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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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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핵심 요점

2019.05.20 04:28 | Posted by 목운

1년전 오늘 글인데 함께 복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여기에 하나 보탠다면 세상 속에서의 조건 없는 사랑 실천입니다.

'내가 교회를 등질 마음이 없는데 왜 이단이냐?'라고 항변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복권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학자이자 영성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말 하나 인용합니다. "'누구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태 16:24)' 모든 것은 여기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 이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다. (영성지도 10쪽)"

여기서 '부인'은 원문에는 잊음(forget)으로 되어 있고 1968년 최익철 님 번역판엔 ‘자기를 끊고’로 되어 있어서 요즈음 서양 영성의 자아 소멸에, 동양 영성의 무아와 극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다음에 나오는 '놓아보냄'에 조응합니다. 결국 철학 내지 영성의 공통 요소는 내면의 탐구인데 '천국이 내면에 있다'고 하는 속뜻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고 했는데 이것은 에고와 참나 또는 복성서 노선에 따른 정(情)과 성(性), 대승기신론 노선에 따른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이라는 자아의 두 측면을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즉 ‘자신’이 바로 에고이고 ‘너’가 참나에 해당합니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대전제를 가르치지지 못하는 심리학은 실천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게 제 체험입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고 하는 부분은 명상과 같은 성찰 방법을 취하여 참나의 자리에서 에고를 살펴보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에고는 부인하고 끊어버려서 궁극에는 잊어버리게 되는 경지까지 이어지는 의식 진화의 길을 평생 가는 것이 누구나 취할 노선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충분한 보상이 있을 뿐 아니라 몸을 버린 후의 안심입명까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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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어 외양에 치중하여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아름다운 곳, 재미있는 곳, 유익한 곳, 특별히 맛있는 곳을 계속 보여주지요!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정신의 자유를 얻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몰라도 결국 상업주의에 매몰되지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여행을 다룹니다. 저는 가장 비천한 메신저에 불과하지만 참 좋은 텍스트 '편지'를 만나 함께한다는 목적에서 이곳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어제는 규칙 1번 "우선 10분부터 시작해서 매일 명상을 하여 만족할 만큼의 시간까지 늘려가겠다."는 바에 따라 10분을 늘려 타이머를 40분에 맞추고 명상을 했는데 진짜 눈 깜짝하는 것처럼 지나가더군요. 명상이 대개는 만족스럽지 않고 헤매다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만에 종일토록 명상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근무했습니다. 물론 헤매는 명상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매일의 선언'(어쩌면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란 생각입니다)이 우리 공부의 요점을 얼마나 잘 요약한 것인지 쓰려다 길어졌습니다.

즉 '선언'은 우리 공부가 '에고 충동이 사라지고 신 의식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이들의 소아가 아름답게 표현되는 천국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매일 비는 것이 '모든 이들의 의식주 해결뿐 아니라 영적으로 드높여지는 것' 즉 의식이 높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돌아갈 곳이 신적 생명과 신 의식이 불타오르는 근원이라는 것, 그곳은 창조의 근원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링크합니다.

https://tjryu.tistory.com/entry/%EB%A7%A4%EC%9D%BC%EC%9D%98-%EC%84%A0%EC%96%B8?category=53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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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이상, 최고의 목표

2019.05.13 05:14 | Posted by 목운

너희 물질세계 장막 너머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적 의식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만유에 저마다 존재를 부여하는, 만유의 배후와 만유의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상이요 진정한 열망이요 최고의 목표다.

너희는 이 실재를 신이든 알라든 야훼든 무한자든 지성이든 신성한 마음이든 신 의식이든 도(道)든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이 모든 이름들이 너희 <존재의 근원>, 즉 <창조의 기원>을 뜻한다. 이보다 더 높은 열망을 품을 수는 없다. 모든 개체적 존재를 있게 하고 돌보아 존속하게 하는, 만유의 배후와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도의 편지, 231쪽)

-- 기본적으로 존재의 근원 또는 창조의 기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을 최고의 지성들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종교가 붙인 이름만이 거룩하고 올바르다는 것부터 오류임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종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탈종교의 시대입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실재를 체험함으로써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일원적(비이원적) 인식을 얻고 사랑 자체를 체험함으로써 저절로 완벽히 진실해지고 완벽히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 하향식 실천이지 싶습니다. 계명 하나하나를 지켜 언젠가는 신을 체험하겠지 하는 상향식 실천은 오히려 힘겹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히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겠다는 결의와 매일 성찰하고 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만나는 모든 이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겠다는 결의가 더 쉬웠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 결론은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 거기서 결사적으로 벗어나겠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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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중독

2019.05.10 19:08 | Posted by 목운

종교를 그저 사회적 필요 때문에, 예를 들면 결혼식, 장례식을 위해서 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요해서 가지고 출석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다면 종교를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 없이 살다가 결정적 회두를 하고 의식이 향상하면서 종교를 택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고 하니 이런 이유도 괜찮지 싶습니다. 또 제 모친처럼 절망적 상황에서 종교쪽의 도움으로 그것을 견뎌낸 경우도 종교를 버리라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저 맹목적으로 또는 생각하고 따지기 싫어서, 의심하고 궁구하기 싫어서 습관적으로 출석하는 것은 안 좋은 경우입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종교를 벗어나서 사고할 것을 권합니다. 어떤 종교든 자기들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분리와 갈등을 낳고 세상에 불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큽니다. 중세 이후 기독교-이슬람의 전쟁, 기독교 내 가톨릭-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은 한시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각설하고 종교를 버려야 할 이유를 잘 정리한 신나이 2권을 인용코자 합니다.

"종교는 너희에게 좋지 않다. 조직된 종교가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을 믿으려면 그들은 먼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야 한다. 그러니 조직된 종교의 첫째 과제가 너희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너희가 지니지 않은 대답을 종교가 지니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고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는 너희가 그것의 대답을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397쪽)"

이 블로그가 집중하는 호킨스 텍스트에서도 종교와 영성을 확연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시공에 제약될 수 없는 신을 시공 내에 가져와 서술한 구약 대부분과 일부 신약을 미개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도 산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관습에서 나온 기독교, 권력자처럼 인간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천 년은 분명 종교 없는 세상을 향해 가리라는 것이 제 직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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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극기복례인가?

2019.05.08 05:56 | Posted by 목운

우리가 살면서 오감을 기초로 얻는 사유로부터 통속성과 세상 즐거움 이외에는 없다는, 즉 보이는 게 전부라는 신화를 받아들인 결과가 지금 세상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통하면 된다는 의미의 통속성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면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실천하게 되고 희소성 원리 위에 세워진 경제성 원리에 따라 살게 되고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수월성 원리(사실상 우리 교육의 바탕이죠!)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1등을 하여 잠시 세상에서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데 투철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입증한 대표적 인간들이 박근혜와 양승태라고 봅니다.

이들 사회진화론, 경제논리, 수월성 원리 위에 세워진 세상을 바꾸려면 그것들이 사회운영에 꼭 필요하더라도 반드시 우리 전통의 극기복례 원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극기복례에서 '돌아갈 예(복례)'란 우주의 근본 원리(天理)이며 중용의 도(道)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경영할 자리에 있는 자들이 모두 예에 따라 살 때 평천하, 즉 평화로운 세상이 구현된다고 본 것이 대학의 요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나 인도에도 그대로 있으니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동굴의 우화는 붓다의 마야에 대한 가르침과 같은바 세상 모든 것이 홀로그램인 것이니 에고를 초탈(극기)하는 것이 제대로 된 답이라는 것입니다. 가시계는 모든 이들 의식이 집단으로 매순간 창조하는 것들이 스크린처럼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라는 것(이것은 한편 첨단 과학인 홀로그램 이론으로도 입증됩니다), 이러한 세상에 우리 참나가 잠시 만들어낸 몸을 의탁하고 그 몸을 써서 작품을 만들고(즉 창조에 참여하고) 있지만 우리 참나는 세상 것이 아니니 세상을 그저 가운 걸친 것처럼 살다가 다음 차원으로 더 높이높이 날아 올라가는 것이 우리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의 진화는 계속 더디기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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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이후 청소년기부터 결혼 후 상당한 기간 동안 제 의식을 지배했던 기존의 기독교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닐 도널드 월시의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 찾았더랬습니다. 그 이후 호킨스 박사 저술과 최근에는 '그리스도의 편지'도 똑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월시의 경우 저와 같은 로마 가톨릭이었는데 그가 겪은 교회에서의 체험이 참으로 공감이 갔습니다. 다음 구절을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너희 종교들은 처벌하는 신이라는 관념을 정당화고자, 신이 화를 낼 만한 뭔가를,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조차 어느 정도는 구원받아야 할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면 자신의 타고난 불완전함 때문에라도 구원받아야 하도록...(신과 나눈 이야기 1권 198~199쪽)"

이상은 원죄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그리스도교 영성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원죄론을 버리고 신의 창조는 매 순간 완벽하며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들은 완벽함 자체의 반영이라는 것(같은 책, 198쪽)을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호킨스 영성과 '편지'의 영성도 두려워해야 하고 복수하고 화내는 신을 달랜다는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월시의 영성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지상의 기독교 종사자들에게 권위와 존재 이유를 제공하는 장치일 뿐입니다. 제 블로그 전체는 이러한 기존의 미개한 프로그램을 해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욕물과 아이를 함께 버리지 않도록 그리스도교 영성의 소중한 핵심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종종 '신과 나눈 이야기' (약칭 '신나이') 말씀을 자주 묵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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