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완전한 순명과 고통

목운 2020. 7. 5. 06:09

에크하르트의 '훈화'를 대학-중용의 가르침에 비추어본 글을 여럿 올렸더랬습니다. '신적 위로의 책' 또한 우리 유학에 조응하는 바 큽니다. 즉 고통에서 위안을 구하는 처방으로서 완전한 순명과 천인합일을 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자님이 말씀하신 이순(耳順)이란 천명을 완전히 알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라고 봅니다. 이는 불가의 여섯 바라밀 가운데 인욕바라밀의 완전한 실천이기도 합니다.

에크하르트는 고통과 불행 가운데 최선의 위로는 "모든 것을 우리가 원하고 원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이 신의 의지로부터, 신의 의지와 함께 그리고 신의 의지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안다면 그대도 실로 그것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그 일이 자신에게 손해와 저주를 안겨주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신과 함께 같은 것을 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선한 사람의 의지는 신의 의지와 전적으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합니다(앞의 책, 134쪽).

사정이 그러하니 내가 저지른 범죄, 또는 내게 이뤄지지 않은 일 등 모든 부정적인 일들마저 그와 달리 일이 진행되었기를 바라면 순명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제대로 순명하게 될 때 불행이 행복처럼, 고통이 마치 사랑처럼 느껴진다는 아이러니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받지만 어떠한 고통도 신의 의지 안에서 취하고 끌어내게 되며 그러한 고통은 완전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고통은 가장 순수한 신의 선성(善性)과 기쁨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도래하고 솟아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이상 136~137쪽 참조).

보살도를 열심히 닦아 그리스도의 세례와 같은 상징을 가진 관정지(灌頂地, 머리에 물을 붓는 경지)에 이르면 이미 이원적 분별을 벗어낫기에 나와 남의 구분도 없을 뿐 아니라 원수와 은인의 구분도 없고 선과 악의 분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용서하고 말 것도 없으며 원수를 용서하고 말 것도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 무엇도 결핍이란 없으며 바람이란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크하르트 가르침의 요지를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Needing nothing attracts everything!)는 말로 요약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도덕경의 함이 없지만 모든 것을 한다(無爲而無不爲)는 경지와도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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