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복을 짓는 비결

목운 2020. 1. 26. 07:02

은퇴후 삶을 논하면서 매일 무슨 글을 쓸까 하는 것이 중요한 소일거리라는 걸 빠뜨렸습니다. 사람마다 바깥조건은 천차만별일지라도 내면의 작업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 내면에 있었던 일을 나눔으로써 세상의 의식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소중한 일이 될 것입니다.

몇십년 동안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제법 읽었고 종교적 실천도 했지만 왜 막장에 이르렀을까요? 한 마디로 안이하고 게으른 데다 교만한 때문이었던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불가의 삼독 가운데 치심이라 해야 마땅하지 싶습니다. 더구나 안팎이 여일하게 투명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그렇게 잘못 산 이들이 맞닥뜨리는 게 세 가지 재앙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바로 건강, 재물, 인간관계 가운데 하나 이상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때 제대로 된 결단으로 미로를 되돌아나오듯 방향을 바꾸어 한 걸음 한 걸음 거꾸로 나아가는 것을 '메타노이아(회두)'라고 하지요.

제 경우 비참한 지경을 당하여 생사를 벗어나고 싶다는 맘이 들었고 철저히 투명한 삶을 살자고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를 잡듯이 읽고 실천했습니다. 돌아보면 들에 싹이 돋는 것보다 고통스럽고도 느리게 환경이 개선되었습니다. 여전히 굴곡은 있지만 꼭 필요한 도움이 적절한 때 생기면서 모든 것이 개선되는데 바로 저 세 측면에서 개선 향상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편두통이 없어지고 소득이 늘어나면서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던 교우관계가 풍요로워지고 새로와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아의 세계관이 참나의 세계관으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소아의 세계관이란 유아기 이후 입력된 모든 프로그램인데 대표적인 게 경제학 원론에 나오는 희소성 원칙입니다. 그러나 참나쪽에서 보면 여태까지 삶에서 필요한 게 채워지지 않은 적이 없으며 집단의식이 한 마음으로 결단하면 전 세계 모든 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시간 현재 전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의식이 향상하는 길을 가는데 어제 오늘만 해도 제가 더 내버려야 할 것과, 사랑이라는 존재상태(호킨스 의식지수 500)로 가는 데 부족한 것을 알려주는 신호를 만나는 만큼 죽는 날까지 최선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의식(또는 붓다 의식)에 도달코자 애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계속 풍요 이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지금 바라보는 모든 현실은 바로 직전까지 모든 의식이 집단으로 결정한 것의 그림자일 뿐이니 그것마저 내 책임으로 여기고 또 한편 모든 것이 완벽하니 현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평온하게 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 벗님들이 복짓는 일에 보탬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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