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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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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서'에 해당되는 글 25

  1. 2018.08.30 생각의 매력과 복성서
  2. 2018.08.25 정허동직((靜虛動直)과 중화(中和)
  3. 2018.08.24 명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4. 2018.08.19 성(性) 자리, 정(情) 자리
  5. 2018.04.08 성(性)과 정(情)
  6. 2017.12.01 복성서에 대하여
  7. 2016.04.23 <하편>(4)
  8. 2016.04.19 5절 삶과 죽음을 논함
  9. 2016.04.17 4절-3
  10. 2016.04.14 4절-2
2018.08.30 06:59 복성서

생각의 매력은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여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 찬탄하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특별한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한 과장된 평가에서 나온다. 그런 마음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겸허한 자세와 배후에 숨겨진 동기를 버리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나의 눈, 143쪽)

--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우리의 애착과 미련이 있습니다. 복성서가 얘기하는 희로애락애오욕, 즉 정(情)이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통틀어서 현대어로 에고라고 부릅니다. 에고가 참나, 즉 복성서 용어로 성(性)이 발현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불려불사(弗慮弗思)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 점은 바로 대승기신론의 노선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에고가 실체라고 믿어 그것을 버리기 꺼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소크라테스는 동굴의 우화를 설했고 금강경은 모든 존재가 몽환포영노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인데 이 출발은 강한 의지와 분명한 결단 없이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시작된 여정도 큰 용기와 믿음, 그리고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려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 결단이 필요한데 그것은 이제까지 삶이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들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매일 10분 이상 침묵 속에 고요히 있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일단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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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8.25 19:33 복성서

주돈이의 통서(通書)는 주희와 이고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희는 주돈이에 대해 평하길 "선생(周惇頤)의 학문은 그 오묘함이『태극도설』하나에 구비되어 있으니, 『통서』에서 말한 것도 모두 이 『태극도설』의 내용이다."라 하는 등 주돈이를 극찬하면서 태극도설을 해설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김용남 님은 주돈이가 이고의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통서의 많은 부분이 복성서의 내용과 일치하거나 흡사하다고 합니다(이고, 성리학의 개창자, 159쪽). 이고를 성리학의 개창자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분이 불교와 유교의 핵심을 통합적으로 실천하여 스스로 사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주돈이가 지은 통서의 한 구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노력해서 상근기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가 필요하니 그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혼자일 때 텅비어 있고, 활동할 때 정직하다. 혼자일 때 텅비어 있으면 꿰뚫어보고 꿰뚫어보면 통달한다. 활동할 때 정직하면 투명하고 투명하면 공평하다. 꿰뚫어보아 통달하고 투명하여 공평하면 거의 성인이다."』 (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 「通書」, 聖學) 

여기서 금장태 님의 해설을 가져옵니다. "먼저 마음이 고요할 때 욕심이 없어져 마음을 텅 비우면 거울에 사물을 그대로 비추듯이 사물에 대한 판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곧음이란 이치를 따라 흔들림이나 굽힘이 없이 곧게 나간다는 것이요 주역에서 '공경함으로써 마음 속을 곧게 한다(敬以直內)'는 말처럼 마음을 기울어짐이나 비뚤어짐이 없이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비움과 밝음, 224~225쪽).

저는 이 구절이 중용의 중(中)과 화(和)에 해당한다고 읽었습니다. 홀로 고요히 마음을 텅비워 희로애락이 나기 전 마음 상태, 즉 중(中)을 지키는 것은 정허(靜虛)에 해당하고, 활동할 때 희로애락이 드러나 상황에 딱 맞는(喜怒哀樂之發而皆中節) 것이 화(和)인데 이것은 바로 동직(動直)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논란이 될 만한 것은, 금장태 님에 따르면 무욕이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주돈이 이래 주자학자들도 완전한 무욕을 얘기한 게 아니라 마음을 완전히 다스리는 경지를 말했다고 하면서 그 다스림은 경(敬)의 실천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위 책, 226쪽). 통속적으로 생각할 때 무욕하면 무능할 것이 우려되는데 실상 명상(敬은 사실상 명상을 말합니다.)의 소득은 무집착과 지혜입니다. 그래서 위 통서 번역에서 저는 '정허즉명(靜虛則明)'을 텅비어 있으면 꿰뚫어본다고 했습니다. 

위 통서 내용은 인간으로서 최상의 존재 상태로 가는데 꼭 필요한 것을 중용의 노선을 따라 재론한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홀로 고요히 있을 때는 신 의식, 참나, 진아, 진여 등(모두 궁극의 실재에 대한 표현임)과 하나가 되어 밝고 투명하며 지혜롭게 됨과 동시에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때까지 의식이 향상하고, 깨어 활동할 때는 지혜를 발휘하여 그 무엇에도 속아넘어가지 않으면서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성인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만하며 인간으로서 목표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최근 사숙하는 그리스도의 편지 내용과 충분히 조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참고삼아 해당 글을 가져옵니다. 비교해서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 의식에 맞추고 자아를 완전히 다스리는 것이 사는 이유가 되고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도록 하라. 그것을 이루면 바라던 모든 것이 '새롭고 초월적이며 영원한 방법으로' 너희 것이 될 것이다. (Attunement with Divine Consciousness and total self-mastery should be your reason for living, and your only goal. When you have achieved it, all you have ever wanted for yourself will be yours – in a new, transcendent and eternal way. '그리스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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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8.24 07:40 복성서

복성서를 통해서 유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가 하나로 꿰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탄허록과 금장태 님의 동양고전 입문서 '비움과 밝음'을 통해서 그것을 더더욱 확인하였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성품(性)이 내 마음(心) 속에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내 성품(人性)이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점에서는 하늘의 성품(天性)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 속에 있는 마음과 내 위에 나를 넘어서 존재하는 하늘이 상하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요,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성품이다. 길이 끊어졌으면 건너갈 수가 없으니 그 길을 잘 찾아내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비움과 밝음, 76쪽)"

이 해설은 맹자 진심상을 소개하면서 붙인 것입니다. 진심상에는 마음을 철저히 파면 성품(불가의 진여로 보면 좋습니다.)을 알고 성품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고 합니다. 그러니 성품을 키우는 것은 하늘을 섬기기 위함(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진여를 알아 하늘을 섬기는 데 전심전력하기보다는 잇속이 지배하는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거기에 휩쓸려 길이 끊어진 채로 살게 됩니다. 제 경우도 직장 생활 후반기와 은퇴후 약 3년간 그랬습니다. 약 5년 전심전력 노력해서 끊어진 길을 어느 정도 복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나 천주교나 하늘을 섬기는 게 삶의 목표인 줄은 알아서 껍데기만 남긴 것이 제사라는 점에서 같습니다(천주교의 미사는 제사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제대로 섬기는 길은 내면의 진여(性)를 확실히 만나서 매사 진여와 상의해서 처리하고 의식을 더욱 향상함으로써(存其心養其性) 기쁨과 평화를 항구하게 누리는 데 있다고 봅니다.

하늘의 뜻은 우리가 완벽하게 기쁘고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본 중의 기본인, 일이 없을 때 무조건 고요히 앉아 마음을 지키는 것(無事則靜坐存心)을 실천해야 합니다. 참고로 중용 1장은 끊어진 길을 보수하는 것이 바로 수도(修道)고 이때 도가 바로 성품(진여)에 순종하는 것(率性)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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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8.19 07:39 복성서

성인은 모든 것이 성(性)의 마음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쓰기에 불성이니 신성이니 한다. 반면 범부는 모든 현상적 존재가 성의 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고 쓰기에 인간성이라 한다. 이 둘의 차이점은 성인은 성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것이고 범부는 정(情)의 자리에 앉아서 쓰는 데 있다(탄허록 115쪽).

-- 호킨스 요약집이라 할 수 있는 'Dissolving the Ego, Realizing the Self'를 번역하다가 이 제목이 멸정복성(滅情復性)을 얘기한 이고 선생의 복성서와 같네 하는 지점에서 어떻게든 복성서를 번역하자고, 부족한 소양으로 1년 가까이 씨름했습니다. 다행히 중국어 해설이 있어 번역을 마치고 나니 김용남이란 분이 복성서에 대한 박사논문을 두 권의 책으로 낸 것을 알았습니다.

위 두 권의 책을 포함하여 복성서에 대한 해설들을 읽어보면 성이란 대승기신론의 심진여, 정이란 심생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을 붙잡은 지 100일이 지난 것 같습니다. 이제 도달한 결론은 극기복례, 멸정복성, 거비정화가 모두 성의 자리에서 삶이라는 것을 잘 써서 화엄경의 이상인 향상일로의 길을 가자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의 자리가 바이블이 얘기하는 '내 안에 있는 천국'이며 이 천국을 먼저 누리는 것이 피안으로 가는 뗏목을 얻는 것입니다.

2세기에 저술된 대승기신론은 인간 마음에 대한 가장 정통하고 확실한 이론이기 때문에 7~8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지성 가운데 한 분인 원효께서 해설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대승기신론 소와 별기'로서 중앙아시아와 일본에까지 읽힌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지관문(사마타+위파사나)을 포함한 5행(6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성의 자리에서 마음을 쓰는 올바른 길이라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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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08 08:19 복성서

오늘은 탄허스님 말씀 공유해보겠습니다.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을 합한 명사다. 성이란 나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우주가 미분(未分)되기 전 상태를 말한다.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나 몸이 나기 전이나 우주가 생기기 전이나 모두 똑같다. 우리가 흔히 마음의 본체인 성에 대해서 논하면서 중생이나 부처, 성인이나 범부가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일체를 성의 자리에서 보았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무조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은 칠정이 일어나기 전의 면목이며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다. (탄허록 180~181)"

제 생각에 이것만 확실히 구분할 줄 안다면 유교와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 가운데 하나를 얻었다고 봅니다. 제가 복성서를 번역하면서 성을 '참나'로 정을 '에고'로 번역한 근거도 여기에 있고 그래서 그 어떤 번역보다 전체를 이해하기 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범부와 성인이 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같지만 범부는 우주의 진면목이자 시공이 끊어진 마음의 본체인 성을 알지 못하고 희로애락애오욕에 끌려다니는 데 반해 성인은 성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다르다고 합니다(같은 책 182쪽). 명상은 언제나 성의 자리에 앉아 있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우연히 TV에서 보여주는 십대 역사 영재와 수영 영재를 보았는데 이들은 그 분야에서 매일 나아지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더군요! 평생에 걸쳐 성의 자리에 들어앉는 일에는 누구나 제한이 없지만 거기에 뜻을 두는 이들은 불과 2~4%밖에 안 됩니다. 이 길이 생사를 벗어나는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학부모들이 사교육으로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듯이 교회나 절에 출석하는 일로 때우는 게 대다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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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12.01 19:21 복성서

※다음은 현대불교뉴스 "심성론의 불유(佛儒) 회통론과 거사들(2008. 9. 23.)"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심성론에 있어 불교와 유가 사상을 결합시킨 양숙(梁肅) 거사의 ‘복성명정론(復性明靜論)’을 계승해 보다 발전시킨 사람은 이고 거사이다. 이고(772~841) 거사는 <복성서(復性書)>를 지어 유명하다. 이고 거사는 자(字)가 습지(習之)이며, 롱서(현재 甘肅省 渭源)사람이다. 거사는 학생시절인 정원(貞元) 9년(793) 9월 주부(州附)에서 공거인사(貢擧人事, 지방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행사)를 시행할 때 양숙 거사와 첫 대면을 했다. 양숙 거사는 이고에 대해 ‘서로 통하는 도가 있다’고 평가해 가르침을 주지만, 아쉽게도 그해 11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2~3개월 짧은 기간 동안 사사는 이고 거사에게 스승인 한유보다도 더욱 깊은 영향을 줬다. 그 후 거사는 양숙 거사를 추모해 <감지기부(感知己賦)>를 지었다. 이후 정원 14년(798), 이고 거사는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고, 낭주(朗州)자사, 예부랑중, 형부시랑 등의 고관을 역임했다. 태화(太和) 9년(835)에 양주(襄州)자사 및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에 임명됐고, 그 임지인 양주에서 생애를 마쳤다. 거사는 딸만 7명 두었고, 외손(外孫)대에서 재상을 3명 배출했다. 


이고 거사의 유불회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대표작 <복성서>이다. <복성서>는 모두 세 편으로 구성됐다. 상편은 성정(性情) 및 성인(聖人)에 대한 총론이고, 중편은 수양하여 성인(聖人)에 이르는 방법을 평론했고, 하편은 사람들에게 수양을 권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전편에 걸쳐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회복할 것을 호소했고, <주역(周易)>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으로 주요 전거를 삼았다. 거사는 이 책에서 정(情)을 버리고 ‘성품을 회복[復性]’하는 것을 취지로 했고, ‘헤아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弗思弗慮]’ 정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복성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표면상으로 본다면 이 책은 유전(儒典)을 근거로 해 유가의 용어를 사용하며, 그 목적도 공맹의 도통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깊이 사상 내부로 들어간다면 어렵지 않게 이 책의 사상 및 표현방식이 불교의 불성론(佛性論)과 상당히 접근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성서>의 사상은 선종(禪宗)의 ‘이념(離念)’ ‘무념(無念)’ 나아가 ‘무상(無相)’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송(宋)의 석실조수(石室祖琇) 선사는 <융흥불교편년통론(隆興佛敎編年通論)> 권24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복성서>를 배우는 것은 불경의 개요를 얻는 것이다. 다만 문자를 달리 했을 뿐”이라 말했다. 이고 거사의 사상에 불교가 깊게 스며들었던 원인은 양숙 거사와의 인연뿐 아니라 다양한 선사(禪師)들과의 인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4는 거사가 낭주자사로 있을 때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를 친견해 오도한 내용을 상세하게 전한다. 


거사가 유엄 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선사는 경전을 보며 못 본 체하자, 거사는 “직접 대해 보니 소문에 듣기보다 못하다”며 떠나려 했다. 그때 선사는 “태수는 어찌 귀만 귀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깁니까?”라고 반문하자 거사는 합장하며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선사는 손으로 위와 아래를 가리키며, “알겠습니까?”라고 묻자 거사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사가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거사는 크게 깨닫고는 게송을 하나 읊었다. “몸을 단련해 마치 학의 형상과 같고, 천 그루의 소나무 아래 두 함의 경전을 두고 있네. 내가 와서 도를 물으니 아무런 말이 없고,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네.” 게송을 마치고, 거사는 다시 선사에게 “어떤 것이 계정혜(三學)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빈도(貧道)의 이 처소에는 한가한 살림살이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니 거사가 헤아리지 못했다. 


선사는 “태수는 이 일을 잘 보임(保任)하십시오. 앉을 때는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앉고, 행할 때는 바다 속 깊이 밑바닥에서 행하십시오. 침실 속의 물건은 버리지 않으면 바로 새어나옵니다”라고 설명했다. 선사가 밤에 산을 올라 경행(經行)하다가 홀연히 구름을 헤치고 나타난 달을 보며 크게 웃으니, 예양(澧陽)의 동쪽 구십 리까지 울려 퍼졌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선사에게 찾아와 물으니, 거사가 옆에 있다가 “그윽이 머물 곳을 골라 얻었으니 들에서 당신(약산유엄) 뜻에 맞으리. 평생토록 사람이 와도 맞이하고 전송하는 법이 없는데, 어느 때는 외로운 봉우리 꼭대기에서, 달 아래 구름을 헤치고 한번 크게 웃는다”라는 시를 읊었다. 


<전등록>에 보이는 이 일화로부터 약산 선사는 이미 거사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있음이 짐작된다. 거사와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당주(唐州)의 자옥(紫玉) 선사,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 아호대의(鵝湖大義) 선사 등 동시대의 여러 뛰어난 선사들과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복성서>에 보이는 ‘성품의 회복’이란 논리가 선종의 ‘명심견성(明心見性)’의 논리와 유사한 원인이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거사의 반연은 유불회통론에 있어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양숙 거사와 다른 측면이 나타나게 했다. 


이러한 거사의 사상을 후대에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다만 불교로부터 나온 것” “지극한 도리를 설하지만, 불교와 유사할 뿐”이라 비판했다. 그런데 이렇게 선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불교에 심취했던 이고 거사는 당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남북조시대부터 출현한 재회(齋會)가 당대에 와서는 점차 화려하고 성대해짐이 최고조에 달했고, 또한 이로부터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국가경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러한 재회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거사는 불교의 재회를 없애자는 의미인 <거불재(去佛齋)>를 찬술해 재회의 폐단을 비판했다. 이 저술을 세밀히 분석하면, 거사의 의도는 불교 본연을 잊고 지나치게 복록을 탐하는 불교도 비판에 있지 불교 자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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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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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내 삶의 방식은 타인과 크게 다름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일입니다. 일할 때는 그것밖에 없는 듯 마치 세상 모두와 함께 하고, 쉴 때는 세상 만물이 없는 듯 쉽니다. 나는 보통 사람과 같지 않으니 낮에 일하는 바 없고 밤에 쉬는 바 없습니다. 일하는 바 없이 일하지만 일이 이뤄지고 쉬는 바 없이 쉬지만 참나에 깨어 있습니다. (晝而作, 夕而休者, 凡人也. 作乎作者與萬物皆作, 休乎休者與萬物皆休. 吾則不類於凡人. 晝無所作, 夕無所休. 作非吾作也. 作有物. 休非吾休也. 休有物.) 


일하는 것, 쉬는 것, 모두 마음에서 떠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집착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존재하는 참나의 작용은 마침내 잃어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습니다. (作耶休耶, 二者 離而不存. 予之所存者, 終不亡且離也.) 



제2절 사람은 짐승과 존재 의미가 다름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아 어리석고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이 한 종을 차지하지만 사람과 짐승이 서로 다른데 사람에게 어찌 도덕을 아는 참나가 없겠습니까? 한 기운을 받아 그 모습을 취하여 하나는 동물이 되고 하나는 사람이 되지만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人之不力於道者, 昏不思也. 天地之間, 萬物生焉. 人之於萬物, 一物也. 其所以異於禽獸蟲魚者, 豈非道德之性乎哉. 受一氣, 以成其形. 一爲物, 而一爲人. 得之甚難也.) 


세상에 나서 그 수명이 무한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오래지 않은 세월에 올바른 행을 닦기도 어렵습니다. 참 진리에 몸을 다 바치지 않고 마음을 함부로 내버려 둔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生乎世. 又非深長之年也. 以非深長之年. 行甚難得之. 身而不專, 專於大道. 肆其心之所爲, 則其所以自異於禽獸蟲魚者, 亡幾矣.) 



제3절 삶의 의미와 수덕 수양의 긴요성


어리석으면서도 생각이 없으니 그 어리석음이 끝내 밝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29살이 되어 19살 때를 생각하니 마치 아침 해가 뜰 때와 같고 9살 때를 생각하니 역시 아침 해가 새로 뜨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수명이 길다고 해야 70에서 90이며 백세를 살기가 어렵습니다. 백세를 맞아 9살 때를 생각할 때 과거에 대한 오늘의 생각이 멀고 가까움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또 보면 아침 해가 뜰 때에서 멀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昏而不思, 其昏也. 終不明矣. 吾之生二十有九年矣. 思十九年時, 如朝日也. 思九年時, 亦如朝日也. 人之受命, 其長者, 不過七十, 八十, 九十年. 百年者則稀矣. 當百年之時, 而視乎九年時也, 與吾此日之思於前也. 遠近其能大相縣耶. 其又能遠於朝日之時耶.) 


그러하니 사람이 태어나 백년을 누린다 하여도 번개가 치는 것과 같고 바람이 회오리쳐 부는 것과 같습니다. 수천 명이 있어도 백세에 이르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하루가 마치도록 진리와 수덕에 뜻을 두고 완성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놓고 허투루 하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然則人之生也, 雖享百年, 若雷電之驚相激也, 若風之飄而旋也, 可知耳矣. 況千百人而無一及百年者哉. 故吾之終日, 志於道德, 猶懼未及也. 彼肆其心之所爲者, 獨何人也.) <끝>


자습노트)

성인이 어린이와 같다면 일이 있으면 거기에 몰입하고 일이 없으면 일에서 완전히 떠난다고 합니다. 1절은 그와 같은 경지를 진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2절에서는 마음을 단단히 관리하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고 장수하는 일도 바랄 일이 아니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시간을 모두 도에 몰입하고 덕을 닦는 데 두지 않으면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유학에 입문했던 선비들은 모두 궁극의 진리를 말하는 도를 깨쳐 거기에 몰입하는 경을 실천하고(居敬) 쉬지 않고 덕을 닦음으로써 모두 성인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누구나 따라야 할 것임을 맹자 이후에 성인으로 여겨진 공자님과 공자께서 공공연히 모델로 삼으신 안회를 예로 들어 강조한 것이 복성서입니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체험을 예로 보여주며 수도에 집중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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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9 10:09 복성서

“감히 묻건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성인께서 모두 이미 책에 쓰셨습니다.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건대 ‘만물의 근원과 그 결말을 탐구하면 생사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정기의 모임이 피조물이 되고 정기의 흩어짐이 혼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혼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미 말씀이 전해집니다. (曰. 敢問. 死何所之耶. 曰. 聖人之所明書於策者也. 易曰.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精氣爲物, 游魂爲變. 是故, 知鬼神之情狀. 斯盡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직 삶이 어떠한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후에 대해 알 수 있는가?’ 하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과 그 결말을 돌아보면 생명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생명에 관한 진리를 모두 알면 사후의 일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됩니다. 다만 그것이 시급한 일이 아니니 쉬지 않고 수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나는 여기에 일일이 쓰지 않을 것입니다.” (子曰 未知生, 焉知死. 然則原其始而反其終, 則可以盡其生之道, 生之道旣盡 則死之說, 不學而自通矣. 此非所急也. 子修之不息, 其自知之, 吾不可以章章然言且書矣.)


자습노트)

사후의 일에 대해서는 유가의 노선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논쟁을 벌일 필요 없이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으로 들으면 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논어 인용에서 추론컨대 70세에 도달하는 '바라는 대로 해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欲不踰矩)'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게 되므로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 블로그가 내걸고 있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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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7 05:47 복성서

“사람의 참나가 모두 선한데 에고의 어긋남으로 어두워지는 것이라니 감히 묻습니다. 성인의 참나는 더 이상 에고의 욕심으로 흐려지지 않습니까?” “다시 흐려지지 않습니다. 에고는 본래 어긋나 있고 허망합니다. 어긋나고 허망한 것에 원래 근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도리가 없으나 성인은 이미 참나를 찾았습니다. 에고의 행태가 어긋난 것임을 알고 그 어긋남을 깨달은 바가 뚜렷합니다. 깨달아 어긋남이 없으니 어디서 어긋남이 나오겠습니까? (問曰 人之性本皆善, 而邪情昏焉. 敢問. 聖人之性, 將復爲嗜欲所渾乎. 曰. 不復渾矣. 情本邪也, 妄也. 邪妄無因, 人不能復, 聖人旣復其性矣, 知情之爲邪, 邪旣爲明所覺矣. 覺則無邪, 邪何由生也.)


이윤이 말했습니다. ‘하늘의 진리란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 앎으로써 자신이 깨달은 후에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 가운데 조금 먼저 깨달았으니 이 진리로써 사람들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나 말고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만약 다시 에고의 어리석은 욕심에 빠진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겠습니까?” (伊尹曰. 天之道, 以先知覺後知, 先覺覺後覺者也. 予天民之先覺者 予將以此道, 覺此民也, 非予覺之而誰也. 如將復爲嗜欲所渾, 是尙不自覺者也, 而況能覺後人乎.)


자습노트)

이윤(李尹)은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탕왕이 삼고초려하여 등용한 후 걸왕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요순과 더불어 할 수 있다고 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깨달음이란 선각자이자 성인인 사람들을 통하여 전해지며 한번 깨달은 사람은 다시 후퇴하여 에고 상태로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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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4 10:41 복성서

“사람의 참나가 성인의 참나와 같다면 보통 사람의 애욕과 분노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에고는 허망하고 빗나간 것입니다. 허망하고 빗나간 것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망한 에고가 없어지면 참나가 회복되어 밝아집니다. 그것이 온통 꽉 차게 되면 참나가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問曰. 人之性, 猶聖人之性, 嗜欲愛憎之心, 何因而生也. 曰. 情者, 妄也, 邪也, 邪與妄則無所因矣. 妄情滅息, 本性淸明, 周流六虛, 所以謂之能復其性也.) 


주역[乾卦 彖辭]에 이르기를 ‘도가 굳세게 운행되면 만물의 본성과 생명이 가장 바람직하게 됩니다.’ 논어에 가라사대 ‘아침에 궁극의 진리에 통하면 저녁에 죽어도 안심이다’ 하였으니 만물의 본성과 생명이 바람직하게 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易曰. 乾道變化, 各正性命. 論語曰. 朝聞道, 夕死可矣. 能正性命故也.)


“에고가 어두우면 참나는 이미 없어진 터인데 어째서 성인의 참나와 같다고 합니까?”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데 그 흐린 것은 모래와 진흙 탓입니다. 물이 흐려졌다고 물의 성질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흐려진지 오래면 움직이지 않아야 모래와 진흙이 절로 가라앉아 맑은 본성이 드러나 천지를 채울 것이니 그 맑음이 밖에서 더해진 것이 아닙니다. (問曰. 情之所昏, 性卽滅矣, 何以謂之, 猶聖人之性也. 曰. 水之性淸澈, 其渾之者, 沙泥也. 方其渾也, 性豈遂無有. 邪久而不動, 沙泥自沈, 淸明之性, 鑒於天地, 非自外來也.) 


그러니 물이 잠시 흐려졌다고 해서 그 본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잠시 모습을 감춘 것입니다. 참나를 회복했다는 것은 참나가 없어졌다가 다시 나오는 게 아니니 사람의 참나도 물처럼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故其渾也. 性本不失, 及其復也, 性亦不生, 人之性亦猶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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