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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불선과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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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5 04:06 실체,영성,현대인

도덕적 권위: 커다란 갈등

오늘날 세상은 '도덕적 권위'를 위한 맹렬한 경쟁이 특징이다. 인기라는 게 타고난 허영심이며 타인에 대한 지배와 통제력이라고 인식된다. 이러한 경쟁은 모든 나라, 정치와 철학시스템 및 모든 문화에 적용되는데 그 모든 것이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따라서 모든 행동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하고 있다. 희생자연하는 것은 교활하고 은밀한 수단이며 그것을 통해서 '남을 그릇된 것으로' 심판함으로써 도덕적 협박과 착취를 꾀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디어가 이끌어가는 세상에서 괴상하고 환상에 찬 선언은 물론이고 아주 극단적인 행동마저 진실과 대등한 대접을 받는다. 이런 장치에 의해서 '정당하고' 우월하다'고 하는 부가된 가치를 가진 주장이 잇따라 발생한다. 그렇게 인정받으면 무슨 일이든 정당화되거나 변명이 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공개적으로 동정을 얻는다. 세상은 신성이 아니라 에고를 숭배하며 그리하여 과장된 자기애적 미사여구와 정신병 수준의 떠들썩한 거짓까지 받아들인다('언론 자유'라는 경건한 사자굴에 숨기). 이제 사회는 실상 이익을 위한 이기적 자기중심성에 지나지 않는 자화자찬의 과장된 도덕적 '권위'의 각축장이다.


정직성, 진실이나 온전성이 극히 저열하게 망가진 것까지 바로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은 의식 조사의 기초적 명제를 확인하게 된다. 즉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이 역사를 통해서 줄곧 그랬던 것처럼 숨겨진 원흉이며 그 때문에 전체 문화가 타락하고 '종교'의 미명 아래 무구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추이는 이미 기술한 대로 현대 기독교의 '자유화'에서 드러난다(Allen, 2006). 신도가 반으로 줄어든 것에 대한 대책인 자유화는 예수의 신적 육화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삼위일체나 성찬의 거룩함을 반박하고 그 대신 성차별적 정치이데올로기로 대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냉소적 코미디언이자 사회비평가인 데니 브루스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교회를 떠나 신에게로 얼굴을 돌린다."고 했다.)


'민감성'을 존중해서 '어머니 자연'은 '어머니-아버지-자연'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문법적으로 신을 '그'라고 할 때는 포괄적인 것이지 성을 구분한 표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맨'이란 말은 인류를 포괄하는 것이지 남성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때건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모두 1,000으로 측정되는데 그들은 신성을 희롱하는 것과 신성을 모독하는 것(20으로 측정됨)을 금했다. 그러한 중대한 원칙을 일부러 침해하고 무신론자 허버트 마르쿠제나 무신론적 마르크스 변증법(지수 135)의 산물인 정치 이념을 대안으로 삼는 것은 거드름이고 극단적인 우둔함이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고위성직자들이 그 종교 자체가 가진 진리의 기반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고는 도덕적 권위라는 허영에 대한 게걸스러운 탐욕으로 종교적 신앙뿐 아니라 온전한 이성을 모두 반박하며 그보다 못한 개념을 취한다. 또 진리를 뒤집어서 신(알라, "대자대비한 분")의 이름으로 무고한 자를 살상하는 일에 빠지는 것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 "그 목을 쳐라" (지수 10), "이방인을 보는 대로 죽여라" 등을 인용함으로써 90으로 측정되고 코란 전반의 고귀한 가르침을 완전히 부정하는 구절이 코란에 있다(야만성; Scheuer, 2007 참조). 


진실과 거짓을 바꿔치기함으로써 지상 삶이 지속적 공포, 위험 및 협박으로 바뀐다. 미국내 많은 회교사원이 테러리스트 이념의 훈련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King, 2007).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유전적으로 깊이 새겨진 프로이드의 '이드'는 신의 말씀이 되었다. 도덕적 권위로 여겨진 결과 모든 형태의 비행이 허용되고 심지어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다. 즉 미국 법정에서 '도덕적 권위'로 받아들여진 바와 같이 "행위는 상징적 언어"이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든' 모두 합법적이고 수용되는 것이라고 합리화됨으로써 법적 방어까지 받게 된 것이다. 


'도덕적 권위'에 의해서 환경주의자들은 방화를 하고 집과 건물을 날려버리며 '자유'를 위한 정치행동 기구의 설립자들이 호전적으로 모든 인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반역자들이 영웅시되고 폭동이 짐짓 고귀한 이상주의의 칭찬할 만한 표현이라고 선언된다. 자신의 고국을 버리는 것이 이제는 초애국적인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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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13 18:51 실체,영성,현대인

전통적 지침(2)

무하마드는 코란을 구술할 때 700이었지만 3년후 갑자기 130으로 떨어졌고 무기를 들었으며 629년에 시작한 '성전(聖戰)'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지하드[성전]는 30으로 측정됨).


또한 이슬람에 극심한 해를 끼친 것은 그 설립자가 20으로 측정되는 와하비즘(지수 30)의 출현이다. 와하비즘의 해로운 가르침은 사이드 쿠트브(지수 75)가 더욱 심화시켰다. 오늘날의 이슬람법(샤리아)은 190으로 측정되며 이슬람의 종말론적 예언은 70, '이슬람 지상주의'는 50으로 측정된다.


재미있는 것은 200미만에서는 겨우 40%의 사람들이 현대 이슬람을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200 이상에서는 80%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슬람의 근원적 과오는 신 대신에 무하마드를 숭배한다는 것이다(신[알라]은 무한대로 측정됨). 이어서 그는 전쟁을 통한 세속 권력의 유혹에 굴복했다. 이슬람의 타락에 대해서는 통합된 성전(Emerson, 2006)과 코란이 실제 말하는 것(Warraq, 2002)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테러리스트처럼 생각하기(German, 2007)에는 더욱 명쾌한 설명이 있다.


심지어 로마 가톨릭 교회도 부패나 사탄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예 종교재판). 이러한 일은 아주 최근 성직자들에게 유행병이 된 소아성애 현상에서 볼 수 있는데 그로 인해 많은 교구가 파산하고 폐쇄되었다. 이는 소아성애 피해자 수천 명이 제기한 소송으로 인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제도상 비극과 별도로 수많은 '타락한 구루'들이 있는데 이들은 아주 높게 측정되어 보통 500대 중반과 심지아 700대를 기록하였으나 그 역할에서 오는 유혹과 매혹 등으로 인해 바로 추락했다. 이러한 일은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을 가질 때 생기는 에고의 약점과 과오를 인지하지 못한 결과다. 그러한 유혹에는 성적인 것, 지위, 돈 등이 있고 영적 에고, 인기 및 '많은 추종자'로 인한 과대 망상에 빠지기 쉬운 점 등이 있다(그렇게 타락은 그들의 스승이 그런 위험을 사전에 경고하지 않은 데 기인한 것임).


영적 노력의 부침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인들이 묘사했다(예,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등). 붓다마저도 영적 결함을 노리는 '악마에 의한 시달림'을 겪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게세마니에서 피를 흘렸다. 매일의 영적 노력에서 죄책과 속죄행위나 영적 교만에 빠져들 유혹처럼 안팎에서 분심잡념이 스며들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현대 생활의 특성상 장애물이 발생하는데 그 방법으로는 주의력과 에너지의 잘 계산되고 조합을 이룬 유혹에 의한 것, 그리고 이성 및 실체 검증에 대한 불성실한 가치와 공격에 의한 것 등이다. 인터넷 '블로깅'은 정치색 있는 사탄과 루시퍼 에너지를 위한 사냥터가 되고 있다(예, 잘 짜여진 증오 사이트).


최근 조사에서 흥미 있는 발견이 이뤄졌는데 그것은 증오 발언과 태도로써 '인과'를 보는 관점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세계적 사건이 일견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증오의 '원인'이라고는 추정함으로써 선전을 하는 양의 탈을 쓴 행위인 것이다. 의식 조사 방법에 의하면 그 선후가 실로 그와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가지는 증오는 인격 특성으로서 이미 틀잡혀서 그것이 증오 연설을 통해 외재화할 명분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 속의 증오가 그저 외부 원인을 찾아 분출한 것이고 외부 사건을 '원인'으로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2차 대전에서 널리 있었던 일인데 군인들은 적을 '미워'했던 게 아니고 나찌와 일본 군국주의 모두 이데올로기상 교조와 강압에 복종해서 행동했음이 알려져 있다. 군인들은 악수를 나누고 서로간에 상대편의 용감성에 경의를 표했으며 어떤 경우는 이전의 적과 평생 이어지는 친구가 되는 일도 있었다. 우리는 가미가제 조종사를 무서워하지만 그들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행한 것에 대해 미워하지는 않았다.


미워하는 이들은 그저 증오성을 '좋아하고' 거기에 집요하게 매달릴 뿐임을 주목하시라. 증오하는 이들 가운데 어떤 경우는 크게 알려지는 데서 커다란 자기애적 만족을 얻고 유명해진 보수를 받는 전문가인 경우가 있다. 그러니 전쟁은 증오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무대와 죄를 전가할 핑게거리가 된다.


안전판과 방어책

광범한 의식 조사에 의하면 종교적 노선과 스승들의 진리 수준을 바로 알 수 있고, 역사적으로 혼란스런 가르침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영혼의 영원한 운명은 위기에 처해 있다. 따라서 진실한 스승과 가르침을 선택하는 것은 충분히 노력하고 바라야 할 일이다. 비교하자면 "170으로 측정되는 조종사가 모는 비행기를 기꺼이 탈 것인지" 주기적으로 자문해야 함에도 사람들은 영적 안전을 위해 해야 할 이 과제를 소홀히 하는데 이 일이야말로 육체적 생존보다 훨씬 더 소중한 일이다.


영적 진화에 대한 내면의 저항은 인간 에고의 구조상 당연한 귀결인데 왜냐하면 인간 에고는 그 한계와 과오에 빠지는 경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무지'). 이런 일은 에고가 외양에 잘 속고 본질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는 의식 측정이 그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예수, 크리슈나 및 붓다께서 주목한 진리에 대한 거대한 장애물이 더 이상 영적 진화를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양의 탈이 더 이상 속이는 도구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영적 사기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진실하며 거룩한 것은 그 측정치가 그대로 나오며 거짓된 것은 무구한 어린이의 팔에 의한 실험만으로도 밝혀질 수 있다(권능 대 완력 비디오 참조). [제17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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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12 18:46 실체,영성,현대인

도입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485년에 처음 발간된 유명한 고전인 신학대전(지수 730)에서 이성과 신앙을 통합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 위대한 저술은 신앙이 이성에 의해 강화되고 명료하게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명제를 확립한 것인데 이 명제는 수 세기에 걸쳐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둘 간의 갈등은 해소된다. 그는 나아가 지극히 진실하고 고귀한 의미는 이성이 계시의 빛을 받을 때만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가르쳤다. 계시가 주관적 각성과 참된 영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 이성은 단지 학자들의 학문적 대상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학문으로의 신학은 선형적 내용을 제공하지만 오직 계시만이 비선형적으로 필요한 맥락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다.


오늘날 구도자의 신앙은 통합해야 하는 이성뿐 아니라 미디어의 영향과 더불어 과학 기술의 지배를 받는 세상을, 신앙과 연관시켜야 하는 과제도 필요하다. 게다가 정치색이 가해진 철학적 왜곡과 오류가 만연되어 골고루 퍼진 영향으로 논리와 이성이 손상을 입은 결과에 따르는 침투가 있는데 그 때문에 성실성과 진실의 표준이 훼손되어 이제 실상 거짓이, 신뢰성 및 진실성과 법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워싱턴의 한 법정은 그 어떤 진술이든('언론 자유') 확인할 수 있는 실제 사실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명예훼손에 근거가 필요 없다고 판결했다. 따라서 공공연한 거짓말과 입증가능한 진실이 대등한 지위가 되었다(이 판결은 170으로 측정됨).


신앙이 역사적으로 기념비적 시기에 일상적으로 공격을 받아온 반면 이제 이성 자체가 바탕에서부터 훼손을 입어 사실상 실체 검증을 위한 인간 마음의 능력에 방해가 될 지경이다.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선과 악을 뒤집는 것은 유력한 학계(예 윤리적 도덕적 상대주의와 포스트 모던 해체주의)는 물론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뻔뻔하게 저지르는 바다.


감정으로 실체 바꿔치기

의식 척도에서 200 미만은 거짓과 부정적 감정을 가리킨다. 200 이상은 진실의 점진적 수준과 긍정적 감정을 표시한다. 400대에서 진실은 논리와 이성으로 드러나는데 논리와 이성은 당연히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 유아기는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철이 나야만 이성적 실체에 순종한다. 결국 이성적이고 실상에 맞을수록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이성과 감정이 통합된 사람이다. 그때 부정적 감정은 거의 사라지고 긍정적 감정이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


200 미만의 감정은 자기애적이며 동물성(소아)에 기원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감정은 종종 합리화와 변명거리가 되지만(‘인간이니까 뭘’ 하면서) 그 자체 칭찬받을 만한 게 아니다. 고삐풀린 정서는 유아적이며 공적 삶이나 신중한 대화에서는 부적절하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감정에 대해 책임질 능력이 있는 것으로 당연히 기대된다. 200 미만에서 ‘감정’은 생활을 지배하며 무슨 행동이든 합리화하려는 구실이 된다. 따라서 200 이상과 미만짜리 집단 간에는 중대한 소통의 벽이 존재한다.


자기애는 감정을 고무하여 이성을 제약하는 기반이 되게 하며 그것을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인구의 1%가 신을 거론하는 데 대해 '불편해' 하면 99%의 사람이 유신론자라는 사실은 당연히 무시당한다. 그리하여 소수의 정신병적 성향과 미성숙함 때문에 기괴한 다수결의 원칙이 생겨난다. 이러한 과정은 반대 시위의 98%의 뿌리이기도 한데 그런 시위에서 에고중심성은 비위를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는 '권리'로서 과대포장된다. 이어서 '권리'가 축구시합이나 파리 시내 폭동에서 드러난 것처럼 폭력, 폭동, 강도, 집단학살 및 파괴 등을 합리화한다. 자기애는 차별적 논쟁을 비롯해서 인종주의, 성차별, 종교차별 등으로 쉽사리 바뀌는 편파적인 고정관념이다. 


전통적 지침(1)

종교적(영적) 지혜에 따르면 부정적 에너지가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영적 진화를 저지하고 순수성과 진리를 공격했다고 한다. 이러한 에너지는 전통적으로 '악한 것', '사탄의 것', '악마적인 것' 또는 '저차원 아스트랄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신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기원함을 뜻한다. 진실에 반하고 진실을 눌러서 거짓으로 바꿔치려는 세력은 고전적으로 '루시퍼적' 에너지(신을 교만하게 반박함)로 불렸다. 순수성과 사랑을 파괴하려는 그러한 에너지는 '사탄에 속하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루시퍼적 에너지가 권력과 통제를 교만하게 추구하는 반면 사탄에 속하는 에너지는 성적 노예상태와 신성모독을 자극하고 가학증, 폭력, 부패, 전쟁, 파괴 등에 관여하도록 유혹한다. 이 두가지 에너지는 유혹을 이용하며 양의 털 속에 숨기 잘하는데 심지어 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도 그러하다(유명한 살인범인 샘의 아들처럼 정신병 상태인 경우가 예외적인 일도 아님).


물론 이 두 세력은 오늘날 사회에서 생생히 볼 수 있고 전파되었으며 그 충격은 미디어에 의해 크게 확산되고 힘을 얻고 있다. 두 추세는 세계적 지도자와 카리스마 있는 연예인들에 의해서 더욱 매혹적인 게 되고 있다. 모든 파괴적 추세는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으로 인해 쉽게 속는 약점과 유혹에 잘 넘어가는 약점을 겨냥하고 있는데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에서 이러한 추세는 발생되며 스스로 강화된다.


종교 역사를 통해서 신을 궁극의 적으로 보고 그에 따라 종교적 진리를 끌어내려 신을 사탄의 이미지와 개념으로 재정의하려는 에너지의 침투를 발견할 수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 이은 기독교의 큰 추락(900을 넘는 수준에서 400대로 떨어짐)을 주목하시라. 그 추락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예를 들면 신약(계시록을 제외하면 800으로 측정됨)에 계시록(지수 70)을 포함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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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09 16:31 실체,영성,현대인

수용하기와 유머

세상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비와 포용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면이 겸손한 데서 나오는데 겸손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신께 바치고 그만큼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매우 가치있는 영적 도구 가운데 역사적으로 잘 거론되지 않는 게 유머다. 코미디는 외양과 본질 간의 비교에서 나오며 그것이 해방을 주는 것은 애매모호함을 포용한 때문이다.


유머는 인간의 한계와 취약점이 태생적임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비롭기 때문에 경멸이나 악의와 크게 다르다. 따라서 '세상을 가벼운 겉옷처럼 걸치는 일'에 도움이 되며 바람에 눕는 갈대와 같기 때문에 강직해서 부러지는 대신 살아남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농담을 통한 폭소에서 나오는 안도감은 갈등의 해소에 대해 기뻐하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능력은 긍정적인 자기 존중에 필수적이다.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아주 중요한 듯 반응하는 것은 에고의 자기애적 중핵에서 나오는 허영의 결과다(예, '예민하거나' '기분이 상하는 것'). 유머는 도덕적 심판 없이 체험과 사건을 재맥락화하며 이어서 기쁨을 촉진한다. 유머는 철학적 수용으로 발전하며 치유하는 힘이 있다. 나아가 고통, 갈등 및 부정적 감정을 줄여준다.


삶이란 유머가 없으면 풀리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의혹으로 가득하다. 현명하게 사용된다면 유머는 포용을 통해서 불만스런 원한이나 패배감보다 평화와 적응력이 커지게 한다. 유머에 의해서 우리는 수치, 분노, 원한이나 자존심 추락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하고' 내면의 존엄을 유지한다. 유머는 인간의 취약성이 인간 조건에 태생적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독자적인게 아니라고 재맥락화한다는 점에서 지혜를 향상시켜준다.


코미디언 잭 베니가 지독한 구두쇠인 어떤 유명한 인물을 연기했다. 강도가 총을 들고 길에서 그를 세우고 말했다. "돈을 내어놓을래 목숨을 내어놓을래" 베니는 머뭇거리다 이어서 천천히, 하지만 신중하고 생각에 잠겨 말한다. "글쎄, 지금은 너무 이른데요." 물론 여기에서 그는 너무 돈에 집착해서 그저 돈만을 위해서 끝없이 생명과 기쁨을 희생하는 인간의 성향을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유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자면 냉소적인 기분나쁜 유머는 극히 무서운 인간 체험에서조차 양면성을 끌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황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고통을 줄일 수 있게 해준다. 유머는 이렇게 세속적 집착과 환상같은 욕망에서 풀려나서 그 상황을 초월하도록 도와준다. 


유머는 자유와 기쁨의 표현이며 폭소는 생물학적으로 치유를 가져온다. 죄책과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통회가 지난 세기에 강조되었지만 의식척도상 그런 것들은 매우 낮은 기록을 보인다. 신은 의식 지도의 바닥이 아니라 꼭대기에 있다. 신앙, 사랑 및 기쁨은 고귀한 길이며 비관과 절망은 슬픔과 낙담으로 이끌 뿐이다. 자기혐오가 있으면 신의 창조가 반영된 바인 참나 각성을 알지 못한다. [제16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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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7.04.09 07:31 실체,영성,현대인

선악의 대립

심판주의가 인간 심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아무리 애써봐도 그것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기 때문에 난공불략이 될 수 있다. 선악 이분법은 유아기 초기에 주입되어 일생을 통해 강화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그저 '바람'과 '바라지 않음'이라는 감정적 색채를 띠고 표현된다. 이런 식으로 바람직한 것은 '좋은 것'이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과 '불쾌한 것'은 '나쁜 것'이 된다. 이것이 도덕 및 행동 기준의 기반이 되는데 서로 다른 사회부문과 문화에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그러나 이분법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근원적이며 동물집단의 행동에서도 목격된다.


이원성은 포상이나 징벌로 강화되는데 상벌은 만족이나 실망으로 내면화되며 자존심의 확대나 추락으로 귀결한다. 도덕이 성립하는 과정은 인간 사회에 내재적이며 이미 언급했듯이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 과정은 인간 뇌의 신경구조와 생리에 고착될 확률이 커진다(Gazzaniga, 2005; Ackerman, 2006). 


가장 원초적인 생명체는 외부에서 필요한 에너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생존하거나 사멸했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 성공 대 실패, 선악 및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하는 것은 유기체가 타고난 것이다. 동물계의 집단 행동은 인간 행동과 거의 같은데 그것은 생존, 영토확장 및 지배력(헤게모니)을 위한 국가간 권력 투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골치아픈 '선악' 이분법은 모든 사물과 사람이 그저 있는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실로 아주 간단히 초월할 수 있다. 즉 사람은 그저 어떤 순간에 도달된 상태이며 있는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도덕적 분류는 '무엇무엇일 수도 있다'는 가설적 견해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다. 사람이 실제 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가설적이란 것은 기초적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상적인 그림일 뿐 언제나 헛된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거짓으로 측정된다.


유효한 선택지는,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스런 말이 입증하듯이 지배적인 확률 범위에 의존한다. 내면에서건 외면에서건 나이나 환경이 달랐다면 다른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의 그 사람이 실수했던 때 존재한 그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은 죄책과 자책을 줄여준다. 그러나 그 사실이 반드시 카르마상 책임이나 결과를 제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질책을 경감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타인이, 실체에 관한 나의 해석과 기준, 도덕과 행위규범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해로운 일이 된다. 투사된 도덕주의는 언제나 '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종종 원망, 증오, 원한이나 심지어 보복과 전쟁으로 이어진다(예, 철없는 미국인은 다른 모든 나라가 민주정이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서 습관적으로 이분법적 판단에 빠질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 결과 내적으로 커다란 평화가 온다. 


국제관계와 정치에서는 한사람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세계관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종종 무시된다.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면 자비심이 일어난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세상이나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그 사람들에게 반대함으로써 잘못됐다고 판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다"(Richmond,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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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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