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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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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에 해당되는 글 50

  1. 2018.04.21 개혁과 동양 영성
  2. 2018.04.20 깨달은 사람
  3. 2018.04.17 동서의 수양론
  4. 2018.04.14 돈오와 점오
  5. 2018.04.13 명상과 영성의 실천
  6. 2018.04.12 명상과 깨달음
  7. 2018.04.10 영적 수행
  8. 2018.04.07 무조건적 사랑
  9. 2018.04.02 성(誠)과 중(中)
  10. 2018.03.03 불려불사(弗慮弗思)
2018.04.21 06:15 단상

세상과 싸우는 이는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동굴의 우화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자와 싸우다보면 지치기 쉽고 분노에 싸여 스스로 병들기 쉽습니다. 더구나 증상과 싸우는 게 되어 잘 개선되지도 않습니다. 그림자를 비추는 실체를 찾아 치유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길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신제가의 핵은 바로 경(敬)이요 성(誠)입니다. 성(誠)이란 완전한 투명성이고 완전히 투명하기 때문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경(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홀로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매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 조상의 가르침입니다. 이것만 잘 해도 제가(齊家)는 바로 된다는 것이 제 체험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을 위해서는 이미 훌륭한 지도자를 가져봤기 때문에 그들을 본받으면 된다고 봅니다.

오늘날 높은 스펙의 사람들이 부패하고 강자에게 부역하는 시시한 인생을 사는 것은 최치원에서 조식 선생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이 땅의 최고 지성인들이 실천한 이러한 공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엊그제 인용한 글에서 칼 융은 진단하길 “인간은 영혼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가장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서구인들을 병들게 한 요인인데 이러한 자신의 탐욕이 온 세상을 오염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시한 대안이 마하라쉬로 상징되는 동양 영성의 실천입니다. 동양 영성 실천의 핵심이 바로 명상입니다. 이 처방은 천 년 전에 복성서도 반복하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명상이란 불사불려(弗慮弗思)이고 마하리쉬는 마음을 없애면 생각이 없어진다고 해서 결국 동양 정신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생까지 치룬 공부에 따라 자신이 화약인지 숯인지 젖은 석탄인지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방편을 찾아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면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깨달음을 향해 진전하고 그런 군자가 많이 나와서 그들이 현대 조직의 리더가 되면 바로 세상이 평화롭게 된다(平天下)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전파하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개혁의 대열에 참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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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20 07:35 단상

10여년 전 읽었던 마하라쉬에 관한 책 '나는 누구인가'를 복습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에 대한 설명을 보면 기독교의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다이몬의 소리대로 살던 소크라테스도 성령을 입은 사람이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하리쉬는 구도자의 근기에 따라 화약-숯-젖은 석탄으로 사람을 나누고 불이 붙는 시간이 깨달음에 걸리는 시간이라 합니다. 젖은 석탄에 해당하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는 데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 하니 제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전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편지'에 따르면 이승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충족될 뿐 아니라 다음 세상으로 넘어갈 때 편안하고 장엄하게 또 자신있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승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길 의식이 높아지는 자체가 세상에 바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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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7 11:58 단상

유교와 불교가 수렴한다면 인간의 마음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가르침이 하나로 수렴한다면 그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융은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가 라마나 마하리쉬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말하길 “동양적 수행의 목표는 서양 신비주의의 그것과 같다. 동양에서는 초점이 소아(小我)에서 참나(眞我)로 옮겨가듯 서양에서는 인간에게서 신으로 옮겨간다. 이는 소아가 참나 안에서 그리고 인간이 신 안에서 사라짐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아란 대승불교의 생멸문, 참나란 진여문에 해당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소아란 몸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개발된 특성으로 이해합니다. 이 소아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넘어설 때 우리 존재의 근원인 참나로 존재하게 되어 모든 두려움과 고통, 불행이 그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제가 파악한 현대 영성입니다. 참나란 신성의 다른 말이기도 해서 신성의 발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가 제거되면 사랑과 기쁨, 평화가 들어차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처방에 따르면 생각으로 된 마음, 즉 소아를 벗어나야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데 하나의 방편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 의문의 근원으로 몰입하여 마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방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완전히 맡겨버림으로써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나는 누구인가, 59쪽). 그 상태는 어린이와 비슷하여서 어떤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그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상황이 지나가버리면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위 책, 125쪽)고 합니다. 이 점은 동아시아 모든 성현이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한 구절만 가져오면, 맹자는 어린 아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은 경지를 수양의 목표로 합니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離婁下).

제 생각에 몸을 버린 후에는 누구나 참나 상태가 되지만 우리 의식이 만든, 그래서 환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세상에 대해 유머를 가지고 즐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참나-깨달음 상태로 가는 것이 비결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아주 오랜 동안 우리 몸이 나라는 생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소위 영적 수행이란 과정을 밟아야 하고 마치 운동선수나 악기연주자처럼 꾸준히 연습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연습의 과정이 각 문화에서 영성 수련이라 할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이 ‘학이시습’이라 할 때도 저는 현대적 학습과정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컨텐츠 습득이 아니라 바로 저러한 과정을 말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학의 정수를 실천한 것으로 평가되는 안회가 수제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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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4 07:40 단상

2,3십대에는 호기심에서 다양한 컨텐츠를 다룬 책들을 읽기도 했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컨텐츠는 아무리 모아도 의식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 의식보다 높은 의식의 글을 읽을 때는 거기에 동승함으로써 높은 의식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것이 완전히 익숙해져서 내 것이 될 때 비로소 내 의식도 높아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전을 손에 놓지 않는 것이 좋은데 경전이란 것도 대개 교단 내지 학단에서 당대에 소아적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삽입한 것들이 적지 않아서 최근의 영적 도서 가운데 검증되었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호킨스 박사의 '나의 눈'에서 가져옵니다.

"돈오와 점오는 동시에 존재합니다. 영적인 진화과정에서 작아보이는 진전 상태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눈더미 밑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입니다. 의식의 갑작스런 도약은 아무 예고도 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뜻밖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게 좋습니다... 

4%의 인구만이 들어서는 사랑의 단계에서 영적 성장은 뚜렷하고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는 너그럽고 자비롭고 온화하고 온유하고 느긋해집니다. 그의 행복은 외적 정황이나 사건과 무관합니다. 판단하는 태도는 사라지고 이해하고 감싸는 마음이 자리잡습니다. 모든 것의 본래적인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습니다. (위 책,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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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3 05:56 단상

소크라테스가 말한 동굴의 우화는 우리가 보는 게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실체를 보고 알았을 뿐 아니라 매 순간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아테네 사람들이 모두 아니라고 해도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미디어가 매일 떠들어대는 세상사가 스크린에 비친 허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세상과 달리 살면서도 세상 변화에 기여하는 길은 영성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허상과 싸우면 고통과 병이 깊어집니다. 영성의 길은 명상과 묵상이 입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은 그저 세상에서 오는 생각을 끊고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그와 동시에 과거와의 단절, 고정관념과의 단절, 황금률의 실천을 병행하게 되며 특히 절대적으로 진실할 것(至誠)이 요구됩니다. 다행하게도 명상이 깊어질수록 환희심이 나서 이것이 인센티브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이 환희심이 목표가 되고 세상과 단절하게 되면 그것은 소승이라고 해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 됩니다.

소승에 가까울수록 꾀까다로운 자세를 강조하고 심지어 면벽수행 같은 것을 하게 됩니다. 명상을 통해서 의식이 계속 진화하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써 세상의 패러다임을 벗어난, 무오류한 실천을 하자는 게 목적입니다. 의식이 끝까지 진화하면 이원성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이원성이란 선악과를 먹기 전, 즉 선과 악처럼 이원적 구분을 벗어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아간 과정의 이야기들은 4대 성인의 가르침에 공통할 뿐 아니라 전 세계 누구나 같은 체험이라는 게 스승들 이야기입니다. 제 남은 꿈이라면 제가 어디까지 향상하고 무엇을 성취하는지 기록해서 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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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2 09:01 단상
중국에 전해오는 관음설화에서 관음이 어여쁜 처녀로 나타나 청년들에게 관음경을 소개합니다. 20명이 처녀와 결혼하고 싶어 관음경 읽기에 도전합니다. 결혼의 요건은 관음경의 암기-해석-체험이었습니다. 최종 합격자는 당연히 1명입니다.

우연이지만 제가 공역으로 소개한 '해피포켓'도 인생대박을 미끼로 명상을 권하는 책입니다. 책 읽으신 분 가운데 1/20이라도 명상에서 나오는 유익하고 고귀한 체험을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이제 막 입문해서 점점 그 가치를 체험해가고 있습니다.

정작 실천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을 만나고 2년 정도 읽고나서 비로소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명상이란 지눌 스님이 지적하신 '텅비어 고요하게 알아차리는 자리'에 생각이란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깨닫고 그 생각이란 놈을 끊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란 호킨스 님의 의식 지도가 시사하듯이 의식의 장에서 저절로 그리고 임의로 솟아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과 성찰을 통해서 내 존재가 높은 의식의 장으로 올라가면 전혀 다른 색조의 생각이 솟아오릅니다. 그 색조는 감정을 따라 층을 이룹니다. 그래서 '냉담-슬픔-두려움-욕망-분노-자부심'이란 부정적 층을 차례차례 극복하면 비로소 긍정적인 색조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호킨스 박사에 따르면 의식이 계속 상승하여 사랑과 기쁨이 주된 색조가 되는 때가 깨달음의 시작이며 깨달음에도 계속 상승하는 단계가 있다는 것은 화엄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최종적인 상태는 완전한 평화라고 합니다. 박사는 깨달음의 초입에 이르는 비율이 4%정도라고 하여서 관음설화에서 결혼조건에 이른 1/20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깨달을 운명에 있는 이들만이 명상에 도전하며 골프에 입문하면 골프를 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한 생에서 깨달으나 열번의 생을 거쳐 깨달으나 마찬가지라고 하여서 어쨌든 깨달음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도 은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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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0 11:14 단상
TV에서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청소년을 보면서 숭고한 영감을 받습니다. 영상으로 자신과 경쟁자를 비교하며 자세를 교정하고 매일 훈련일지를 쓰는 것은 기본입니다. 한편 한 가지 컨텐츠에 꽂혀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는 편집증에 가까운 취미를 가진 사람도 봅니다. 예를 들면 트럼프 카드 모으기, 옥편 외우기 같은 것입니다. 많은 책들이 실상 컨텐츠 모으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읽은 것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푹스의 풍속의 역사인데 이것은 성 풍속이란 컨텐츠의 집대성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컨텐츠의 수집이란 아무리 산처럼 모아도 우리의 궁극적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에 평생 몰입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청년 영재들의 실천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것을 고쳐 완성에 이르려는 과정이 마치 영적 수행과 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백성욱 선생은 영적 수행이란 개과천선에 다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과실을 고쳐 보다 나은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일본식 경영을 찬사해 마지않는 경영학 책에선 '카이젠(改善)'이라 하는데 어디서든 요구되는 덕성이기도 합니다.

명상을 기본으로 하는 영적 수행이란 에고(情)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데 달인이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신 의식(참나, 性)과 접속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 힘으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쪽에서 할 일은 에고를 잊어버리는(坐忘, forget self) 수준까지 에고를 완전히 이해하고 내버리는 일입니다. 그 과정은 마치 청소년 영재들이 취하는 훈련과정과 흡사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비슷한 경우로는 골프와 피아노 연주에서 세계를 제패한 우리나라 청년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승에서뿐 아니라 다음 차원에까지 통하면서 이 일을 하다가 오늘 죽는 것이 어제 죽은 것보다 낫더라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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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07 06:02 단상

오늘은 저희 공부 그룹에 올린 글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너희가 배척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나 그리스도는 언제나 가장 깊은 사랑과 연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깨닫고 있는가? 너희가 배척하는 사람에게 나는 무조건적 사랑을 방사하고 있다."

실상 위와 같은 일은 우리가 에고에 머무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말입니다. 유교의 인(仁)과 서(恕),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은 모두 인간에게 불가능한 수준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하는 것이라고 바이블은 말하는 것입니다. TV를 보니 짐승도 측은지심을 실행하더군요.

경전들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에고를 완전히 극복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 도정에서 되도록 억지로라도 하다못해 기브앤테이크 방식으로라도 비슷하도록 끝까지 노력해보자는 것이 소위 종교들이 버티는 최저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리학 또는 신유학의 가장 초기 논문인 복성서는 대략 11세기 전에 에고로 에고를 이기려는 것은 더 큰 에고일 뿐(以情止情, 是乃大情也)이라고 했습니다. 바이블도 자신을 부정하고(forget self)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한 필수적인 방편이자 간절한 노력이 명상입니다. 마음이 근본적으로 침묵해야만 에고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이성이 도움이 된다면 위 구절에서 방사한다(radiate)는 말에 주목하면 됩니다. 무조건적 사랑은 우리가 신의 불꽃에 심지를 빌려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신적 사랑은 우주의 에너지 내지 태양빛과 같아서 수용자의 상태를 가리지 않고 그냥 방사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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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09:15 단상

어제는 혼자 24시간을 근무하면서 다시 한 번 성(誠)과 중(中)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돌아보면 혼자 있을 때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재미있는 오락거리를 찾거나 고요를 깨는 무엇을 합니다. 그 결과 직장 말년부터 약 10여년 엉망진창 삶을 경영하여 깊은 절망상태까지 갔었습니다. 요컨대 적당히 세상에서 통하는 정도의 도덕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바닥에서 떠오른 게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하겠다(至誠)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영성은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愼其獨)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혼자 있을 때 삼간다는 것은 바로 중을 지킨다(守其中)는 것이고 중이란 희로애락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喜怒哀樂之未發)를 말하는 것이어서 바로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키워드이기도 한 성(誠)에 대한 요지입니다.


중용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밝게 드러나고 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넓게 퍼지는 것이니(不覩之覩, 見莫大焉, 不聞之聞, 聞莫大焉) 경계하고 두려워하여야 한다(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을 실천할 것인지 자세히 안내하는 공부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작해야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세상은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는 동안 사기를 당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고 속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재앙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성이란 고요한 상태(誠者定也)라 하여 성의 실천은 바로 명상에 있습니다. 명상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항상 접속하여 흔들리지 않고 선만을 행하게 합니다(擇善而固執之). 그러니 거짓 없음(至誠)이란 바로 수기중(守其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용은 중(中)이 우주의 근본(中也者, 天下之大本也)이라고 선언합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이것을 흉내낸 말입니다.


요즈음은 나머지 삶만이라도 흑자를 기록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 매일 명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혼자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잘 해나가는 편입니다. 그런데 실은 명상이란 의식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첩경이어서 날로 삶이 개선될 뿐 아니라 결국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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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3 07:21 단상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데 계시기에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뵙도록 노력하는데 장모님은 93세, 모친은 85세입니다. 저도 이 세상의 입구보다 출구쪽이 가깝기에 앞의 단상(궁극의 바람)과 같은 소감을 적은 것입니다. 대략 향후 15년 정도 안전한 출구 통과를 염두에 두고 전심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론하면 어떻게 그 전에 '지고의 존재상태에 도달하고 고통없이 장엄하게 건너갈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마련중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명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실패하던 꾸준한 명상을 지금은 실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바닥 체험과 회두와 조금 꾸준하고 열심한 추구가 있었습니다.

명상은 고려, 조선의 모든 진실한 지성인이 추구했던 일로서 그에 대해 가장 좋은 안내서는 '복성서'입니다. 복성서는 제가 나름 심혈을 기울여 번역했는데 요컨대 멸정복성(滅情復性)을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법을 중용을 근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요점은 불려불사(弗慮弗思)입니다.

명상의 목적은 생각을 '나'와 동일시 하지 않는 것이며 고요하고 텅 비어 있는 자리, 눈 감고 있을 때 마치 잔잔한 대양과 같은 자리가 바로 신적 실재라는 것을 완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존재와 생명이 나오고 거기가 바로 모든 기쁨과 사랑의 근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까지 노력하여 결국 믿음이 아니라 앎으로써 신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 천국의 실현입니다. 그렇게 신과 하나 되어 세상에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것이 모든 영성이 제시하는 바의 천국에 드는 방법입니다. 그 길에서 소아의 노력을 버리고 스승과 신령 쪽에 주도권을 드리는 것이 바로 순명이자 순종입니다. 명상을 어렵게 생각지 말고 매일 10분 이상 생각을 끊고 '릴랙스'하는 것만 실천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검증된 경전을 교재로 삼아 곁에 두고 학습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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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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