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편지

너무 간단한 공부의 핵심 요결

목운 2020. 12. 18. 05:27

"내가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의지를 버리고 아버지를 향해 내가 떠맡은 모든 일에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70쪽)

앞서 거론한 개체화 또는 가시화 과정에서 고통이 생긴다고 했는데 거기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 할 수 있는 구절이 이어지므로 인용합니다. "개체화 과정은 인간 행동에 '당기기와 밀어내기', 즉 '주기와 받기'라는 역학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이러한 성질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좀더 나은 삶의 길을 추구하도록 재촉한 것도 바로 그 고통이 아니던가? 나는 인류의 불행도 인간 존재의 설계도상 그만의 역할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어서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처방이 제시됩니다. 그것은 인간과 '아버지-창조 의식' 사이에 장벽을 친 것이 바로 '인간 욕망의 중심점'이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동양 영성의 핵심 가르침이기도 해서 계속 옮깁니다. "내가 '아버지-의식'의 흐름 속에 남아 있는 한 그 어떤 해로운 일도 나를 범접하지 못하며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충족될 것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 일하시는 '아버지-의식'이 치유와 위로를 절실히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실 것이었다. (71쪽)"

이 점은 마태복음 16:24절의 취지이자 유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불교의 멸정복성(滅情復性)과 일치하는 가르침입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한 실천 또한 일치하는데 그것은 "(내 인간적) 반발심을 극복하고 내면의 소리에 언제나 귀를 기울여 '아버지의 더 높은 뜻'을 따라야 하는데 이 '더 높은 뜻'은 내 최고선을 북돋아주는 데만 전적으로 쏟아부어지는 '완벽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 행동을 지배해온 '소아의 뜻'을 계속 따라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았다."고 하여서 저는 이 대목에서 마치 대학-중용을 읽는 듯했습니다.

중용이 얘기하는 천명(天命)이 바로 아버지의 더 높은 뜻이며 최고선을 지향하는 것이 지어지선이며 완벽한 사랑은 어짊(仁)과 다름 없습니다. 제가 공부한 바의 불교와 유교는 모두 언제나 천명을 듣고 따르기 위한 정좌(靜坐), 그리고 천명을 올바로 이해하고 잊지 않기 위한 경전 독서를 공부의 핵으로 여기고 있는데 '편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완전히 이완하면서 깊은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식의 흐름 속에서 살고자 하는 실천이자 결단입니다. 평생 그렇게 노력할 때 '소아의 뜻'은 굴복할 것이며 세상에 치유와 위로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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