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물질세계 장막 너머에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종교적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적 의식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만유에 저마다의 존재를 부여하는 만유의 배후와 내부에 있는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상이요 진정한 열망이요 최고의 목표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은 너희 <존재의 근원>, 즉 <창조의 기원>이다.” (231쪽)
우리는 소통의 필요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입니다. 실로 우리 이름 석 자가 우리 존재가 아니듯 각 문명이 <존재의 근원>에 붙인 이름도 <그것>이 아닙니다. 무소부재, 즉 없는 곳이 없이 어디에든 있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그것>에 학문을 하기 위해 또는 다른 목적으로 문화마다 달리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이 책에 거론된 것만 보면 신, 알라, 야훼, 무한자, 지성, 신적 마음, 신 의식, 도(道) 등이 있습니다.
영어의 ‘GOD‘만 해도 ’신‘이나 ’하느님‘으로 달리 쓰면 또 느낌이 달라집니다. 야훼 또는 여호와란 말도 ’그는 되게 한다’라는 뜻이라 하며 모세가 직접 신을 대면하고 알게 된 이름은 “나다(I am)’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쓴 사람도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해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던 상황에서 자신만이 신을 안다고 하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가장 알기 쉬운 특성을 드러내 부르기 위해 그리스도는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모든 존재, 즉 만유를 낳았으며 만유에 대해 ‘무조건적 사랑’을 베풀고 양육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채워준다는 것인데 꼭 이름 붙여 불러야 한다면 ‘아버지’라 부르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다는 것이 이 책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름이 가지는 문제점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책 중간 쯤 이후에는 ‘아버지-어머니-생명’이라 부르자고 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도(道)라고 할 때 그것은 우징숑(吳經熊) 님에 따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인 ‘실재’를 뜻하며... 만물과 만덕의 정의할 수 없는 근원”입니다. 제 생각엔 어쩌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가장 잘 준수한 사람들이 바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솔직히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부르거나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가벼워 보이기 짝이 없습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간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각 문화에 속하는 이들이 신의 이름을 <존재의 근원> 또는 <근본 실체>나 <궁극의 실재>와 같은 학문적인 용어로 한결같이 부르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책처럼 그 실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며 명상을 통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열망을 품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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