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중용과 깨달음의 요체

목운 2021. 12. 25. 10:12

30년 넘는 기독교(천주교) 생활을 지양극복하니(저는 졸업했다고 표현합니다) 좀더 객관적인 관점이 생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기들은 계시종교고 아시아의 불교나 유교는 그저 자연에서 진화한 종교라고 하는 가르침(이라 쓰고 세뇌로 읽습니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유불선을 공부한 바로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지난 번에 이어서 중용을 더 파보려고 말을 꺼냈습니다. 중용 첫머리에서 말하는 교는 실상 종교로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교란 수도고 도란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게 요점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도란 한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이란 것이 도덕경 말씀입니다. 전심법요가 말하는, 말이 끊어지고 마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하늘의 뜻이란 것도 그러하지요. 그래서 우리 전통에서는 육신을 벗어난 마음 또는 진여심을 깨쳐버려야만 알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게 깨달음의 요체인데 그것을 위해서 마음을 완전히 투명하게 하고(誠之) 선을 택하여 지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명상을 하라(守其中)고 하는 게 중용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가서 존재의 근원에 이르면 깨달아 밝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숙하는 이고 선생은 그 대표 선수로서 안회를 들고 있습니다. 이고 선생은 안회가 성인이라고 말하는 전통을 세우신 분으로 생각되는데 복성서에서 안회를 세 번이나 거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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