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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불선과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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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0 17:06 실체,영성,현대인

종파주의와 종파

잠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공식 종교, 교리 및 권위의 전반적 영향은 군목들에게 보편적으로 부여하는 존경에 반영되어 있는데 군목의 역할이 종파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보편적 선익이 있음을 의미한다. 군목은 세례식, 견진, 결혼 및 임종, 장례 및 발인 등에서의 직무뿐 아니라 군내 모든 분야에서 차별없이 봉직한다.


신앙의 길은 기초적 전통으로서 모든 종교와 영적 노선에 필요한 근거이자 기초(자연법)를 형성한다. 신앙은 매우 자주 성실한 가정생활과 문화적 전통의 아주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것은 익숙함에 의해서 동화되는데 그 익숙함에는 종교적 축일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축일은 물론 이러절한 예식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 공식 교회모임이나 단체에 속해서 종종 영감(커다란 고딕 성당과 우아한 회교사원 같은 데서 얻는 영감을 말하며 저런 성전은 신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며 의식 측정치는 모두 700대임)을 부르는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데서 오는 종교적 유익도 있다.


집단의 지향에서 나오는 영적 힘은 헌신, 예배 및 기도로써 강해지는데 저런 요소들은 책임감, 진실성, 정직성, 도덕 및 윤리를 지지함으로써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의식 진화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통적 미국'이라 불리었던 기초 원칙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전통적 미국이란 원칙 하에 오늘날 대통령과 대법원장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바이블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 이것은 특정 신앙을 상징하는 게 아니고 그 권위의 기원인 신의 말씀이라는 주인되는 권위를 받아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삼덕의 주춧돌이다. 신앙의 커다라나 보상 중 하나는 무상한 것에 대한 기대를 넘어 영혼의 다음 생 안으로 넓혀들어간다는 점이다.


덕(지수 210~385)

영적 진화에는 진리에 관한 변증법을 지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긍정적 성격특성과 공정성, 선 및 품위에 대한 감각에 끌리는 정도는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어린 시절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및 형제적, 공적 봉사, 공제주의적이거나 인도주의적 기관 등처럼 진실한 조직과 더불어 부모의 모범, 사회적 확인과 강화 및 종교 등에 의해서 가장 잘 길러진다. 긍정적 성격특성이 성취 및 삶의 만족은 물론 높은 수준의 행복, 성공 및 건강과 관련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선업(카르마)에 의해서 인간은 성실한 가정, 문화 및 환경 속에 태어나고 거기에 동화됨으로써 본질적 자산과 성격특성을 습득한다.


집합적으로 이런 특성은 현대 문명과 전통적 미국의 근간이며 거기에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강력한 국가가 나오게 된 기반이기도 하다. 악성의 정권과 문화를 특징짓는 것은 이상의 가치를 결여한 것인데 그것이 수세기에 걸쳐 인류에게 전쟁, 빈곤, 죽음과 파괴를 초래한 원인이다(예, 폴포트, 스탈린, 나찌, 공산주의, 파시즘, 이슬람 테러주의).


세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200 이상의 것과 200 미만의 것) 간에 상호작용이 펼쳐지는 무대다. 각 사회마다 '물과 기름'의 입지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다시 진실성이 갈리는 임계점인 200의 위 아래인 개인들, 기관들이나 집단들이 나뉜다.


조사에 의하면 대략 92%의 사회문제는 200 미만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며 그로 인해 시민들에게 전가되는 전체 비용은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방임적이거나 불성실함을 용인하는 사회는 삶의 질에서는 물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즉 일상의 육체적 안전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적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덕이란 오랜동안 거기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경은 물론 긍정적인 자아 존중이 나오는 '기초적 품위'로 생각되었다. 모든 덕은 선의와 책임에 기초하는데 이 두가지는 책무, 정직성 및 신뢰의 바탕이 된다. 이런 것들은 또 사람이 도움이 되고 진정성이 있으며 우정이 있고 의지할 만하다는 것을 뜻하는 성숙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윤리적 감각은 공정성, 이성적임 및 외교적 수완으로 귀결되는데 이런 것들은 타인의 느낌을 존중한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사람은 우정있고 예의바르며 신중하고 균형감이 있다. 나아가 그들은 일반적으로 우호적이고 남을 도우며 자기들의 부정적 감정을 남에게 퍼붓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으며 성적이거나 다른 무엇으로 약탈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긍정적 특성을 '인격'이라 하며 참으로 그러한 것을 습득하는 데는 개인적 노력, 자기통제 및 인내가 필요하다. 또 이러한 특성은 애덕에 이르는 기초 자산이 되는데 애덕은 500으로 측정되며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무조건적 사랑(지수 540)이라는 위대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덕을 완성하도록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인류의 0.4%만이 실제로 달성하고 있다.


근본원리와 윤리 및 도덕은 200 미만의 의식을 없애기 위한 수단과 동력도 제공하고 있다(의식수준을 넘어서 참조). 영적 진보의 각 단계마다 그 자체가 보상이 되며 그리하여 이 여정은 그 자체가 동력이 되고 점증적으로 기쁨을 주는 삶의 방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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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3.29 20:01 실체,영성,현대인

도입

신에게 이르는 길이 수천 가지 있다고 오랫동안 얘기되고 있다. 전통적인 길은 앞선 저술에서 기술했으며 거기에 주요한 인도 수행자와 위대한 스승들은 물론 세계의 위대한 종교에 대한 의식 측정치를 포함시켰다. 대략 기원전 1만년 전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종교 및 영적 조직과 집단에 대한 측정치도 붙였다.


그 정보가 진리의 수준을 정의하고 확인했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노선에 대해서나 실용적인 가치를 가지는 검증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구도자는 신뢰를 위해서 역사적이거나 외적인 변수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그 자체가 자명한 검증에 의한 것이어서 그 간편성, 편안함 및 확실성이 제고되었다. 의심이나 불확실성을 배제하고 확증과 상호대조가 가능한 축적된 정보의 총체에 전반적으로 부합하고 일치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의식 측정의 방법론과 그 발견은 의식 자체의 진화 산물인데 그 덕분에 진리와 그 확실성이 드러났다.


종교

영적 교육은 지적 이해, 신앙, 이성 및 논리에 기초하며 다른 연구 주제처럼 기초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점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과정을 거쳐 신부, 목사 또는 신학박사 학위를 정식으로 받도록 하는 신학교 및 교계의 학문적 문서는 물론 종교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그러한 연구가 신앙을 굳게 하고 복잡한 정보를 통달하게 하는 반면 그 자체로 반드시 개인적 주관적 깨달음이라는 진보한 상태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한계는 깨달음이라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기보다 학문적 세분화와 장벽치기와 박식함으로만 귀결되는 학계의 맥락화 과정 때문인 듯하다. 보통 철학, 신학, 존재론 및 형이상학의 엄청난 양과 복잡성을 생각할 때 그 분야를 통달하는 것은, 높은 학위를 가진 고위 성직자의 "교회 박사" (예 마이스터 에카르트) 같은 직함에서 보듯 매우 존경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위나 '많이 배운' 노선을 따르는 것에서 초래될 수 있는 한계는,

 1. 출판물 자이곤에 있는 논문에 따르면 지적 영역 내에서 세분하여 장벽 치기(신학은 440~470으로 측정됨). 

 2. '무엇무엇에 관하여' 아는 것이 '무엇무엇이 되는' 것과 동등한 것이라는 영적 에고와 환상에 이끌리게 됨. 예를 들면 애덕에 관하여 논문을 쓰는 것과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3. 직업, 전문직 또는 제도적 직위나 기능으로 맥락화함으로써 세분하여 장벽 치기. 종교적 직책은 근원적으로 다른 이들을 교육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회적 혜택은 물론 커다란 이익이 있다. 

 4. 교계내 정치와 직책이나 권력에 대한 에고차원의 이끌림에 사로잡힘(예 교황대리, 몬시뇰, 고위 성직, 주교, 대주교, 추기경 등). 영적 진화를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대성당의 장보다는 수위가 되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특정 교리와 그 역사적 맥락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편재하는 실체로서의 신보다 종교 자체에 대한 숭배로 이어질 수 있는 특정 교리에 편중된 충성도 생길 수 있다(예 '종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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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3.29 08:18 실체,영성,현대인

무신론, 불가지론, 불신(2)

무신론이 의식 수준 190으로 측정되는 반면 200 수준의 불가지론은 좀더 고차원이고 실체에 부합하며, 지성이 그 자체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불가지론에는 궁극의 진리에 대하여 반목하는 부정적 감정 태도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주의보다는 높게 측정된다. 그것은 지성이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그저 겸손하게 언급한다. 적대적 태도의 한계는 지성만의 수준에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답을 지성에게 구한다는 점이다.


불가지론과 무신론은 연대기적 시대 순에도 일치할 수 있으며 지혜의 노선을 따라 감정적 성숙과 함께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어서 내용물이라는 선형 차원뿐만 아니라 맥락이라는 비선형 영역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는데 비선형 맥락은 궁극의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인생의 많은 영역에서 선형적 지적 과정보다 계시의 메카니즘을 통해 드러나는 고차원의 인식 능력의 확장 및 확신이 사고를 대체한다.


의심과 불신은 종종 좌절, 재앙 혹은 단순한 성숙과 지혜의 출현으로 인한 재동기화의 결과 생길 수 있는 의식의 커다란 도약의 전조가 된다. 이런 일은 기적적인 일을 비롯해 커다란 전환을 겪은 많은 사람들, 심지어 성인들이 주목했던 바다. 그러한 길 가운데 하나에는 재난적 환경으로 인해 초년의 종교적 신앙을 잃어버리는 일이 포함되는데그런 일은 확인가능한 진리에 대한 수년간의 추구에 이어지곤 한다. 그러한 내적 탐구는 관련된 종교 없이도 명상을 함으로써 가속된다. 그래서 불신자에게는 붓다께서 '신'에 대한 믿음 없이 8정도를 가르치셨기 때문에 불교가 종종 실용적이고 매력적이다. 


불신자에게 맞는 또 하나의 길은 양자 역학의 발견을 예견한 베다 우파니샤드가 있다. 이들은 정신 작용은 물론 지각에 의한 환상을 넘어 존재하는 원시의 근본 실체인 절대 원칙의 궁극 실체와 의식 자체의 무한한 장에 대하여 말했다. 아드바이타(비이원성)의 길은 모든 신앙체계를 배제한 근본 진리에 대한 성실한 구도의 순수한 노선이다. 필자의 이전 저작에서 이러한 것을 기술해 두었다. 비이원성이 깨달음에 이르게 함에도 베단타 연구는, 혼란스러운 신앙 체계가 될 수 있는 여러 인도 철학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회의주의자와 불신자에게 있어 의식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는 길은, 이것이 모든 신앙 체계를 넘어 오직 성실한 호기심과 진정성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길이자 방법론이다.


영적(종교적) 진리에 대한 마음의 (선형적) 모든 묘사는 실효성이 없으며 논쟁과 토론에 맡겨져 있다. 하지만 의식 자체(비선형)는 정의와 묘사를 뛰어넘으며 회의주의나 의심 또는 불신에 좌우되지 않는다.


의식의 본성에 대해 탐구하면 의식의 빛이 깨달음의 조건이기 때문에 바로 비추임의 근원에 다다른다. 그 빛에 의해서 대상과 주체는 내재하는 신인 참나의 깨달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 [제13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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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3.28 14:31 실체,영성,현대인

사회적 생존

대중화된 불성실 집단의 맹공은 의식 200미만의 55% 미국인이 뜻하는 바이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미국 사람의 전체적 의식 수준은 현재 421(426이었다가 2006년 가을 떨어짐)이다. 이렇게 두드러진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200 미만 수준에는 성실한 사람들의 높은 의식에 존재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 가운데 상대적으로 얼마 안되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힘이 아주 높아서 전반적 생존 능력을 지탱하며 나아가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상위 100명이 미국에서 없어지면 전체 의식 수준은 320으로 떨어진다. 1,000명이 없어지면 그것은 421에서 220으로 떨어진다.)


영적 실체, 도덕성, 성실성 및 진실을 반박하는 것은 문명을 고갈시킨다. 인류의 전체 의식 지수는 (2007년 11월에) 204인 반면 세계적으로 상위 1,000명을 빼면 그 수준은 겨우 198이 될 것이다.


덜 진보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은 사회를 끝없이 개선하려는 노력을 부추기고 진화상 운이 조금 안 좋은 이들의 부족을 메꾸면서 도움을 준다. 그러니 자비심, 수용 및 관용은 (물론 거기에는 종말론적 이슬람 지상주의[현재 지수 60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측정됨] 같은 사회-정치-종교적 실체에 대한 인식도 포함되어 있음) 실제적으로 사회적 균형과 능률을 지탱해준다.


무신론, 불가지론, 불신(1)

진정한 지적 의심은 그것이 의사결정과 믿음을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고려한다는 점에서 성실한 것이다. 이성은 정보에 논리가 가해지면 마음의 처리를 통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에서 지적 처리를 한다. 그로써 (성숙한 선형적 체험과 지혜의 출현에 뒤따르는) 이분법과 의문이 들어선다. 드디어는 지성만으로는 (가설로) 고안된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이 진화의 모든 단계에서 동시에 수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앙은 마음의 상수이며 따라서 어디에 신앙을 둘 것인가 하는 것이 유일한 질문이 된다.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은 '올바른 것'을 따른다. 이때 '올바름'이란 지혜에 부합하는 것이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겸손함으로써 진지한 구도자는 마음이 받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저 홀로는 진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진실 검증에는 객관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주관적 체험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필요함)는 것을 알게 된다.


영적 실체와 진실을 성의 있게 추구하는 대다수에게는 신앙을 통해 권위에 의지하는 게 족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의문에 잠긴다. 그러나 그 해답은, 오늘날 세상에서 의식 측정 방법으로 영적 실체를 검증하는 데 더하여 의식 수준을 초월할 때 이뤄지는 내면의 영적 진화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조합에 더하여 신에 이르는 길로서 진리에 헌신하면 드디어는 고전적으로 전해지는 커다란 '의심의 장벽' (그 반대편에 깨달음과 계시가 나타난다)을 넘을 수 있다. 모든 의심은 소아(小我)에게서 나오는데 우리가 확실성에서 오는 평화와 더불어 마침내 고향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참나의 압도적인 실체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


마음이 어떤 전제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전제가 오류인 것은 아니다. 마음이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이 무신론자가 빠지는 함정이다. 우리가 그 반대를 입증할 수 없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반증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은 자기가 전능하다고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철없이 가정하며 따라서 고차원의 진리에 도달하는 데 필수적인 겸손을 결하고 있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궁극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자는 의식 측정 기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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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3.28 08:08 실체,영성,현대인

진리에 대한 반박(2)

반항적 성격에는, 진리나 권위가 전제적인 부모의 통제이기 때문에 불쾌하게 여겨진다. 손상된 인격은 온전한 진리를 위협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그것을 거짓이라고 내친다. 


이러한 손상이 사회정치적 관점과 관련하여 낮은 차원이 된 예가 '나'('신경과민') 세대다. 이렇게 부조화한 인격은 자기애로 부푼 '권리'와 쾌락에 다투어 몰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관점은 세속주의적이고 반종교적이며 신과 영적 실체에 반대하는 사회적 관점으로 요란하게 표현된다. 이들은 소위 '포스트모던'의 도덕적 상대주의(지수 160)라는 철학 시스템 출현의 지원을 받는다. 이어서 에고의 떠벌림은 이러한 일단의 팽창된 에고 중심 관점을 '우수한' 또는 '선발된', '올바른' 것으로 명명함으로써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추세가 학계의 대중주의적이고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언론 자유'라는 것으로 포장되는 미사여구로 지원을 받아 실체적 검증상 훼손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러한 편중된 수사(修辭)가 학계로 침투함으로써 오늘날 130이나 심지어 90으로 측정되는 전체 강의에 대해 '관용'을 이유로 하거나 미화를 통해서 대학의 우수성은 크게 떨어졌다.


반권위주의 입장과 그 추종자의 모순은, 그 자체가 적대적이고 악의와 증오에 빠지기 쉬운 데다 초권위주의적이며 강압적인 전제주의라는 점이다. 그에 관련된 감정은 저차원 의식의 끌개장에 기인한 결과이자 그 끌개장의 본질이다. 그 정치적 부산물은 임계 의식 수준인 200 이상과 미만 사람들 간의 충성을 얻기 위한 치열한 투쟁으로 겪은 바 있다.


사회정치적 투쟁에 대한 주 표적은 도덕성 자체에 집중돼 있다. 그리하여 수천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야만적 범죄자를 위하거나, 이슬람 테러리스트(이들 역시 수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를 동정하거나 수천의 고문과 사망에 책임 있는 MS-13 갱단의 '권리'에 대한 옹호자와 후원자가 존재한다.


상대주의의 잘못된 미사여구에 의해 세뇌된 데 따른 실체 검증의 손상의 결과 다음과 같은 기괴한 일들이 생긴다. 즉 어린이를 살해한 소아성애자나 수천의 자국민을 죽이고 천정에 달린 중에 매인 여성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며칠 동안 죽어가도록 함으로써 느린 성적 고문을  즐기는 정신병자 독재자에게 동정심을 표하기 위해 모여드는 연예인들의 사례 말이다.


권위라는 것은 꼭 그 반대 의견을 취할 필요 없이도 부동의(예, 반대)할 수 있는데 반대 의견은 억지로 부동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류 수준으로 떨어지게 한다. 비유하자면 자비는 거짓에 일치하기보다 훨씬 더 적절한다. 왜냐하면 악을 옹호하는 것은 악에 동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미쳐버린 범죄자가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서 거기에 꼭 동조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영적 실체를 분간하는 능력의 손상은 보통 사람의 순진함에 힘입은 미디어가 끝없이 선전하고 프로그램한 결과인데 보통 사람은 멋지고 유행하는 관점으로 위장된 오류의 왜곡과 과장을 통해서 쉽사리 끌리고 프로그램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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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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