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제사장과 성인

목운 2020. 8. 2. 05:36

아래 붙인 사진은 자금성의 황제가 앉는 자리 모습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그랬지만 적어도 중국의 경우 당나라까지는 인민들에게 왕즉불 사상을 깊이 세뇌함으로써 통치 계급의 특권을 합리화하였습니다. 서양의 경우는 상당 기간까지 왕권신수설이 같은 기능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경우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제사장 또는 제사장 계급이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그 기능을 했던 것입니다.

두 사상은 특별히 제사장 계급의 유지를 위한 경제적 부담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한유와 이고가 앞장서서 유학으로 대체하는 노력이 있었고 서양의 경우는 계몽사상의 출현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의 경우만 보면 원시 유학에 나오는 서경 16문자의 실천 요강인 윤집궐중에 의해서, 왕을 바로 성인 겸 제사장으로 만듦으로써 왕즉불 사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종묘 제사가 나라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된 것입니다. 고려말에도 그랬지만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불교가 나라 경제에 큰 부담이 된 것이 척불의 가장 큰 명분이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 말기에 불재(佛齋)에 비판이 집중된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각설하여 동아시아에서 통치이념을 위하여 계속 호명된 성인에 요와 순이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게 왕들에게 요청된 것은 왕이 바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핵심 실천 사항이 윤집궐중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윤집궐중에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실천 사항이 성인이 되기 위한 독서(Lectio Divina)였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윤집궐중의 실천인 반일정좌에 이어 반일독서를 주장한 것입니다. 요컨대 세상에의 참여를 뜻하는 입전수수를 말하지 않는 불교가 없듯이 말 그대로 반나절을 정좌하고 반나절을 독서하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두 가지가 성인이 되는 핵심 요소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왕위를, 요임금처럼 혈통이 아니라 성인 여부에 따라 이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편의상 혈통으로 하기로 하되 왕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 유학의 타협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 현판은 왕을 위한 것이건만 왕은 제대로 아니하고 실제로는 통치계급과 인민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로 유학의 이념으로 다스려진 중국과 한국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진화상 오늘날 주권자 모두가 저 이념을 실천해서 성인이 되자는 것으로 하면 설득력이 생길 수도 있겠다 여겨집니다.



저는 전 세계 모든 교육과정에,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자고 하는 것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정에서는 모든 이들이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훈련과정으로 유학에서 이미 결론이 난, 진아(眞我) 자리 또는 심진여(心眞如)에 몰입하는 윤집궐중과 성인이 되기 위한 꾸준한 독서 과정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지상에 천국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합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개인 차원에서는 노력하는 만큼 개인과 그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분명한 개선이 있다는 것을 계속 말하는 것이 제 소명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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