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요령과 요점 144

새로 태어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와 '새로 남'에 대해 나누신 대화를 찾았더니 요한복음에만 있더군요. 불가에서 '견성하셨나요?' 하는 질문처럼 '새로 나셨나요?' 하는 질문은 하기도 어렵고 알아보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공부그룹에 그 체험을 하신 것으로 믿어지는 분이 계셔서 아침에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약 50년의 구도 체험 속에서 새로 남을 구현하셨다고 하면서 제게도 그게 필요하지 않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대로 '새로 남'은 육체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고 스승들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존재합니다. 제 일감으로는 에크하르트 님의 '영원한 탄생'이 있고 플로티누스라면 '일자 체험'이 될테고 인도의 성자라면 '비이원성 체험'이 될 것이라 봅니다. 중요한 것은 제 동학님 말대..

최고의 임종 대책

어제에 이어 친구의 질문 요지를 더 생각해보니 제가 돈오 내지 활연관통을 얻었냐 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즉답하자면 그런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불퇴위에는 들어섰다고 말하겠습니다. 불퇴위란 '한번 도달한 수양의 계단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수행을 퇴폐하는 일이 없는 지위(대승기신론 소와 별기 참조)'를 말하는데 쉽게 보면 발심을 제대로 해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라 봅니다. 기독교적으로는 탕자가 아버지 집에 들어선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돈오 이후의 공부는 오후(悟後) 공부라 해서 오행(보시, 지계, 인욕, 선정, 지혜, 정진)을 끝없이 닦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과정은 화엄경의 보살도라고 보면 됩니다. 더 쉽게 이해하려면 십우도 또는 심우도 해설을 보시면 좋다고 생..

반일정좌 반일독서와 공부 목표

'반일정좌 반일독서'는 추사께서 고택에 써붙여 놓아서 유명해졌으나 주희 선생도 곽덕원이란 제자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말의 취지는 공부의 입문 단계에서 1~3년 집중적으로 하면 반드시 진보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본인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을 때 양생수단으로 실천했다고 합니다. 제가 파악하는 한 보다 중요한 것은 서양 신비주의 내지 수도 전통에서도 공부 수단으로서 신적 독서(Lectio Divina)와 정관(静观, contemplation)을 병행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반일정좌 반일독서'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또 동서 공히 공부 목표는 의식의 끝없는 상승이며 그것은 불가에서 화엄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유가의 상근기라면 언제 어디서나 덕을 좋아함이 색을 좋아함을 압도하는 ..

존재상태의 진화로서 보살도

앞글에서 진짜 제대로 사는 것과 세 가지 한계상황을 거론했는데 제대로 사는 길이란 그 존재상태가 사랑 자체가 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입발린 종교적 용어로 인(仁), 대자대비, 사랑의 삶이 아니라 존재상태가 조건없는 사랑의 길로 상승 진화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보살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일에서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꾸준하기가 불가한 것은 이고 선생이 설파한바 '에고로 에고를 이기려는 것은 더 큰 에고일 뿐(復性書)'이기 때문입니다. 향상일로의 보살도를 가는 데 꼭 필요한 방편으로 정좌 또는 명상, 모든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는 하심(letting go) 및 끝없는 경전 독서(lectio divina)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길에서 상승 여부의 점검은, 사랑과 기쁨, 평화가 커지고 있는지, 유머 감각이 ..

신비체험 사례 3

마지막 부분 인용하고 합일체험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갑자기 나는 몸에 대한 감각이 아주 없어졌다. 소리도 못 느끼고 시각도 없었다. 촉각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이 상상해 볼 수도 있는 충만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상상밖의 것이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환희였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어서 인간으로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사랑과 환희다. 그리고 이것을 '느끼는' 것은 나, 지아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주객이 없고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상태였다. 끝없는 사랑과 환희의 무한한 대양이 나를 완전히 감쌌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놀랍게도 '내가 그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없고 그것이었다. 그것을 '체험하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나는 없었다. 내..

신비체험 사례 2

어제에 이어집니다. "나는 고요히 앉거나 심지어 누워서 그저 내 안의 한 점에 집중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깊이 느끼곤 했다. 나는 어떻게든 내 안에 있는 한 점에 내 의식의 초점을 모을 수 있다면 나를 뛰어넘는 어딘가 먼 곳에 있는 무엇인가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바의 그 사랑과 연결되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매일 그렇게 했다. 그러자 어느날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넘어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날 그 어느때보다 강렬히 집중해서 명상을 했는데 '무한에 이르겠다'는 내적 열망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두 시간째 됐나 싶은데 내 몸은 엄청난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깊은 평화의 느낌이 나를 감쌌고 나는 거의 무게를 못 느끼며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이 생..

신비체험 사례 1

오늘부터 앞에 소개한 책을 쓴 분의 신비체험을 소개할까 합니다. 주지하시듯 서양철학의 기원은 소크라테스고 그 가르침은 플라톤이 집대성했습니다. 플라톤을 계승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베푼 사람이 플로티누스고 플로티누스의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을 통해서 기독교에 깊이 심어져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서양철학이 기독교에 깊이 심어질 수 있었던 것은 플로티누스의 신비체험, 즉 일자와의 합일체험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가 아니었던 플로티누스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신인합일 체험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는 탈기독교 추세에 맞추어 다시 플로티누스의 일자와의 합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우리가 여행담을 쓰는 것은 남들도 똑같은 환희와 놀람을 체험했으면..

공부의 네 단계

6년전 제대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제 공부는 은퇴후 공부로서는 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 공부는 어쨌든 경쟁사회에서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도 과거 관성대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계속 설파하는 이 공부의 목표는 이 세상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보다 몸을 벗은 뒤의 안전을 구하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목표인 공부입니다. 즉 "신의 안에 있는 궁극적 의식과 앎이 바로 입니다. 이 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공부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부의 결과 의식이 진화하고 향상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수행은 기법의 훈련임

앞 글에 이어 글쓰기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강원국 님이 1,500여 개를 쓰고나서 자신감을 얻었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5~6년 동안 7백여 개의 글을 썼으니 앞으로 7~8백개를 더 쓰고 '내 책 쓰기'에 도전할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글쓰기는 바로 삶의 공부, 특히 유교적 수행의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제 글쓰기도 수행의 이면이자 연장선상의 작업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일이 기법(skill)의 수련이라고 본 점에서 에카르트 님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동서양이 같습니다. 채근담은 달사(達士)라고 했고 영어의 'skillful'에는 깨달은 자란 뜻도 있습니다. 이 일에는 매우 단순한 일의 엄청난 반복이 필요하다는 ..

격물치지와 중화(中和)

8~9세기를 살으신 이고 선생은 인척인 한유와 더불어 타락한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유교를 재해석한 분입니다. 특히 대학의 격물치지를 깨달음 이후의 일을 처리하는 원칙으로 보고 그 바탕에서 수신제가와 평천하를 실천할 때 비로소 대승이 성취된다고 본 것입니다. 즉 격물이란 일이 닥친다는 뜻이고 치지란 일이 닥칠 때 그 마음이 초탈하고 완전히 객관적이 되어 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物至之時, 其心昭昭然明辨焉, 而不應於物者, 是致知也, 복성서 중편 2절-3, 제 블로그 참조)이라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때야말로 에고를 벗어난 것이며 가장 공(公)적인 상태가 됩니다. 또한 이때는 전혀 숨김이 없어 완전히 투명하며 에고의 집착이 없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게 됩니다. 저는 이 경지가 바로 중용에서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