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환상

인간적 고독에서 신적 고독으로의 비상

그리스도의 편지

긍정적 사고방식에 대한 가르침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진화해가는 구도자에게는 그런 정도의 의식 변화로는 영적인 메마름이 해소되지 않아서 자꾸 뭔가를 더 갈망하게 만든다. 영혼이 갈망하는 그 '무언가 더'는 <존재의 근원>과의 진정한 만남과 재합일이다... 

우주적 존재의 본성을 깨닫고 그것과 진정한 만남을 이루는 일에 주의를 돌리면 너희는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우주를 지탱하는 실재로부터 뒷받침받고 있는 자신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그것과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저러한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너희 <존재의 근원>과 진정한 만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 존재의 근원과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은 (1) 너희가 의식으로부터 거친 인간적 에고 욕구를 충분히 닦아내고 (2) 일정 시간 이상 명상을 하여 영을 접함으로써 존재를 새롭게 충전시키도록 애쓰면서 근원에 '가 닿기를' 의식 속의 강렬한 느낌으로 규칙적으로 염원할 때만 경험된다. (275~276쪽)

-- 우리의 욕망은 영혼의 갈망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영원을 향하지 않으면 가시 세계의 것들에 갇혀서 루프를 끝없이 반복할 뿐입니다. 그것은 권태와 무미건조함을 느끼는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과 만날 때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3세기 사람 플로티누스가 '인간적 고독에서 신적 고독으로의 비상(flight of the alone to the Alone)'을 말할 때 전해지던 것입니다. 신과 함께할 때 다른 이들에게는 혼자인 것 같지만 완전히 또 진실로 인간적 고독을 극복한 상태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가는 비결은 위 (1) (2)밖에 없다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 입증된 진실입니다.   

자유, 심지여와 심생멸

단상

어제는 고전음악에 대한 책을 읽다가 servant가 valet보다 아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략 18세기 음악가들은 궁정에 채용되지 않으면 생계가 매우 어려워지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출신이 대개 servant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모차르트는 여기에 반기를 들고 최초로 프리랜서를 선언한 음악가라 합니다.

각설하고 저쯤에서 자유라는 말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영성 깊은 말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자유란 영어로 하면 'from self'죠. 밖의 것, 또는 밖에서 주입된 모든 것을 부인하고 내면의 것만 따라서 산다면 비로소 자유롭다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self와 Self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1~2세기에 정리된 대승기신론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즉 심진여를 Self, 심생멸을 self로 따로 구분하지 않으면 바로 혼란에 빠집니다. 그렇게 해서 마태오 16:24의 '자기를 부인하라(forget self)' 할 때도 심 생멸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경전들의 회통도 되고 요새 경영학이나 자기개발서들이 말하는 '자아실현'이란 말도 명료해집니다.

요컨대 자유란 세상 살기와 몸의 진화에 복무하는 소아 또는 심생멸이 아니라 하늘의 프로그램이 새겨진(天命) 참나(性) 또는 심진여에 따라 살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저는 공자께서 종심소욕 불유구를 말하실 때의 마음도 심진여라고 보는 겁니다. 심진여에만 의지해서 사는 데 꼭 필요한 수련이 명상이며 이 수련은 밥먹고 양치질하듯 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영성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데 서양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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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속성과 다음 차원의 모습

그리스도의 편지

너희는 너희가 하느님이라 부르고 내가 우주적 존재라고 일컫는 <그것>에에는 많은 종교들이 덧붙여놓은 인간적 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온전하고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분노와 위협, 처벌 등 인간적 속겅은 오직 인간의 상황에만 어울리는 것이다...

죽음은 존재의 한정된 차원으로부터 더 밝고 더 강력한 차원으로 넘어가는 행복한 여행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영적으로 어느 정도 정화되어 육신의 껍질을 벗어날 때가 되면 너희는 이곳을 떠나서 육체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사랑과 아름다움과 경이로운 존재감을 누리는 세계로 진입할 것이다. (274쪽)

-- 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어머니 따라 그리스도교에 입문했습니다.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하느님은 인간과 비슷한 것이었고 게다가 마지막 날에 단호한 심판으로 천국, 연옥 아니면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관이었습니다(다행히 가톨릭에 입문해서 연옥의 가능성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교회 출석을 그만두고 읽은 책들은 한결같이 신에게 인간적 속성은 없으며 절대 심판관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선가귀감에서 신적 존재를 한 물건(一物)이라고 하여 '편지'에서 자주 <그것(It)>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시대적으로 부족 의식 수준의 종교도 존재하는 반면 아무리 고등 의식으로 된 종교라도 우리 의식이 높아지지 않으면 부족 의식 수준의 종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임사체험자들이나 높은 의식에 도달한 스승들 얘기를 들으면 이 세상이 너무 누추해서 별로 이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이는 세상만을 기준으로 살고 있습니다. 호킨스 박사도 의식이 <무조건적 사랑>을 넘어 <평화>의 수준에 이르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선택에 무심해진다고 합니다.

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공부의 요령과 요점
요새 독서는 Carl McColman이란 미국인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Neale D. Walsch의 '신과 나눈 이야기'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 배운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적 수행법 가운데 신적 독서(Lectio Divina)가 초기 수도원에서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출처를 신에게 돌릴 수 있는 책을 읽고 감도를 느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취지로 짐작되는 것은 수도자가 되기 전에 습득한 생각, 개념, 이념 등은 에고 또는 소아에 근거한 것들이므로 신적인 생각으로 채우면 우리 삶이 거룩하게 된다는 믿음에서 나왔으리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신나이'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만한 말씀을 만났기에 인용합니다.

"지금 네 정신은 낡은 사고로 가득차 있다. 낡았을 뿐 아니라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다. 뭔가에 대한 네 마음을 바꾸자면 지금이 기회다. 이것이 바로 진화다. (신나이 1, 277쪽)" 출처를 신에로 돌릴 수 있는 책은 수천 년을 견딘 경전이 가장 좋을 것이고 호킨스 의식지수로 540 이상이면 믿을 만합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는 지점은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되는 것인데 보살이 되는 것이 바로 우주를 장엄하는 일이고 그 길을 상세히 안내한 경전이 화엄경입니다. 보살이 되어 우주를 장엄한다 함은 대승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근원을 공유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호킨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 뜻을 따르옵니다. 주님, 제가 당신 종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무한한 잠재력을 성취하여 당신 영광에 기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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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극복

단상

비번이어서 괜찮은 영화를 찾다가 '인 디 아일(in the aisles)'이라는 독일 영화를 봤습니다. 꽤 수준 높은 영화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두 가지가 인상 깊었습니다. 첫째는 전세계적인 현상인데 세계화로 인한 제3세계화의 질곡을 겪는 생존선 상의 인민들은 어디든 똑같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는 주로 동독 출신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 기생충과도 맥이 닿습니다. 경제적으로 저 인민들은 강고한 시스템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자유를 못 누리는 게 감옥생활이나 다름없다는 느낌입니다. '인 디 아일'에서는 버티다 못한 부르노가 자살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기생충에서는 폭발적 파국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생충의 파국은 매우 한국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특별히 감옥과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꿈꾸는 것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해방인데 이 영화에서는 파도소리 들리는 바다와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쇼생크 탈출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조금 의식이 낮은 브룩스는 석방된 후 자살을 하는데 저 독일 영화의 브루노와 겹쳐 보입니다. 하지만 쇼생크의 주인공은 많은 이의 꿈대로 바닷가에서 편안한 삶을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지지요!

제 나이 정도의 체험으로는 저들의 실패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답과 개인적 답을 제안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정치사회적으로는 기본소득제를 골인점으로 두고 계속 복지국가로 가는 것이 답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복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이요인론'에 따르면 위생요인(즉 경제문제)의 해결이 정신의 문제(사기요인, 즉 삶의 의미)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정신의 문제는 공자님의 종심소욕불유구나 선가귀감의 세간을 벗어난(출세) 자유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 독일 영화도 계속 외로움의 문제를 던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동병상린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아일여와 물아양망을 통해서 모든 존재와 하나임을 알고 체험하는 출세자유인의 경지를 모르면 외로움의 문제는 극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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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성자성(聖子性)

신과 나눈 이야기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는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발전된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도저히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실익이 있는 교리인지 하는 의문은 충분히 가질 만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시적 표현이나 신비적 표현으로 보면 상당히 높은 의식수준 또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인정할 부분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들도 그리스도처럼 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동서 영성 모두 인정합니다(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아시아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자손[天孫]이라 하지요).  아들 하느님, 즉 성자(聖子)는 아버지 하느님(聖父)과 구별되지만 하나인 신이기도 하다는 게 삼위일체 교리이므로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신나이' 1권의 말씀을 인용해 봅니다. "모든 선각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가르침을 전했다. 나는 곧 너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도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이 이상 가는 것도 하게 되리라." 이 점은 요한 복음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요컨대 우리가 신이지만 아버지 하느님과는 다른 아들 하느님이라고 보면 우리 모두의 성자성(聖子性)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영(靈) 하느님이 다르면서 하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나이'가 시사하는 보다 중요한 가르침이 여기에서 도출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참된 정체성, 다른 말로 참나란 바로 신성이기 때문에 신성으로서의 자각과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매일 명상을 하고 신적 독서(Lectio Divina)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계정혜의 실천(또는 6바라밀의 실천, 또는 기독교적 양심성찰, 또는 유교적 사단[四端]의 발휘)을 통해서 최대한 신성을 구현해내는 것이 사는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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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화중생을 위한 과학적 대안

그리스도의 편지

기독교란 내 초기 제자들과 안티옥 수임 이후의 바울이 유대인들을 최대한 한데 뭉치게 하고 이방의 개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종교다... 너희 영적 발전은 오로지 존재의 법칙과 <너희를 존재하게 한 그것>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인식과 이해로부터만 일어날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의 영적 근원을 알지 못함으로 해서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고 인간 의식을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온갖 고난을 낳는 근원인 지상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희가 배운, 혹은 전통이 전해준 그릇된 믿음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실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쌓을 수 있도록 <존재의 진실>을 이해가능한 현대 언어로 너희에게 전하기 위해 <내 그리스도 의식을 온통 쏟아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편지, 270~271쪽)

-- 저처럼 소년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신 분들은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 영향력이 압도적이어서 오히려 종교로 인한 깊은 고난과 좌절의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위에 써 있는 대로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초기 교회 다음엔 로마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 이후 로마제국 통치의 하위 수단, 즉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위에 써 있는 대로 '편지'의 기본 태도는 과학적입니다. 인류 고통의 원인인 전쟁(기록된 역사의 약 93% 이상이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이 없었을 때는 페스트와 같은 전쟁에 버금가는 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고 영적 발전을 꾀함으로써 모든 창조의 근원인 집단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매우 합리적인 하화중생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는 방법

신과 나눈 이야기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원한다(wanting)'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원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현재 결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당장 이뤄지지 않습니다. 즉 현재 이뤄지지 않고 미래 어느 시점에 막연히 이뤄지기를 현재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는 상태가 됩니다. 대부분 우리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대개는 믿는다고 기도합니다. 물론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했으니 이것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믿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아는(knowing) 것입니다. 아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며 그보다 조금 못한 것으로 내 체험을 종합해보니 마치 법칙처럼 확실하더라고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한국인이 되면 나는 한국에 대해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뜻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방법은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신처럼 창조자가 됩니다. 신이 아는 것을 모두 압니다.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신을 아는 것입니다. 신처럼 생각하고 신처럼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들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는 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있고 신처럼 창조할 때 신적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뜻하는 것을 이루는 차선책으로는 과거를 돌아볼 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이뤄졌다는 것을 체험상 알기 때문에 앞으로도 모든 필요가 채워지리라는 것을 그냥 아는 것입니다. 제 경우 여기에 해당하면서 신이 되는 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이 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신비주의가 신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일에 몸바친 사람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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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걱정 없음과 삶의 목표

그리스도의 편지

어제 글은 매일 명상을 위해 바치는 기도와 지상 천국 회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보면 (1)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2) 치유와 해결을 필요로 하는 모든 치유와 문제 해결이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이미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아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는 환갑 넘는 삶을 살면서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채워졌음'을 압니다. 제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채워진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다음에 지금 순간까지 적절한 때에 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필요한 치유가 일어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부를 잘 해서 내가 이미 신 의식의 일부임을 믿을 필요가 없이, 마치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두말할 필요없이 아는 것처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같은 성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신인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랑 자체가 되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명상 기도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궁극 목적은 당신을 표현하는 것임을 아나이다"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실천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일거수일투족이 신의 표현이 되도록 사는 것이 바로 인간 삶의 참 목표임을 뼛속 깊이 새기기 위해 매일 정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공부입니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

그리스도의 편지

우선 명상기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당신은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 제 가장 숭고한 영감이십니다." 다음에 세부규칙 해설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신 의식과 결합함으로써 치유와 해답을 구하는 모든 문제가 적절히 치유되고 해결될 것임을 안다."

매일 읽고 기도를 바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기도 지향이 오직 신 의식과 합치하고자 하는 데 있고 또 신 의식에 완전한 신뢰가 있다면 따로 구할 게 있습니까? 부자의 정의를 제대로 내린다면, 즉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자'가 부자라고 본다면 우리는 믿는 바대로 이미 부자입니다.

다음에 또 다시 신 의식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걱정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치유와 해답을 구하는 모든 문제가 적절히 치유되고 해결될 것임을 아는데'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며 왜 잠을 잘 못 이룹니까? 그리스도 말씀대로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온 마음과 뜻과 목숨을 바쳐 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기존 교회에 의지하는 일이 매우 효과가 없고 간혹 속임수에 휩쓸린다는 자각이 있는 분은 탈교회-탈종교를 추구한다고 봅니다. 루터가 세 가지 '만', 즉 성경, 은총, 믿음만을 주장한 것은 기존 교회가 심하게 부패했을 뿐 아니라 길을 잃고 아무런 효험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정당한 기존 교회는 오늘날 다시 형태만 다른 교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서 보다 효과적으로 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신비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는 것이 바른 판단인데 자기네 교회만이 그리스도 신비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