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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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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2 09:01 단상
중국에 전해오는 관음설화에서 관음이 어여쁜 처녀로 나타나 청년들에게 관음경을 소개합니다. 20명이 처녀와 결혼하고 싶어 관음경 읽기에 도전합니다. 결혼의 요건은 관음경의 암기-해석-체험이었습니다. 최종 합격자는 당연히 1명입니다.

우연이지만 제가 공역으로 소개한 '해피포켓'도 인생대박을 미끼로 명상을 권하는 책입니다. 책 읽으신 분 가운데 1/20이라도 명상에서 나오는 유익하고 고귀한 체험을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이제 막 입문해서 점점 그 가치를 체험해가고 있습니다.

정작 실천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을 만나고 2년 정도 읽고나서 비로소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명상이란 지눌 스님이 지적하신 '텅비어 고요하게 알아차리는 자리'에 생각이란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깨닫고 그 생각이란 놈을 끊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란 호킨스 님의 의식 지도가 시사하듯이 의식의 장에서 저절로 그리고 임의로 솟아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과 성찰을 통해서 내 존재가 높은 의식의 장으로 올라가면 전혀 다른 색조의 생각이 솟아오릅니다. 그 색조는 감정을 따라 층을 이룹니다. 그래서 '냉담-슬픔-두려움-욕망-분노-자부심'이란 부정적 층을 차례차례 극복하면 비로소 긍정적인 색조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호킨스 박사에 따르면 의식이 계속 상승하여 사랑과 기쁨이 주된 색조가 되는 때가 깨달음의 시작이며 깨달음에도 계속 상승하는 단계가 있다는 것은 화엄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최종적인 상태는 완전한 평화라고 합니다. 박사는 깨달음의 초입에 이르는 비율이 4%정도라고 하여서 관음설화에서 결혼조건에 이른 1/20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깨달을 운명에 있는 이들만이 명상에 도전하며 골프에 입문하면 골프를 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한 생에서 깨달으나 열번의 생을 거쳐 깨달으나 마찬가지라고 하여서 어쨌든 깨달음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도 은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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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10 11:14 단상
TV에서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청소년을 보면서 숭고한 영감을 받습니다. 영상으로 자신과 경쟁자를 비교하며 자세를 교정하고 매일 훈련일지를 쓰는 것은 기본입니다. 한편 한 가지 컨텐츠에 꽂혀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는 편집증에 가까운 취미를 가진 사람도 봅니다. 예를 들면 트럼프 카드 모으기, 옥편 외우기 같은 것입니다. 많은 책들이 실상 컨텐츠 모으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읽은 것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푹스의 풍속의 역사인데 이것은 성 풍속이란 컨텐츠의 집대성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컨텐츠의 수집이란 아무리 산처럼 모아도 우리의 궁극적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에 평생 몰입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청년 영재들의 실천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것을 고쳐 완성에 이르려는 과정이 마치 영적 수행과 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백성욱 선생은 영적 수행이란 개과천선에 다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과실을 고쳐 보다 나은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일본식 경영을 찬사해 마지않는 경영학 책에선 '카이젠(改善)'이라 하는데 어디서든 요구되는 덕성이기도 합니다.

명상을 기본으로 하는 영적 수행이란 에고(情)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데 달인이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신 의식(참나, 性)과 접속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 힘으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쪽에서 할 일은 에고를 잊어버리는(坐忘, forget self) 수준까지 에고를 완전히 이해하고 내버리는 일입니다. 그 과정은 마치 청소년 영재들이 취하는 훈련과정과 흡사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비슷한 경우로는 골프와 피아노 연주에서 세계를 제패한 우리나라 청년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승에서뿐 아니라 다음 차원에까지 통하면서 이 일을 하다가 오늘 죽는 것이 어제 죽은 것보다 낫더라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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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08 08:19 복성서

오늘은 탄허스님 말씀 공유해보겠습니다.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을 합한 명사다. 성이란 나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우주가 미분(未分)되기 전 상태를 말한다.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나 몸이 나기 전이나 우주가 생기기 전이나 모두 똑같다. 우리가 흔히 마음의 본체인 성에 대해서 논하면서 중생이나 부처, 성인이나 범부가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일체를 성의 자리에서 보았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무조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은 칠정이 일어나기 전의 면목이며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다. (탄허록 180~181)"

제 생각에 이것만 확실히 구분할 줄 안다면 유교와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 가운데 하나를 얻었다고 봅니다. 제가 복성서를 번역하면서 성을 '참나'로 정을 '에고'로 번역한 근거도 여기에 있고 그래서 그 어떤 번역보다 전체를 이해하기 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범부와 성인이 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같지만 범부는 우주의 진면목이자 시공이 끊어진 마음의 본체인 성을 알지 못하고 희로애락애오욕에 끌려다니는 데 반해 성인은 성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다르다고 합니다(같은 책 182쪽). 명상은 언제나 성의 자리에 앉아 있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우연히 TV에서 보여주는 십대 역사 영재와 수영 영재를 보았는데 이들은 그 분야에서 매일 나아지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더군요 평생에 걸쳐 성의 자리에 들어앉는 일에는 누구나 제한이 없지만 거기에 뜻을 두는 이들은 불과 2~4%밖에 안 됩니다. 이 길이 생사를 벗어나는 일인데도 그렇습니다. 학부모들이 사교육으로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듯이 교회나 절에 출석하는 일로 때우는 게 대다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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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07 06:02 단상

오늘은 저희 공부 그룹에 올린 글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너희가 배척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나 그리스도는 언제나 가장 깊은 사랑과 연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깨닫고 있는가? 너희가 배척하는 사람에게 나는 무조건적 사랑을 방사하고 있다."

실상 위와 같은 일은 우리가 에고에 머무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말입니다. 유교의 인(仁)과 서(恕),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은 모두 인간에게 불가능한 수준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하는 것이라고 바이블은 말하는 것입니다. TV를 보니 짐승도 측은지심을 실행하더군요.

경전들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에고를 완전히 극복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 도정에서 되도록 억지로라도 하다못해 기브앤테이크 방식으로라도 비슷하도록 끝까지 노력해보자는 것이 소위 종교들이 버티는 최저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리학 또는 신유학의 가장 초기 논문인 복성서는 대략 11세기 전에 에고로 에고를 이기려는 것은 더 큰 에고일 뿐(以情止情, 是乃大情也)이라고 했습니다. 바이블도 자신을 부정하고(forget self)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한 필수적인 방편이자 간절한 노력이 명상입니다. 마음이 근본적으로 침묵해야만 에고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이성이 도움이 된다면 위 구절에서 방사한다(radiate)는 말에 주목하면 됩니다. 무조건적 사랑은 우리가 신의 불꽃에 심지를 빌려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신적 사랑은 우주의 에너지 내지 태양빛과 같아서 수용자의 상태를 가리지 않고 그냥 방사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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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06 05:35 공부의 요령과 요점

조선 말기에 독학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비들은 기독교 핵심이, 불교와 도교 철학이 흠뻑 스며든 성리학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경우 기독교도로서 대학국어 시간을 통해서 사서집주와 논어를 접했습니다. 논어 맹자를 간헐적으로 독서하면서 대충 지내던 중 탄허스님과 홍익학당을 만나면서 그 모든 게 하나로 정리된다는 느낌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와 성리학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고 님의 복성서를 번역하면서 성리학이 불교의 다른 버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중용 첫머리가 기독교 핵심 사상과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곳에서 여러 번 거론한 적 있지만 주자의 중용장구 서문을 오늘 처음 읽었습니다. 제 생각엔 논어도 그렇지만 중용도 디테일에 빠져버리면 숲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자의 글을 읽으면 더 확신하게 됩니다. 주자가 처음 입문한 불교의 눈으로 유교 경전을 읽을 때 실천을 위한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즉 남명 선생처럼 언제나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종과 언제나 의를 선택함을 상징하는 칼이 실천의 핵심입니다.

요컨대 유교, 특히 성리학은 요순우 및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이 목표이며 거기에 이르는 길에서 중을 잡는 것(允執厥中)이 핵심이라는 것이 중용장구의 요지입니다. 여기서 중은 어제 논의한 희로애락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 즉 참나(性)로 읽어야 하고 거기에 이르는 방편은 남명 선생의 종이 상징하는 거경(居敬), 즉 명상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을 잡는다는 것은 일이 없을 때는 깨어있으면서 생각 없이 고요하되, 일이 있을 때는 고요함을 바탕으로 하여 일하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길게 썼지만 홀로 있을 때는 명상 상태로, 사회생활을 할 때는 매 순간 모든 생각을 하늘(신성) 또는 불성에 바치는 염송기도를 하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기술적이고 실무적인 일은 어떻게 하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큰 일을 홀로 결정해야 한다면 우선은 기술적 지식과 집단 지성을 활용하되 주역 정신에 따라 괘를 뽑아 최종 결정을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괘를 뽑는 능력이 없는 제 경우 호킨스 박사의 근육테스트가 그에 못지 않은 방편이라고 봅니다. 근육테스트는 반드시 파트너가 있어야 하기에 그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오링테스트를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이제까지는 명상도 안 했고 그때그때 즉흥적 결정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도 형편없이 했고, 은퇴 후에는 큰 실패도 했으며 현재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삶이라도 제대로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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