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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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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07:35 단상

10여년 전 읽었던 마하라쉬에 관한 책 '나는 누구인가'를 복습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에 대한 설명을 보면 기독교의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다이몬의 소리대로 살던 소크라테스도 성령을 입은 사람이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하리쉬는 구도자의 근기에 따라 화약-숯-젖은 석탄으로 사람을 나누고 불이 붙는 시간이 깨달음에 걸리는 시간이라 합니다. 젖은 석탄에 해당하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 하니 제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전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편지'에 따르면 이승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될 뿐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넘어갈 때 편안하고 장엄하게 또 자신있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승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길 의식이 높아지는 자체가 세상에 바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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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7 11:58 단상

유교와 불교가 수렴한다면 인간의 마음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가르침이 하나로 수렴한다면 그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융은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가 라마나 마하리쉬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말하길 “동양적 수행의 목표는 서양 신비주의의 그것과 같다. 동양에서는 초점이 소아(小我)에서 참나(眞我)로 옮겨가듯 서양에서는 인간에게서 신으로 옮겨간다. 이는 소아가 참나 안에서 그리고 인간이 신 안에서 사라짐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아란 대승불교의 생멸문, 참나란 진여문에 해당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소아란 몸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개발된 특성으로 이해합니다. 이 소아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넘어설 때 우리 존재의 근원인 참나로 존재하게 되어 모든 두려움과 고통, 불행이 그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제가 파악한 현대 영성입니다. 참나란 신성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신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가 제거되면 사랑과 기쁨, 평화가 들어차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처방에 따르면 생각으로 된 마음, 즉 소아를 벗어나야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데 하나의 방편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 의문의 근원으로 몰입하여 마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방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완전히 맡겨버림으로써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나는 누구인가, 59쪽). 그 상태는 어린이와 비슷하여서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그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버리면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위 책, 125쪽)고 합니다. 이 점은 동아시아 모든 성현이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한 구절만 가져오면, 맹자는 어린 아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경지를 수양의 목표로 합니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離婁下).

제 생각에 몸을 버린 후에는 누구나 참나 상태가 되지만 우리 의식이 만든, 그래서 환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세상에 대해 유머를 가지고 즐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참나-깨달음 상태로 가는 것이 비결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아주 오랜 동안 우리 몸이 나라는 생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소위 영적 수행이란 과정을 밟아야 하고 마치 운동선수나 악기연주자처럼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연습의 과정이 각 문화에서 영성 수련이라 할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이 ‘학이시습’이라 할 때도 저는 현대적 학습과정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컨텐츠 습득이 아니라 바로 저러한 과정을 말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학의 정수를 실천한 것으로 평가되는 안회가 수제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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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5 07:14 공부의 요령과 요점

제가 영적 수행에 전념하고 헌신하게 된 계기는, 수많은 그릇된 선택으로 인한 우울과 권태, 가계경영의 실패에 직면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죽으면 가족들에게 남기는 게 너무 적고 죽은 후 운명에 대해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러면 되도록 물질적으로도 좀 더 많이 남기고 죽은 후 운명에 대해 좀 더 안정된 것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서산대사의 말씀이 크게 와 닿았는데 ‘생사를 벗고자 하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갈을 지워나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동시에 중용과 호킨스 텍스트의 접점이기도 한 지성(至誠, integrity)를 철저히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성의 실천 기반은 우리의 사언행위가 있는 그대로 개인의식은 물론 우주 의식에 기록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투명하게 사는 것, 내 생각마저 하늘에 중계된다고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시간 이외에는 영적 독서와 기도, 명상, 그리고 내려놓기를 실천하거나 번역, 글쓰기, 클래식 음악 듣기 등으로 시간을 채워갔습니다. 드디어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명상을 매일 실천하게 되었고 당연히 권태와 우울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외부에서 그 어떤 부정적 자극을 주더라도 금방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 책이 가르치는 명상법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 명상법은 (1) 가장 편한 자리에서 완전히 편한 자세를 취합니다. 졸음에 빠지듯 단순해야 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의식을 지성과 이성 경계 너머로 옮겨가는 데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신 의식>과 접촉하기 위한 뜻을 의식하며 생각합니다. 우리 생각은 명상 전 기도에 있는 대로 <신 의식>을 찾아나서는 탐조등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우주 의식> 즉 <신적 생명>에 집중합니다. (3) 그렇게 해서 무소부재한 <신 의식>이자 <아버지-어머니-생명>인 <궁극의 실체>와 만나고 <신 의식>이 우리의 비워진 자리에 온전히 들어서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소위 신의 종이 되는 것이며 신이 다스리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4) 명상 기도에 있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하고 심상화합니다. 눈은 감고 시선은 이마 부분을 향합니다.

제가 아는 한 가장 손에 잡히는 명상법입니다. 혹여라도 입문하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면 기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위에 소개한 책 읽기와 함께 하시면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호킨스 님이 지은 ‘내려놓기 : 순명의 길’을 이용해서 감정 내려놓기를 함으로써 의식지도를 따라 의식을 높이는 노력을 함께 하면 완벽한 커리큘럼이 마련되는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티스토리 블로그는 이 일을 지원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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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4 07:40 단상

2,3십대에는 호기심에서 다양한 컨텐츠를 다룬 책들을 읽기도 했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컨텐츠는 아무리 모아도 의식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 의식보다 높은 의식의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동승함으로써 높은 의식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것이 완전히 익숙해져서 내 것이 될 때 비로소 내 의식도 높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전을 손에 놓지 않는 것이 좋은데 경전이란 것도 대개 교단 내지 학단에서 당대에 소아적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삽입한 것들이 적지 않아서 최근의 영적 도서 가운데 검증되었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호킨스 박사의 '나의 눈'에서 가져옵니다.

"돈오와 점오는 동시에 존재합니다. 영적인 진화과정에서 작아보이는 진전 상태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눈더미 밑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입니다. 의식의 갑작스런 도약은 아무 예고도 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뜻밖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게 좋습니다... 

4%의 인구만이 들어서는 사랑의 단계에서 영적 성장은 뚜렷하고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는 너그럽고 자비롭고 온화하고 온유하고 느긋해집니다. 그의 행복은 외적 정황이나 사건과 무관합니다. 판단하는 태도는 사라지고 이해하고 감싸는 마음이 자리잡습니다. 모든 것의 본래적인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습니다. (위 책,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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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3 05:56 단상

소크라테스가 말한 동굴의 우화는 우리가 보는 게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실체를 보고 알았을 뿐 아니라 매 순간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아테네 사람들이 모두 아니라고 해도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미디어가 매일 떠들어대는 세상사가 스크린에 비친 허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세상과 달리 살면서도 세상 변화에 기여하는 길은 영성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허상과 싸우면 고통과 병이 깊어집니다. 영성의 길은 명상과 묵상이 입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은 그저 세상에서 오는 생각을 끊고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그와 동시에 과거와의 단절, 고정관념과의 단절, 황금률의 실천을 병행하게 되며 특히 절대적으로 진실할 것(至誠)이 요구됩니다. 다행하게도 명상이 깊어질수록 환희심이 나서 이것이 인센티브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이 환희심이 목표가 되고 세상과 단절하게 되면 그것은 소승이라고 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 됩니다.

소승에 가까울수록 꾀까다로운 자세를 강조하고 심지어 면벽수행 같은 것을 하게 됩니다. 명상을 통해서 의식이 계속 진화하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써 세상의 패러다임을 벗어난, 무오류한 실천을 하자는 게 목적입니다. 의식이 끝까지 진화하면 이원성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이원성이란 선악과를 먹기 전, 즉 선과 악처럼 이원적 구분을 벗어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아간 과정의 이야기들은 4대 성인의 가르침에 공통할 뿐 아니라 전 세계 누구나 같은 체험이라는 게 스승들 이야기입니다. 제 남은 꿈이라면 제가 어디까지 향상하고 무엇을 성취하는지 기록해서 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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