지 '절대성이 나를 꿰뚫었다'든지 하는 신비 용어를 쓰는 것은 맞지 않다. 즉 공간을 초월한 때라면 전체와 부분이란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부분이 전체가 되어 내가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을 제외하면 나는 절대인 것이다. 그때 내가 보는 것은 내 참 '나'이며 그것은 바로 만유의 참 본성이기도 하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동일하지만 눈이 자신을 볼 수 없듯이 보는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참된 선 수행자의 유일한 목표는 마음을 훈련하여 '일상' 생활과 뗄 수 없는 이원성에 기반한 모든 사고 과정을 초월하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처음으로 자신이 진짜 무엇인지 하는 것이 그에게 드러나는 그러한 '직관적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라면 한 존재의 참 본성(타고난 자아)에 대한 지식은 우주 만물의 참 본성에 대한 앎이 된다. 기독교도든 불자든, 아니면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 간에 이 굉장한 체험을 실제 한 사람은 그것을 말로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다른 사람에게 그 길을 가리켜 줄 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들이 스스로 그 체험을 할 때까지 그들은 그 진실을 그저 극히 희미하게만 파악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인간 지성이 도달한 최고의 지점을 넘어 무한히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초라한 지적 개념일 뿐이다.
선사들이 유머가 필요한 것 같은 때 종종 유머를 구사했지만 어설프게 신비화를 좋아해서 역설을 사용한 것은 아니라는 게 이제 분명할 것이다. 보통 선사들 설법의 역설적 성격을 설명해주는 궁극의 체험을 기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확답하는 것도 부인하는 것도 모두 한계가 있다. 게다가 한계를 짓는 것은 진리의 빛을 막아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올바른 길 위에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말은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모순된 말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것들이 때로는 모순 속의 모순, 또 그 모순 속의 모순이 될 수도 있었다.
황벽 선사가 보다 전통적인 길을 가는 불자들에 대해 자주 비판했다는 것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전통이라 하면 지식을 쌓고 단계적인 존재 상태를 거쳐 선행과 자비심을 배양하는 것인데 그러한 비판은 그 실천의 가치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불자로서 황벽 선사는 이러한 일들이 일상 생활에서 적합한 행동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겼다. 우리는 배휴가 그 삶의 태도로써 칭찬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덕과 같은 개념 때문에 이원성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이 직관적 통찰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점차적으로 얻어내는 과정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배웠다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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