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모세 패러다임과 아론 패러다임

목운 2020. 6. 28. 08:42

13세기에 "브뤼헤 상인들이 너나 없이 자신의 성(姓)에 네덜란드어로 '돈지갑'이란 말을 붙여 썼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고 하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쓰는 성인 김(금)씨도 같은 맥락에서 정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 삶이란 누구에게나 그리고 고금 불문하고 가시적 삶에 대한 것이 대종을 이루며 옛날에 부귀가 제일 가치였다면 오늘날은 성공이 제일 가치가 되었다고 보면 좋을 겁니다. 모세나 그리스도가 혁명적인 것은 가시적 삶에 대항한 비가시적 삶, 즉 영의 삶을 대척점에 세웠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요컨대 모세가 단죄한 우상숭배(아론의 패러다임)란 가시적 가치를 모든 결정의 최종 잣대로 삼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닙니다.

신약은 아론의 가치를 요한1서 2:16에 잘 정리하고 있는데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 또는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립하는 최종 기준으로서 항구한 가치 기준은 제가 볼 때 사랑과 진리입니다. 어제 읽은 아댜샨티 글에선 사랑과 진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the front and back of your hand)고 했던데 비기독교적인 말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말하면, 사랑과 진리라 봅니다.

부연하면 사랑이란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慈悲)인 한편 완전한 투명성(誠 또는 公) 또는 진실이 그 이면일텐데 이들을 최종가치로 두는 게 영적 삶 또는 비가시적 삶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제가 볼 때 아론의 가치는 부귀 또는 성공인데 이것과 완전히 단절코자 하는 것이 소승이라면, 세상에 아무런 집착이 없을 뿐 세상 것을 써서 세상에 인과 자비 또는 투명성과 진실을 실천하는 것은 대승입니다.

그래서 대승은 먼저 완전히 깨달아(상구보리) 세상을 구제코자(하화중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구잡이로 섞이고 심하면 모세를 내세워 아론의 삶을 구하는 데 써먹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선현들은 그런 일은 도적질이나 다름 없다고 하였으며 맹자는 사람들이 천작(天爵)을 내세워 인작(人爵)을 구하는 일에 매진한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도 그와 똑같은 일에 빠져 있어서 임종을 기다리는 신세나 다름 없습니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극복의 필요성과 대안  (0) 2020.07.15
아담 스미스와 수양론  (0) 2020.07.08
쉽게 풀은 윤집궐중  (0) 2020.06.26
죽음과 성장의 관계  (0) 2020.06.20
팬데믹에서 중요한 것  (0) 2020.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