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향후 천 년의 과제

목운 2021. 2. 4. 05:29

“그들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보았고 깨달았고 알았다. 그들은 높이 추앙받았지만 그 추종자 가운데 극소수만 가르침을 이해했다. 제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말씀을 해석했다. 그 해석들은 각자 놓여진 조건과 성향에서 파생된 것이다. (232쪽)

앞 글에서 <존재의 근원>이 <창조의 근원>이며 근본적 <실체(實體)> 내지 <실재(實在)>인데 그것을 알고 체험하는 것보다 “더 높은 열망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책은 그것을 보고 깨닫고 이해한 스승들이 뒤에 오는 모든 이들, 즉 우리에게 제시한 목표 또한 그들이 체험한 것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지구촌이란 말이 말하듯 하나로 연결된 세상에서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키려면 위와 같은 사실에 모두가 합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분열과 다툼 가운데 가장 큰 줄기라 할 수 있는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소통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 책은 앞으로 천 년을 내다보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를 보더라도 붓다께서 연꽃을 들어 가르친 진리에 대해 미소로 답한, 문자를 벗어난 가르침에 집중하는 사람과 문자를 통해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사람 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위 말씀처럼 공부하는 사람의 놓여진 조건과 성향 차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간에도 엄청난 수준의 차이가 있어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해서 배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오로처럼 기적 체험을 하고 미친 듯이 전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구촌이 된 세상에서 각 종교 간, 문화 간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지 말고 스승들 가르침이 똑같은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똑같은 용어로 말할 수 있는 부분부터 합의해 간다면 분명 평화는 앞당겨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에 이 책에서 노력하는 것처럼 가르침의 근본을 왜곡했거나 쓸데없이 덧붙여진 것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지구 위 모든 사람이 많은 시간을 홀로 명상하며 내면에서 의식수준을 점점 높여나가면서 체험하는 것들에 대해 같은 용어로 정리해본다면 몸을 벗은 다음에 모든 스승들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는 일도 가능해질지 모릅니다. 제 경우는 책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 동아시아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해 표현한 것들이 바로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다는 전제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수 십 년의 기독교 생활을 돌아보며 가장 부족한 부분이, 뿌리 깊게 독선적이고 우월하다는 의식이 곳곳에 잠재해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두 선민의식을 가졌던 유태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데 있습니다. 우리 에고가 하는 대로 구분과 경쟁의 습(習)을 버리지 못하여 거의 모든 선의의 가르침에 그러한 것이 녹아 있습니다. 오늘날 로마 교회가 버렸다고는 하지만 잠재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는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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