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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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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5 08:50 단상
학술적으로 말하면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이 되고 마치 이름이 있는 주체처럼 표현해서 전자를 참나 후자를 에고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일상 용어로는 양심과 욕심이 되겠습니다. 소학-대학의 학습체계가 있는 유교나 오늘날 기독교나 결국 양심으로 욕심을 다스리며 사는 게 복을 짓는 확실한 길임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 때나 지금이나 진화에서 나온 에고대로 사는 이들이 재화와 권력을 틀어지고 행세하기 때문에 범인(凡人)들로서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십상입니다. 근본 결단 혹은 회심이란 양다리 걸쳐 살아보니 역시 답이 아니고 괴롭기만 하더라는 체험 후에 양심대로만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준에서 그치면 조직의 관리자나 세상의 통치자에게 이용만 되는 비애를 맛보게 됩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사리 분별이 정확해서 주어진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되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초월한 경지로 가서 덕과 지혜를 두터이 한다면 저승 갈 때 노자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어 보입니다. 엊그제 사회교육을 오래 하신 분과 '웰 다잉'을 얘기했는데 그 길을 제 체험을 근거로 정리해 본 것입니다. 이러한 명쾌한 정리 없이 정년 퇴직 후 전원 생활을 4년 하다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근본 결단을 한 후 3년을 살았습니다.

이 길에서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즉 소크라테스처럼 신의 소리를 천둥처럼 듣고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뜻이 내 양식이다 하는 경지까지 가야 합니다. 그 길을 안내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 잘 통하는, 그래서 통속의 인간만을 키워내는 종교와 학교의 가르침을 하루 속히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명이 양심이고 양심을 따르는 게 도(道)'라고 가르친 소학과 중용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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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1.23 07:05 단상
우연히 시골의사 박경철 님의 아주대 강연을 들었는데 취지는 좋으나 극단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인 해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즉 1% 안에 드는 부를 쌓아 99%의 유기체적 인간(organic matter)과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1%의 부자들이 세계의 부를 통제하면서 세상이 더 팍팍해지는 현실에 대한 처방으로는 'integrity'가 있는 사람이 과반수가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인데 그런 사회라야 사랑과 평화가 실행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세상의 많은 고통이 해소될 수 있을 것입 니다(금융을 장악한 이들이 잉여 상품을 하층민에게 분배하기만 하면 세계적 호황과 평화가 올 것입니다. 지금 AI와 4차 산업혁명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이 해법은 4대 성인의 공통 해법인데 이제 이것을 세계적으로 통하는 현대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의식에 대한 이론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은 전자기학, 입자물리학, 에너지 장, 세포이론 등으로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호킨스 님은 의식 지도에 관한 박사학위(국내에 '의식 혁명'이란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로 이 일을 꽤 성공적으로 해내었습니다. 요컨대 과학과 영성의 통합 이론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기존 종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존 종교는 부족 종교이거나 왕정 시대의 종교라서 미개한 의식에 빠지게 하고 외양 중시적입니다. 즉 통합 목적을 위해 획일화와 강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와 언어 차이로 분열과 갈등을 부르고 자주 위선에 빠집니다. 요컨대 존재의 근원을 인격신으로 이해한 과거의 종교는 현대인의 의식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명화된 지역일수록 기성 종교를 이탈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로 확인됩니다.

4대 성인이 가르치신 바를 공통 언어로 전파하여 적어도 51%의 사람이 실천하게 되면 민주주의와 인터넷이 위력을 발휘하여 인간의 문제는 최적으로 해결되고 많은 이들이 존재 자체에서 무궁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 전제로서 동서 영성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에고 탈피와 정화과정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거나 합일에 이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존재의 근원을 이해하고 체험할 때 진정한 덕과 지혜, 사랑과 평화에 이르고 창의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게 되어 무한한 성취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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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6.10.04 15:28 단상
우주 의식(신 의식)이 개별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 의식을 취합니다. 인간 의식은 인간적 감정과 생각이 핵심입니다. 인간 의식이 언제나 신 의식을 인식(또는 선택)하며 그 지도를 받을 때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의식이 독자적이고 자족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찌꺼기로 오염된 채 삽니다. 그 결과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피시가 제 기능을 못하거나 쓸모 없어지는 것처럼 삶이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장 비극적인 결말이 감옥이나 정신병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의 예외없이 정도는 다르지만 오염된 상태임을 인정하기에 잘못 심어진 인간적 감정과 생각을 씻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모든 의식은 그 원료가 같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 하나의 의식이 정화되어 점점 더 신 의식이 드러나고 동시에 신 의식에 일치해가면 그만큼 세상도 밝은 쪽으로 변혁되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호오포노포노라고 생각합니다. 하와이의 가장 효험있는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서 발견하는 문제의 의식을 자신에게서 치유했더니 병원 전체가 개선되더라 하는 임상체험에서 나온 영성이 호오포노포노죠! 호킨스 박사도 한 사람의 의식 변화가 세상의 부정적 에너지를 상쇄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유학의 핵심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쪼록 매일 의식 정화와 의식 향상에 매진하고 있다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해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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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04:36 단상
제가 기독(그리스도)교도로서 30여년 살았는데 신도 되기를 포기하고 무교회 영성 실천가로 자처합니다. 특히 기독교나 유불선의 핵심 영성은 같다고 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독교도였던 때 배운 것들 가운데 좋은 것은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기독교가 권능(power)을 잃고 통속화(또는 세속화) 하는지 그 원인을 알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힘을 회복하고 세상을 극복(또는 초월)하려면 기존의 교조를 버리고 현대인들에게 맞는 과학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그리스도의 편지'를 권합니다. 한편 제 경험상 기독교가 부족한 점은, 어떻게 매 순간 신을 느끼고 알아(참을 안다는 것은 신과 함께하는 것 또는 신이 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힘으로 믿음을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소아 또는 에고만의 추진력으로 자신을 몰아붙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성취하려는 것은 더 크고 강한 에고에 빠져 쓰라린 실패만을 맛보게 된다는 게 제 경험입니다. 신적 동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적 동력은 창조와 존재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그 일을 하는 제1 원인인 신령한 앎(知, consciousness)이 우리가 홀로 침묵할 때 우리 안에 뚜렷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할 때 얻어집니다.

그런데 이 체험은 누구에게나 코를 만지는 것만큼 쉽다는 게 동양 영성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말씀과 교리가 아니라) 명상과 (통성 기도가 아니라) 골방에서의 기도로써 세상에서 초월한 마음으로 세상사를 처리하려는 굳센 결심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습(習)이 되어버린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고 내버리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 실천을 위해서는 현대 심리학과 정신치료 분야의 책, 특히 호킨스 박사의 '레팅고'(번역도 나왔습니다)가 큰 도움이 됩니다. 찾기만 하면 제가 거론한 방편들이 아니라도 곳곳에 얼마든지 좋은 수단들이 있습니다. 모쪼록 성공하는 크리스찬이 많이 나오길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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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3 14:11 단상
논어 1장은 유학 전체의 핵심 요점으로 이해됩니다. 즉 삶의 목표는 군자가 되는 것이고 공부의 척도는 '남이 나를 몰라도 화내지 않는 것'에 있음을 명시합니다. 그런 점에서 논어를 인간 관계 속에서 변혁을 추구하는 것으로 읽은 신영복 선생의 해설은 취할 바가 있습니다. 각설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남이 나를 모른다는 것(人不知)'을 나를 오해하거나 개무시(?)해도 나에게서 과오를 찾는 경지까지 가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대중의 평균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런 일을 당하고 씩씩 대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에 미쳤습니다. 즉 성인이나 군자 또는 보살이 되는 게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면 다른 모든 면에서 변변치 않아도 사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가 이 점을 건드리기는 하지만 살면서 그것을 이루려는 사람도 못 만났고 종교란 오히려 사람을 세상에 잘 적응토록 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종교도 통속(通俗)에 그칩니다.

제가 볼 때 모든 통속주의는 개나 고양이가 제 꼬리를 잡으려 덤비는 것처럼 순환론이며 컴퓨터 용어로 '루프 돌기'입니다. 오직 최고 목표를 향해 향상할 때만 삶이 올바르게 된다고 봅니다. 그 목표는 각 종교에서 나름의 말로 정리되어 있는데 저는 유교의 것을 취해 봅니다. 즉 유교에서 바오로 이상으로 중요한 주자는 소학과 중용을 편집하면서 첫머리에 다음 말씀을 배치했습니다. 내용인즉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프로그램이 진여(性)인데 진여를 따르는 게 인간의 길이고 이 길을 닦는 게 바로 가는 것(教)'이라는 것입니다.

매순간 이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는 삶이라면 다른 사정이 어떠하든 제대로 산 삶이라고 봅니다. '다른 사정이 어떠하든'이라 했지만 그렇게 산 삶이 더 나빠지리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 점은 유교에서 공자님이 가장 높이 평가한 안회의 삶에서 확인됩니다. 이때 평가의 시간척도는 수천 년에서 영원에 이르는 긴 척도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군자 되는 공부를 매일 놓지 않고 같은 뜻을 가진 친구(朋)와 공부가 몸에 밸(習) 때까지 즐겁게(悦樂) 하라는 것이 논어 1장의 깊은 뜻이라고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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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9:13 단상
'먹방'과 '놀방'이 지배하는 세계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대자본의 이익에만 복무하고 대다수 사람이 거기에 매몰돼 낄낄대지만 사실은 의식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초월'과 '장엄'에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저 호화로운 감옥살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한 극단에 빠져 '타'를 교도한다는 자만이 모든 압제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무집착 상태에서 타와 울고 웃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화하고 한 사람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무주상 보시'라 할 만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의식, 강한 의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높은 의식은 '듣보잡' 의식 수천~수천만에 달하는 힘이 있다 합니다. 명상과 기도, 6바라밀을 실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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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09:32 단상
돌아온 탕자와 고백록의 아우구스티노를 포함 역사상 유명무명의 회심가들이 전환하는 계기에 대한 대표적 표현이 바닥치기입니다. 제가 번역한 '나비되기'의 스티븐 데이비스는 이것을 한계의 법칙이라 했습니다. 요컨대 재산, 인간관계 또는 건강에서 말기 내지 파탄 진단을 받는 경우를 말합니다.

읽어보면 그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만큼 행동을 바꾸게 하는 문구를 붙드는 일이  많습니다. 제 경우는 '선가귀감'의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탐욕과 애갈을 없애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해가며 세운 목표가 공자님의 '종심소욕불유구'입니다. 두 가지 구절의 공통점을 생각하니 초탈하라는 것입니다.

초탈(non-attachment)은 불가에서나 제가 사숙하는 호킨스 박사에게서나 중요한 키워드인데 도대체 초탈해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스도의 편지'에서 발견합니다. 그것은 의식의 끝없는 상승입니다. 삼세에 걸쳐 유일한 실재(reality)는 '의식'이며 의식이 향상하고 있을 때만 인간은 온전하고 안전하다는 게 오늘 얻은 깨우침입니다.

어쩌면 이카루스 신화가 말하려는 게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함께 드는데 그 추구하는 이데아와 표현하는 현상을 동일한 차원으로 풀기 때문에 해피엔딩도 확신도 주지 못해서(이카루스는 결국 태양열 때문에 사멸하지요!) 비의(秘義)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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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8 09:16 단상

무엇이 되든 가시계의 것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환원주의의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면 의식이 뇌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원주의는 유물주의와 같습니다. 효에도 환원주의가 있습니다. 대체로 효란 세상에서 출세하고 가문을 빛내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효경을 자세히 읽으면 '입신행도'가 효도입니다. 많은 가르침이 우리 삶이 세상에 통용되도록 또는 세상에 잘 적응되도록 하는 데 그칩니다. 즉 통속성에 빠지며 통속성이란 고차원의 것을 저차원에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타락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종교도 실패합니다.


2013년 말경에 비로소 입신행도의 길에 전념하는 삶을 시작해서 감을 잡고 한가지 길로 가고 있습니다. 대체로 공자님이 말씀하신 '지천명-이순-종심소욕불유구'가 그것인데 제가 볼 때 그 길은 의식의 온전함, 즉 성(誠)을 통한 성(性)의 만개에 있다고 봅니다. 이 길을 제대로 가서 어제 죽은 것보다 오늘 죽는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면 입신행도에 들어선 것이라고 봅니다. 구태여 덧붙이자면 이 길은 그저 착한 사람이나 모범생이 되어 성공하고 이 세상에서 포인트를 축적해서 극락(천국) 티켓을 얻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길입니다. 이런 삶의 가장 큰 장점은 부모가 돌아가셨어도 효를 실천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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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3 06:13 단상
어제는 친구들 만날 시간이 멀어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이종톈(易中天)이란 사람이 공자님에 대해 쓴 걸 읽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한참 후 맹자에 의해 성인으로 간주되셨는데 당신께선 '난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범인과 같다'고 하셨답니다. 직전에 소개한 체르노빌의 영웅들도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고 거론했습니다.

주희 이전에 이미 대학과 중용에 집중하고 주역으로 보충해가며 유교의 핵심진리를 상술한 복성서를 보면 성(性)과 정(情)을 대승기신론의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보고 결국 진여문 또는 참나에 해당하는 성(性)을 최대한 발현한 사람이 성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유교 텍스트의 성(誠)을 완벽히 구현함에 길이 있고 이 성의 요체는 신기독(慎其獨)인데 신기독이란 수기중(守其中)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수기중에서 중이란 탄허스님에 따르면 생각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란 공적영지 또는 상락아정을 말하며 성리학에서는 경(敬) 또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몰입상태를 말합니다. 그 상태에서 얻어진 지혜와 실천방안을 강구하고 부단히 실천합니다. 9세기에 복성서를 지은 이고나 12세기에 성리학의 체계화와 종합을 이룬 주희나 모두 불교에서 개종한 사람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유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신, 멀리는 함허스님과 가까이는 탄허스님이 유명하지만 동아시아 지성인이라면 한문 텍스트에 심취할 수밖에 없고 결국 선불교와 도교, 유교의 통섭을 구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주마간산으로 읽은 이종톈은 최근 중국에서 스타강사(?)가 되어 거부를 얻었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문화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이익에 복무하는 듯합니다. 즉 이고, 주희는 물론 우리 선조들이 추구한 심학의 깊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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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09:41 단상

20~21세기를 미국에서 살다 가신 호킨스 박사 텍스트와  8~9세기에 당나라에서 살았던 '이고' 님의 텍스트가 너무 똑같아서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복성서를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햇빛과 같고 부정적인 생각은 구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나는 해와 같고 우리가 가진 모든 부정적인 생각, 의심, 두려움, 분노와 원한 등은 햇빛을 가리고 결국에는 빛이 가냘프게만 뚫고 옵니다. 


We might picture love to be like the sunlight and negative thoughts like the clouds. Whereas our higher, greater Self is like the sun, all the negative thoughts, doubts, fears, anger, and resentments that we hold dim the light of the sun and, finally, the light comes through only weakly. David R.  Hawkins, Letting Go: The Pathway of Surrender (p. 94). Veritas Publishing. Kindle Edition."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좋음, 싫음, 욕망의 일곱가지가 모두 에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에고는 이미 어두운 것이기에 참나를 가리는 것은 참나의 탓이 아닙니다. 저 일곱가지가 돌아가며 차례로 돌아오니 참나가 충만하지 못합니다. 


喜怒哀懼愛惡欲七者, 皆情之所爲也. 情旣昏, 性斯匿矣, 非性之過也. 七者循環而交來, 故性不能充也."


※제가 이 블로그에 복성서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도움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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