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제사의 의미

목운 2020. 2. 13. 07:53

우연히 BBC 특선 다큐 제의(ritual, 祭儀)를 보았습니다. 수백만에서 수천만까지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겸 제의를 취재했더군요. 인원수 순서로 보면 힌두교, 이슬람, 천주교의 제의와, 중남미를 비롯해서 일본과 유럽의 마을 축제 등이 있었습니다. 탈종교적인 것으로는 라스베가스 사막에서 몇주 동안 성전을 지었다가 불태워버리는 축제도 있었습니다.

저 다큐를 근거로 제가 유추한 바에 따르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소망에서 모이는 것인데 그것은 개인보다 위대한 초월적 존재와의 일치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치유를 받고 고통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평안과 복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부 제의가 불을 숭상하면서 밝아짐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고대의 제의에 비해 진보했다고 하면 산 제물의 심장을 바치거나 피를 보는 과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주교 제의나 유교의 종묘 제의를 보면 모두 피를 바치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천주교의 경우는 유태부족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중남미 문화에서도 그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요! 극단적인 죄의식 내지 새도매저키즘과 그 의식 수준이 비슷하다는 증거입니다.

일부 제의에서 보면 피를 바치는 대신 불이나 빛을 숭상한다는 점에서는 배화교 정도의 진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제의의 경우 피부를 뚫는다든지 매를 때린다든지 해서 그 지향은 고귀할지언정 고통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저열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결론짓고자 하는 바는 밖에서 신인합일을 구하고 궁극의 지복을 찾는 모든 시도들이 오늘날 종교라는 별 효과 없는 껍데기와 여러 제의를 유산으로 남기고 있지만 진정한 제의란 무엇이냐 하면 제천(祭天)을 그 어원으로 하는 선(禪)에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요히 앉아 있는 것(靜坐)을 기본으로 하면서 끝없이, 어쩌면 고통스럽게 내면을 닦아냄에 따라 조금씩, 때론 한꺼번에, 밝아지는 데에 참된 신인합일과 평화와 지복이 있다는 게 21세기 이후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93%가 전쟁의 역사이고 그 주된 원인이 유치한 수준의 의식에 머물러 있는 종교들(대부분 고귀함으로 치장하지만 속은 모두 낮은 수준임)에 있기에 이제 종교를 초월할 때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만 저런 대형 제의들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깨어난 개인들이 이심전심, 때로는 거대한 집단을 이루며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변혁의 파급력을 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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