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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운
'종심소욕불유구'로 가기 위해,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 영성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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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5 10:46 단상

어제 저녁은 아내와 저녁을 먹는데 일년의 반은 일해야 하는 내 신세가 안되어보였는지 "노후에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합니다. 저는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여 지금 이렇게 되었으나 현실에 불만이 없을 뿐 아니라 이승이 최종 종착지라면 나는 확실히 루저지만 이곳은 그저 지나가는 여행지이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생명과 의식은 부단히 이어진다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이자 우리의 직관에 맞습니다. 더구나 임종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관계가 아니라 의식수준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이승은 학습장소이자 훈련장입니다. 도량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누차 인간 행복을 위해서는 세상의 개조 개혁으로는 부족하며 내면의 천국을 이곳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면의 천국 찾기에 몰입하고 실천했던 전통이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고 그 방편이 명상이라는 것을 앞에서 논증했습니다. 즉 생각이 끊어진 자리가 세상의 근본이라는 것(中也者 天下之大本也)을 설명했습니다. 홀로 고요히 명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일상 속에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 하는 것을 적어보겠습니다. 불가나 유가 모두 공통되지만 유불도를 잘 종합하고 있는 채근담을 보면 일이 없을 때는 고요하되 깨어 있는 정신으로 비추어야 하고(宜寂寂而照以惺惺) 일이 있을 때는 깨어 일하되 고요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宜惺惺而主以寂寂)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홀로 있을 때나 사회 생활을 할 때나 내 생각이란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요체입니다. 그 비결로 제가 발견한 것이 염송기도입니다. 이 방편은 천주교와 불교에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무한한 빛이며 생명(아미타)인 의식의 장(佛)에 내 모든 것을 의탁한다는 뜻을 가진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어떤 수단을 택하든 24시간을 통틀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신께 또는 비로자나불께 바쳐 내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게 생각이 끊어진 경지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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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4.02 09:15 단상

어제는 혼자 24시간을 근무하면서 다시 한 번 성(誠)과 중(中)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돌아보면 혼자 있을 때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재미있는 오락거리를 찾거나 고요를 깨는 무엇을 합니다. 그 결과 직장 말년부터 약 10여년 엉망진창 삶을 경영하여 깊은 절망상태까지 갔었습니다. 요컨대 적당히 세상에서 통하는 정도의 도덕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바닥에서 떠오른 게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하겠다(至誠)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영성은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愼其獨)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혼자 있을 때 삼간다는 것은 바로 중을 지킨다(守其中)는 것이고 중이란 희로애락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喜怒哀樂之未發)를 말하는 것이어서 바로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키워드이기도 한 성(誠)에 대한 요지입니다.


중용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밝게 드러나고 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넓게 퍼지는 것이니(不覩之覩, 見莫大焉, 不聞之聞, 聞莫大焉) 경계하고 두려워하여야 한다(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을 실천할 것인지 자세히 안내하는 공부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작해야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세상은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는 동안 사기를 당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고 속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재앙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성이란 고요한 상태(誠者定也)라 하여 성의 실천은 바로 명상에 있습니다. 명상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항상 접속하여 흔들리지 않고 선만을 행하게 합니다(擇善而固執之). 그러니 거짓 없음(至誠)이란 바로 수기중(守其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용은 중(中)이 우주의 근본(中也者, 天下之大本也)이라고 선언합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이것을 흉내낸 말입니다.


요즈음은 나머지 삶만이라도 흑자를 기록하는 삶이 되기 위해서 매일 명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혼자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잘 해나가는 편입니다. 그런데 실은 명상이란 의식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첩경이어서 날로 삶이 개선될 뿐 아니라 결국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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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3.31 08:00 그리스도의 편지

그의 일상 속으로부터 오로지 찬양과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을 지닌 밝아진 영혼(enlightened soul)이 잠을 깰(wake up)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일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 일을 행할 의욕과 에너지를 지닌 것에 감사를 올리면서 마음 속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시작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행하러 나설 것이다. (526쪽)

-- 어제에 이어 '에고로부터 해방(freedom from the 'ego')'을 성취한 사람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신의 현존인 참나는 우리의 에고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에고만 치우면 신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스승들은 가르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면 태양빛이 환해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 상태와 가장 비슷한 경우가 아이 마음(赤子之心)이기에 노자를 비롯한 동양 영성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텅빈 마음이어서 일이 있으면 그림자처럼 일이 비추지만 일이 지나가면 다시 텅비고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불가에서 이 경지는 일이 없는 상태(没事)라 해서 북한과 중국에서는 인사말로 정착되어 있지요!

마음은 세상사, 즉 컨텐츠들에서 떠나 하나인 존재 자체, 즉 맥락과 하나가 되어 있어 특별히 마음이 고정돼 있는 사물이나 장소가 없습니다. 신의 현존, 신성을 항상 느끼기 때문에 언제나 '하늘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고 외치고 싶은 환희와 평화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요구되는 일을 하되 애덕의 요구 때문에만 움직입니다. 그러니 저항 없이, 망설임 없이 주어지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은 은총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우리처럼 '편지'의 인도대로 꾸준히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열망과 결단과 기대입니다. 나날이 밝아지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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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목운
2018.03.26 05:28 그리스도의 편지

기도는 다시 한 번, 신성이 완전한 사랑이며 우주적 지성이어서 창조 법칙과 작용의 주체이시고 또한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시며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반복합니다. 스승들 용어로 하면 모든 드러난 것(manifest)과 그 배후(unmanifest)가 모두 신입니다.

또한 이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신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주시기를 기원하며 우리 생각은 신성에 집중합니다. 그것이 마치 탐조등을 비추며 신을 찾는 행위와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꾸준히 노력하는 동안 바깥 사물로 향하던 우리 마음은 더욱 신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변하며 신은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마음과 심장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즉 신을 만나는 일은 상호작용임을 암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온 존재와 매 순간의 삶 모두를 신의 보살핌에 완전히 맡기면서 기도를 마칩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기도 첫머리와 끝머리를 합치면 범어인 '나무아미타불'과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아미타 부처'란 무한한 빛이며 영원한 생명 자체를 일컫는 말이며 '나무'란 의탁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반복하자면 '아버지-어머니-생명이신 이여, 제 자신과 제 삶을 당신 보살핌에 내어 맡기나이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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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5 07:41 그리스도의 편지

오늘은 명상기도를 해설해 볼까 합니다. 이 기도는 어쩌면 책 전체의 핵심을 요약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가장 먼저 신의 속성이 무조건적 사랑임을 말합니다. 즉 신성이란 우리에게 생명이며 건강이고 가장 숭고한 영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를 지탱해주고 보호해주며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며 안내자가 되어 줍니다. 

이러한 신성에 대해 우리는 그 실체를 계시해 줄 것을 기도합니다. 그 실체는 무소부재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물론 바로 내 주변에서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혹시 이 계시가 교회나 절에만 드러나고 개인은 다시 그러한 종교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독실한 신도일지 몰라도 영성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성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모든 스승들의 표현이 일치하는바 밝아짐이라 합니다.

밝아짐의 성취조건은 소아(小我) 또는 에고 포기에 비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우리가 '완전히 밝아져서 신성의 현존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믿기만 하는 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믿고 안다고' 기도합니다. 영성 전통에서 안다는 것은 체험하는 것, 또는 그것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성을 체험하고 신성이 우리를 독차지하여 우리 존재가 신성으로 가득 차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성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는 목적이라고 선언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밝아짐의 조건은 거비정화(去非淨化, purification), 즉 아닌 것(낮은 감정, 즉 情)을 떠나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밝아지고 비추는 단계, 즉 진덕명화(進德明化, illumination)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점진적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요! 내일 후반부를 해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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