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기

목운 2021. 2. 2. 06:09

“너희 물질세계 장막 너머에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적 의식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만유에 저마다의 존재를 부여하는 만유의 배후와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상이요 진정한 열망이요 최고의 목표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너희 <존재의 근원>, 즉 <창조의 기원>이다.” (231쪽)

우리는 소통의 필요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입니다. 실로 우리 이름 석 자가 우리 존재가 아니듯 각 문명이 <존재의 근원>에 붙인 이름도 <그것>이 아닙니다. 무소부재, 즉 없는 곳이 없이 어디에든 있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그것>에 학문을 하기 위해 또는 다른 목적으로 문화마다 달리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이 책에 거론된 것만 보면 신, 알라, 야훼, 무한자, 지성, 신적 마음, 신 의식, 도(道) 등이 있습니다.

​영어의 ‘GOD‘만 해도 ’신‘이나 ’하느님‘으로 달리 쓰면 또 느낌이 달라집니다. 야훼 또는 여호와란 말도 ’그는 되게 한다’라는 뜻이라 하며 모세가 직접 신을 대면하고 알게 된 이름은 “나다(I am)’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쓴 사람도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해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던 상황에서 자신만이 신을 안다고 하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가장 알기 쉬운 특성을 드러내 부르기 위해 그리스도는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모든 존재, 즉 만유를 낳았으며 만유에 대해 ‘무조건적 사랑’을 베풀고 양육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채워준다는 것인데 꼭 이름 붙여 불러야 한다면 ‘아버지’라 부르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다는 것이 이 책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름이 가지는 문제점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책 중간 쯤 이후에는 ‘아버지-어머니-생명’이라 부르자고 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도(道)라고 할 때 그것은 우징숑(吳經熊) 님에 따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인 ‘실재’를 뜻하며... 만물과 만덕의 정의할 수 없는 근원”입니다. 제 생각엔 어쩌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가장 잘 준수한 사람들이 바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솔직히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부르거나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가벼워 보이기 짝이 없습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간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각 문화에 속하는 이들이 신의 이름을 <존재의 근원> 또는 <근본 실체>나 <궁극의 실재>와 같은 학문적인 용어로 한결같이 부르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책처럼 그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며 명상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열망을 품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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