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목운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불선과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2017.04.27 13:19 실체,영성,현대인

질의와 응답

문 :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장식이 가지는 매력을 제거하면 위에서 제시한 과정이 너무 엄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 : 위에 적은 것들은 깨달음만을 진실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쓴 것입니다. "길은 곧고 좁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위해서뿐 아니라 실용적 편의를 위해서도 분심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에고에 호소하지만 막장으로 이끄는 사기꾼뿐 아니라 영적 환상으로 이루어진 잘못된 신비적, 마술적 영역을 좇느라 수십 년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부주의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히 은밀한 함정을 숨겨놓은 오락거리나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면 '피안'의 것이라는 것은 그 진실 여부를 측정할 수 있으며 추종자와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이익을 취하는 영적 에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초심자인 학인들은 종종 진정한 영적 상태와 초성 현상 및 변성 의식 상태(뉴에이지주의)를 혼동합니다. 따라서 장식품으로 숭배받고 전교하는 식의 보여주기로 유혹하는 미끼를 사용하는 노선의 스승들은 누구든지 의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문 :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것은 고전 불교와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 상 오류일 뿐 아니라 지각 상 오류이기도 합니다. 신이라는 말이 오해를 부르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학인을 위하여 지혜롭게도 그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불성'이란 참나의 핵심이자 순수한 의식(알아차림)입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내용물과 동일시를 하지 않지만 모든 맥락을 포괄합니다. 또 불교에 대한 학인의 지식은 우선적으로 교육적 목적을 가지며 전통에 의존합니다. '스승'이란 말은 650으로 측정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이들 가운데는 박식하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일시적인 삼매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문 : 고도로 진화한 영적 상태에 대한 당신의 설명이 3인칭으로 되었는데 왜 그렇습니까?

제가 기록한 현상은 독자적인 게 아니며 따라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존재하는 '조건'이나 '상태'라고 했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특정한 '누구'라고 할 게 없습니다. '나' 또는 '너'라는 감각은 특정한 위치나 선형적 특성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그것은 특정 위치, 경계, 시간, 시작이나 끝이 없이 빛나는 하늘과 보다 유사합니다. 그 조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 무언가의 '원인'도 아닙니다. 현상들은 누군가로 인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가 없이 덧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불성)은 그저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언가를 '행하거나' 어딘가로 '가지' 않으며 '기간'이라 할 시간의 흔적도 없습니다. '지금'과 '영원'이 동일합니다.


문 : 영적 노력의 전반적인 맥락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답 :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무주상 보시(selfless service)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신과 이웃을 위해 복무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태생적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고 동화되십시오. 세상이 낡고 못쓰게 되었고 추하다고 여길만한것에 대해서조차 매력과 색다름을 보십시오.


문 : 어떻게 하면 진보에 유익한가요?

답 : 그것은 자연스러운 관심사죠. 선택을 통해서 주의력 있는 습관적 태도를 습득하게 됩니다. 모든 순간 안에 각성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있습니다. 단순히 외양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면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모든 것은 빛나고 새롭든지 낡고 칙칙하든지 간에 정확히 그것이 '있고자 한 바대로' 있습니다. 형용사란 모두 투사된 마음의 꾸밈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부사를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든 게 태생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변화란 일련의 사건을 동사로 연결하려는 관찰자 안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1/10,000초보다 빨리 보면 모든 것은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 : 만약 개인의 정체성을 버리면 무(無)가 되는 게 아닙니까?

답 : 아닙니다. 무라는 환상을 초월하면 총체성(Allness)이 있습니다. 참나는 시작이나 끝이 없이 무한합니다. 참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으며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참나는 소아가 아니라 그 사람의 '궁극적 실체'에 더 가깝습니다. 실상에 있어 사람은 만유, 총체성 및 영원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무'가 되지 않습니다.


'공(空)'의 문제(무[無]인 듯한 것은 850으로 측정됨)는 의식 수준을 넘어서 제18장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공에 대한 오해는 에고의 한 측면인 조건적 사랑(집착)을 신의 자비(이는 신의 근본 성질임)와 혼동함으로써 궁극의 실체인 사랑을 부정한 소치입니다. 


허공이라는 환상을 넘으면 총제적이고 오류에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내비춤과 유사한 완전한 충만이 있습니다. 신성은 원래 '근원'이기 때문에 '오용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성은 그 자체를 스스로 알아보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이 진술은1,000으로 측정됨).


비선형을 넘으면 무인 듯 여겨지는 것이 총체성인데 그것은 무한한 자비인 신성이 계시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핵심이 내비추는 것으로서 권능에 차 있고 관대하며 압도적입니다. 그것은 심오하고 오류에 빠질 수 없으며 스스로 자명하며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세상은 무엇과 비슷합니까?

신성의 본질은 그 존재라는 품성이기도 한 모든 창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빛으로서 방사되고 있습니다. 지속적 발생이 현상으로목격되는데 그것들은 시간, 인과 혹은 순서가 없이 자동적이고 스스로 진화합니다. 즉 잠재성이 현상으로 구현되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존재의 단일성'으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알려집니다. 만유의 완전성이 절묘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균형과 조화로서 내비추어지는데 그러한 미와 균형과 조화에 의해서 또 진화하면서 펼쳐짐에 의해서 완전성이 더 큰 완전성으로서 현시됩니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습니다. '지금'도 없고 '그때'도 없습니다. 완전성과 더불어 모든 게 자명하기 때문에 답을 구해야 할 어떠한 질문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19장 및 본문 끝]


하늘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실체,영성,현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 질의와 응답  (0) 2017.04.27
제19장 - 마지막 질주  (0) 2017.04.26
제19장 - 영적 삶의 양식  (0) 2017.04.25
제19장 - 실제 적용(2)  (0) 2017.04.24
제19장 - 연구 과정  (0) 2017.04.23
제19장 (실습과정)  (0) 2017.04.22
posted by 목운
2017.04.26 12:19 실체,영성,현대인

마지막 질주

마음 틀, 지향 및 헌신을 비롯해서 조건이 알맞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에고의 인지자(체험자) 측면을 전력을 다해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포기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들고자 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아주 신속하게 이뤄져서 마음을 넘어서서 체험자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처리장치와 같은' 경계는 보통의 '나-임'의 감각이 있는 실제 처소를 말하며 거기에는 실체(있는 그대로의 세계, 데카르트의 레스 엑스텐사)와 감지되거나 체험되는 바의 세계(데카르트의 레스 코기탄스나 레스 인테르나) 간에 1/10,000초 만큼의 시간 지체가 있다. 이 분리는 소아의 이원성 환상이 있는 급소이자 장소인데 비이원성(참나)이라는 근원적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분리된 개별적인 소아의 환상을 초월함으로써 참나의 '비추임'과 '하나됨'이 드러나는데 참나의 드러남으로 인해서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모든 생명이 '하나인 근원'으로 재맥락화된다.


결말

매우 앞선 의식 상태와 영적 진보에 있어서는 육체를 떠나는 게 하나의 초대처럼 허용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지수 600)이 본질적이기 때문에 육체의 환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몸에 계속 있을지 말지 하는 것은 더 이상 개인적 의사에 달린 게 아니다. 실상에 있어 고귀한 상태에서는 보통의 세속에 대한 포기가 요구된다.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주로 고독과 새로운 상태나 조건에 적응하면서 지내게 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상태란 인과 관계에 관한 이원적 믿음과 인과의 주체로서 동떨어지고 의지를 가진 개인적 자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전의 자아감을 대체한 상태를 말한다. 새로 들어찬 상태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자동적인 상태나 조건이다. 경계가 있는 개인적 정체성은 사라지고 참나의 총체성(Allness)이 소아 대신 들어선다.


처음에 '신의 충격'이라 할 시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시기에 마음은 말을 잊고 자의적 지향이나 이전에 해버릇하던 목표 추구 없이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상황 자체가 그저 '있는 그대로'이며 그 자체 있는 그대로 이미 총체적이고 완전하다. 몸도 자동적이고 저절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그 몸을 '당신'이라고 계속 보고 있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린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계속되거나 새로운 적응 방식이 생기기까지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육신 삶에 필수적인 것을 배우는 것처럼 공간 감각을 새로 익혀야 한다. 공복감이 사라지는가 하며 어떤 경우 먹지 않고 며칠을 지내보기도 한다. 거울에 비친 몸을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세상으로 되돌아가가기 위해 '페르소나'의 출현을 통한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새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페르소나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접속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배우 역할과 같은 것이며 세상에서 적당하다고 보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기 위하여 여분의 기억 장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보통의 인간 세상을 향해 가기 위한 기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벗어나니 몸이 '얼마나 오래'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주기적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며 그것은 기묘한 초대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그저 떠날까 말까 무심하게 관조하는 상태이기도 한다.


선형 세계의 소아를 넘어 참나의 비선형 비이원성인 실체 안에는 따라야 할 대본이 없는데 참나의 실체에는 세속적 동기나 목적이 없다. 이어서 중요하거나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이 펼쳐진다. 이런 것들은 더 이상 개인적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제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게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며 '신성의 신적 질서'와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이라고 외치게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실체,영성,현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 질의와 응답  (0) 2017.04.27
제19장 - 마지막 질주  (0) 2017.04.26
제19장 - 영적 삶의 양식  (0) 2017.04.25
제19장 - 실제 적용(2)  (0) 2017.04.24
제19장 - 연구 과정  (0) 2017.04.23
제19장 (실습과정)  (0) 2017.04.22
posted by 목운
2017.04.25 07:47 실체,영성,현대인

영적 삶의 양식

다음은 많은 학인(學人)이 의문과 의혹을 가지는 점이다. 영적 수행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1. 세상에서 벗어나 영적 공동체, 아슈람이나 피정 센터에 들어가기. 이들 기관은 보통 몇몇 특정 종교나 공식 영적 기관에 관련되며 어떤 경우 서약을 요구하거나 다른 형태의 입회식에 참여하기도 한다. 일부는 교리를 준수하는 공식 종교의 수도회이며 그리하여 헌신을 확인하는 물질적 요구가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피정 센터는 홀로 떨어져 명상과 일정 기간 단식이나 다른 금욕생활을 강조한다. 어떤 공식 기관은 노동, 워크숍, 독서, 대화 및 함께 나누기를 비롯해서 영적인 단체활동을 강조한다. 최소한의 필수품으로 소유가 제한되며 종종 재산을 단체에 기부받는다. 모든 세속적 소유와 집착을 포기해야 하며 사람들의 방문은 보통 제한된다.


종교 단체의 규칙으로는 교리와 관련이 있다. 삭발, 수도복 등등에서 보듯이 영적 에고에게 특별해지려는 유혹도 있다. 어떤 영적 추구에서나 보듯 그 교리와 공식 행사는 물론 단체나 기관의 의식 수준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 피정으로 단기적 혜택을 받을 수 있고 한 기관의 후원을 받거나 피정 지도자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두에 대해 반드시 지수 측정을 해야 한다.


3. 보통의 생활을 하면서 많은 방법으로 영적 수행을 하는 것이 실상 매우 바람직하고 유익한 수단이다(이 말은 진실로 측정됨). 동떨어지고 안전한 곳에서 순수하고 거룩해지는 것과 끝없는 유혹과 부딪침이 있는 세상에서 굳세게 몸바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 일반적 관찰이다.


영적 진보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처음에는 영적 실체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한다. 봉헌에 의해서 삶이 기도가 된다. 몸바치고 결단하고 실천함으로써 영적 개념이 체험적 실체가 된다. (상당히 진보한 어떤 학인이 말했듯이 "적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적을 사랑하겠는가?")


일상 생활에서 대표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에는 아침 저녁으로 틀잡고 앉아 하는 명상이 있다. 처음에는 2~3십 분으로 시작했다가 한 시간 이상으로 늘려간다. 짧은 염송 기도가 분위기를 잡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되면 실상 그저 의식이 변형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종소리, 음악, 향, 기름, 초 및 기타 비슷하게  감각을 겨냥한 도구처럼 덫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무리 강하게 추천되는 것이라도 염송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을 권장한다. 특히 대가를 받는 '비장'의 염송 기도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며 상품화된 것이라야 겨우 290 정도로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


하루 동안 중점적으로 묵상 재료로 삼을 만한 영적 교훈이나 개념을 택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하루의 삶 전체와 그 체험을 재맥락화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기적 수업에 있는 교훈, 12단계 프로그램 가운데 한 단계, 시편이나 그밖에 순명, 겸손, 통제의 포기, 이득에 대한 욕망 포기 같은 기초적인 영적 과제를 고를 수도 있다.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행하면 그것이 인격과 의식 안에 통합되어 자동적으로 모든 생명체에 대해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게 되고 매 순간 완전성과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된다.


영적 수행이 일상 생활에 통합됨으로써 의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는 형태를 띨 수 있으며 그것은 다시 자동적인 관조와 무위(無爲)의 바라봄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량이 독자적인 게 아니라 의식 자체의 성격임을 알게 된다.


4. 영적으로 모아진 초점은 마치 '마음의 기본틀'과 같아서 그것에 의해서 영적 과정이 최우선적인 게 된다. 결국에는 그러한 과정을 '행하는' 분명하고 분리된 독자적인 '나'는 사라져간다. 이어서 이런 현상은 그 자체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무위의 상태에 이르는 첩경은 시간의 경과나 지속을 인식(체험)하기를 포기하는 데 집중하는 간단한 방법에 있다. 이것은 놀랄 정도로 간단하지만 매우 강력한 방법이며 그 대가는 '시간'이라는 무의식적으로 계속되는 압박에서 돌연 벗어나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 삶에 대한 체험을 미묘하게 맥락화해주며 채색해준다. 시간이란 환상이 지배하는 이러한 상황을 깨는 것은 매우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이어서 시간이란 의식으로부터의 투사이며 하나의 믿음(그 믿음으로 인해 에고는 현상의 출현을 바라보는 것을 '시간에 따라 배열함')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커다란 해방감과 내적 환희를 느끼게 된다. (시간이 인간 의식의 투사이며 우주에 근원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 최근 양자 이론에서 드러났다[Lynds, 2003].)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실체,영성,현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 질의와 응답  (0) 2017.04.27
제19장 - 마지막 질주  (0) 2017.04.26
제19장 - 영적 삶의 양식  (0) 2017.04.25
제19장 - 실제 적용(2)  (0) 2017.04.24
제19장 - 연구 과정  (0) 2017.04.23
제19장 (실습과정)  (0) 2017.04.22
posted by 목운
2017.04.24 03:45 실체,영성,현대인

불쾌한 일이나 환경은 거기에 있는 보이지 않는 카르마상 이익을 확인함으로써 유용한 쓰임새로 바뀔 수 있다. 즉 그런 일들이 카르마상 빚을 갚는 길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을 용서하고, 기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지침이다. 인간 삶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뿐 아니라 개인의 의식 진화에 최적의 기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내, 간구, 끈기, 기원, 순명과 깊은 겸손에 의해서 영적 지향은 더욱 강해진다. 장애를 치우면 절대적 궁극의 진리와 실상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 '공중부양 수련', 주문외기, 자세 잡기, 억지로 하는 호흡법 및 그밖의 인공적 기법을 피하는 게 좋다(프라나야마 같은 호흡법이 190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주목할 것).


영적 에너지나 쿤달리니 에너지는 영적으로 헌신하고 봉헌하여 진보한 결과 저절로 발생한다. 구도자는 참나가 내면에서 조화롭게 이끌어 운명처럼 미래로 이끌어감에 맡기는 것이, 목적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보다 낫다. 그리하여 구도자는 참나가 지휘하는 내면의 부르심에 응답하는데 참나 쪽에서 그를 이끌어 미래의 운명으로 이끈다.


영적 진화는 일생에 걸친 몰입이며 그것에 의해서 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모든 체험이 영적 지향에 기여하는 삶의 한가지 양식이다. 이제 신의 종이 된다는 선택보다 더 큰 소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모든 걸음이 똑같이 중요해지는데 그것은 비유컨대 벽 전체가 무너지고 일견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 단 한 개의 벽돌을 뺌으로써 이뤄지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 저절로 생겨나기 시작할지 모른다. 그런 현상들은 자신이 한 것이거나 소아의 몫이 아님을 인식하고 또 그것들이 마술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기적적인 일들은 조건이 맞을 때 발생하는 잠재성의 구현일 뿐이다. 그 조건의 하나는 높은 수준의 의식 에너지의 존재다. 훨씬 더 높은 의식 수준에서 보면 모든 현상은 실로 우주 진화의 결과로서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자명해지며 따라서 생명이란 어떤 순간에도 완전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참여자(목격자)로서 존재하는 지속적인 현현(顯現)이다.


소아가 참나에 포섭되어 사라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죽을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을 맞을 수 있다. 죽음을 당한다는 소아의 느낌은 잘못일 뿐이며 따라서 그 현상에 순종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것은 또 자신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내려놓기에 좋은 때이기도 하다. 몸은 계속 걸어다닐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선택은 소아에 달린 게 아니라 오직 참나에 달린 문제다.


높은 수준에서는 카르마상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나 잊혀진 약속과 관련된 에너지가 생길 수 있다. 그 어떤 곤경이나 의심이든 그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신의 뜻'에 깊이 순종하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자책하거나 현재 상태보다 더 멀리 '나아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 영적 진화는 불규칙적이며 종종 간헐적이며 어떤 때는 정체 상태에 빠진다. 죄책을 가지는 것은 자기애적 방종이라는 것을 깨달으시라.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길고 삭막한 기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위장이다. '길고 삭막한 기간'이란 결단을 촉구하는 시험인 것처럼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는 영적 에고의 '진보'를 통한 이득 추구 소망을 초월함으로써 넘어갈 수 있다. 따라서 좌절 자체가, 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저 견디기만 하는 사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다. 몇년 동안 진전이 없는 것 같아도 기대했던 바를 훨씬 뛰어넘고도 남을 만하게 매우 빠르고 큰 진보를 갑자기 맞이할 수가 있다.


그러한 진보의 결과 기쁨과 지복 또는 심지어 세상에서 제 기능을 못할 정도의 열락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상태가 되면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소용 없고 그들의 눈에는 그 상황이 애처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변화가 될 수도 있다. 희극적인 사실은 그들이 '그 친구는 틀림없이 정신이 나갔다.'고 하면서 뒤틀린 말을 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사실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소아의 마음은 '생각을 하지만' 그 참나는 침묵 속에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와 인간 육신의 삶은 무상하며 혼의 운명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작은 것을 큰 것에 넘긴다는 결단에 이른다. 친척, 친구나 사업상 관련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높은 소명에 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실체,영성,현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 마지막 질주  (0) 2017.04.26
제19장 - 영적 삶의 양식  (0) 2017.04.25
제19장 - 실제 적용(2)  (0) 2017.04.24
제19장 - 연구 과정  (0) 2017.04.23
제19장 (실습과정)  (0) 2017.04.22
제18장 - 도덕과 창조  (0) 2017.04.21
posted by 목운
2017.04.23 07:21 실체,영성,현대인

연구 과정

의식 조사에 관한 일련의 출판물을 읽거나 강의를 듣기만 해도 개인의 의식 수준이 눈에 띄게 상승하며 따라서 영적으로 진보한다는 게 의식 조사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감화를 주는 정보는 체험과 이해력을 재맥락화하여 패러다임을 확대시킴으로써 선형적 처리가 아니라 재맥락화의 결과 의미를 바꿔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분명히 변형력이 있다.


인간 의식 수준의 질적 양적 분석과 측정(1995), 권능 대 완력(1995), 나의 눈(2001), 나: 실체와 주관성(2003)으로 시작되어 진실 대 거짓(2005), 의식 수준을 넘어(2006), 신의 현존 발견(2007)으로 이어지는 이미 발간된 책 내용에는 의미심장한 연결성이 있다.

위 책자의 내용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한 많은 강의물도 제공되고 있으며 그것들은 또 CD와 DVD로도 이용할 수 있다. 비공식적 삿상 형태의 워크숍 내용도 CD로 이용할 수 있다.


실제 적용

대부분의 사람은 문화나 가족의 삶의 양식의 결과 종교적-영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안에는 이제 쉽사리 확인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가 있다. 진실 대 거짓에는 온전한 스승과 가르침 목록은 물론 영적 진리의 근원에 대해 측정치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인 영적 여정은 다양한 원칙과 가르침에서 자연적으로 끌려 생겨난 진실한 영적 자료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방식이다. 기도로써 우리 지향은 더욱 강해지고 그에 따라 의식의 점진적 수준에 부응하는 진리 차원이 점차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일견 애매함을 초래하는 의식을 섞지 않는 게 중요하다. 뇌 생리 자체가 의식 향상에 따라 변하여 이해력을 도와주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잠정적인 것으로 해두는 것이 좋다.


한가지 기초적인 영적 개념을 하루 동안 주제로 삼아 봉헌 행위와 더불어 관상과 명상, 그리고 기도를 바치는 게 좋다. 로렌스 형제의 신의 현존 실습(2005)이나 존 커링의 향심기도(2004)가 아주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확인했다. '거룩한 교유'를 구하고 200 미만의 사람과 장소 그리고 여가를 피하는 것을 권장한다. 피해야 할 것으로, 명분으로는 영적이라고 하지만 의식 측정치는 매우 낮은 활동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뉴에이지 판매장, 심령서적 및 의식수준을 높여 준다고 주장하는 도구들을 피하는 게 좋다. 또 '초능력'이나 싯디를 얻기 위한 '수련회'에의 초대 같이 눈을 끌거나 혹하게 하는 것을 피하는 게 좋다. 상업적 비법들은 매우 낮게 측정된다. 그리하여 '고대의 비전' (지수 160)에 유혹당하거나 빠지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런 것들은 '특별하게' 되고자 하는 영적 에고에게 끌리는 것들이다.


영적 진리에 비밀은 없다. 그것들은 공짜로 쓸 수 있고 투명하다. 역사상 위대한 화신과 영적 스승들에게 그 어떤 '비밀'도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시라. 반대로 그분들은 돈받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말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호의와 자비심으로 인하여 그 태생적 미와 완전성이 빛의 비추임(거기에서 존재가 발현해 나온다)으로 뻗어 나간다. 우리가 관찰하는 세상에 그 어떤 '원인'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것은 창조이기도 한 진화가 계속된 결과로서 실제로 드러나는 잠재성이 저절로 발생하는 것일 뿐임을 명심하는 게 좋다. 이 현상은 고급 이론과학에 있는 발생과 복잡성 이론의 핵심이다(Theise, 2006). 


관상(觀想) 중에 '목격하고' '관찰하거나' '체험하는' 현상이 자동적인 것이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며 근원적으로 비독자적인 것임을 주목하는 것이 유익하다.또 세속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란 에고의 내면에서 투사된 것임을 주의하시라. 행복이란 소유나 체험이 아니라 의식 수준(그 사람이 된 상태)의 결과임을 깨달으시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실체,영성,현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9장 - 영적 삶의 양식  (0) 2017.04.25
제19장 - 실제 적용(2)  (0) 2017.04.24
제19장 - 연구 과정  (0) 2017.04.23
제19장 (실습과정)  (0) 2017.04.22
제18장 - 도덕과 창조  (0) 2017.04.21
제18장 - 이성과 신앙: 조화  (0) 2017.04.19
posted by 목운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