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쌍둥이 추동력

목운 2020. 12. 14. 05:53

"사실은, 그가 더욱 성장하여 세상일에 더 능숙해질수록 그의 쇠사슬과 가죽끈은 그를 ‘결합-배척’의 쌍둥이 <추동력>의 손아귀 속에서 더욱 꼼짝달짝 못하도록 옭아맨다.“ (59쪽)

신학이 지복직관이라 말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견성과 다름없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 어쨌든 그리스도는 존재의 근원을 ‘바로 보는’ 체험을 하고 환희와 놀라움에 빠졌으나 그때 바로 든 생각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질병과 불행과 궁핍에 시달리는지” 하는 것이어서 싯다르다 붓다가 도달한 지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무한한 창조력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피조계, 특히 인간계에 질서와 사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편지’는 ‘피조물이 개체성을 취할 필요가 있었고 개체성을 보장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힘, 또는 추동력(basic impulses)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갓난아이일 때 우리는 창조력의 살아 있는 형체로서 순수한 빛의 상태였지만 성장하면서 오감이 보여주는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자신의 믿음을 형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습관적 생각, 선입견 등이 그러한 존재 상태를 흐리게 하는 쇠사슬과 가죽끈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의 위대한 스승들이 이구동성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갓난아이처럼 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신적 존재이지만 개별화 과정 또는 몸의 진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분리와 경쟁 때문에 우리는 쉽사리 이기적 욕망에 빠지고 다른 존재를 견제하는, 심하면 미워하는 마음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것이 불행으로 가득한 감옥처럼, 또는 가죽끈과 쇠사슬처럼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처방 역시 불가의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존재에 관한 근본 진실>을 깨닫는 데 있다고 봅니다(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