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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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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3 12:12 복성서

제1절 내 삶의 방식은 타인과 크게 다름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일입니다. 일할 때는 그것밖에 없는 듯 마치 세상 모두와 함께 하고, 쉴 때는 세상 만물이 없는 듯 쉽니다. 나는 보통 사람과 같지 않으니 낮에 일하는 바 없고 밤에 쉬는 바 없습니다. 일하는 바 없이 일하지만 일이 이뤄지고 쉬는 바 없이 쉬지만 참나에 깨어 있습니다. (晝而作, 夕而休者, 凡人也. 作乎作者與萬物皆作, 休乎休者與萬物皆休. 吾則不類於凡人. 晝無所作, 夕無所休. 作非吾作也. 作有物. 休非吾休也. 休有物.) 


일하는 것, 쉬는 것, 모두 마음에서 떠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집착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존재하는 참나의 작용은 마침내 잃어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습니다. (作耶休耶, 二者 離而不存. 予之所存者, 終不亡且離也.) 



제2절 사람은 짐승과 존재 의미가 다름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아 어리석고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이 한 종을 차지하지만 사람과 짐승이 서로 다른데 사람에게 어찌 도덕을 아는 참나가 없겠습니까? 한 기운을 받아 그 모습을 취하여 하나는 동물이 되고 하나는 사람이 되지만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人之不力於道者, 昏不思也. 天地之間, 萬物生焉. 人之於萬物, 一物也. 其所以異於禽獸蟲魚者, 豈非道德之性乎哉. 受一氣, 以成其形. 一爲物, 而一爲人. 得之甚難也.) 


세상에 나서 그 수명이 무한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오래지 않은 세월에 올바른 행을 닦기도 어렵습니다. 참 진리에 몸을 다 바치지 않고 마음을 함부로 내버려 둔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生乎世. 又非深長之年也. 以非深長之年. 行甚難得之. 身而不專, 專於大道. 肆其心之所爲, 則其所以自異於禽獸蟲魚者, 亡幾矣.) 



제3절 삶의 의미와 수덕 수양의 긴요성


어리석으면서도 생각이 없으니 그 어리석음이 끝내 밝아지지 않습니다. 내가 29살이 되어 19살 때를 생각하니 마치 아침 해가 뜰 때와 같고 9살 때를 생각하니 역시 아침 해가 새로 뜨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수명이 길다고 해야 70에서 90이며 백세를 살기가 어렵습니다. 백세를 맞아 9살 때를 생각할 때 과거에 대한 오늘의 생각이 멀고 가까움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또 보면 아침 해가 뜰 때에서 멀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昏而不思, 其昏也. 終不明矣. 吾之生二十有九年矣. 思十九年時, 如朝日也. 思九年時, 亦如朝日也. 人之受命, 其長者, 不過七十, 八十, 九十年. 百年者則稀矣. 當百年之時, 而視乎九年時也, 與吾此日之思於前也. 遠近其能大相縣耶. 其又能遠於朝日之時耶.) 


그러하니 사람이 태어나 백년을 누린다 하여도 번개가 치는 것과 같고 바람이 회오리쳐 부는 것과 같습니다. 수천 명이 있어도 백세에 이르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하루가 마치도록 진리와 수덕에 뜻을 두고 완성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놓고 허투루 하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然則人之生也, 雖享百年, 若雷電之驚相激也, 若風之飄而旋也, 可知耳矣. 況千百人而無一及百年者哉. 故吾之終日, 志於道德, 猶懼未及也. 彼肆其心之所爲者, 獨何人也.) <끝>


자습노트)

성인이 어린이와 같다면 일이 있으면 거기에 몰입하고 일이 없으면 일에서 완전히 떠난다고 합니다. 1절은 그와 같은 경지를 진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2절에서는 마음을 단단히 관리하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고 장수하는 일도 바랄 일이 아니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시간을 모두 도에 몰입하고 덕을 닦는 데 두지 않으면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유학에 입문했던 선비들은 모두 궁극의 진리를 말하는 도를 깨쳐 거기에 몰입하는 경을 실천하고(居敬) 쉬지 않고 덕을 닦음으로써 모두 성인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누구나 따라야 할 것임을 맹자 이후에 성인으로 여겨진 공자님과 공자께서 공공연히 모델로 삼으신 안회를 예로 들어 강조한 것이 복성서입니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체험을 예로 보여주며 수도에 집중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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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9 10:09 복성서

“감히 묻건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성인께서 모두 이미 책에 쓰셨습니다.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건대 ‘만물의 근원과 그 결말을 탐구하면 생사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정기의 모임이 피조물이 되고 정기의 흩어짐이 혼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혼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미 말씀이 전해집니다. (曰. 敢問. 死何所之耶. 曰. 聖人之所明書於策者也. 易曰.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精氣爲物, 游魂爲變. 是故, 知鬼神之情狀. 斯盡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직 삶이 어떠한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후에 대해 알 수 있는가?’ 하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과 그 결말을 돌아보면 생명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생명에 관한 진리를 모두 알면 사후의 일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됩니다. 다만 그것이 시급한 일이 아니니 쉬지 않고 수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나는 여기에 일일이 쓰지 않을 것입니다.” (子曰 未知生, 焉知死. 然則原其始而反其終, 則可以盡其生之道, 生之道旣盡 則死之說, 不學而自通矣. 此非所急也. 子修之不息, 其自知之, 吾不可以章章然言且書矣.)


자습노트)

사후의 일에 대해서는 유가의 노선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논쟁을 벌일 필요 없이 수행을 통해 증득하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으로 들으면 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논어 인용에서 추론컨대 70세에 도달하는 '바라는 대로 해도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欲不踰矩)'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게 되므로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 블로그가 내걸고 있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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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7 05:47 복성서

“사람의 참나가 모두 선한데 에고의 어긋남으로 어두워지는 것이라니 감히 묻습니다. 성인의 참나는 더 이상 에고의 욕심으로 흐려지지 않습니까?” “다시 흐려지지 않습니다. 에고는 본래 어긋나 있고 허망합니다. 어긋나고 허망한 것에 원래 근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도리가 없으나 성인은 이미 참나를 찾았습니다. 에고의 행태가 어긋난 것임을 알고 그 어긋남을 깨달은 바가 뚜렷합니다. 깨달아 어긋남이 없으니 어디서 어긋남이 나오겠습니까? (問曰 人之性本皆善, 而邪情昏焉. 敢問. 聖人之性, 將復爲嗜欲所渾乎. 曰. 不復渾矣. 情本邪也, 妄也. 邪妄無因, 人不能復, 聖人旣復其性矣, 知情之爲邪, 邪旣爲明所覺矣. 覺則無邪, 邪何由生也.)


이윤이 말했습니다. ‘하늘의 진리란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 앎으로써 자신이 깨달은 후에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 가운데 조금 먼저 깨달았으니 이 진리로써 사람들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나 말고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만약 다시 에고의 어리석은 욕심에 빠진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겠습니까?” (伊尹曰. 天之道, 以先知覺後知, 先覺覺後覺者也. 予天民之先覺者 予將以此道, 覺此民也, 非予覺之而誰也. 如將復爲嗜欲所渾, 是尙不自覺者也, 而況能覺後人乎.)


자습노트)

이윤(李尹)은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탕왕이 삼고초려하여 등용한 후 걸왕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요순과 더불어 할 수 있다고 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깨달음이란 선각자이자 성인인 사람들을 통하여 전해지며 한번 깨달은 사람은 다시 후퇴하여 에고 상태로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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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참나가 성인의 참나와 같다면 보통 사람의 애욕과 분노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에고는 허망하고 빗나간 것입니다. 허망하고 빗나간 것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망한 에고가 없어지면 참나가 회복되어 밝아집니다. 그것이 온통 꽉 차게 되면 참나가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問曰. 人之性, 猶聖人之性, 嗜欲愛憎之心, 何因而生也. 曰. 情者, 妄也, 邪也, 邪與妄則無所因矣. 妄情滅息, 本性淸明, 周流六虛, 所以謂之能復其性也.) 


주역[乾卦 彖辭]에 이르기를 ‘도가 굳세게 운행되면 만물의 본성과 생명이 가장 바람직하게 됩니다.’ 논어에 가라사대 ‘아침에 궁극의 진리에 통하면 저녁에 죽어도 안심이다’ 하였으니 만물의 본성과 생명이 바람직하게 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易曰. 乾道變化, 各正性命. 論語曰. 朝聞道, 夕死可矣. 能正性命故也.)


“에고가 어두우면 참나는 이미 없어진 터인데 어째서 성인의 참나와 같다고 합니까?”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데 그 흐린 것은 모래와 진흙 탓입니다. 물이 흐려졌다고 물의 성질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흐려진지 오래면 움직이지 않아야 모래와 진흙이 절로 가라앉아 맑은 본성이 드러나 천지를 채울 것이니 그 맑음이 밖에서 더해진 것이 아닙니다. (問曰. 情之所昏, 性卽滅矣, 何以謂之, 猶聖人之性也. 曰. 水之性淸澈, 其渾之者, 沙泥也. 方其渾也, 性豈遂無有. 邪久而不動, 沙泥自沈, 淸明之性, 鑒於天地, 非自外來也.) 


그러니 물이 잠시 흐려졌다고 해서 그 본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잠시 모습을 감춘 것입니다. 참나를 회복했다는 것은 참나가 없어졌다가 다시 나오는 게 아니니 사람의 참나도 물처럼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故其渾也. 性本不失, 及其復也, 性亦不生, 人之性亦猶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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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에고, 참나
2016.04.12 10:09 복성서

“범인의 참나와 성인의 참나가 같습니까?” “걸왕 주왕의 참나는 요순의 참나와 같습니다. 그들이 참나를 보지 못한 이유는 욕망과 악을 좋아하여 어두워진 때문이지 참나의 탓이 아닙니다.” “악을 하는 것은 참나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에고의 작용입니다. 에고에는 선악이 있지만 참나에는 악이 없습니다. (問曰. 凡人之性, 猶聖人之性. 故曰. 桀紂之性, 猶堯舜之性也. 其所以不覩其性者, 嗜欲好惡之所昏也, 非性之罪也. 曰. 爲不善者, 非性也. 曰. 非也. 乃情所爲也. 情有善有不善, 而性無不善焉.) 


맹자[告子上]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은 낮은 데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 없다. 만약 물을 쳐서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 높이를 넘어가게 할 수 있고 물결을 막아서 거슬러 올라가게 하면 산 위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 때문이겠는가?’ 억지로 끌어들이는 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나는 모두 선하므로 그 악한 것은 모두 물의 예와 같습니다.” (孟子曰.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夫水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 其所以導引之者然也. 人之性 皆善, 其不善亦猶是也.)


“요순에게 어찌 에고가 없습니까?” “성인은 지극히 온전합니다. 요순은 16명의 재상을 천거해서 썼지만 사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공공과 환도를 유배 보내고 우임금의 부친인 곤을 처형하고 삼묘를 토벌했지만 개인적 감정으로 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절도에 맞았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 모범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問曰. 堯舜豈不有情耶. 曰. 聖人至誠而已矣. 堯舜之擧十六相, 非喜矣. 流共工, 放驩兜, 殛鯀, 竄三苗, 非怒也. 中於節而已矣. 其所以皆中節, 設敎于天下故也.) 


주역에 말하길 ‘변화하는 도리를 안다는 것은 신명의 작용과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중용에 말하길 ‘희로애락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중이라 하고 드러나면 모두가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합니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며 화는 천하의 끝까지 통하는 원칙입니다. 중화가 이뤄지면 천지가 모두 제 자리를 찾고 만물이 생장합니다. (易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中庸曰.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下位焉, 萬物育焉.)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길 ’덕행이 깊으니 천하만물의 마음에 통하고 날카로운 예지로써 지극히 어려운 일을 이루고 수양이 신령한 데 이르러 재주가 둔한 것 같지만 실제 움직임은 재빨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목표를 달성하고 있습니다. 이를 일러 성인의 경지라고 합니다.” (易曰. 唯深也. 故能通天下之志. 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 唯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 聖人之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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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4.08 17:27 복성서

옛날에 중용을 해석한 것과 선생님이 말한 것이 같지 않은데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상식과 드러난 바에 따라 해석했지만 나는 마음으로 깨치고 경전에 통한 뜻을 말합니다.” “그들도 마음으로 깨친 바가 아닙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루를 닦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까?” “10년 놀린 밭을 하루 갈았다고 싹이 나길 바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치 물 한잔으로 한 수레 땔나무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으니 커다란 망상입니다. 생각을 끊기를 쉬지 않으면 진실해지고, 진실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자명해지고, 진실투명하고 진리에 자명해지면 마침내 어긋나지 않으니 결국 도달할 것입니다. 급하여 구차한 때라도 놓치지 않고 넘어져 엎어질 때라도 놓치지 않으면 어느때 불현듯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問曰. 昔之註解中庸者 與生之言, 皆不同, 何也. 曰. 彼以事解者也, 我以心通者也. 曰. 彼亦通於心乎. 曰. 吾不知也. 曰. 如生之言, 修之一日, 則可以至於聖人乎. 曰. 十年擾之, 一日止之, 而求至焉, 是孟子所謂以杯水而救一車薪之火也. 甚哉, 止而不息必誠, 誠而不息必明, 明與誠終歲不違, 則能終身矣.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則可以希於至矣.) 


그래서 중용에 말하길 지극한 온전함에는 쉼이 없고 쉼이 없으면 오래 가고 오래 가니 효과가 나타나며 효과가 나타나니 끝이 없고 끝이 없으니 넓고 깊으며 넓고 깊으니 높고 밝습니다. 넓고 깊으니 만물이 담기고 높고 밝으니 만물을 덮고 끝이 없으니 만사가 이뤄집니다. 넓고 깊음은 땅에 어울리고 높고 밝음은 하늘에 어울리며 끝이 없음은 말 그대로 영원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나타내려 하지 않아도 절로 나타나며 움직이지 않아도 변화하며 행하지 않아도 이뤄지니 지극한 진리는 이렇게 한마디로 할 수 있습니다.“ (故中庸曰. 至誠, 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博厚, 配地, 高明, 配天, 悠久, 無疆.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之也.)


자습노트)

중용 26장의 해석입니다. 안회의 예에서도 거론되었지만 깨어 있음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않도록 쉬지 않고 닦을 때 어느때 일순간 깨치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자의 해석에 지극한 온전함(至誠)은 헛되고 거짓됨이 없음(無虛假)이라 하고 있어서 제가 취한 바 성(誠)의 번역을 온전함(integrity)으로 한 것에 부합합니다. 지극한 온전함은 일이 닥치기(格物) 전에 생각이 끊어진 자리(탄허스님은 이것이 中이라 하십니다.)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끊어짐이 없습니다(自無間斷). 


당연히 거기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일이 생기면 진리에 맞게 처리하고 다시 그 상태로 사는 것, 이것이 경(敬)의 실천이라고 봅니다. 남명 선생이 경의 실천을 위해 항상 깨어 있고자 방울을 달고 사신 뜻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참나로 깨어 있기 위해 조선 선비들은 기본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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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5 06:17 복성서

"청하건대 중용을 해설해 주십시오." "앞에서 대략 말했지 않습니까?" "아직 명료하지 않습니다. 감히 여쭙건대 하늘의 뜻이 참나라 하는 게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날 때 아이와 같이 고요한 품성이 참나입니다. 참나란 하늘의 뜻입니다." "참나를 따르는 게 도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따른다는 것은 순명한다는 것입니다. 근원을 따르고 참나로 돌아가는 것이 도입니다. 도란 참되고 온전한 것이며 온전한 그대로가 하늘의 도입니다. 온전함이란 고요하여 시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曰. 生爲我說中庸. 曰. 不出乎前矣. 曰. 我未明也. 敢問. 何謂天命之謂性. 曰. 人生而靜天之性也, 性者天之命也. 率性之謂道何謂也. 曰. 率, 循也, 循其源而反其性者, 道也. 道也者至誠也, 至誠者天之道也. 誠者, 定也, 不動也.)


"도를 닦는 게 가르침을 펴는 것이란 무슨 뜻입니까?"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이며,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고요한 가운데 자명한 것을 택하여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를 닦아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게 밝음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이렇게 얻은 도를 세상에 펴는 것입니다. 안회가 그 모범입니다. 도란 떠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닙니다." (修道之謂敎何謂也. 曰. 誠之者人之道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修是道而歸其本者明也. 敎也者 則可以敎天下矣, 顔子其人也.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說者曰.) 


"또 그 마음이 잠시라도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움직이면 멀어지므로 도가 아닙니다. 한없이 변하는 것은 애초에 시끄러운 데서 떠나지 않은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지 못하는 것을 삼가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숨은 것보다 잘 보이는 게 없고 하찮은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삼가하고 조심하는 것입니다. (其心不可須臾動焉故也. 動則遠矣, 非道也. 變化無方, 未始離於不動故也. 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밝게 드러나는 것이고 듣지 못하는 말이 가장 넓게 퍼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번 움직이는 것이 바로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니 참나로 돌아가는 일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삼가하며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說者曰. 不覩之覩, 見莫大焉, 不聞之聞, 聞莫大焉. 其心一動, 是不覩之覩, 不聞之聞也, 其復之也, 遠矣. 故君子愼其獨, 愼其獨者守其中也.)


자습노트)

중용 삼강령인 참나(性), 도리(道), 가르침(敎)에 대한 해설입니다. 핵심 비결인 온전하고 진실함(誠)을 지키는 게 도를 닦는 것이며 온전하고 진실한 상태는 아이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고 그 닦음의 모범은 안회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마음에 일어나는 게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이며 정일(精一)인데 그래서 명상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민족의 책상다리는 바로 이러한 전통에서 기원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컨대 언제나 참나에 깨어 있는 주일무적 상태에 있다가 일이 생기면 자명한 원리에 따라 처리하고 다시 무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닦음의 요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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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1 마음 다스리는 방법 - 고요히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참나가 비춤  (0) 2016.03.28
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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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1 20:24 복성서

이르기를 감히 묻습니다. 참된 앎에 이르려면 먼저 사물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여 답합니다. “사물은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무슨 일이든 닥쳐올 때 마음을 맑게 하고 자명하게 판단하여 그 변하는 것을르지 않는 것을 참된 앎이라 하며 투철하게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曰. 敢問. 致知在格物, 何謂也. 曰. 物者, 萬物也, 格者, 來也, 至也. 物至之時, 其心昭昭然明辨焉, 而不應於物者, 是致知也,)


앎이 투철해진 때문에 의식이 온전하며 의식이 온전한 때문에 마음이 바르고, 마음이 바른 때문에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때문에 집안이 가지런해지며, 집안이 가지런해지기 때문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때문에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비로소 창조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는 성인의 경지입니다. (是知之至也. 知至故意誠, 意誠故心正, 心正故身修, 身修而家齊, 家齊而國理, 國理而天下平. 此所以能參天地者也.)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기를 성인의 행실이 우주의 도리에 맞기 때문에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지혜가 만물에 두루 미쳐 진리로써 구제하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빗나가 흐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즐거이 따르기 때문에 근심이 없습니다. 본분을 지키고 어짊이 두터우니 능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易曰. 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세상을 기르고 지탱하면서 실수가 없고 빈틈이 없습니다. 음양운행의 이치를 분명히 알아 모르는 바가 없어 성인은 그 변화를 헤아리기 어렵고 일정한 모습도 없습니다. 한 번의 양과 한 번의 음이 합쳐서 도를 이룬다는 것은 이것을 말합니다.'“ (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遺, 通乎晝夜之道而知. 故神無方而易無體. 一陰一陽之謂道, 此之謂也.)



자습노트)

세상의 경영, 자비의 실천이 모두 의식의 온전함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때 비로소 사물이 변하는 대로 또 세상이 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세상을 경영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맑고 투명하여 언제나 하늘의 뜻에 순명한다면 하늘의 권능에 참여하는 성인의 경지에 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태극과 무극에 음과 양의 창조 추동력이 이미 내재하고 있으니 거기에 맞추는 것이 창조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에고를 잠재운 상태에서 하늘의 뜻을 분명히 인식하고 다시 에고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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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3.30 20:40 복성서

묻습니다. "아예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를 모른다면 소리가 나도 들리지 않고 사물이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답합니다.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면 어찌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똑똑히 보고 듣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에 휘둘려서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참나를 실현한 후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게 없고 하지 못하는 게 없으며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지혜의 빛으로 모든 것을 꿰뚫으니 그것은 의식이 맑고 투명한 때문입니다. (問曰. 本無有思, 動靜皆離, 然則聲之來也, 其不聞乎, 物之形也, 其不見乎. 曰. 不覩不聞, 是非人也. 視聽昭昭而不起於見聞者, 斯可矣. 無不知也, 無不爲也, 其心寂然, 光照天地, 是誠之明也.)


대학에 가라사대 "참된 앎에 이르려면 모름지기 먼저 사물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경(系辭上傳)에 가라사대 "주역의 정신은 생각도 걱정도 없어야 하고, 일부러 행함도 없어야 하니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일과 사물을 느껴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경지의 성인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이르겠는가?"라 하였습니다. (大學曰. 致知在格物. 易曰. 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자습노트)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서는 의식의 작용이 오히려 맑고 분명해지며 또한 에고의 욕심에서 나오는 사언행위가 없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사물에 대한 판단과 선택이 더욱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습관이 들면 무소부지, 전지전능의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모든 영성 수련 및 그와 유사한 수행이 지향하는 바가 이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꾸준히 닦을 때 우리는 점점 더 밝아지고 언젠가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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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3.28 12:07 복성서

"근심도 생각도 없을 때 사물은 밖으로 향하고 감정은 안에서 작용하니 어떻게 그것을 제지합니까? 한가지 감정으로 다른 감정을 제어하는 게 가능합니까?" "에고란 참나의 치우친 작용이니 먼저 에고의 속성이 치우침에 있고 치우침이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그릇된 생각이 저절로 그칩니다. 오직 참나가 밝게 비추면 치우침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에고로써 에고를 그치게 하려는 것은 에고를 더 굳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問曰. 不慮不思之時, 物格於外, 情應於內, 如之何而可止也. 以情止情其可乎. 曰. 情者, 性之邪也. 知其爲邪, 邪本無有, 心寂不動, 邪思自息, 惟性明照, 邪何所生. 如以情止情, 是乃大情也. )


일곱가지 감정이 서로 돌아가며 작용한다면 어떻게 그칠 수 있겠습니까? 주역(系辭下傳)에 말하길 '안회의 덕행이 거의 성인의 경지였다. 아직 모르는 자신의 결함이 있으면 그것을 알아내어 다시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또 말하길(系辭下傳)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멀리 가는 법이 없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 고치니 매우 훌륭하다.'" (情互相止, 其有已乎. 易曰. 顔氏之子,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不行也. 易曰. 不遠復, 無祗悔元吉.)


자습노트)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은 에고로 에고를 다스리려 하면 에고가 더 굳어진다(如以情止情 是乃大情也)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킨스 박사도 에고를 이해하고 자비롭게 대함으로써만 없어진다고 합니다. 안회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도 에고의 작용을 안 다음에는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며, 선지식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수행이란 개과천선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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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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