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누진통과 여의주

목운 2021. 12. 13. 08:55

중용을 공부한다는 것은 수도의 삶을 산다는 것이고 중용 첫머리에서 도란 요샛말로 참나를 따른다(率性)는 뜻입니다. 참나란 대승기신론 용어로 진여심(眞如心)입니다.

기독교 삶도 자기를 버림으로써 신과 일치한 후에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조건없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유교도 그러했고 오늘날 기독교도 그러한데 먼저 할 일을 미루고 에고 드라이브로 도를 이룬 듯이 살려 하기 때문에 쉽사리 부패한다고 봅니다.

어제 공부 모임에서 더 이상 새지 않는다는 뜻의 '누진(漏盡)'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과거 써놓은 글이 있어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에크하르트 님은 영혼이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가장 순수하고 고귀하고 섬세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 영혼은 오관을 통하여 다양한 피조물을 향해 바깥으로 달려가지 말고, 전적으로 안으로 향해야 하며 하나로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이부현 님 선집 255쪽).

저는 이 지점이 정확히 유교의 윤집궐중이나, 불교의 육근불루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생각이 끊어진 중을 잡으라는 말이고 후자는 오관의 감각과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행 가운데 보시, 지계, 인욕의 기초가 바로 선정, 지혜, 정진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정과 지혜가 극에 이르러 얻는 경지를 누진통이라 했고, 누진통에서는 뜻하는 바를 모두 구현하기 때문에 여의주를 얻는다고 했는데 이 말의 공자님 버전이 바로 종심소욕불유구라고 생각합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상적 계승  (0) 2021.12.18
수도, 걸림돌 제거  (0) 2021.12.17
득도의 길  (0) 2021.12.05
임종 준비  (0) 2021.11.23
신명 있는 삶  (0) 2021.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