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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불선과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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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되기 '에 해당되는 글 63

  1. 2015.01.06 목차(재수록)
  2. 2014.12.23 15장 3
  3. 2014.12.21 15장 2
  4. 2014.12.19 15장 1 ; 초탈과 "무욕"
  5. 2014.12.17 14장 5
  6. 2014.12.17 14장 4
  7. 2014.12.17 14장 3
  8. 2014.12.16 14장 2
  9. 2014.12.13 14장 1 ; 영적 자기분해
  10. 2014.12.11 13장 4
2015.01.06 10:35 나비되기

처음 방문하시는 분의 편의를 위해 목차만 재수록합니다.


나비는 자유롭게 난다


영적 진보를 위한 새롭고 근본적인 방법


저자 : 스티븐 데이비스


목차


도입


1부 - 영화관 비유


1부 서문

1장 - 플라톤의 동굴

2장 - 단체들

3장 - 무엇이 잘못됐나?

4장 - 도서관

5장 - 무한한 장(場)

6장 - 홀로그램

7장 - 바깥 세계라는 건 없다

8장 - 탈출


2부 - 고치 속에서


2부 서문

9장 - 의식 모델

10장 - 연기자 모델

11장 - 인간 게임 모델

12장 - 전후반 모델

13장 - 로버트 프로세스

14장 - 영적 자기분해

15장 - 초탈과 무욕

16장 - 판단

17장 - 믿음과 의견

18장 - 저항

19장 - 두려움

20장 - 나는 누구인가?

21장 - 나비되기에 관하여


3부 - 질문과 답


3부 서문

22장 - 홀로그램은 하나인가?

23장 - 타인들

24장 - '지구환경'이란 틀

25장 - 우리는 모두 하나인가?

26장 - 한사람당 한 '무한 의식'일까?

27장 - 전생

28장 - 카르마, 인과율

29장 - 믿음

30장 - 돈

31장 - 에고

32장 - 자비

33장 - 로버트 샤인펠드

34장 - 제드 맥케나

35장 - 크리슈나무르티

36장 -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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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23 08:22 나비되기

"외적 탐구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다른 부분은 내적인 것이다. 한 꺼풀씩 한 조각씩 자기를 벗기는 느리고 고통스런 과정이다. 마치 영적으로 괴사조직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어떤 조각은 그저 떨어져 나가고 어떤 것을 길게 또는 흐늘흐늘한 덩어리로 찢겨져 나가며 어떤 것은 꼼꼼하고 고통스럽게 수술을 통해 제거된다. 수십년동안 내 일부가 되었던 모든 것은 사라졌다. 내 모든 것의 실상은 믿음으로 된 것이었으며 그 모든 믿음을 벗겨버려야만 했다. 내 세상은 냉정하고 밝고 솔직하게 되었지만 과거의 내 마음은 여전히 평생 쌓았던 믿음과 의견과 잘못된 지식과 감정적 집착들로 가득하였는데 (그 모든 것은 에고를 구성하는 해로운 파편과 독성 쓰레기였음) 그 모든 것을 보내버려야 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었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세상은 순간에 허무가 될지도 모르지만 소아가 타버리는 데는 좀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일을 위한 폭탄은 없다. 소아를 빠르게 고통없이 무로 만드는 데 효과적인 라틴어 문구나 산스크리트 만트라는 없다. 일순간에 거짓된 소아를 닦아낼 깨달음이나 통찰이나 계시는 없다. 순간에 깨어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장 사기성이 높다..." (제드 맥케나)


 로버트 프로세스와 영적 자기분해. 나는 우리가 나비로 탈바꿈 하는 데 유용한 다른 절차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당신이 더 나은 것을 찾았다면 그것을 쓸 수는 있습니다. 다만 영화관 안에서 개발된 과정은 잘못된 전제(즉 영화가 실체다)에 기초하기 때문에 고치 속에서는 효과가 없을 거라고 주의를 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의 반대가 진리며 그래서 그 어떤 절차도 고치 속으로 가져오지 않는 게 좋습니다.

 게다가 고치 속에서 이용하는 절차는 어떤 것이든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바깥"에 객관적이고 독립된 실체가 없으며 당신이 취급하는 체험은 리얼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

 ....모든 판단, 믿음, 의견과 두려움을 찾아 보내버릴 것

 ....홀로그램 속의 어떤 사람이나 장소, 사물에 부여한 힘을 철수하거나 끊어버릴 것

 ....당신의 홀로그램에서 자기 역할을 했던 사람, 장소, 사물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그것을 창조한 '무한한 나'에 대해 감사할 것.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참된 답을 찾을 목적으로 영화관 안에 있는 동안 만들어진 에고의 꺼풀을 찾아서 떼어버릴 것

 여기에 덧붙이면 모든 절차는 일방적으로 혼자서 해야 합니다. 즉 당신 외의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도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당신의 반응과 대응을 바꿉니다.

 반복컨대 로버트 프로세스는 머리로 할지라도 영적 자기분해는 실제 적을 때만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두려움과 에고의 꺼풀을 다룰 때 머리로만 하면 무화될까 두려운 에고가 반격함으로써 두려움을 정당화하고 당신의 에고를 변호하여 그 껍질을 끌고 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만의 절차를 진행할 때 머리에서 끄집어내서 냉철히 떨어져서 봐야 합니다.

 단 2년에 걸쳐 나는 명상과 시각화에 생을 바치다시피 한 많은 사람들이 달성하지 못한 것을 이 두 절차를 사용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당신이 열심히 그리고 충실하게 어떤 절차든 성과를 내었다면 나는 당신이 도달한 지점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판단을 버렸습니다. 당신은 더이상 "좋거나" "나쁘다"거나, "더 낫거나" "더 나쁘다"거나, "옳거가" "그르다"거나, "선하거나" "악하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제까지 가졌던, 당신이 누군가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여 모든 믿음을 버릴 것입니다.

 당신의 의견은 사라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며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당신 삶에서 죽음과 부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여 모든 두려움을 제거했습니다.

 요컨대 당신은...

 무가 될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난 무아. 그저 기쁨과 감사 그리고 멸진정에 이른 상태.

 "완전히 깨달았을 때 진실로 내가 얻은 것은 없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비는 그저 무(無)입니다. 나비처럼 결국 당신은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판단과 믿음, 의견과 잘못된 지식과 자기에 대한 집착 등이 없는 상태. 드라마와 갈등, 아픔과 괴로움이 없는 상태. "자유롭게 납니다, 멀리, 높게 납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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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21 13:01 나비되기

내 삶에서 다른 이들에게 받은 많은 굉장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내가 55세때 사랑에 빠진 여성인데 바로 내 어머니 같은 여성이었습니다. 내 생에서 처음으로 그 여자 덕에 내가 부모(그때에는 모두 돌아가셨음)에게 가졌던 집착을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전혀 기분좋은 추억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내 어린시절 부분을 처리하면서 일년 내내 거의 매일 울며 지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을 뿐 아니라 매우 집착했는데 매일 매순간 한번도 빼지 않고 그녀의 언행에 완전히 의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지독해서 아침마다 모닝 키스를 안해주면 나는 망연자실 하루를 망칠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집착상태를 벗어나도록 해준게 '알-아논' 프로그램입니다. 그것은 좋아하는 알콜을 끊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여전히 좋아하면서 또 여전히 마시면서 언행과 관계없이 만족하면서 알콜과 그 중독에서 떨어져 있도록 가르칩니다. 일단 내 부모와 약혼녀에게서 떨어질 수 있게 되자 나는 그녀의 언행 또는 키스방식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되어 나는 그녀를 조건없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집착끊기"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집착 외의 무언가를 포기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사랑 또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신 인생에서 그러한 좋은 것들을 계속 바랄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좋은 포도주와 함께 좋아하는 먹거리를 즐기지 못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행복이 그것을 얻는지 여부에 의지하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동굴 밖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동굴과 거기 있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누구고 진리는 무엇인지 찾기 위해 영화관과 거기 있는 동료 인간들을 떠나 보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깨어남의 과정은 마치 에고를 소멸하는 일처럼 보입니다만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한 거짓 자기인 에고를 완전히 떼어버릴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백일몽에 묶어놓는 감정적 밧줄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붙들어 매어 우리가 무언가 리얼한 것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백일몽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에고의 연결에 뿌리처럼 붙어있는 에너지 덩굴을 내보냅니다. 감정의 에너지는 우리의 생명력이며 그 생명력의 크기는 감정의 힘을 결정합니다. 감정에서 에너지를 떼어내면 무엇이 납습니까? 메마른 생각. 껍질뿐이죠. 이런 의미에서 집착을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깨달음의 과정이지만 그런 집착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합니다."(제드 맥케나)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는 자기 몸과 기어다닐 때의 땅에 대한 느낌, 즐겨먹던 이파리와 4000개의 근육, 몸을 보호하던 털 등등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결실이 밝은 빛과 가벼운 몸, 날개와 달콤한 꿀의 맛이라면 그런 애착을 버릴 만하지 않습니까?

 나비가 되는 것은 굉장한 경험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깨달음 3부작' 제2권은 '영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깨달음'이라 불리는데 제드 맥케나는 줄리라는 학생에게 영적 자기분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 마음, 내 생각은 홀리고 사로잡혀 있다. 마귀에 시달린다. 내 어머니가 있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다. 내 미래도 있고 내 꿈도 있다. 내게 뭔가 의미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좋건 나쁘건, 기분좋건 나쁘건 여기 있다. 그들을 어떻게 당장 안볼 수 있을까? 내 골방이 나고 다른 장소는 없다. 그들이 실제 몸을 가지고 나타나든 아니든 내게 무의미하다. 마치 내가 진짜 세상에 진짜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듯 말이다. 지각(perception)이 현실이다. 나는 내 지각에 사로잡혀 있다. 사물이나 사람, 미래나 과거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지각하는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것들이 내 연결상태고 집착이다. 아마 내 진짜 정체성은 이런 연결들과 두려운 갈망과 집착들의 집합일 것이다. 어쨌든 집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다. 그게 전부다. 강력한 믿음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저 하나의 믿음이다. 그래, 제드. 알아, 어떤 믿음도 진실이 아니라는 걸... 펜이 칼보다 세지, 안그래? 칼에 대해 썼지만 그저 비유일 뿐이다. 펜이다. 영적 자기분해는 펜의 힘이며 그것은 마음의 힘이고 보는 힘이며 명료하게 보는 힘이다. 그래. 나는 내 마음에 사는 이 사람들을 죽일거야. 그들을 여기 있도록 하는 집착을 명료하게 봅으로써 죽일거야. 나는 그 집착들을 지금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작용하는 감정을 볼 수 있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나는 이 나라는 감옥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고치 속에서 매일을 보내면서 할 일들이 명확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먼저 바깥 세상 및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생기는 육체적 감정적 스트레스를 분석하고 다음에 당신 에고를 층층이 구성하는 잘못된 지식과 정서적 집착(그것들은 당신 생각하는 당신을 규정하는데)을 찾아서 진정 당신이 누구인지 알 때까지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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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9 07:39 나비되기

 앞장에서 "초탈은 우리가 바라지 않거나 싫어하는 것에뿐 아니라 우리가 바라거나 좋아하는 것에도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비가 되려면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래놓으면 많은 이들에게 나비되기가 아주 재미없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탈에 대해 덧붙이자면 매사 그렇듯이 "초탈"이 아닌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초탈"은 때때로 "무집착"이나 "무욕"이라고도 하는데 영화관 안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변형되고 왜곡되어 그걸 시도하는 '인간 어른'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나고 결과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초탈은 바하이교, 불교,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자이나교, 카발라와 도교 등에서 중요한 원칙 또는 이상으로 꼽힙니다. 불교와 힌두교 경전에서 그 반대개념이 집착입니다. 초탈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의 집착은 평온하고 충만한 삶에 중대한 장애물로 여겨집니다. 다른 많은 영적 전통에서는 금욕을 못하면 욕망과 야망 때문에 걱정과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고 봅니다."

 "선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무집착입니다. 무집착에 대한 가르침은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무집착을 습득하는 것은 아주 핵심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의 세상입니다. 모든 생물은 욕망으로 탄생하며 욕망의 조합으로 존속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욕망으로 태어났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난 이상 많은 것들에 매혹당하며 욕망이 샘솟듯합니다. 욕망을 통해서 집착이 생깁니다. 모든 욕망에는 그에 해당하는 집착, 즉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 몸에 가장 두드러지게 집착합니다. 누가 몸을 위협하면 우리는 화를 내고 방어합니다. 우리는 몸이 편한 것과 감각의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결국 우리는 몸에 강하게 집착합니다. 그러나 이런 집착을 돌아보면 그것이 고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개념이 통하지 않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거기에 판단, 즉 욕망은 "나쁘고" 무욕은 "좋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욕망에 대한 저항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무욕을 바라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욕망입니다.

 사실은 욕망에 "잘못"된 것은 없으며 거기에 저항하거나 욕망없이 살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욕망할 수 있습니다. 욕망으로 해서 삶이 재미있고 가슴뛰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그 욕망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때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욕망의 성취에 집착해서는 안 되며 그것의 성취 여부가 행복이나 마음 가짐에 아무 영향이 없어야 합니다. 떼어내야 할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 성취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는 붓다께서 이것을 알고 가르치셨으나 그의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의 결과보다 "욕망"을 금욕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위에 인용한 대로...

 "모든 욕망에는 그에 상응하는 집착, 즉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집착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성취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욕망의 성취에 집착함으로써 옵니다. 그리고 명상과 기도, 시각화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이뤄지지 않을 때 실망하는 데서 고통이 옵니다. 고통은 욕망 자체로 인한 게 아닙니다.

 "백일몽에 대한 모든 집착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그 에너지를 감정이라 부른다. 모든 감정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집착이다."

 나는 아직 집착하고 있는 몇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65피트짜리 날개달린 쌍동선을 만들어 대양을 항해하고 스쿠바 다이빙을 하고 돌고래와 사귀면서 나비로서 삶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욕망의 성취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무한한 나'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나는 그저 그 바람을 즐기고 꿈꾸고 설계도를 그리고 내 우주의 물결이 그쪽으로 흐르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볼 뿐입니다.

 

 "초탈에 대해 말하는 그 어떤 영적 가르침도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그들 누구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탈의 감각을 기르라'고 합니다. 초탈의 감각이요? 도대체 어느별에서 온 사람입니까? 그들은 초탈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아마 당신이 가지고 싶은 BMW나 멋진 배우자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좋아하는 것에서 떨어지도록 하라! 당신의 존재상태에서 벗어나라! 인간으로 당신을 특징짓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그게 시작이라고."(제드 맥케나)


 아주 짧게 말해서 당신은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으로 인해 당신의 느낌이 영향받을 때 거기에 "집착"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행동이나 말이 당신의 행복이나 불행에 영향을 미치면 당신은 거기에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당신이 "올바르다" 느끼게 하기 위해 "올바라야" 한다면 당신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정의가 에고의 거짓 꺼풀이라면 그 꺼풀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관심있는 초탈은 참된 우리에 대해 오해하게 만드는 이 꺼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탈은 우리가 영적 자기분해를 하고 우리가 아닌 것을 발견할 때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초탈을 추구하거나 연습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정체성의 거짓 꺼풀은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찾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아닌 것을 찾을 때 우리는 그런 정체성들에서 벗어나 초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초탈입니다.


 "초탈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은 앞뒤를 바꾸고 있습니다. 초탈은 해방의 열쇠가 아니고 부산물입니다."(제드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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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7 20:36 나비되기

베티의 주차 사건, 전처와의 승강이처럼 소소한 일들에는 그렇다 치고 진짜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어쩔거냐고 물어볼지도 모릅니다. 육체적 학대, 즉 강간, 가정폭력, 이혼, 아동학대, 전쟁, 빈곤, 기아, 공황, 극심한 질병, 진짜 큰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스트레스의 심각성 여부는 상관없습니다. 그 절차는 홀로그램 내용에 상관없이 똑같습니다. 그 모두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즉 손가락을 베이는 작은 것이든 치명적인 교통사고든 실체가 아닙니다. 아무리 실제처럼 보이고 느껴지더라도 그저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고 정서적이거나 육체적이거나 고통이 클수록 더 실제처럼 느낄 뿐입니다. 즉 우리가 거기에 더 힘을 부여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프로세스를 시작할 때 그 상황의 "열기"와 "실체성"을 느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항상 그 체험이, 당신의 '무한한 나'가 당신이 힘을 부여한 지점을 알려주고 거기에 대한 당신의 반응과 대응을 어떻게 바꾸고 거기에 딸린 두려움과 거짓 정체성의 꺼풀을 어떻게 할지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영적 자기분해를 하십시오.

 그래요, 더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처리하려면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겠으나 과정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즉 처음에는 어느 정도 힘을 "회수"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힘이 있어서 두번이나 세번 또는 삼백번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좋은" 것은 그 과정을 거칠 때마다 그 힘은 작아지고 따라서 다음 번에는 좀더 손쉬워진다는 것입니다.

 드디어는 2~3년 안에 이 모든 것을 쉽고 즐겁게 하게 될 것이고 스트레스 체험을 마지막까지 판단과 두려움의 잔재를 찾아내어 처리할 기회로 생각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 인생에 대하여 더욱 더 "목격자"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 3부작'의 셋째권인 '영적 전쟁'에서 제드는 십대 학생 매기와의 대화에서 "목격하기'에 대해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유일한 영적 수련은 관찰하는 것이란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거야. 즉 영적 자기분해는 머리를 써서 더 명확히 보려는 거야. 목격하기에서 우리는 살아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한발 물러서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지. 일기와 같은 반성이 아니고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거야. 바로 지금 여기 내가 앉아서 너와 얘기하지만 제3의 관찰자 모드로 보는 거야. 나는 배역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고 관중이기도 한 거지. 내가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좀 무관심한 듯 내 연기를 모니터하고 있지."

 그 학생은 헷갈리는 듯했지만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되죠?"

 "음 너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 그 목격이 집중적이진 않지만 말이야. 그녀가 지루해하고 배고프고 화나고 말이 없지만 그녀를 앉혀놓고 집중하게 할 수 있지."

 "그녀라고요?"

 "네 마음 뒤켠에 있는 작은 목소리말야. 너는 지루할 때 어떻다는 걸 알잖아. 마음의 뒤켠에 뭔가 다른 걸 생각하잖아. 너는 완전히 현재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곳에 가 있지. 방황하고 백일몽을 꾸지. 백일몽이란 좋은 단어야. 왜냐하면 우리가 낮에도 자고 있음을 말해주니까. 그게 바로 요점이야. 우리는 우리 배역에서 의식을 옮겨서 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로 집중하는 거야. 그 차이를 강조하고 싶은 거야. 즉 우리가 연기하는 배역과 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섞지 않는 거지. 우리는 우리가 연기하는 배역 대신 배우 역에 주로 몰입하려는 거야. 그게 의미가 있지 않겠어?"

 "모르겠어요. 지속적으로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지. 하지만 판단하는 느낌이 아니고 제3자와 같이 무관심한 감각으로 그러는 거야. 네가 내면의 목소리와 가상의 대화를 하거나 블라우스를 잘못 있었는지 걱정할 때 그것은 배역이지. 연기자는 뒤로 물러서서 그 모든 걸 관찰하는 거고. 이런 식으로 네가 남을 관찰하는 것처럼 너 자신을 관찰할 수 있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너는 할 수 있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말야."


 내 경우 목격자 관점은 많은 수련과 연습이 필요하고 고치 생활 초기에는 아마 적합치 않은 고급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탈바꿈을 마치는 데까지의 모든 시간에 연습해야 할 방편입니다.

 "관찰, 깨어 있기, 주목하기가 전부다. 이 무관심한 듯 깨어있기를 위해 우선 주의를 기울이기를 배우는 거야. 한번에 조금씩 의식적으로 하는 거지. 일단 요령을 터득하는 거야.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걸 연습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의아해하고 해체해보고 거꾸로 다시 구성해보는 거야. 그리고나서 그들을 관찰했던 것처럼 너 자신을 관찰하는 거야. 그것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그리고 거의 언제나 목격자 모드가 될 때까지.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제3자 관점으로 네 배역을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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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7 10:51 나비되기

나는 전처 및 그녀의 남편과의 이 사건에 대한 제드의 영적 자기분해를 돌렸을 때 많은 두려움도 발견했습니다. 요점은 내가 더 이상 그들과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 그녀의 드라마에 개입되는 데 흥미가 없어졌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정부 집중에 대한 음모론을 얘기하는 것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 등입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참았던 유일한 이유는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도 그들에게 보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녀와 그녀 남편을 떠나보내는 걸 두려워 했습니다. 내 여생 동안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데다가 끝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갑자기 끝내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나는 친척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두려웠습니다. 내가 어느날 "있지요, 나는 당신들에 내게 베푼 모든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답할 길이 없고 이제 보답하려 하지 않겠어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배은망덕하게 보이겠습니까? 

  내 자식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만일 그들이 전처에 대한 내 행동을 반대한다면 그들의 아버지로서 내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또 그렇게 바랬던, 막 되찾은 어머니와 형제의 사랑을 잃는 것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의 꺼풀들이 내 어린시절 동안 품었던 결손가정 기간 동안 나를 구성했던 것들입니다.

 마침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전처를 영화관에서 꺼내어 고치 속으로 넣을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는 것(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주려 했던 "선물"이었습니다)도 하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보살펴서 드라마에서 구출해서 갈등과 고통을 면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내 에고가 자기 존재를 유지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려는 책략이었습니다.

 집착을 끊는 일이 항상 우리가 바라지 않고 싫어하는 것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라고 좋아하는 것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했고 내가 잘못 생각했던 내 에고의 꺼풀(코치, 친구, 아버지,형제, 아들 등)을 만들고 있던 두려움도 놓아버려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내가 연기했던 역할들이었는데 그중 아무것도 참된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 삶에서 했던 모든 판단이 나를 그 체험에 집착케 했고 내 에고의 꺼풀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판단의 결과 내가 했던 모든 믿음은 거짓이었고 내 에고를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그 거짓 믿음에 기초한 모든 의견은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잘못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한한 나'는 우리가 고치 속에 있는 동안 그런 체험을 다시 하고 다시 살아볼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즉 그런 판단 믿음 의견을 놓아버리고 두려움을 직면하고 우리 에고를 형성하고 있는 집착을 부셔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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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7 07:46 나비되기

 "그것도 좋은 질문이네. 맞아, 공안과 만트라는 머리로 하지.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질문은 머리로 하지. 하지만 그걸 자네가 볼 수 있는 종이나 컴퓨터에 적는 이유는 머리가, 아닐 것 같지만 신중한 생각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지. 신중한 생각을 위해서는 언제나 그 전체를 보고 사방에서 살펴보아야 하지. 공격하고 다방면에서 살펴보고 또 역공을 해보는 건데 그게 머리 속으로는 안 된다네. 적어놓으면 자네는 마치 선생처럼, 비판자처럼 또는 적수처럼 볼 수 있다네.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자네 스스로 자네의 구루가 될 수 있지. 즉 자신을 판단하고 패드백을 하고 더욱 객관적이고 높은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러면 영적 자기분해는 심장의 길이나 봉헌의 길이나 봉사의 길과는 반대인 지적인 길이 되는 건가요?"

 "음 솔직히 자네는 거기에서 나를 헷갈리게 만드네, 아더." 그는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길들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네, 아더. 영적 자기분해는 지적인 노력이지만 나는 그것을 대충 지성의 길이라 부른다네. 그것은 차별화의 과정이고 진실이 아닌 것을 무지로 돌리는 과정이고 점차 거짓을 벗겨내어 진실인 것만 남기는 과정이지. 지성은 느리고 고통스러운 자살을 할 수 있는 칼처럼 쓰이지. 수천번의 칼질을 하게 되는...그것이 이런 길이다 저런 길이다 하는 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네. 그게 계속 궁금하면 그저 '영적 자기분해'라고 알아두게."



 이상이 내 전처와 관련된 체험에서 내가 필요로 한 바로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나는 내 전처와 그의 남편에 대한 내 감정적 집착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빚을 지고 있다는 잘 포장된 교묘한 집착들이었죠. 이런 집착들이 내가 믿는 내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적고 그 결과 내 에고가 나에 대해 붙들고 있는 것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진실인지 알아내고 싶었으며 영적 자기분해는 그 과정에서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발견한 것은 내 에고가 내 전처의 코치 역할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내 정체성과 그녀에 대한 관계(특히 내가 이미 그녀의 남편이 아닌데도 유지하려 했던)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실상 내 에고는 그 누구에게든 코치 노릇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선생이나 멘토, 구루로서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또 그들을 나보다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그런데 물론 이것은 모두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남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믿음을 만족시켰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인지 또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일입니까?

 내 전처와 그 남편에게 되돌려 줄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그토록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고 느껴 그런 역할을 계속하려 한 것은 바로 내 에고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에고는 끈질기게 생존하고 커지고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내 전처(그밖의 누구에게든)에게  코치나 멘토나 선생 또는 구루가 되려는 집착과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끝없이 감사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날 때가 온 것이 었습니다.

 하지만 집착을 끊는 것이 자동적으로 관계를 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이 경우에서는 전처가 결국 그녀와 그녀 남편을 연락처에서 빼달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나는 그 관계 단절이 항구하거나 길어지길 바라지 않으면서 연락처에서 빼긴 했습니다.)

 집착 끊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에고란 양파라고 생각합시다. 그것은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내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과거를 돌아보면 전처와 그의 남편에게서 단호하게 내 코치 역할이 거부된 것에 대해 엄청 놀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에게 지극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에고 꺼풀을 찾아 내버릴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의 저항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구원이고 그들이 또 다시 내게 어떤 선물을 준 것인지 놀랄 뿐입니다. 비록 이번에는 그 고마움에 대해 구애받지 않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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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6 00:04 나비되기

그의 '깨달음 3부작' 가운데 한권에서 제드 맥케나는 "영적 자기분해"라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자기분해는 심적, 육체적, 정서적 측면을 포괄하는 자아의 수준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둡시다. 두 단어를 합치면 당신을 한번에 한조각씩 정화하는 불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쾌한 과정입니다. 기본적으로 선불교의 공안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해야 할 것은 진실을 적는 것입니다. 간단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제드가 영적 자기분해에 대한 실제 과정을 말한 것을 잘 묘사한 것이 아더라는 학생과의 대화를 적은 1권에 있습니다.

 "자네가 진실이라고 아는 것 또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저 적고 진실이라고 생각해낼 때까지 계속 적는 것일세."

 "파이는 원지름에 대한 원둘레의 비율입니다."라고 아더가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동의하네. "그처럼 더 논의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진술이 놓여진 기초를 검사하기 시작하고 그걸 따라 가장 견고한 것, 참된 것, 즉 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보는 것이지."

 "파이는 원지름에 대한 원둘레의 비율이 아닙니까?" 그가 묻습니다.

 "그 물음은 원이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이지."

 "원이 없습니까?"

 "아마도. 나는 모르네. 원이 있는가?"

 "글쎄요, 내가 원을 그리면..."

 "나? 자네는 언제 자네의 존재를 확인했는가? 그린다고? 자네는 이미 자네가 인식 능력과 그릴 능력을 가진 물질 존재임을 확인한 지점을 지났는가? 그렇다면 자리를 바꿔 앉아보세."

 아더는 생각에 잠기고 잠시 침묵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계속하라는 게 그렇게 하는 거라 생각했죠. 이거 굉장히 어려운데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시작하는가는 문제가 아닐세. 자네는 마하리쉬의 물음인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걸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겠지. 뭔가 진실인 것을 그저 말하기 시작하는 거야. 쓰고 또 쓰는 거야. 명료하게 하고 지나친 것은 잘라내고 끝날 때까지 하는 거야."

 "그러면 그게 보통 얼마나 걸립니까?"

 "내 생각엔 2~3년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다 끝내면 당신은 다 한거야."

 "다 했다니요?"

 "끝난거지."

 "그럼 일기를 쓰는 것 같은 건가요?"

 "좋은 질문이야. 그렇지는 않아. 이건 개인적 깨달음이나 자아탐구가 아냐. 감정이나 통찰에 관한 것도 아니고 개인적이거나 영적인 진화에 관한 것도 아닐세. 자네가 확실히 아는 게 뭐냐는 거지. 자네가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게 뭐냐는 거지. 이 과정을 통해서 자네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의 꺼풀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거라네. 그게 어제 쓴 것이라면 언제든 쓴 것으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서부터 자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깜짝 놀라게 될 걸세. 그건 실로 고통스럽고 심술궂은 과정이며 자기 몸을 절단하는 것과 비슷할 거야. 그것은 결코 낫지 않는 상처를 낳을 수도 있고 다시 세울 수 없는 다리를 태우는 일이기도 하고 그것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다시는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야."

 잠시후 학생은 물었습니다. "그렇게 쓰는 이유가 뭔가요? 공안처럼 머리로 하면 안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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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3 07:48 나비되기

 대략 평균 1년 동안 로버트 프로세스를 제대로 실천하고 나서 당신은 바깥 실체라는 게 없음을 확실히 알 것입니다. 또 당신의 3D 홀로그램 영화도 리얼하지 않고 당신의 '무한한 나'가 세세한 부분까지 당신의 체험을 창조하며 당신은 결코 언제라도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의 희생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느끼면 그것이 무엇이든 전적으로 당신 영화에 대한 반응과 대응의 결과이며 몇초나 몇분간 프로세스를 돌려서 남아있는 판단 믿음 의견을 찾아 보내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이 게임과 거기 출연하는 연기자들에 대해 놀라움과 감사를 크게 느끼면서 살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이것은 참으로 도달할 만한 경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미흡하다고 느끼고 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니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 아직 지속되는 열정과 기쁨을 느끼기보다 그저 은은한 만족을 느끼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때로는 잠시동안 스트레스를 느끼기도 합니다.

 나는 일찌기 로버트 프로세스가 꽤 좋은 성과를 낳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압니다.

 로버트 프로세스는 "바깥"에서 기인한 스트레스를 다루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바깥"이란 생각이 이미 없는 지점에 이르렀고 "내면"에 더 관심을 가진 때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판단과 믿음, 의견이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당신이 그것들을 보내버려 편안한 상태라면 탈바꿈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판단, 믿음과 의견 밑에는 거기에 이르게 하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생겨난 에고의 꺼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거짓 나인데 로버트 프로세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최소한 내게는 그랬습니다.



 2003년 내가 여전히 영화관 안에 있을 때 나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목과 등의 뼈 11개가 부러져 거의 평생 불구가 될 뻔하였습니다. 목의 척추뼈를 적출하여 티타늄을 대신 넣어야 했고 회복을 위해 6개월을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내 전처는 3년전에 새 배우자와 결혼한 상태였고 새 시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 대한 사랑으로 대가없이 병원 침대를 거실에 가져다 놓고 6개월 동안 돌봐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충분히 걸을 만하게 되자 여행용 트레일러를 사서 집 근처에 설치하고 6개월을 더 음식을 주고 보살펴주었습니다.

 그해 내 전처의 남편은 내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의 어머니는 나를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우해주었습니다. 57살이 되어서야 나는 어릴 때 꿈꿨던 어머니 같은 분과 진짜 형제를 덤으로 얻었습니다. 전처의 부모는 이웃에 살았는데 역시 나를 계속 사랑했고 도와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자동차 사고는 참으로 내 '무한한 나'가 많은 차원에서 나에게 아주 특별히 준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내 전처와 그 남편에게 (물론 그 모든 가족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고 그후 7년 동안 그들에게 받은 몇 퍼센트라도 갚을 방법을 찾길 바라면서 지냈습니다. 

 우리가 17년간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아내의 남편이기도 했지만 정찰대이자 코치였습니다. 그녀에 대한 내 역할의 일부는, 그리고 내 에고의 일부는 그녀가 길에서 벗어날 때(그녀는 기적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제 자리로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새 남편은 사실 나의 그 능력과 내가 해낸 일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여러번 나에게 감사했습니다.

 헤어진 지 10년인데 나는 여전히 그러한 내 에고 정체성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탈바꿈 기간 1년 반 동안 내 전처와 내가 갑자기 예기치 않게 소통 문제가 생겼을 때 내 에고는 내가 그녀와 그 남편에게 코치로서 도와줄 기회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답할 기회이기도 했죠. 

 그러나 우리 사이에 처음으로, 과거에 내가 보여주었던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내 전처는 나에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통 문제는 6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이번에는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로버트 프로세스를 충분히 돌렸기에 나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었고 그녀을 비난하거나 판단하지도 않았으며 그녀를 변하게 하거나 개선시키려는 아무런 바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마땅치" 않은 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로버트 프로세스 이상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는 로버트 샤인필드를 통해서 제드 맥케나의 '깨달음 3부작'을 만났습니다.

 "외적 추구는 이 이야기의 한 요소일 뿐이다. 다른 요소는 내적인 것이다. 느리고 고통스럽게 한꺼풀 한꺼풀, 조각조각 자기를 벗기는 것이다."

 내 전처와의 이러한 소통 문제를 통해서 나는 몇몇 내 에고의 단단한 꺼풀과 그것을 만든 두려움에 대처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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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4.12.11 13:13 나비되기

이번 장과 다음 장에서 이 프로세스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두세 사례를 내 경험에서 자세히 설명하려 합니다. 첫번째 사례는 내가 얘기한 모든 요소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고치 생활 6개월 무렵 나는 '타메라'라고 부르는 남부 포르투갈의 국제 공동체에서 이백명의 좋은 친구와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내 일은 저녁 카페를 운영하는 것인데 나는 그 일을 완전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때라면 만나지 못했을 공동체의 많은 친구들을 만날 기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녁에 카페에 와서 쉬며 즐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특별한 분위기와 기운을 조성했고 팝콘과 좋은 음악을 제공함으로써 대접했습니다.

 이 카페는 내게는 자부심과 기쁨의 원천이어서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겼는데 어느날 아주 꼭지가 돌아버릴 일이 생겼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베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독일의 '제크' 마을에서부터 그 여자를 15년 동안 알았었죠. 나는 베티를 싫어하지는 않았고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녀와 친분을 가지는 걸 기꺼워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솔직히 누가 그런 여자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 여자는 언제나 화를 내며 건방진 태도를 보여 주위를 즐겁지 않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가 누군가를 쫓아내지는 않았기에 그 여자는 15년간 거기에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여자를 거의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던 날 베티는 내 카페의 자갈이 깔린 마당에 갑자기 자기 차를 주차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차가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면 손님들이 그렇게 짜증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차는 보기싫게 있었고 내가 애써 만들려 했던 분위기를 망쳤습니다. 게다가 거기는 주차 금지구역이었습니다.

 내 첫 반응은 짐좀 내리고 와서 차를 옮기려고 임시로 주차했으려니 했습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차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방으로 가서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주 정중히 요청했음에도 그 여자는 화를 내며 "상관 말아요!"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났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나는 10분을 더 기다렸다가 꼼짝도 않는 차를 보고 다시 방으로 가서 권위를 갖추어 마땅히 주차할 자리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당신은 누구냐"며 격노하길래 나는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 여자는 차를 옮기지 않았고 차는 내 카페 분위기를 망쳐가며 저녁 내내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마실 것과 팝콘을 대느라고 바빠서 로버트 프로세스를 할 시간도 장소도 없었으나 차를 바라보거나 베티를 생각했었다면 심하게 화가 났었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밤 공동체의 어떤 여성 손님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때문에 앰뷸런스를 불러야만 했습니다. 앰뷸런스가 지나가야 할 자리에 베티의 차가 주차해 있었기에 그날밤의 내가 냈던 분노가 갑자기 정당성을 얻은 셈입니다. 그 차를 치워야 했던 것은 이미 내 개인적인 바람에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주차하지 말아야 할 규칙의 근거가 된 것이었죠.

 그래서 나는 베티에게 가서 앰뷸런스가 오기 전에 차를 옮겨달라고 다시 한번 얘기했습니다. 그여자는 거부했는데 그게 그 여자 스타일이었죠. (앰뷸런스는 결국 다른 길로 가서 환자를 데려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내가 느꼈던 분노를 되새겼습니다. 나는 베티가 "잘못"임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그때 내 즐거움을 망친 것을 비난했습니다. 그 여자가 한 짓을 바꾸기만 했어도 나는 훨씬 기분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 프로세스를 돌렸고 그 스트레스가 바로 내가 힘을 부여한 지점을 가리키는 빨간 불임을 상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완전히 느낄 때까지 그 스트레스가 커지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한참 걸려 이 일이 "왜" 생겨났는지 묻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내 '무한한 나'는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경험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더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신 아무것도 리얼하지 않다는 것, 즉 내 '무한한 나'가 나의 자기인식을 위해 선물로서 하나의 홀로그램 체험을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했습니다. 지금은 그게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걸 5초면 알지만 그때는 포장된 선물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희생자라는 느낌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나는 베티가 내 카페에서 내 즐거움을 방해했다고 믿었죠. 그리고 베티가 "잘못"이라고 판단했죠. 나아가 앰뷸런스를 보고 내 판단을 더 정당화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공동체의 다른 멤버들에게서 엄청난 도움을 받아 내가 얼마나 "올바르고" 베티는 얼마나 "잘못"인지를 입증하려 했었죠.

 하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내 모든 판단을 버리기로 결정하고 베티를 비난하기를 그쳤습니다 그 여자는 내 '무한한 나'가 쓴 영화 대본대로 행동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일은 그 여자를 위해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베티의 행동은 전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는 영화에서 자기 역을 아주 잘 소화해냈을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여자를 비난하겠습니까?

 나는 또 그 여자가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내 입장이었습니다. 또 내 의견은, 그 여자가 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내 홀로그램에서는 더더욱 빠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한 상황"은 내가 카페를 운영하는 데서 얻는 온전한 기쁨을 망치도록 내가 그 여자에게 힘을 부여했고 스트레스를 불러온 것은 베티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나의 베티에 대한 반응과 대응행동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반응과 대응행동은 즉각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그 상황을 리얼하게 만든 힘을 "회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샤인필드가 말했던 방법입니다. 내 식으로 말하면 전원의 스위치를 끈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 그것은 몇분 걸렸는데 내 모든 스트레스는 가버렸고 나는 내 '무한한 나'에게 엄청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된 판단과 믿음, 의견이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베티가 나를 위해 해준 연기와 역할에 대해 너무 감사해서 끌어안고 감사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베티는 내가 결코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다시는 그곳에 주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 여자를 보고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게 하나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세스를 하면서 당신의 체험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나 '무한한 나'를 속이거나 바보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즉 "바깥"의 사람이나 사물은 당신이 그 홀로그램 체험에서 달라지길 바라지 않을 때만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게 바뀌든 바뀌지 않든 그것은 당신에게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 장을 끝내기 전에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로버트 프로세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훌륭하고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용서를 위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베티를 용서한 일에 관한 게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직 뭔가 "잘못"한 게 있다는 판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거기까지 간 것이라면 아직 더 가야 합니다.

 한편 기적수업은 말합니다. "용서란 형제가 당신에게 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난 일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하고 그게 실재했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없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정의하는 용서입니다.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다른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무언가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당신은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진심으로 열정적으로 그들이 행한 것(당신의 홀로그램에서 그들이 완벽하게 역할을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목적지에 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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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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