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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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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참나'에 해당되는 글 12

  1. 2016.04.14 4절-2
  2. 2016.04.12 4절-1 참나와 에고의 작용과 관계를 재론함
  3. 2016.02.26 복성서와 탄허록
  4. 2016.02.09 수행의 목표와 에고 소멸
  5. 2016.01.14 함허스님의 참나
  6. 2016.01.13 2절-2
  7. 2016.01.05 2절-1 : 성인의 길
  8. 2015.12.28 1절-3
  9. 2015.12.15 명상에 대하여
  10. 2015.08.30 종(또는 종복)과 대리인
2016.04.14 10:41 복성서

“사람의 참나가 성인의 참나와 같다면 보통 사람의 애욕과 분노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에고는 허망하고 빗나간 것입니다. 허망하고 빗나간 것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망한 에고가 없어지면 참나가 회복되어 밝아집니다. 그것이 온통 꽉 차게 되면 참나가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問曰. 人之性, 猶聖人之性, 嗜欲愛憎之心, 何因而生也. 曰. 情者, 妄也, 邪也, 邪與妄則無所因矣. 妄情滅息, 本性淸明, 周流六虛, 所以謂之能復其性也.) 


주역[乾卦 彖辭]에 이르기를 ‘도가 굳세게 운행되면 만물의 본성과 생명이 가장 바람직하게 됩니다.’ 논어에 가라사대 ‘아침에 궁극의 진리에 통하면 저녁에 죽어도 안심이다’ 하였으니 만물의 본성과 생명이 바람직하게 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易曰. 乾道變化, 各正性命. 論語曰. 朝聞道, 夕死可矣. 能正性命故也.)


“에고가 어두우면 참나는 이미 없어진 터인데 어째서 성인의 참나와 같다고 합니까?”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데 그 흐린 것은 모래와 진흙 탓입니다. 물이 흐려졌다고 물의 성질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흐려진지 오래면 움직이지 않아야 모래와 진흙이 절로 가라앉아 맑은 본성이 드러나 천지를 채울 것이니 그 맑음이 밖에서 더해진 것이 아닙니다. (問曰. 情之所昏, 性卽滅矣, 何以謂之, 猶聖人之性也. 曰. 水之性淸澈, 其渾之者, 沙泥也. 方其渾也, 性豈遂無有. 邪久而不動, 沙泥自沈, 淸明之性, 鑒於天地, 非自外來也.) 


그러니 물이 잠시 흐려졌다고 해서 그 본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잠시 모습을 감춘 것입니다. 참나를 회복했다는 것은 참나가 없어졌다가 다시 나오는 게 아니니 사람의 참나도 물처럼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故其渾也. 性本不失, 及其復也, 性亦不生, 人之性亦猶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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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TAG 에고, 참나
2016.04.12 10:09 복성서

“범인의 참나와 성인의 참나가 같습니까?” “걸왕 주왕의 참나는 요순의 참나와 같습니다. 그들이 참나를 보지 못한 이유는 욕망과 악을 좋아하여 어두워진 때문이지 참나의 탓이 아닙니다.” “악을 하는 것은 참나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에고의 작용입니다. 에고에는 선악이 있지만 참나에는 악이 없습니다. (問曰. 凡人之性, 猶聖人之性. 故曰. 桀紂之性, 猶堯舜之性也. 其所以不覩其性者, 嗜欲好惡之所昏也, 非性之罪也. 曰. 爲不善者, 非性也. 曰. 非也. 乃情所爲也. 情有善有不善, 而性無不善焉.) 


맹자[告子上]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은 낮은 데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 없다. 만약 물을 쳐서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 높이를 넘어가게 할 수 있고 물결을 막아서 거슬러 올라가게 하면 산 위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 때문이겠는가?’ 억지로 끌어들이는 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나는 모두 선하므로 그 악한 것은 모두 물의 예와 같습니다.” (孟子曰.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夫水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 其所以導引之者然也. 人之性 皆善, 其不善亦猶是也.)


“요순에게 어찌 에고가 없습니까?” “성인은 지극히 온전합니다. 요순은 16명의 재상을 천거해서 썼지만 사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공공과 환도를 유배 보내고 우임금의 부친인 곤을 처형하고 삼묘를 토벌했지만 개인적 감정으로 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절도에 맞았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 모범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問曰. 堯舜豈不有情耶. 曰. 聖人至誠而已矣. 堯舜之擧十六相, 非喜矣. 流共工, 放驩兜, 殛鯀, 竄三苗, 非怒也. 中於節而已矣. 其所以皆中節, 設敎于天下故也.) 


주역에 말하길 ‘변화하는 도리를 안다는 것은 신명의 작용과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중용에 말하길 ‘희로애락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중이라 하고 드러나면 모두가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합니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며 화는 천하의 끝까지 통하는 원칙입니다. 중화가 이뤄지면 천지가 모두 제 자리를 찾고 만물이 생장합니다. (易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中庸曰.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下位焉, 萬物育焉.) 


주역[系辭上傳]에 이르길 ’덕행이 깊으니 천하만물의 마음에 통하고 날카로운 예지로써 지극히 어려운 일을 이루고 수양이 신령한 데 이르러 재주가 둔한 것 같지만 실제 움직임은 재빨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목표를 달성하고 있습니다. 이를 일러 성인의 경지라고 합니다.” (易曰. 唯深也. 故能通天下之志. 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 唯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 聖人之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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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2.26 14:54 단상

제가 복성서와 탄허록에 집중하는 이유는 복성서를 지은 이고는 불교로 깨달음을 얻고 유교를 재해석하여 유교와 불교가 다름이 없음을 말하였고 탄허스님은 유학에 먼저 입문하셨다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어 유교와 불교가 같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탄허스님은 여말선초를 사신 함허스님과 같은 행로를 가셨는데 어쨌든 사실상 복성서와 탄허록은 똑같은 수행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탄허스님을 인용하면 '성(性)이란 칠정이 일어나기 전의 면목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로서 불교의 4덕,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유교의 인의예지와 같다(탄허록 181쪽)'고 하십니다. 또 그 자리는 선악이나 시비분별이 없어서 대학의 지선(至善)과 같다고 하십니다. 또 덧붙이시기를 불교에서는 허령불매한 자리라고 하시는데 지눌스님의 공적영지와 같다고 봅니다.

성의 자리를 유교에서는 중이라고도 하며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이고 따라서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말하며 천하의 근본 또는 우주의 핵심체입니다(탄허록 187쪽). '서경'은 도심(道心, 人心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참나에 해당)이 미약하므로 오직 도심에 집중(惟精惟一 允執厥中)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언제나 참나를 의식하며 에고를 부려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요컨대 두 종교에 공통하는 바는 명상을 통하여 생각이 끊어진 참나 자리에서 세상 일을 경영하고 향유하자는 것입니다. 즉 안회는 심재(心齋)를 통해 무아를 깨치고 좌망(坐忘)을 통해 이원성을 초극하여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대목은 '장자'에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유교가 불교는 물론 도교와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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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2.09 10:18 단상
따져보고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따위가 없이 바로 나오는 것이 '무조건적 사랑'(불교의 무주상 보시)에 딱딱 맞을 때가 참나(性)에서 나오는 행동이며 맹자께서 물에 빠지는 아이를 구하는 예에서 거론하신 측은지심의 행이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법률 기타 두려움, 책임감 등등에서 나오는 행은 모두 에고에서 나오는 행이라 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 대부분의 조직 기타 일들이, 명분은 고귀한 성(性)을 내세우더라도 인간 의식 내지 에고(情)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혜능을 위시한 선사들이 행을 검증하는 수단은 일말의 주저없이 나오는 행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수행이란 오직 에고의 완전한 소멸이 골인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 의식(참나, 신성, 性)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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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1.14 07:15 단상
여말 선초를 사신 함허스님은 유불선이 하나임을 주장한 '현정론'을 지으셨습니다. 위키백과가 인용한 다음 말이 바로 제가 천착하는 복성서 및 호킨스 박사의 핵심 메시지와 같습니다. 제가 하던 대로 성을 참나로, 정을 에고로 바꿨습니다.

"불교인의 목표는 사람으로 하여금 에고를 버리고 참나를 빛나게 할 뿐이니 에고가 참나에서 나온 것은 마치 구름이 하늘(長空)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고 에고를 버리고 참나를 빛냄은 마치 구름이 걷혀 청명한 하늘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참나의 빛남은 다른 말로 깨달음이고 '그리스도의 편지'는 이 깨달음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고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참고로 함허스님은 성균관 출신으로 시대를 거슬러 불교로 입문하셨고 '금강경오가해'를 지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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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1.13 11:47 복성서

주역(乾卦 文言傳)에 이르기를 "무릇 성인은 그 덕이 천지에 부합하고, 그 밝음이 해와 달과 같으며, 그 질서는 사계가 바뀌듯 하고 길흉의 징조를 통찰하는 데는 신령과 같으니 하늘보다 앞서 가도 하늘에 어긋남이 없고 하늘을 뒤따르면 그 뜻을 받드니 어떤 사람이나 신령이 그의 뜻을 어길 수 있으랴? 그 모두가 몸 밖에서 얻는 게 아니고 참나가 모두 드러나 발휘된 것일 뿐입니다." (易曰, 夫聖人者, 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已矣.)


자사가 말하길 "오직 하늘과 땅에 숨김이 없을 때 그 참나가 모두 발현하는 것이니 참나가 모두 발현하면 다른 이의 참나가 발현할 것이고 다른 이의 참나가 발현하면 사물의 본성이 발휘되고 사물의 본성이 발휘되면 세상의 생존을 돕는 것입니다. 세상의 생존을 도움으로써 천지와 창조 작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子思曰,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 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


그 다음에 빈틈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빈틈없이 드러내면 사사로움이 없게 됩니다. 사사로움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니 투명하고 투명하니 통하게 되고 그 결과 변화가 이뤄집니다. 그러니 빈틈없이 드러내고 사사로움이 없어야만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자습노트)

주역과 중용에서 묘사한 성인에 대한 해설입니다. 저는 호킨스 박사의 가르침에 비추어 읽었습니다. 즉 주역에서 핵심이 되는 문구는 '성인의 무한한 능력이란 어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움이 전혀 없을 때(즉 誠이 이뤄질 때) 참나가 드러나서 참나가 주도적으로 행함으로써 이뤄지는 것(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矣)'이라고 봅니다.


이어지는 중용 22장과 23장 자사의 언급도, 곡(曲)을 빈틈없이 정직한 것, 성(誠)을 사사로움이 없이 겉과 속이 다 드러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형(形)과 더불어 같은 경지를 다른 각도에서 기술한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60년 가까운 삶에서 가장 크게 반성한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의식에서 사사로움이나 비밀이 전혀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살자고 결심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것과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럴 때 다른 아무 노력을 하지 않고 의식을 깨끗하고 온전하게 가져가려는 노력이 바로 영적 수행 내지 수양의 시작이자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호킨스 박사는 영적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만이 세상에 제대로 기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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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01.05 13:40 복성서

따라서 성인이란 사람들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입니다. 깨달으면 밝고 깨닫지 못하면 갈팡질팡하니 어둡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이 같지 않다고 하는데 밝음과 어두움이 본래 참나에 존재하지 않으며 둘다 참나와 떨어져 있습니다. 무릇 밝음이란 어두움에 대비하여 말하는 것이니 어두움은 없는 것이며 따라서 밝음도 없는 것입니다. (故聖人者, 人之先覺者也. 覺則明, 否則惑, 惑則昏. 明與昏謂之不同. 明與昏, 性本無有, 則同與不同, 二者離矣. 夫明者所以對昏, 昏旣滅, 則明亦不立矣.)


그런 때문에 진실하고 온전한 것이 성인의 참나로서 그것은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고 확 트여 밝으며 천지를 비추어 온 세상을 두루 느껴 아는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참나로 돌아간다 함은 덕을 닦는 자가 쉬지 않고 실천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노력하길 그치지 않으면 그 근원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是故誠者, 聖人之性也. 寂然不動, 廣大淸明, 照乎天地, 感而遂通天下之故. 行止語黙, 無不處於極也. 復其性者, 賢人循之而不已者也. 不已則能歸其源矣.)


자습노트) 

참나의 경지는 밝음 대 어두움이라는 이원성 세계마저도 초월한 것이며 참나에 이른 상태는 우리가 원래 태어난 상태이며 그 가장 큰 특성이 진실하고 온전한 것(誠)입니다. 여기서 참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보면 보조 스님이 공적영지(空寂靈知)로 요약하신 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참나로 돌아가는 데 덕과 쉬지 않는 노력을 거론한 것은 여섯 바라밀을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통한다고 봅니다.


참나 상태란 기독교 신비주의에 비추어보면 신인합일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신인합일에 이르기 위한 전단계로서 거비정화(purification)와 진덕명화(illumination)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번째 단계의 용어입니다. 즉 덕이 나아감으로써 밝아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밝아진 후에는 밝음과 어두움의 이원성을 벗어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덕이 높은 자(賢人)가 쉬지 않고 노력할 때 참나에 이른다고 한 것도 정확히 기독교 신비주의 삼단계설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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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8 15:04 복성서

불씨가 산과 바위, 숲과 나무에 숨어 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불씨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고, 강과 냇물이 흐르지 않고 산 속 깊이 숨겨 있다고 해서 샘이 없는 게 아닙니다. 돌을 두드리고 나무를 비벼대지 않으면 나무를 태워 만물을 말리지 못하며, 샘의 근원이 터져 흐르지 않으면 시내와 강을 이뤄 동쪽으로 힘차게 흘러 깊디 깊은 바다가 되지 못합니다. 에고의 움직임이 그치지 않으면 [불씨나 샘처럼 숨겨져 있는] 참나를 회복하여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무궁한 빛을 내지 못하게 됩니다. (火之潛于山石林木之中, 非不火也. 江河淮濟之未流而潛于山, 非不泉也. 石不敲木不磨, 則不能燒其山林而燥萬物, 泉之源弗疏, 則不能爲江爲河爲淮爲濟. 東滙大壑, 浩浩蕩蕩爲弗測之深. 情之動弗息, 則不能復其性而燭天地爲不極之明.)


자습노트)

거의 5개월 되도록 진도를 못 나가다 드디어 해독이 되었습니다. 앞의 구절에 대한 반복 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는 제가 붙였습니다. 참나가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에고의 작용을 치울 때만이 참나가 발현한다는 것을, 불을 붙이는 이치와 심해가 형성되는 이치를 빌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나를 드러내는 수행에서 에고의 움직임을 중지시키는 것(息情之動)이 핵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비유를 들어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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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02:06 단상

이제 저에게 남은 공부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다음 차원으로 건너가는 일이며 따라서 4대 성인과 수많은 스승들이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는 일은 매우 시급합니다. 그 가운데 명상이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실상 이 일은 은퇴한 후 물보다 넘쳐나는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이제 인간 존재가 전자기적 존재이고 그 존재를 둘러싸고 에너지 장(場)이 형성되어 있다는 정도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읽어보면 우리 의식이란 게 진동주파수에 따라 높고 낮음이 있어서 수련과 집중을 통해서 그 주파수가 높을 때 고무되고 신명나는 상태가 되는 반면, 밀폐된 상태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 침울하고 신산해지기 마련입니다.

종합컨대 명상은 우리의 에너지 장과 진동주파수를 끝없이 상승시킴으로써 고요한 상태와 지혜를 구사할 수 있는 상태로 가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정혜쌍수 내지 지관을 핵심 과제로 보는 거지요!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신 의식 내지 참나가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시기 때문에 걱정근심도 없고 원하는 바는 모두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관련해서 다음 문구를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발생해서 드러나는 것은 선형적인 인과관계의 함수일 뿐 아니라 부분적 조건과, 인간 의식을 포함한 총체적 조건에 따른 확률의 함수인 것이다. '신성'의 권능은 무한하기 때문에 '창조'의 모든 것은 잠재성이 실제 존재하게 되기까지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표현되는 과정이다. 약한 장(field)에서 가능성인 것이 강한 장에서는 더 높은 확률이고 '무한한 권능'의 장에서는 확실성이다(Reality, Spirituality, and Modern Man,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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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0 06:26 단상
제 전공이 경제학입니다만 경제학에도 영성과 관련지을 수 있는 유익한 개념이 한두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리인에 대한 이론은 유기적 조직의 감시비용과 관련된 중요한 이론입니다. 요컨대 주식회사와 같은 법인이 설립목적에 맞도록 구성원들이 제대로 기능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여러가지 내부통제 수단을 도입합니다. 이때 대표이사와 종업원들은 주주의 대리인이며 이들이 주주이익에 제대로 복무하는지 감시하는 모든 비용이 감시 비용이 되겠죠.

한편 이 블로그가 전제하는 것처럼 인간 존재를 참나-소아로 보면 소아는 참나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는 대승불교, 신유학, 기독교에 공통적이기도 합니다. 세 패러다임이 용어만 다르게 구사할 뿐 핵심은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아가 참나의 뜻을 완전히 파악해서 그대로 살 때 당연히 감시비용은 제로가 될 것이고 참나가 무소부재, 전지전능한데다 사랑과 평화 자체라면 소아의 능력과 복지는 무한대가 될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많이 나오는 종과 주인의 관계는 물론 성자와 성부의 관계까지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가까운 예로서 이재용씨가 자기 일가보다 주주 이익에만 복무한다면 그는 마땅히 가장 정당한 대표이사로 대접받을 것입니다. 영성에서는 소아인 우리가 참나(또는 하느님, 주인공)에게 감시비용 제로인 대표이사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게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시사하겠지요. 여기에서 난점은 참나의 뜻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뜻을 파악하는 방법과 모범을 4대 성인과 그분들의 가르침을 철저히 준수한 사람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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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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