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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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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7 13:19 실체,영성,현대인

질의와 응답

문 :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장식이 가지는 매력을 제거하면 위에서 제시한 과정이 너무 엄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 : 위에 적은 것들은 깨달음만을 진실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쓴 것입니다. "길은 곧고 좁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위해서뿐 아니라 실용적 편의를 위해서도 분심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에고에 호소하지만 막장으로 이끄는 사기꾼뿐 아니라 영적 환상으로 이루어진 잘못된 신비적, 마술적 영역을 좇느라 수십 년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부주의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히 은밀한 함정을 숨겨놓은 오락거리나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면 '피안'의 것이라는 것은 그 진실 여부를 측정할 수 있으며 추종자와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이익을 취하는 영적 에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초심자인 학인들은 종종 진정한 영적 상태와 초성 현상 및 변성 의식 상태(뉴에이지주의)를 혼동합니다. 따라서 장식품으로 숭배받고 전교하는 식의 보여주기로 유혹하는 미끼를 사용하는 노선의 스승들은 누구든지 의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문 :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것은 고전 불교와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 상 오류일 뿐 아니라 지각 상 오류이기도 합니다. 신이라는 말이 오해를 부르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학인을 위하여 지혜롭게도 그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불성'이란 참나의 핵심이자 순수한 의식(알아차림)입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내용물과 동일시를 하지 않지만 모든 맥락을 포괄합니다. 또 불교에 대한 학인의 지식은 우선적으로 교육적 목적을 가지며 전통에 의존합니다. '스승'이란 말은 650으로 측정됩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이들 가운데는 박식하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일시적인 삼매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문 : 고도로 진화한 영적 상태에 대한 당신의 설명이 3인칭으로 되었는데 왜 그렇습니까?

제가 기록한 현상은 독자적인 게 아니며 따라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존재하는 '조건'이나 '상태'라고 했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특정한 '누구'라고 할 게 없습니다. '나' 또는 '너'라는 감각은 특정한 위치나 선형적 특성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그것은 특정 위치, 경계, 시간, 시작이나 끝이 없이 빛나는 하늘과 보다 유사합니다. 그 조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 무언가의 '원인'도 아닙니다. 현상들은 누군가로 인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가 없이 덧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불성)은 그저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언가를 '행하거나' 어딘가로 '가지' 않으며 '기간'이라 할 시간의 흔적도 없습니다. '지금'과 '영원'이 동일합니다.


문 : 영적 노력의 전반적인 맥락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답 :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무주상 보시(selfless service)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신과 이웃을 위해 복무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태생적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고 동화되십시오. 세상이 낡고 못쓰게 되었고 추하다고 여길만한것에 대해서조차 매력과 색다름을 보십시오.


문 : 어떻게 하면 진보에 유익한가요?

답 : 그것은 자연스러운 관심사죠. 선택을 통해서 주의력 있는 습관적 태도를 습득하게 됩니다. 모든 순간 안에 각성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있습니다. 단순히 외양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면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모든 것은 빛나고 새롭든지 낡고 칙칙하든지 간에 정확히 그것이 '있고자 한 바대로' 있습니다. 형용사란 모두 투사된 마음의 꾸밈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부사를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든 게 태생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변화란 일련의 사건을 동사로 연결하려는 관찰자 안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1/10,000초보다 빨리 보면 모든 것은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 : 만약 개인의 정체성을 버리면 무(無)가 되는 게 아닙니까?

답 : 아닙니다. 무라는 환상을 초월하면 총체성(Allness)이 있습니다. 참나는 시작이나 끝이 없이 무한합니다. 참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으며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참나는 소아가 아니라 그 사람의 '궁극적 실체'에 더 가깝습니다. 실상에 있어 사람은 만유, 총체성 및 영원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무'가 되지 않습니다.


'공(空)'의 문제(무[無]인 듯한 것은 850으로 측정됨)는 의식 수준을 넘어서 제18장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공에 대한 오해는 에고의 한 측면인 조건적 사랑(집착)을 신의 자비(이는 신의 근본 성질임)와 혼동함으로써 궁극의 실체인 사랑을 부정한 소치입니다. 


허공이라는 환상을 넘으면 총제적이고 오류에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내비춤과 유사한 완전한 충만이 있습니다. 신성은 원래 '근원'이기 때문에 '오용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성은 그 자체를 스스로 알아보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이 진술은1,000으로 측정됨).


비선형을 넘으면 무인 듯 여겨지는 것이 총체성인데 그것은 무한한 자비인 신성이 계시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핵심이 내비추는 것으로서 권능에 차 있고 관대하며 압도적입니다. 그것은 심오하고 오류에 빠질 수 없으며 스스로 자명하며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세상은 무엇과 비슷합니까?

신성의 본질은 그 존재라는 품성이기도 한 모든 창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빛으로서 방사되고 있습니다. 지속적 발생이 현상으로목격되는데 그것들은 시간, 인과 혹은 순서가 없이 자동적이고 스스로 진화합니다. 즉 잠재성이 현상으로 구현되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존재의 단일성'으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알려집니다. 만유의 완전성이 절묘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균형과 조화로서 내비추어지는데 그러한 미와 균형과 조화에 의해서 또 진화하면서 펼쳐짐에 의해서 완전성이 더 큰 완전성으로서 현시됩니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습니다. '지금'도 없고 '그때'도 없습니다. 완전성과 더불어 모든 게 자명하기 때문에 답을 구해야 할 어떠한 질문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19장 및 본문 끝]


하늘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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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2:19 실체,영성,현대인

마지막 질주

마음 틀, 지향 및 헌신을 비롯해서 조건이 알맞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에고의 인지자(체험자) 측면을 전력을 다해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포기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들고자 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아주 신속하게 이뤄져서 마음을 넘어서서 체험자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처리장치와 같은' 경계는 보통의 '나-임'의 감각이 있는 실제 처소를 말하며 거기에는 실체(있는 그대로의 세계, 데카르트의 레스 엑스텐사)와 감지되거나 체험되는 바의 세계(데카르트의 레스 코기탄스나 레스 인테르나) 간에 1/10,000초 만큼의 시간 지체가 있다. 이 분리는 소아의 이원성 환상이 있는 급소이자 장소인데 비이원성(참나)이라는 근원적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분리된 개별적인 소아의 환상을 초월함으로써 참나의 '비추임'과 '하나됨'이 드러나는데 참나의 드러남으로 인해서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모든 생명이 '하나인 근원'으로 재맥락화된다.


결말

매우 앞선 의식 상태와 영적 진보에 있어서는 육체를 떠나는 게 하나의 초대처럼 허용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지수 600)이 본질적이기 때문에 육체의 환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몸에 계속 있을지 말지 하는 것은 더 이상 개인적 의사에 달린 게 아니다. 실상에 있어 고귀한 상태에서는 보통의 세속에 대한 포기가 요구된다.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주로 고독과 새로운 상태나 조건에 적응하면서 지내게 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상태란 인과 관계에 관한 이원적 믿음과 인과의 주체로서 동떨어지고 의지를 가진 개인적 자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전의 자아감을 대체한 상태를 말한다. 새로 들어찬 상태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자동적인 상태나 조건이다. 경계가 있는 개인적 정체성은 사라지고 참나의 총체성(Allness)이 소아 대신 들어선다.


처음에 '신의 충격'이라 할 시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시기에 마음은 말을 잊고 자의적 지향이나 이전에 해버릇하던 목표 추구 없이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상황 자체가 그저 '있는 그대로'이며 그 자체 있는 그대로 이미 총체적이고 완전하다. 몸도 자동적이고 저절로 행동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그 몸을 '당신'이라고 계속 보고 있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린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계속되거나 새로운 적응 방식이 생기기까지 여러 해가 걸릴 수 있다. 육신 삶에 필수적인 것을 배우는 것처럼 공간 감각을 새로 익혀야 한다. 공복감이 사라지는가 하며 어떤 경우 먹지 않고 며칠을 지내보기도 한다. 거울에 비친 몸을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세상으로 되돌아가가기 위해 '페르소나'의 출현을 통한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새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페르소나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접속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배우 역할과 같은 것이며 세상에서 적당하다고 보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기 위하여 여분의 기억 장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보통의 인간 세상을 향해 가기 위한 기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벗어나니 몸이 '얼마나 오래'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주기적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며 그것은 기묘한 초대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그저 떠날까 말까 무심하게 관조하는 상태이기도 한다.


선형 세계의 소아를 넘어 참나의 비선형 비이원성인 실체 안에는 따라야 할 대본이 없는데 참나의 실체에는 세속적 동기나 목적이 없다. 이어서 중요하거나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행동이 펼쳐진다. 이런 것들은 더 이상 개인적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제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게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며 '신성의 신적 질서'와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이라고 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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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5 07:47 실체,영성,현대인

영적 삶의 양식

다음은 많은 학인(學人)이 의문과 의혹을 가지는 점이다. 영적 수행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1. 세상에서 벗어나 영적 공동체, 아슈람이나 피정 센터에 들어가기. 이들 기관은 보통 몇몇 특정 종교나 공식 영적 기관에 관련되며 어떤 경우 서약을 요구하거나 다른 형태의 입회식에 참여하기도 한다. 일부는 교리를 준수하는 공식 종교의 수도회이며 그리하여 헌신을 확인하는 물질적 요구가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피정 센터는 홀로 떨어져 명상과 일정 기간 단식이나 다른 금욕생활을 강조한다. 어떤 공식 기관은 노동, 워크숍, 독서, 대화 및 함께 나누기를 비롯해서 영적인 단체활동을 강조한다. 최소한의 필수품으로 소유가 제한되며 종종 재산을 기부받는다. 모든 세속적 소유와 집착을 포기해야 하며 사람들의 방문은 보통 제한된다.


종교 단체의 규칙으로는 교리와 관련이 있다. 삭발, 수도복 등등에서 보듯이 영적 에고에게 특별해지려는 유혹도 있다. 어떤 영적 추구에서나 보듯 그 교리와 공식 행사는 물론 단체나 기관의 의식 수준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 피정으로 단기적 혜택을 받을 수 있고 한 기관의 후원을 받거나 피정 지도자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두에 대해 반드시 지수 측정을 해야 한다.


3. 일상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영적 수행을 하는 것이 실상 매우 바람직하고 유익한 수단이다(이 말은 진실로 측정됨). 동떨어지고 안전한 곳에서 순수하고 거룩해지는 것과 끝없는 유혹과 부딪침이 있는 세상에서 굳세게 몸바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 일반적 관찰이다.


영적 진보는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처음에는 영적 실체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한다. 봉헌에 의해서 삶이 기도가 된다. 몸바치고 결단하고 실천함으로써 영적 개념이 체험적 실체가 된다. (상당히 진보한 어떤 학인이 말했듯이 "적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적을 사랑하겠는가?")


일상 생활에서 대표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에는 아침 저녁으로 틀잡고 앉아 하는 명상이 있다. 처음에는 2~3십 분으로 시작했다가 한 시간 이상으로 늘려간다. 짧은 염송 기도가 분위기를 잡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되면 실상 그저 의식이 변형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종소리, 음악, 향, 기름, 초 및 기타 비슷하게  감각을 겨냥한 도구처럼 덫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무리 강하게 추천되는 것이라도 염송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을 권장한다. 특히 대가를 받는 '비장(秘藏)'의 염송 기도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며 상품화된 것이라야 겨우 290 정도로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


하루 동안 중점적으로 묵상 재료로 삼을 만한 영적 교훈이나 개념을 택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하루의 삶 전체와 그 체험을 재맥락화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기적 수업에 있는 교훈, 12단계 프로그램 가운데 한 단계, 시편이나 그밖에 순명, 겸손, 통제의 포기, 이득에 대한 욕망 포기 같은 기초적인 영적 과제를 고를 수도 있다.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행하면 그것이 인격과 의식 안에 통합되어 자동적으로 모든 생명체에 대해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게 되고 매 순간 완전성과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된다.


영적 수행이 일상 생활에 통합됨으로써 의지를 지속적으로 포기하는 형태를 띨 수 있으며 그것은 다시 자동적인 관조와 무위(無爲)의 바라봄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량이 독자적인 게 아니라 의식 자체의 성격임을 알게 된다.


4. 영적으로 모아진 초점은 마치 '마음의 기본틀'과 같아서 그것에 의해서 영적 과정이 최우선적인 게 된다. 결국에는 그러한 과정을 '행하는' 분명하고 분리된 독자적인 '나'는 사라져간다. 이어서 이런 현상은 그 자체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무위의 상태에 이르는 첩경은 시간의 경과나 지속을 인식(체험)하기를 포기하는 데 집중하는 간단한 방법에 있다. 이것은 놀랄 정도로 간단하지만 매우 강력한 방법이며 그 대가는 '시간'이라는 무의식적으로 계속되는 압박에서 돌연 벗어나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 삶에 대한 체험을 미묘하게 맥락화해주며 채색해준다. 시간이란 환상이 지배하는 이러한 상황을 깨는 것은 매우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이어서 시간이란 의식으로부터의 투사이며 하나의 믿음(그 믿음으로 인해 에고는 현상의 출현을 바라보는 것을 '시간에 따라 배열함')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커다란 해방감과 내적 환희를 느끼게 된다. (시간이 인간 의식의 투사이며 우주에 근원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 최근 양자 이론에서 드러났다[Lynd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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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24 03:45 실체,영성,현대인

불쾌한 일이나 환경은 거기에 있는 보이지 않는 카르마상 이익을 확인함으로써 유용한 쓰임새로 바뀔 수 있다. 즉 그런 일들이 카르마상 빚을 갚는 길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을 용서하고, 기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지침이다. 인간 삶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뿐 아니라 개인의 의식 진화에 최적의 기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내, 간구, 끈기, 기원, 순명과 깊은 겸손에 의해서 영적 지향은 더욱 강해진다. 장애를 치우면 절대적 궁극의 진리와 실상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 '공중부양 수련', 주문외기, 자세 잡기, 억지로 하는 호흡법 및 그밖의 인공적 기법을 피하는 게 좋다(프라나야마 같은 호흡법이 190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주목할 것).


영적 에너지나 쿤달리니 에너지는 영적으로 헌신하고 봉헌하여 진보한 결과 저절로 발생한다. 구도자는 참나가 내면에서 조화롭게 이끌어 운명처럼 미래로 이끌어감에 맡기는 것이, 목적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보다 낫다. 그리하여 구도자는 참나가 지휘하는 내면의 부르심에 응답하는데 참나 쪽에서 그를 이끌어 미래의 운명으로 이끈다.


영적 진화는 일생에 걸친 몰입이며 그것에 의해서 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모든 체험이 영적 지향에 기여하는 삶의 한가지 양식이다. 이제 신의 종이 된다는 선택보다 더 큰 소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모든 걸음이 똑같이 중요해지는데 그것은 비유컨대 벽 전체가 무너지고 일견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 단 한 개의 벽돌을 뺌으로써 이뤄지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 저절로 생겨나기 시작할지 모른다. 그런 현상들은 자신이 한 것이거나 소아의 몫이 아님을 인식하고 또 그것들이 마술적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기적적인 일들은 조건이 맞을 때 발생하는 잠재성의 구현일 뿐이다. 그 조건의 하나는 높은 수준의 의식 에너지의 존재다. 훨씬 더 높은 의식 수준에서 보면 모든 현상은 실로 우주 진화의 결과로서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자명해지며 따라서 생명이란 어떤 순간에도 완전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참여자(목격자)로서 존재하는 지속적인 현현(顯現)이다.


소아가 참나에 포섭되어 사라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죽을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을 맞을 수 있다. 죽음을 당한다는 소아의 느낌은 잘못일 뿐이며 따라서 그 현상에 순종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것은 또 자신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내려놓기에 좋은 때이기도 하다. 몸은 계속 걸어다닐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선택은 소아에 달린 게 아니라 오직 참나에 달린 문제다.


높은 수준에서는 카르마상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나 잊혀진 약속과 관련된 에너지가 생길 수 있다. 그 어떤 곤경이나 의심이든 그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신의 뜻'에 깊이 순종하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자책하거나 현재 상태보다 더 멀리 '나아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 영적 진화는 불규칙적이며 종종 간헐적이며 어떤 때는 정체 상태에 빠진다. 죄책을 가지는 것은 자기애적 방종이라는 것을 깨달으시라.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길고 삭막한 기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위장이다. '길고 삭막한 기간'이란 결단을 촉구하는 시험인 것처럼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는 영적 에고의 '진보'를 통한 이득 추구 소망을 초월함으로써 넘어갈 수 있다. 따라서 좌절 자체가, 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저 견디기만 하는 사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다. 몇년 동안 진전이 없는 것 같아도 기대했던 바를 훨씬 뛰어넘고도 남을 만하게 매우 빠르고 큰 진보를 갑자기 맞이할 수가 있다.


그러한 진보의 결과 기쁨과 지복 또는 심지어 세상에서 제 기능을 못할 정도의 열락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상태가 되면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소용 없고 그들의 눈에는 그 상황이 애처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변화가 될 수도 있다. 희극적인 사실은 그들이 '그 친구는 틀림없이 정신이 나갔다.'고 하면서 뒤틀린 말을 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사실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소아의 마음은 '생각을 하지만' 그 참나는 침묵 속에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와 인간 육신의 삶은 무상하며 혼의 운명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작은 것을 큰 것에 넘긴다는 결단에 이른다. 친척, 친구나 사업상 관련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높은 소명에 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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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23 07:21 실체,영성,현대인

연구 과정

의식 조사에 관한 일련의 출판물을 읽거나 강의를 듣기만 해도 개인의 의식 수준이 눈에 띄게 상승하며 따라서 영적으로 진보한다는 게 의식 조사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감화를 주는 정보는 체험과 이해력을 재맥락화하여 패러다임을 확대시킴으로써 선형적 처리가 아니라 재맥락화의 결과 의미를 바꿔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분명히 변형력이 있다.


인간 의식 수준의 질적 양적 분석과 측정(1995), 권능 대 완력(1995), 나의 눈(2001), 나: 실체와 주관성(2003)으로 시작되어 진실 대 거짓(2005), 의식 수준을 넘어(2006), 신의 현존 발견(2007)으로 이어지는 이미 발간된 책 내용에는 의미심장한 연결성이 있다.

위 책자의 내용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한 많은 강의물도 제공되고 있으며 그것들은 또 CD와 DVD로도 이용할 수 있다. 비공식적 삿상 형태의 워크숍 내용도 CD로 이용할 수 있다.


실제 적용(1)

대부분의 사람은 문화적 또는 가정적 생활 양식에 따라 종교적-영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안에는 이제 쉽사리 확인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가 있다. 진실 대 거짓에는 온전한 스승과 가르침 목록은 물론 영적 진리의 근원에 대해 측정치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인 영적 여정은 다양한 원칙과 가르침에서 자연적으로 끌려 생겨난 진실한 영적 자료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방식이다. 기도로써 우리 지향은 더욱 강해지고 그에 따라 의식의 점진적 수준에 부응하는 진리 차원이 점차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일견 애매함을 초래하는 의식을 섞지 않는 게 중요하다. 뇌 생리 자체가 의식 향상에 따라 변하여 이해력을 도와주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잠정적인 것으로 해두는 것이 좋다.


한가지 기초적인 영적 개념을 하루 동안 주제로 삼아 봉헌 행위와 더불어 관상과 명상, 그리고 기도를 바치는 게 좋다. 로렌스 형제의 신의 현존 실습(2005)이나 존 커링의 향심기도(2004)가 아주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확인했다. '거룩한 교유'를 구하고 200 미만의 사람과 장소 그리고 여가를 피하는 것을 권장한다. 피해야 할 것으로, 명분으로는 영적이라고 하지만 의식 측정치는 매우 낮은 활동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뉴에이지 판매장, 심령서적 및 의식수준을 높여 준다고 주장하는 도구들을 피하는 게 좋다. 또 '초능력'이나 싯디를 얻기 위한 '수련회'에의 초대 같이 눈을 끌거나 혹하게 하는 것을 피하는 게 좋다. 상업적 비법들은 매우 낮게 측정된다. 그리하여 '고대의 비전' (지수 160)에 유혹당하거나 빠지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런 것들은 '특별하게' 되고자 하는 영적 에고에게 끌리는 것들이다.


영적 진리에 비밀은 없다. 그것들은 공짜로 쓸 수 있고 투명하다. 역사상 위대한 화신과 영적 스승들에게 그 어떤 '비밀'도 없었다는 것을 주목하시라. 반대로 그분들은 돈받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했고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말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호의와 자비심으로 인하여 그 태생적 미와 완전성이 빛의 비추임(거기에서 존재가 발현해 나온다)으로 뻗어 나간다. 우리가 관찰하는 세상에 그 어떤 '원인'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것은 창조이기도 한 진화가 계속된 결과로서 실제로 드러나는 잠재성이 저절로 발생하는 것일 뿐임을 명심하는 게 좋다. 이 현상은 고급 이론과학에 있는 발생과 복잡성 이론의 핵심이다(Theise, 2006). 


관상(觀想) 중에 '목격하고' '관찰하거나' '체험하는' 현상이 자동적인 것이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며 근원적으로 비독자적인 것임을 주목하는 것이 유익하다.또 세속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란 에고의 내면에서 투사된 것임을 주의하시라. 행복이란 소유나 체험이 아니라 의식 수준(그 사람이 된 상태)의 결과임을 깨달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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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22 07:53 실체,영성,현대인

도입

앞서 쓴 것과 강의한 모든 것의 의도는 깨달음과 영적 진리의 발견으로 가기 위한 의식 진화의 원칙을 실제로 적용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모든 저술은 신에게 바쳐진 것이며 궁극의 실체이자 생명과 존재의 근원인 신성을 발견하는 데 바친 것이었다.


이러한 지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책마다 "하늘 높은 곳에는 신께 영광!"이란 구절로 시작하고 끝맺었다.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책의 진리수준과 의식수준 측정치를 남겼다.


발간된 책들의 목적은 전반적인 조사와 연구 성과에 따른 것이며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합을 촉진하는 새로운 연구 방식을 점진적으로 제시한 바에 따른 것이다. 새로운 발견을 접하고 그것을 적절히 재맥락화하는 일이 주관적으로 변형력이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의식을 이해함으로써 영적 진화를 촉진시켜주는 노선이 드러나며 과거와 현재의 영적 진리를 즉각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학인과 수행자들은 오직 풍문, 평판이나 해당 문화에서 확인된 것에만 의존하던 과거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나침반이 없이는 인간 의식 진화가 가진 한계 때문에 역사적을 과오를 면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어떤 가르침, 스승 및 종교적 영적 전통이든 진실을 가리는 바로 이용할 도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과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 측정 조사의 핵심 가치는 그것으로 본질과 외양을 분별하고 나아가 진실과 거짓(환상)을 분별한다는 점에 있다.


역사적 검토: 개괄

영적-종교적 실체와 진실에 대한 연구 조사법의 출현은 그 자체로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 조사방법에 의해서 전에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정보 영역을 열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임상적 조사법의 요점은 조사 대상의 외양보다는 그 본질의 진실성과 의식의 수준에 의해서 생리적 반응이 결정된다는 데에 있다(최근 조사에서는 자연적인 동공반응에 의해서도 확인된다고 함 [Davis, 2007]). 꽤 진보한 영적 구도자의 경우 부정적 자극(예, 형광등, 농약 및 인조 조미료)에는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한 관찰 때문에 실험집단을 정식 영적 연구과정(기적수업 워크북) 시작 전에 측정해서 기록하고 나서 주기적으로 다시 측정했다. 그 결과 실험집단이 그 과정을 약 3개월 마친 후에 보니 부정적 자극에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이 밝혀졌다(이 점은 다른 진실한 영적 수련 과정에도 적용됨).


생리적 실험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지배적인 의식수준 자체가 결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반응을 기록하기 위하여 1에서 1,000까지 의식 지수에 대하여 임의의 숫자를 사용하였으나 숫자가 가파르게 늘어나서 실용적이지 못한 것을 금방 알았다. 따라서 상향하는 의식 에너지의 상대적 힘을 표시하기 위해 로그 함수가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1에서 1,000에 걸친 척도에는 모든 확률수준과 생명 형태가 포함되는데 거기에 모든 잠재성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설계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화신, 즉 예수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 및 조로아스터를 측정한 결과 최고 수준의 의식을 1,000으로 정했다. 이어서 200 미만은 거짓이며 200 이상은 진실도가 점점 상승하는 것이라는 결정적 발견에 이르렀다. 이 구분은 또 (200 미만의) 완력과 (200 이상의) 권능을 표시하였다.


이어 30년간 진실도와 영적 실체의 수준을 식별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대해 지속적으로 조사했다. 그리하여 임상적 조사의 결과에서 나온 실체에 관한 스펙트럼과 범례를 추출했는데 이것들은 깨달은 현자들의 아주 고매한 영적 상태를 비롯해서 인간 역사에 드러난 체험은 물론 의식 수준에 관련된 것이었다.


의식 조사를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하는 일은 수십년 간 진행되었고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립적 연구자와 스터디 그룹의 참여가 있었다. 거기에서 나온 결과 덕분에 방대한 시간과 심지어 시간이란 환상을 넘는 존재의 모든 국면에 대한 조사가 촉진되었다. 여기에서 진실에 관한 모든 진술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인간 역사에서 처음으로 확증할 수 있는 진실을 알아보는 방법론이 생긴 것이다.


궁극의 맥락은 개념화된 시간이나 장소를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사할 수 있는 영역은 무제한하다. 그 결과는 가장 시시한 듯한 것에서부터 가장 숭고한 영적 인식과 깨달음의 수준까지 펼쳐져 있다. 진실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진실성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에게 유용한 새로운 지식체가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류 의식은 1980년대 말에 겨우 200 수준을 넘어 204로 상승했다. 이러한 결과 자체가 인간 진화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음(즉 호모 스피리투스의 출현[나: 실체와 주관성 - 번역서명 호모스피리투스] 참조)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하여 진실 자체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안이든지 진실성의 정도를 순식간에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사방법을 개발한 동일한 시기에 우주에 관한 패러다임을 확장시켜준 양자역학과 양자 물리학의 진보가 있었다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발견과 서술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어 의식 자체가 선형과 비선형 간에 그리고 이성과 신앙 간에 가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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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21 07:50 실체,영성,현대인

도덕과 창조

모든 종(種)은 고통과 이익을 체험한 결과이기도 한 그 자신만의 태생적 '도덕'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옳음 대 그름'은 이제는 과학에서조차 뇌 신경계에 새겨진 생물학적 특성으로 전제하는 듯하다. 그러한 '도덕적' 행위는 늑대 떼, 돌고래 떼, 코끼리와 원숭이 집단에서 발견된다. 낮은 수준에서라도 옳고 그름은 공격, 집단에서의 추방, 지배와 종속 및 우두머리 수컷이나 암컷의 지배 등에서 드러난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라는 간단한 법칙에 의해서 유기체는 통하는 것과 통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이러한 정보는 끌개 에너지 장 안에 모아져서 내면화되고 신경 시스템 안에 저장된다(Bird, 2006). 동물이라도 '속이는' 놈은 단호히 추방되고 징벌되거나 무리에서 쫓겨난다. 그리하여 감각이 있는 존재는 옳고 그름의 구분이 필수적이며 종국에는 지배적인 것이 되는 방식으로 창조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뇌의 되비추는(mirroring) 능력을 발견한 것은 엄청 흥미있는 일이다(Medina, 2007). 포유류는 다른 동물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상호간 감정과 의도를 직관한다. 이것이 사회화와 공감의 기초적 기제가 된다. 마카크 원숭이 실험에서의 매우 중요한 체험에서 보면 원숭이는 먹이를 취하는 과정에서 이웃 우리의 다른 원숭이에게 고통을 줄 경우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 실험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기적 소득을 추구하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 행동에 수치를 안기는 듯하다.


이러한 전반적 맥락 안에서 보면 개인의 욕망과 선택을 충족하는 데는 허용범위와 영역이 있으나 그마저도 확인가능한 한계와 조건이란 맥락 안에서만 합당하다. 그리하여 생물학적으로 도덕과 윤리는 의식과 인간의 인식이 깨달음에 이르려는 목표에로 진보해가는 것에는 물론이고 생존에도 도움이 된다.


신앙과 이성의 통합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엄청난 연구 끝에 계시종교뿐 아니라 이성과 신학 사이에 근원적 갈등은 없으며 오히려 상호 강화하며 서로 돕는다고 밝혔다. 영적 에너지를 받으면 영적 이해력을 통해서 이성과 신앙의 통합이 이뤄진다. 이것은 내용의 실체를 설명하는 맥락이 확장된 결과로서의 의식 수준에 따른 것이다.


의식의 에너지 장은 상호작용하는 유력한 장('끌개')과 같은데 이들은 점차 커지는 중력장 안에 있는 보다 작은 장들에 비유할 수 있다. 소규모 장들은 상호 영향에 의해서 공조하기 쉽다. 작은 것이 큰 것의 진동 유형에 맞추어 차례로 영향을 준다. 나아가 그 유형과 상호작용은 에너지 장의 조화에 의해서 더욱 화합하고 그 에너지 장은 다시 아주 높은 범위에서 복잡성을 확대한다. 이러한 유기체가 최근의 신경 생리학 연구에서 확인되었다(Medina, 2006).


이러한 설명은 자유의지의 작용 대 결정론 주장 간의 대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선택지를 취하거나 거부하게 하는 유형과 성향(이들은 카르마적으로 습득한 것임)과 상호작용하는 지향이 가지는 영향을 밝혀준다. 한가지 선택지를 자주 선택할수록 미래에 다시 그것을 택할 가능성은 커진다. 이것은 양자 역학('양자 제논 효과')과 확률론에서도 관찰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습관'이나 '성격형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택 효과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온전한 진리를 택함으로써 그보다 못한 선택지를 택할 가능성은 점차 줄어든다("불쏘시개 효과"; Medina, 2006).


의식 측정은 지배적인 에너지 장을 가리키는 숫자를 내어놓는데 이 에너지 장이 지각을 결정한다. 이해력이 진보함에 따라 모아진 정보는 지혜로 일컬어진다. 신앙과 이성이 통합되면 의식의 특정 에너지 장에 부합하게 된다. 의미와 시사점에서 나온 것의 본질은 그 본질에 부합하는 영적 직관으로 귀결되고 이때 그 본질은 고전적으로 영적 통찰로 불린다(에테르체의 차크라에서 '제3의 눈이 열림'[지수 600]).


도덕성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이 통합되어 집합적으로 '인격'이라는 말로 포섭되는 바의 행동, 인식 및 의사결정에 있어 습관적 양식이 된다. 영적 지향은  체험을 다시 맥락화하며 이어서 가치와 목표뿐 아니라 생활양식과 선호를 조화시키는 데 있어 지배적 역할을 한다. 그때 우리는 삶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혜자가 된다. [제18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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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19 07:12 실체,영성,현대인

이성과 신앙: 조화

이미 진술했듯이 이성은 논리의 합리적 추론과 확고한 정의에 따라 구체적 선형적 표상 및 사실을 다룬다. 이러한 과정에 따라 전제에서 나온 결과인 확인가능한 결론이 나온다. 수학법칙처럼 논리의 법칙은 유동적이거나 개인적 왜곡에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엄격하고 선형 법칙에 따른다. 따라서 '통계적 적합도'라는 요구조건이 추가로 필요한데 그 의미는 표상들이 동일한 추상 수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가지 주제는 특정한 수준의 추상화나 범주, 분류, 종, 과에 제한되어 그에 따라 특정 사례로 한정된다. 예를 들어 이성에 따르면 새가 단 하나의 날개 달린 동물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추상화수준을 속여 기초적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전적으로 '수사학(修辭學)' (지수 180)이라고 부른 수준으로 이성을 타락시키고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사학은 이기적 이익을 위해 기본 원칙을 파괴하는 특징이 있다. 이성의 한계와 규칙 안에서 명제는 반드시 입증가능해야 한다. 거짓은 저차원 의식을 가리키며 진실성이나 지성을 결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성은 그것만의 영역에서는 매우 실용적이고 유익하지만 주로 선형적 영역에 국한된다(지수 400). 따라서 논리에는 사실적이고 유익한 정보가 더해지지만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선형성'이란 사실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확인해주는 특성을 가리키는 반면 '의미'란 본질과 맥락의 결과인 것이다. 본질과 적절한 맥락을 분별하는 이러한 능력은 세계 인구의 대략 85%(미국인의 55%)에게는 결여되거나 퇴화한 상태다. 따라서 똑같은 사안이 200 이상과 미만의 사람들 간에는 아주 다르게 보이고 해석된다. 예를 들어 200 미만에서는 '힘이 정의다'라는 개념이 수용되지만 200 이상에서는 '힘'이 제약이고 책임임을 의미한다.


맥락에 있어 중요한 것은 가치판단을 비롯해서 지향, 동기, 전제 및 추상화 등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지배적 조건, 환경, 타이밍 등이다. 그리하여 개인이 꽤 높은 의식 수준에 이르지 않는 한 진짜 '아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의식 수준의 측정은 특정 에너지 끌개장과 관련한 근원적 실체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큰 가치를 가진다.


영적 시야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목했듯이 이성(선형 내용물)에는 신앙과 기도에서 나오는 영적 에너지에 비추어 보는 게 필요하며 그때 비로소 의미와 시사점이 드러난다(비선형 맥락의 도움에 의해서 그렇게 됨). 그리하여 마침내 주관적 체험과 영적 인식에 의해서 분별과 완전한 평가가 가능해진다.


영적 인식과 이해력을 얻었는지는 그 자체로는 '입증'할 수 없지만 의식 측정 기법으로는 검증할 수 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은 높은 의식 수준에서는 자명하지만 가설적 이상에 매여 있는 낮은 수준에서는 거짓으로 들린다.


강의에서 많은 목격자와 참여자 앞에서 탐구했던 바와 같이 이 세상은, 의식 진화를 돕고 카르마상 최대의 혜택을 부여하는 수많은 선택지를 통해서, 최대한의 영적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거듭해서 확인하였다. 개인적 의견을 초월하면 각 순간은 완전한 것으로 목격하고 관찰할 수 있다(즉 겉보기에 좌절이나 비극인 것 안에 숨겨진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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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18 11:09 실체,영성,현대인

'주의'의 힘

의식조사에 의하면 무슨무슨 '주의'는 190으로 측정되며 그 주장자들이 도덕적 우위를 뽐내는 바의 지배적이며 정치색을 띤 감정적 신앙이 되면 그 지식 체계나 일단의 전제들은 타락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근본주의'가 서로다른 색채와 의미를 가지는 반면 '근본적'이라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과학조차도 일단 '과학주의'가 되면 덜 온전해진다(예 환경보호주의나 유물론적 환원주의). 일단 신앙 체계가 '주의'가 되면 전교를 하고 개종자를 찾게 된다. 도덕적 우월성은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에게 '특별함'이라는 지위와 그에 맞는 과장된 언외의 힘을 부여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변성 의식 상태를 유도함으로써 소위 싯디의 과대포장된 면을 얻기 위해 '손님을 끄는' 소위 연수(지수 200)라는 유혹에 덧붙여진 특별한 '힘'을 얻는 것이 영적 에고에 매혹적이다. 또 '비법', 'UFO', '신비', '고대' 가르침 같은 모호한 명칭('비전' [지수 160]이란 말로 더욱 과대 포장된다.)뿐 아니라 밀교적이라는 미화되고 마술적인 유혹도 있다.


'밀교와 신비'는 엄청난 돈이 들고 변성 의식이나 특별한 '축복'을 얻는 연수는 수천이나 수만 달러 이상을 요구하는 반면 높은 지수로 측정되는 온전한 영적 가르침은 무료이고 다 드러나 있다.


물론 마법적 비밀 의식, 주문, 제사 등의 유혹은 어린이의 상상력 풍부한 순진함을 향한 것이다. 이것은 해리포터 책의 인기로 증명되는데 그 책들은 신비하고 마술적인 힘들을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와 똑같은 특별함이 채널러, 심령학, 투시, 외계방문자 및 '다른 차원'에서 온 UFO, '미래에서 온 메신저', '사도의 환생' 등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덕적 우월성으로서 이상주의

'이상적'이라는 것은 그 매력적인 표제에도 불구하고 가설적 의미를 가진다. 인간의 모든 참화는 몇몇 과장된 이념적 '이상'으로서 동력을 얻었다("만물 위의 독일', '노동자여 단결하라, 잃을 것은 속박뿐이다.". "해방전선에 뛰어들라.", '인민 정부를 지지하라.", "인민의 법정" 등등).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적 표현에서 '주의'란, 구호로서 사용되는 매혹적인 도구여서 단지 반복에 의해서 희생이 기대되고 영웅적인 것(자살 폭탄, 가미가제, 자유의 전사 등)으로 권장되는 종교처럼 된다. 그러한 과시는 균형을 잃은 극단주의의 표지이며 TV 제작을 통해 거창하게 보여줌으로써 자신과 타인, 어린이와 영적 온전성을 희생하도록 권장하고 독려한다.


그러한 '주의' 운동의 뒤에는 대중동원식 과시와 공연식 보여주기의 최면적 도취로 자기애 넘치게 부푼 추종자는 물론 그 지도자의 과대망상이 놓여 있다. 또한 그러한 운동에 모두 공통되는 동력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몰아침이다(레닌,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 폴포트, 아라파트, 빈라덴, 카스트로 및 북한, 남미, 중동[이란] 등의 지도자, 이들 모두 지수 180 이하로 측정됨).


진정한 도덕성

진정한 이성과 신앙처럼 온전한 도덕과 윤리는, 본질이 외양과 사회적 인식을 대체하는 실제적 겸손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 덕으로서의 도덕성은 기초적 영적 개념에 대한 충실은 물론 타인에 대한 배려, 정직성, 성실성, 책임 등과 같은 인격특성의 윤리성으로 드러난다. 온화하고 애정깊고 도움이 되며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사려깊은 것은 목적이라는 깃발을 들거나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지 않는다. 도덕성은 이득이나 에고 부풀리기보다는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서 겸손하게 처신하는 삶의 방편일 뿐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내면적이지만 또한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고 실제로 그 바탕에 자아존중감이 있는지 하는 것으로 입증된다.


이러한 성격 특성은 영적 진화와 진보에 필수적인데 후자에는 결단력뿐 아니라 자기수양, 겸손 및 불굴의 정신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든 일에서 궁극적으로 삶이란 선물로써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인식에 수반되는 기도와 영적 원칙의 실천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무한대의 진실로 측정됨. "머리에 있는 한올의 머리칼까지 셀 것이다."는 것은 진리로 확인된다.)


진정한 도덕성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과 감사, 자비심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요소들로써 결국에는 아름다움, 완전성 및 모든 피조물에 내재하는 거룩함이 계시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길은 곧고 좁으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영적으로 성숙함에 따라 우리는 이번 생이 고귀하며 남보다 우월해지는 일이나 에고를 부풀리는 허영에 찬 환상에 빠지는 일로 낭비하기에는 너무 값지다는 것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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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17 07:57 실체,영성,현대인

도덕적 권위: 커다란 갈등(2)

사법부가 인간의 행동이 상징적 언어이고 언론이 자유라고 선언한 만큼 무정부주의가 이 땅의 새로운 법이 되는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촘스키의 저서(지수 180), 마르쿠제의 저서(지수 150), 푸코의 저서(지수 90) 등이 위대한 성인들(지수 1,000)의 자리를 차지한다. 만일 상대주의가 가르치는 대로 건강성과 정신이상이 근원적 실체가 없는, 그저 언어상 편리한 억압수단이라면 와트 폭동(1965년 LA에서 있었던 흑인 폭동 - 역주), 카트리나 직후의 재난, 바그다드 시내 및 축구장 폭동의 무정부상태에서 드러난 바대로 무정부적 혼란이 하나의 이상이 된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우월하다고 믿어 그것을 이상화한 것은 '신도덕'이 그저 합리화된 비도덕이라는 게 드러남으로써 무너진다. 역설적으로 자유에 대한 새롭고 확장된 현대적 관점이란, 유명한 1984년(조지 오웰, 1949)에 나오는 바의 '신 언어'와 신사고'에 따라 정당화된 독재적 조치에 의하여 효력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오늘날 대학 캠퍼스의 '사상 경찰', '건강 경찰', '비만아 부모 경찰' 및 '사회적 민감성' 상의 언어 경찰(Ravitch, 2003)로 구현되었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던 '도덕'의 자유라는 평판이 대학 합창단에 대한 학생들의 공격에서 드러나듯 자기부정(관용의 횡포, Dierker, 2006)에 의해서 무효화된다. 정치적 편향에 의해서 극좌 '자유주의'가 전제적 통제와 강압이 된다(오늘의 해방자는 내일의 독재자).


신앙과 이성을 부인하면 자유보다 부패와 타락에 이른다는 것은, 미국에서 감옥과 죄수가 넘쳐나는 것과 곳곳에 정신병자와 노숙자가 떼를 이루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도덕적 우월성은 또 모든 전쟁에 존재하는 상대주의이기도 한데 이것들은 이상주의적 합리화를 바탕으로 번창한다. 그리하여 '자유'가 동조자와 지지자에 의한 자기애적 과시뿐 아니라 다투기 좋아하고 퇴행적인 부패 행위에 대한 사이비 도덕적 핑게와 포장이 되고 있다.


샌디에고 대학에서의 24년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자기애가 세대를 이어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한다. 대중 미디어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이 실로 거짓 고백, 범죄의 TV 방영, 의도적인 도발, 경찰 행동의 고의적 기획('돌팔매질') 및 '희생자' 시나리오 등과 같은 강박신경증적 극단으로 이끄는 중독의 한 형태다. 미국 정부가 불법이민자를 그 아이들과 가정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냉담한 것으로 보이도록 교묘한 계략에 의해서 고정관념으로 되어 있다. 또 하나 호평받는 구도는 공공연한 성적 행동이나 범죄행동을 '생방송 촬영'하는 등의 노출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는 여성 선교사를 서서히 참수하거나 어린이가 가득 탄 버스를 폭발시키는 것을 게임처럼 한다. 호전적인 이슬람은 빈라덴이 개인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미디어의 관심을 활용한다.


과도한 찬사를 받는 언론 자유(현재 미국의 지수, 190)라는 도덕적 '우월성'은 그것을 고의적으로 악용함으로써 사회적 자살이라 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이 된다. 즉 언론자유 환경에서 오감의 인식이나 개념에 채색함으로써 본질을 흐리기 위해 모든 것에 정치색을 씌운 결과 학문적 구조는 물론 사회적 구조가 점차 붕괴하고 있다(Krauthammer, 2007). 그러는 동안 사회의 기본 구조가 사실상 경제, 산업, 기업 등의 실용주의(지수 350~380)에 의해 통합되고 나아가 책임, 법적 구조, 합리성 및 의무 등에 의해 강화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이제 정부 관료조직이 정치권력 투쟁을 통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재난지역에 생필품을 실제 공급하는 것은 월마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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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