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입문

고통에 대한 근본 처방

목운 2020. 7. 4. 08:45

'신적 위로의 책'은 고통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처방은 통속적으로도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처방을 제시하면서 보다 심층적인 데까지 다룹니다. 그러길래 거의 700년에 가까운 시간의 검증을 견디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통속적 처방으로는, 100마르크를 가진 사람이 40마르크를 잃어버렸다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60마르크를 "바라보고 그것에 고마워하고 얼굴을 맞대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갖고 좋아서 수다를 떤다면 그 사람은 확실히 위로받을 것(이부현 옮긴 책, 130쪽)"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큰 병에 걸렸으나 간호와 시중을 충분히 받는 부자가 "냉수 한 그릇 떠다 줄 사람도 없는 가난한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자기 고통만 생각한다면 무슨 위로가 있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면하는 방법으로 손실에 집착하지 않을 것과 자신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을 생각할 것을 제시합니다.

이것만이라면 그의 가르침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보다 깊이 들어가면 이해하기 곤혹스런 면이 있는데 그만큼 더 큰 진리에 터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사람들은 드러내지 않거나 본인이 모를지라도 고통과 손실에서 즐거움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이란 실상 최고선은 추구하기에 너무 어렵고,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으니 그냥 가시 세계 내에서 적당히 만족하겠다는 결단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최고선을 신적인 것으로 바꾸면 에크하르트 말대로 "신과 낯설고, 신과 같지 않고, 철저하게 신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은 위안이 아니라 고통만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위 책, 132쪽)"

"그러므로 외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위로를 줄 수 없는 것에서 위로를 찾고 거기에 관해 많은 말을 하면서 즐기는 것은 신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는 것, 나를 지켜보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내 가운데 작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세상 것이 아닌 신적인 것만을 추구한다는 근본 결단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6:25로 바로 이어지는 결단이자, 신명기 6:5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신을 사랑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전통에서는 먼저 천작을 구하고 인작은 거기에 따르게 하라는 맹자 말씀과 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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