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되기

14장 4

목운 2014. 12. 17. 10:51

나는 전처 및 그녀의 남편과의 이 사건에 대한 제드의 영적 자기분해를 돌렸을 때 많은 두려움도 발견했습니다. 요점은 내가 더 이상 그들과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 그녀의 드라마에 개입되는 데 흥미가 없어졌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정부 집중에 대한 음모론을 얘기하는 것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 등입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참았던 유일한 이유는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도 그들에게 보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녀와 그녀 남편을 떠나보내는 걸 두려워 했습니다. 내 여생 동안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데다가 끝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갑자기 끝내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나는 친척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두려웠습니다. 내가 어느날 "있지요, 나는 당신들이 내게 베푼 모든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답할 길이 없고 이제 보답하려 하지 않겠어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배은망덕하게 보이겠습니까?
내 자식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만일 그들이 전처에 대한 내 행동을 반대한다면 그들의 아버지로서 내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또 그렇게 바랬던, 막 되찾은 어머니와 형제의 사랑을 잃는 것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의 꺼풀들이 내 어린시절 동안 품었던 결손가정 기간 동안 나를 구성했던 것들입니다.
마침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전처를 영화관에서 꺼내어 고치 속으로 넣을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는 것(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주려 했던 "선물"이었습니다)도 하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보살펴서 드라마에서 구출해서 갈등과 고통을 면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내 에고가 자기 존재를 유지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려는 책략이었습니다.
집착을 끊는 일이 항상 우리가 바라지 않고 싫어하는 것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라고 좋아하는 것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했고 내가 잘못 생각했던 내 에고의 꺼풀(코치, 친구, 아버지,형제, 아들 등)을 만들고 있던 두려움도 놓아버려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내가 연기했던 역할들이었는데 그중 아무것도 참된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 삶에서 했던 모든 판단이 나를 그 체험에 집착케 했고 내 에고의 꺼풀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판단의 결과 내가 했던 모든 믿음은 거짓이었고 내 에고를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그 거짓 믿음에 기초한 모든 의견은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잘못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한한 나'는 우리가 고치 속에 있는 동안 그런 체험을 다시 하고 다시 살아볼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즉 그런 판단 믿음 의견을 놓아버리고 두려움을 직면하고 우리 에고를 형성하고 있는 집착을 부셔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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