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왜 닦아 나갑니까?

목운 2021. 1. 16. 08:49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은 ‘하느님이 주재하는 존재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름답고 영광에 찬 것입니다. 사랑이고 관대함이며 자신을 돌보듯이 타인을 돌보는 것이며 타인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무판단의 경지입니다. 그들도 ‘신의’ 자식이며 동등하게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환희이고, 그치지 않고 넘쳐나는 에너지인 생명이며 건강이고, 욕구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모든 필요한 것이 채워지는 상태입니다.” (171-172쪽)

천국이란 의식의 존재 상태입니다. 지상에서 도달한 존재 상태가 몸을 벗어버리는 순간 지속되기 때문에 임종시까지 최고의 존재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오행, 즉 선정, 지혜, 정진, 보시, 지계, 인욕을 쉬지 않고 닦아 최고의 보살에 이르는 일을 보살도라고 해서 평생 닦을 일로 보며 유가에서는 수행 공부에 뜻을 두고(志學) 칠순에 도달할 최고선을 목표로(止於至善) 가는 일을 공자께서 손수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닦으면 닦은 것에 비례해서 위에 거론한 혜택들을 누리게 되며 점점 밝아지면서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을 점점 체험하게 됩니다. 즉 닦은 만큼 황금률을 실천하기 수월해져서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게 되는(己所不欲勿施於人) 것은 타인과 자신을 똑같이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신 의식과 하나 되기 위해 좌선하며 노력함과 동시에 타인에 대해 판단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연습할 것입니다.

에고가 사라져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에고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게 없는 것은 초월 의식 또는 상위 자아, 또는 참나 쪽에서 무소불위한 작용을 대신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교에서 가르치는 무위(無爲)와 무지(無知)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에고 차원에서는 행하는 바도 아는 바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신 의식에게 맡겨서 자신의 의지로는 하는 게 없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습니다(無不爲).

제가 이러한 것을 조금이라도 체험하고 글을 쓰려고 했으나 아직 도달하지 못하여 자신의 체험을 적은 호킨스 박사의 고백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신의 <현존> 안에서의 궁극적 깨달음과 앎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써 무한한 보호가 있는 무한한 안전과 무사함이 보증됩니다. 고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이 경지를 알고 있었으니 그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 합니다.

다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예로 든 것처럼 매일 목마른 자처럼 갈구하며 악기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글쓰기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닦아나갈 때 멀리서 빛을 보는 사람처럼 조금씩 조금씩 체험의 정도가 커지면서 결국 골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전통에서 명백히 기술되고 있는 것은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닦는 일의 주체가 내가 아니고 신 의식이 되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큰 희망과 결단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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