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요령과 요점 144

영적 독서와 명상

번역중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핵심 중 핵심이라 할 만한 구절을 공유코자 합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영적 독서의 수행이라는 게 명상보다 유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관련된 유일하고 매우 기초적인 영적 수행이다. 참으로 내 책에서 배우는 단 하나의 수행을 실천하려고 하신다면 그것이 영적 독서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스도교 명상이나 관조적 기도를 하고 싶다면 영적 독서로 시작하시라. 영적 독서는 신께서 택하신 곳으로 당신을 이끄시도록 당신을 개방시킨다. 기도, 명상 및 묵상은 정확히 이 수행의 파생물들이기 때문에 신비적 삶에서 강력한 훈련이 된다. 침묵의 훈련으로서 명상과 묵상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당신 여정에서 최후까지 함께할 집처럼 작용한다. 반면 영적 독서는 그 ..

당신의 공부는 진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언어는 거의가 이분법 내지 이원성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상대계라고도 하지요. 영적 삶에서의 공부란 육적 삶에서의 공부를 암암리에 전제합니다. 맹자에 따르면 세상 벼슬, 즉 인작(人爵)을 추구하는 공부가 있으면 천작(天爵)을 추구하는 공부가 있습니다. 맹자의 고자(告子) 상편에 따르면 천작이란 인의충신과 선(善)을 즐기되 지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지극한 선에 이를 때까지(止於至善) 공부하라는 대학의 뜻과도 통합니다. 제가 말하는 공부는 영적 공부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 전통에서 천작을 구하는 공부라 생각합니다. 인작을 구하는 대표적인 노선이 제 경우는 예비고사였지만 요즈음은 수능이 될 것입니다. 수능에서는 시험치는 순간의 실력이 최대가 되도록 계속 연습을 거듭합니다. 공..

신적 독서와 보살 되기

요새 독서는 Carl McColman이란 미국인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Neale D. Walsch의 '신과 나눈 이야기'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 배운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적 수행법 가운데 신적 독서(Lectio Divina)가 초기 수도원에서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출처를 신에게 돌릴 수 있는 책을 읽고 감도를 느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취지로 짐작되는 것은 수도자가 되기 전에 습득한 생각, 개념, 이념 등은 에고 또는 소아에 근거한 것들이므로 신적인 생각으로 채우면 우리 삶이 거룩하게 된다는 믿음에서 나왔으리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신나이'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만한 말씀을 만났기에 인용합니다. "지금 네 정신은 낡은 사고로 가득차 있다. 낡았을 뿐 아니라 대부..

수행의 기초로서의 독서

오늘은 제가 번역중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우리가 잘 모르거나 간과하는 사실을 하나 소개합니다. 일단 옮깁니다. "그리스도교적 명상이나 관상적 기도를 하고 싶다면 독서(lectio)로 시작하시라. 독서는 신께서 택하신 곳으로 당신을 이끄시도록 당신을 열어준다. 기도, 명상 및 관상(觀想)은 정확히 이 수행(lectio)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신비적 삶에서 강력한 수련인 것이다. 침묵의 훈련으로서 명상과 관상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당신의 여정에서 끝까지 함께할 집으로 작용한다. 반면 독서는 그 집이 지어지는 기초다." -- 필자는 reading을 쓰지 않고 라틴어 lectio를 씁니다. lectio는 Lectio Divina를 줄인 말로 '거룩한 독서' 또는 '영적 독서'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니..

공부의 핵심 요점

1년전 오늘 글인데 함께 복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여기에 하나 보탠다면 세상 속에서의 조건 없는 사랑 실천입니다. '내가 교회를 등질 마음이 없는데 왜 이단이냐?'라고 항변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복권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학자이자 영성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말 하나 인용합니다. "'누구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태 16:24)' 모든 것은 여기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라.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너로부터 놓아보내라. 이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다. (영성지도 10쪽)" 여기서 '부인'은 원문에는 잊음(forget)으로 되어 있고 1968년 최익철 님 번역판엔 ‘..

무심(無心)과 힘 빼기

대부분의 무예와 스포츠에서 기술을 최대한 습득한 이후 본 경기에서 감독이나 코치들이 힘을 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 있을 것입니다. 어떤 목표에 집착하면 목표 달성에 거의 실패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나 직감으로나 알고 있습니다. 마음 수련 또는 영성 수련에 있어서도 목표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깨닫겠다는 목표, 신을 만나겠다는 목표 등을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미 깨달아 있다는 것, 또는 지금 이미 신이 우리에게 임재하신다는 것을 스승들은 강조합니다. 요컨대 아무런 목표도 의식하지 않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어디로 가는가요? 도대체 왜 수행을 하는 건가요? 그렇게 마음의 달인이 되어 할 일은 유교에서는 평천하요 불교에서는 보살도이며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살까?

인문학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도록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아서 비슷한 소리를 계속 달리 말해 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볼 때 Σ(BE+DO+HAVE)입니다. 빠진 게 있을까요? 편의상 BE, DO, HAVE를 1, 2, 3으로 표기합니다. 젊었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2와 3으로 미루어 1을 짐작하거나 2와 3에 열중하다 보면 1이 해결되는 것으로 아는 게 보통입니다. 한편 1에 인작과 천작이 있다고 본 분이 맹자입니다. 공경대부 같은 세상의 신분이 인작이고 끝까지 선을 추구하는 것(樂善不倦)이 천작입니다(고자 상). 사실상 외견을 구한다는 점에서 인작은 2나 3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천작을 추구함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인작이 다라는 생각을 ..

세상을 바꾸기

어제 '무위-무불위'와 '무주상보시'가 같은 경지라고 썼습니다. 이 경지는 기독교에 오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는(마태 6:3)' 경지라는 게 직감되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가는 데 핵심 노하우가 '소아를 잊기(마태 16:24)'입니다. 노장에서는 '좌망'으로 불가에서는 '무아'로 표현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운동선수나 연주가가 매일 연습하듯 실천하는 게 유가에서는 내성 또는 반구제기이고 불가에서는 계정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경지에 가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범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산은 똑같은 산이지만 내면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혜능의 경우 똑같이 마당 쓸고 부엌일을 했지만 스승이 알아 봤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군자와 성인의 차이

이미 세 번에 걸쳐 소개한 '유교 명상론'은 공부하는 사람의 성장 삼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세에 공부에 뜻을 세운 때부터 학인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공자님이 거론하신 나이는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꼭 나이대로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학인의 경우 보시 기타 선을 행하려 하지만 잘 안되는 경우입니다. 엊그제 썼지만 불혹이 되면 선을 선택하는 데 흔들림이 없어져 군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위 책에서 배우는 것은, 유교 명상에서 거경궁리 또는 계신공구를 거쳐 '한다는 의식 없이' 선에 항구한 경지에 도달한 때를 성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경지가 도덕경의 무위-무불위, 금강경의 무주상보시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군자에서 성인으로 가는 노하우가 각 영성에 있지만 공통점은 '내가 있다는..

종심소욕불유구에 이르기

늦어도 칠순까지 제 자식을 포함한 뒷세대한테 쓸모있는 수행서를 내는 게 목표라서 읽고 쓰는 일의 과반수가 여기에 바쳐집니다. '유교명상론'을 공부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주희를 전후한 신유학자들의 목표는 작위(作爲)가 없이 보시행을 할 수 있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이 경지는 다름 아닌 도덕경의 무위와 금강경의 무주상 보시를 행하는 경지라고 봅니다. 대개의 신유학자들은 불가에서 먼저 공부를 했거나 텍스트로라도 선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그럴만한 일입니다. 이미 서술했듯이 선불교는 도교와 불교의 융합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쨌든 위 책을 지은 정은해 님은 유교 명상의 목표가 반성의식의 정상적 작동을 거쳐 결국에는 반성의식의 소멸한 경지에 있다고 하며, 전자는 공자님의 학습단계 가운데 불혹에 해당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